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 불가인 강퍅

선을 더욱 선 되게 하는 악(강퍅)

빛을 더욱 빛 되게 하는 악

지독한 편애는 해석불가이다. 감당이 불감당(불가능)이다.

지독한 미움 또한 해석 불가이다. 감당이 불감당(불가능한 해석)이다.

강퍅함이란 주님의 선하심을 더더욱 빛내기 위해서 상상을 초월하는 예상 밖의 강퍅함으로서만 드러나야만 한다. 인간이 상상하거나 해석 가능하거나 예상한 강퍅은 강퍅도 아니다. 미움도 심판도 저주도 싫어함도 ...

(출 14:4, 개역)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출 14:17, 개역)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즉 애굽 왕 바로의 강퍅은 인간의 어떠한 해석도 해석할 길이 없는 강퍅이다.
마치 가인에게 덮쳐진 죄의 소원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해석불가의 죄의 소원 즉 지독한 미움이다.

10가지 재앙이 덮쳤고 결국 장자가 죽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절대로 이대로 무릎 꿇지 않도록 주님은 바로왕의 무릎을 일으켜 세우신다.
그가 끝까지 해내어야만 하는 일인 악으로 인해 여호와 주님은 영광을 기필코 받아 내시고야 말겠다고 바로를 일으키신다. 절대로 낙망하여 주저 앉지 못하도록 하셨다. (가룟 유다야 너가 해야 할 일을 어서 해야지?)

자 이것을 누가 감히 해석하겠다고 달려들겠는가?

지독한 미움을 해석하겠다고?

그 카는 너가 지독한 미움의 대상이 아닌가 하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시면 우짤려고?

마찬가지 이다. 지독한 편애를 해석하겠다고?

감당이 불감당(불가능)임을 모르기에 기여이 해석을 해서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취지가 행함이요 행적이요 실적으로써 육을 자랑하는 바로 강퍅함이 아닐 수 없다.

주님은 신부를 일방적으로 확정 하셨다. (무덤의 권세 지옥의 권세도 이기지 못하도록 완료하셨다)

바로 그 일방적인 무조건을 해석 할 길이 없도록
마치 화염검으로 생명나무를 차단하시듯이

그 일방적인 신부됨을 해석할 길이 없도록 불감당(불가능)으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더욱더 화염검으로 막고 넘어뜨리고 실족케 하고 차단하고 삭제하고 지우듯이

일부러 악을 그것도 그냥이 아닌 빠글 빠글 우글거리도록 악을 깔아 놓으신다. 죽음의 권세를 일부러 깔아놓으신다. 그래서 죽을맛이다.

왜? 신부임을 확정짖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이다.

신부이기에 악을 더욱더 깔아 놓으신다. 죽음의 권세를 깔아놓는다. 지독한 미움 속에 놓이게 하신다.
(오뚜기인지 아닌지는 넘어뜨려 보면 안다. 그렇게 생겨먹었는데 우짜겠는가? 그러나 오뚜기 스스로가 오뚜기 됨을 증명할 길이 없다. 고맙게도 악마가 나서도록 되어 있다.)

신부 되자 라고 주장하는 교회에는 악을 깔아 놓을 이유가 없다. 미완료의 교회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도하자가 아닌 기도자로 태어났고, 예배하자가 아닌 예배자로 이미 완료로써 누릴 뿐이다.)

아무리 악을 깔아 놓아도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완료로서의 신부는 자기를 쳐다볼 이유가 없다. 오로지 자기부인 뿐이다.

그래서 주님 자신이 신랑으로써 신부를 자기 영광에 부합이 되도록 격상시켰듯이 신부를 영광 스럽게 완료 된 것을 더욱더 드러내기 위해서

일부러 그 신부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악을 깔아 놓으시는 것이다. (에스더, 죽으면 죽으리라 즉 처음근본자리=예정는 안바뀐다. 잉여성은 죽음으로써 극대화 되는 간격을 더욱더 벌려놓는다.)

얼마나 신부가 신랑으로부터 받은 영광이 얼마나 빛나고 빛났으면 얼마나 크고 영광스럽게 빛낫길래

시샘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하늘을 찌르고, 죽도록 극도의 미움을 발하는지를 정말 이루 상상을 못할 정도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가 벌리는 두 패로 나누는 처음자리이다.

에서는 미워하였고 야곱은 사랑 하였다.

(롬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개역)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7, 개역)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 9:18, 개역)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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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신 희망

2009년 5월 2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16-18

(렘 3:16, 개정)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하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렘 3:17, 개정) 『그 때에 예루살렘이 그들에게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모든 백성이 그리로 모이리니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모이고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그들이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렘 3:18, 개정) 『그 때에 유다 족속이 이스라엘 족속과 동행하여 북에서부터 나와서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기업으로 준 땅에 그들이 함께 이르리라』


오늘 본문에 ‘강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뜻에 대해서 거부 반응을 나타낸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천국에 가려면 가슴에 구멍이 뻥하니 뚫린 듯이 콸콸 말씀이 쏟아져 들어와야 합니다. 그냥 문자로서의 말씀이 아니라 아예 성도 안에 들어와서 사는 말씀이 됩니다.

