외부에서 완성(완료)된 주의 처소가 덮쳐지는 미래 영광


요즘 들어서 설교시간에 메모하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그만큼 머리가 점점 더 지워지는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아서 이다.

그래서 카테고리로 설교 노트 란도 만들었다.

막상 설교 한 편당 적는 메모의 량이 점점 쌓여가지만 일일히 옮겨 적고자 하니 무지 귀찮아 진다.
그래서 사진으로 찍어서 올려도 봤다. 잘 보이지 않으니 이것도 귀찮다.

그래도 순간 순간 적은 것을 함께 나누고픈 마음이 아주 가끔 3초씩 생길 때 마다 올리기도 한다.

어제 이윤자 권사님과 최종훈 장로님과의 대화를 녹음 한 것이다.

http://media.woorich.net/passofday/passofday081203car.mp3




=========

메모한 내용 다시 요약


==========

http://crossvillage.tistory.com/entry/주의-처소-이사야-63-9-15

주의 처소

2008년 12월 3일                            본문 말씀: 이사야 63:9-15

(사 63:9)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사 63:1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사 63:11) 『백성이 옛적 모세의 날을 추억하여 가로되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들 중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사 63:12) 『그 영광의 팔을 모세의 오른손과 함께 하시며 그 이름을 영영케 하려 하사 그들 앞에서 물로 갈라지게 하시고』
(사 63:13)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말이 광야에 행함과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사 63:14) 『여호와의 신이 그들로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
(사 63:15)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시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긍휼이 내게 그쳤나이다』

기도라는 것은 답답할 때 저절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심지어 평소에 아무런 종교를 갖지 않는 자라고 할지라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 누군가를 향하여 도와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기도를 했다고 해서 하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여겨서는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원칙과 질서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기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질서와 원칙이 잘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기도하시는 분은 자기 것이 깨어져서 답답해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처소’가 깨어졌다고 답답해서 기도합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교인이든 교인 아니든 상관없이 순전히 자기 것에만 관심이 가 있기에 자기 것이 아닌 것이 깨어졌던 말던 무심하기 마련입니다. 특히 하나님마저 남이 된채 등돌리고 삽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사시고 나는 나대로 살렵니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처소가 깨어지던 말던 자기 처소 안 깨어지면 아주 살기 좋은 세상인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신앙인은 자기 것이 자기의 보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보물로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성소란 이방 나라에서 말하는 그런 성소가 아닙니다. 세상 나라의 성소란 인간의 정성으로 해서 생겨나는 제단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성소는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시고 친히 임재하시고 영광이 가득차게 하시는 곳입니다.

열왕기상 8:10-11에 보면,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구원이란 자기 내부의 열성을 뭉쳐서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천사는 나그네처럼 다가옵니다. 그만큼 구원이란 외부에서 주어진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외부적으로 주어지지 아니하면 구원이란 것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 40:34-35에 보면,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만나서 모든 구원을 결정지어버리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신비로움입니다. 더러운 인간의 흔적이 하나님의 구원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배격합니다. 이방나라의 제단에는 인간들의 지성과 열성이 가득하지만 하나님의 성소에는 오직 희생물의 피가 중앙을 젓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소는 두 개의 있습니다. 하나의 성소는 하늘에 있습니다. 일종의 본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성소는 지상에 있습니다. 분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점이 없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분점을 차지하고 계신 분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불리우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선 ‘이름’만 지정해 있고 신약에 가서는 그 이름에 해당되는 인물이 실제로 나타나버리고 마는 겁니다. 그 전의 성소는 그림자에 해당됩니다. 참으로 신비로운 일은 그림자가 실체와 더불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만 먼저 나타나고 그 다음에 그 그림자를 드리우게 한 실체가 나타난다는 겁니다.

이 그림자 같은 분점이 파괴되었기에 신앙인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분점이 파괴되었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스러워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분점에서 하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열왕기상 8:42-43에 보면, “저희가 주의 광대한 이름과 주의 능한 손과 주의 펴신 팔의 소문을 듣고 와서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무릇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으로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 처럼 경외하게 하옵시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주의 성소가 하는 일은 주의 이름을 알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열왕기상 8:45-50에 보면, “주는 하늘에서 저희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 일을 돌아보옵소서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 적국이 저희를 사로잡아 원근을 물론하고 적국의 땅으로 끌어간 후에

저희가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 사로잡은 자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패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하며 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 열조에게 주신 땅 곧 주의 빼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저희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저희의 일을 돌아보옵시며 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저희를 사로잡아 간 자의 앞에서 저희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저희를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바다에 빠졌을 때, 그가 고기 뱃속에 있으면서도 그는 성전을 있는 쪽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만 그는 바다에서는 살아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이는 곧 그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이란 순전히 인간의 정성이나 성의를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만의 의논으로 성사되는 이유는, 인간은 무슨 짓을 해도 기껏 용서되어야 될 죄인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래서 구약 성도들은 하나님의 성소가 계속 존재하여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 용서의 원천이 되는 성소가 불타버리고 깨어져버리니 그들은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그림자 시절이 지나가고 실체가 드러난다는 신약에 와서 과연 성도는 어디입니까?

그것은 바로 구약에서 성전의 기능이 어디서 일어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즉 주의 백성에 대한 용서가 어디에서 이루어지느냐는 겁니다. 그곳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눈 앞에 십자가가 보인다고 사도 바울은 이야기했습니다. 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용서받지 않을 죄는 없습니다. 이 용서가 이끄는 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구출되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보다 더 귀한 보물이 없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169강-사63장,15-19,(주의성소)-isa081203.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169강-사63장,15-19,(주의성소)-isa081203.wmv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169강-사63장,15-19,(주의성소)-isa081203.hwp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