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아! 돌아오라 !! ??? , 앗수르야! 돌아오라 !! ???,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19; 1-25)

 

애굽에 관한 경고, 애굽을 찢으셨으나 낫게 하실 것이요 ~~~

 


(
19:1, 개역) 애굽에 관한 경고라 보라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 애굽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겠고 애굽인의 마음이 그 속에서 녹으리로다

(19:2, 개역) 그가 애굽인을 격동하사 애굽인을 치게 하시리니 그들이 각기 형제를 치며 각기 이웃을 칠 것이요 성읍이 성읍을 치며 나라가 나라를 칠 것이며

(19:3, 개역) 애굽인의 정신이 그 속에서 쇠약할 것이요 그 도모는 그의 파하신 바가 되리니 그들이 우상과 마술사와 신접한 자와 요술객에게 물으리로다

(19:4, 개역) 그가 애굽인을 잔인한 군주의 손에 붙이시리니 포학한 왕이 그들을 치리하리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9:5, 개역) 바닷물이 없어지겠고 강이 잦아서 마르겠고

(19:6, 개역) 강들에서는 악취가 나겠고 애굽 시냇물은 줄어들고 마르므로 달과 같이 시들겠으며

(19:7, 개역) 나일 가까운 곳 나일 언덕의 초장과 나일강 가까운 곡식 밭이 다 말라서 날아 없어질 것이며

(19:8, 개역) 어부들은 탄식하며 무릇 나일강에 낚시를 던지는 자는 슬퍼하며 물에 그물을 치는 자는 피곤할 것이며

(19:9, 개역) 세마포를 만드는 자와 백목을 짜는 자들이 수치를 당할 것이며

(19:10, 개역) 애굽의 기둥이 부숴지고 품꾼들이 다 마음에 근심하리라

(19:11, 개역) 소안의 방백은 지극히 어리석었고 바로의 가장 지혜로운 모사의 모략은 우준하여졌으니 너희가 어떻게 바로에게 이르기를 나는 지혜로운 자들의 자손이라는 옛 왕들의 후예라 할 수 있으랴

(19:12, 개역) 너의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애굽에 대하여 정하신 뜻을 알 것이요 곧 네게 고할 것이니라

(19:13, 개역) 소안의 방백들은 어리석었고 놉의 방백들은 미혹되었도다 그들은 애굽 지파들의 모퉁이 돌이어늘 애굽으로 그릇가게 하였도다

(19:14, 개역) 여호와께서 그 가운데 사특한 마음을 섞으셨으므로 그들이 애굽으로 매사에 잘못 가게 함이 취한 자가 토하면서 비틀거림 같게 하였으니

(19:15, 개역) 애굽에서 머리나 꼬리나 종려나무 가지나 갈대나 아무 할 일이 없으리라

(19:16, 개역) 그 날에 애굽인이 부녀와 같을 것이라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흔드시는 손이 그 위에 흔들림을 인하여 떨며 두려워할 것이며

(19:17, 개역) 유다의 땅은 애굽의 두려움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애굽에 대하여 정하신 모략을 인함이라 그 소문을 듣는 자마다 떨리라

(19:18, 개역) 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그 중 하나를 장망성이라 칭하리라

(19:19, 개역) 그 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

(19:20, 개역) 이것이 애굽 땅에서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표적과 증거가 되리니 이는 그들이 그 압박하는 자의 연고로 여호와께 부르짖겠고 여호와께서는 한 구원자, 보호자를 보내사 그들을 건지실 것임이라

(19:21, 개역) 여호와께서 자기를 애굽에 알게 하시리니 그 날에 애굽인이 여호와를 알고 제물과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경배할 것이요 여호와께 서원하고 그대로 행하리라

(19:22, 개역)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 것이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인고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를 고쳐주시리라

(19:23, 개역)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19:24, 개역)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19:25, 개역)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 지어다 하실 것임이니라

 

(19:1, 새번역) 이것은 이집트를 두고 하신 엄한 경고의 말씀이다. 주님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이집트로 가실 것이니, 이집트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고, 이집트 사람들의 간담이 녹을 것이다.

(19:2, 새번역) "내가 이집트 사람들을 부추겨서, 서로 맞서 싸우게 하겠다. 형제와 형제가, 이웃과 이웃이, 성읍과 성읍이, 왕권과 왕권이, 서로 싸우게 하겠다.

(19:3, 새번역)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의 기를 죽여 놓겠다. 내가 그들의 계획을 무산시켜 버리면, 그들은 우상과 마술사와 신접한 자와 무당을 찾아가 물을 것이다.

(19:4, 새번역) 내가 이집트를 잔인한 군주의 손에 넘길 것이니, 폭군이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 주님, 곧 만군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19:5, 새번역) 나일 강이 마를 것이다. 강바닥이 바싹 마를 것이다.