바로 이러한 변화가 어디서 주어지는 겁니까?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이 땅에서 천국갈 백성들이 번성한다고 했습니다. ‘번성’이라는 것은 창세기 1장과 2장에 의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았을 경우에만 번성이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 받을 자들이 복을 달라고 해서 복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복의 원천지의 마음과 복 받을 자의 마음이 일치되면 복이 오지 말래도 복이 오는 겁니다. 왜냐하면 복받을 자가 복을 달라는 주장을 할 수 없고, 복받을 자는 복을 내리시는 쪽의 작품이요 생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창세기 1장~2장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 위주로 세상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위주로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천지와 에덴동산과 각종 피조물과 사람을 통해서 어떤 구조를 만드신 것입니다. 이 구조 속에 사람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놓치지 아니됩니다. 그리고 그 구조를 유지하는 원리가 따로 있습니다. 인간들이 그 원리를 위배했을 때 그 구조로 무너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구조란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원리를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한 예로서, 구조의 일부에 해당되는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키신 이유는, 오로지 생명나무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결코 그 반대가 아닙니다. 즉 인간을 살리고 생명나무를 훼손하려는 것이 이 창조 구조의 원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선악과 따먹은 인간으로 하여금 결코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지 못하게 단단히 추가적 조치를 취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조치를 간단히 말하면 이러합니다. ‘사람이란 하나님을 위해서 만들어졌지,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서 계신 것이 아니다’고 말입니다. 인간의, 인간을 위한, 인간을 위한 세계란 아브라함 링컨이 외치는 민주주의 세계이지 결코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이란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인간이 절대로 들어와서는 아니 될 나라입니다. 하나님만이 사실 수 있는 나라입니다. 인간은 어디까지 흙에 속해서 흙으로 지어진 이 세상에 머무는 것이 당연하고 마땅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복이 주어질 수 밖에 없고, 복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그 창조 구조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의 겉내용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땅에서 번성하고, 그들이 다시는 언약궤를 언급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이 예루살렘에 모이는데, 그 예루살렘에는 전혀 서로 갈라섰던 이스라엘과 유다가 동행해서 모여와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전체 내용의 주제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구조와 그 기능이 전부 하나님께 속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인간이 주축이 될 수 없습니다. 제가 볼펜을 쥐고 있다면 이 볼펜은 제가 무슨 글씨를 쓸 줄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내 손에 쥐어있는 볼펜은 그저 내가 쓰고 싶은대로 쓰기 위한 수단인 겁니다. 인간도 하나님의 원리를 유지하는 구조 속에 포함될 뿐입니다. 로마서 8:20에 보면,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이 늙고 아프고 죽는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요 오직 그런 죽임을 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는 겁니다. 구조의 일부에 속한 자가 전체 구조를 회복할 수 있는 능력자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6:28-29에 보면,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예 하나님의 일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구조와 그 원리를 세우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보내신 아드님이 하실 일입니다.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여 살린 것이 떡을 받아먹는 사람들의 힘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남은 떡 조각도 다 거두어서 예수님에게 도로 가져오게 하셨습니다. 즉 축복이란 결코 축복받을 자격이 있어 주는 것이 아니라 주시는 분의 하실 일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원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전에 사람들은 ‘언약궤’를 찾거나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언약궤가 요구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그 일로 인하여 복을 받는 자들이 숱하게 등장하게 된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겁니다. 그 예루살렘이 곧 ‘어린양의 신부’라는 별명으로 불리워집니다. 즉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친히 자신의 신부를 만들어내신 그 복의 원천지가 예루살렘이라는 겁니다. 이 때 신부들은 신랑되시는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되는 그 영광스러운 능력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빌립보서 3:20-21에 보면,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현재 이 지구상 구석구석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만물을 자신의 능력으로 지배하고 계십니다. 그 계신 능력으로, 흙으로 저주스럽게 죽어있는 성도의 낮은 몸을 자신의 부활의 영광체처럼 만들어 버릴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런 복이 가능한 것은, 예수님 홀로 예루살렘에 있는 십자가 위에서 모든 복의 원천과 창조적 구조와 원리를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예루살렘에 성도들이 모여든다는 것은 자기네들 노력과 열성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한 분 예수님이 하신 일에 감격하고 찬양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모이게 되는데 그들이 곧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새예루살렘성’입니다.

자신의 생명의 면류관까지 아낌없이 예수님의 발 앞에 던지면서 영원토록 감사할 때, 그 곳이 바로 하나님만이 살 수 있다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은 단지 예수님께서 천국과 영생과 구원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만 쓰여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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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더욱더 악 답게 하는 [대신 죽으심](십자가)

대구 강의 2009-05-19  피4강 대신 죽으심

(가짜인 자아라는 우상 vs 실체인 약속의 충돌 = 악을 더욱더 악 답게 하는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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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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