(19:6, 새번역) 강에서는 악취가 나며, 이집트 시냇물의 물 깊이가 얕아져 마르겠고, 파피루스와 갈대도 시들어 버릴 것이다.

(19:7, 새번역) 나일 강 가와 어귀의 풀밭과 강변에 심은 모든 나무가 말라서, 바람에 날려 사라지고 말 것이다.

(19:8, 새번역) 나일 강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 슬퍼하며 통곡하고, 나일 강에 낚시를 던지는 모든 낚시꾼과 강에 그물을 치는 사람들이 잡히는 것이 없어서 고달파 할 것이다.

(19:9, 새번역) 가는 베를 짜는 사람이 베 짜는 일을 그만두고, 흰 천을 짜는 사람도 실망하여 천 짜는 일을 그칠 것이다.

(19:10, 새번역) 옷 만드는 사람들이 낙심하니, 모든 품꾼의 마음에도 병이 들 것이다.

(19:11, 새번역) 소안의 지도자인 너희는 어리석기만 하고, 지혜롭다고 하는 바로의 참모인 너희도 어리석은 제안만을 하고 있으니, 어찌 바로에게 너희가 옛 현인들과 옛 왕들의 후예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느냐?

(19:12, 새번역) 이집트의 임금아, 너를 섬기는 현인이 어디에 있느냐? 그들을 시켜서, 만군의 주님께서 이집트에 대하여 무엇을 계획하셨는지를 알게 하여 너에게 보이라고 하여라.

(19:13, 새번역) 소안의 지도자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멤피스의 지도자들은 제 꾀에 속고 있다. 이집트의 주춧돌들인 지파들이 이집트를 그릇된 길로 이끌었다. / , ''

(19:14, 새번역) 주님께서 친히 그들에게 마음을 혼란시키는 영을 부으셔서, 그들이 이집트를 잘못 다스리게 하셨다. 그래서 마치 취한 자가 토하면서 비틀거리듯, 이집트를 그 꼴로 만들었다.

(19:15, 새번역) 그러므로 이집트에서는 되는 일이 없고, 우두머리나 말단에 있는 사람이나 종려나무처럼 귀한 자나 갈대처럼 천한 자나 가릴 것 없이, 모두 쓸모가 없이 될 것이다.

(19:16, 새번역) 그 날이 오면, 이집트 사람이 마치 겁 많은 여인처럼 되어, 만군의 주님께서 그들 위에 팔을 펴서 휘두르시며 심판하시는 것을 보고서, 두려워하며 떨 것이다.

(19:17, 새번역) 이집트 사람은 유다 땅을 무서워할 것이다. 만군의 주님께서 그들을 치려고 세우신 계획을 상기할 때마다 '유다'라는 이름만 들어도 모두 무서워할 것이다.

(19:18, 새번역) 그 날이 오면, 이집트 땅의 다섯 성읍에서는 사람들이 가나안 말을 하며, 만군의 주님만을 섬기기로 충성을 맹세할 것이다. 그 다섯 성읍 가운데서 한 성읍은 '멸망의 성읍'이라고 불릴 것이다. / 사해 사본과 불가타와 몇몇 마소라 본문에는 '태양의 성읍', '헬리오폴리스'

(19:19, 새번역) 그 날이 오면, 이집트 땅 한가운데 주님을 섬기는 제단 하나가 세워지겠고, 이집트 국경지대에는 주님께 바치는 돌기둥 하나가 세워질 것이다.

(19:20, 새번역) 이 제단과 이 돌기둥이, 만군의 주님께서 이집트 땅에 계시다는 징표와 증거가 될 것이다. 그래서 그 곳 백성이 압박을 받을 때에, 주님께 부르짖어서 살려 주실 것을 간구하면, 주님께서 한 구원자를 보내시고, 억압하는 자들과 싸우게 하셔서,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19:21, 새번역) 주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을 이집트 사람에게 알리실 것이며, 그 날로 이집트 사람은 주님을 올바로 알고, 희생제물과 번제를 드려서, 주님께 예배하고, 또 주님께 서원하고 그대로 실천할 것이다.

(19:22, 새번역) 주님께서 이집트를 치시겠으나, 치시고 나서는 곧바로 어루만져 낫게 하실 것이므로, 그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고, 주님께서는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을 고쳐 주실 것이다.

(19:23, 새번역) 그 날이 오면,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통하는 큰길이 생겨, 앗시리아 사람은 이집트로 가고 이집트 사람은 앗시리아로 갈 것이며, 이집트 사람이 앗시리아 사람과 함께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

(19:24, 새번역) 그 날이 오면, 이스라엘과 이집트와 앗시리아, 이 세 나라가 이 세상 모든 나라에 복을 주게 될 것이다.

(19:25, 새번역) 만군의 주님께서 이 세 나라에 복을 주며 이르시기를 "나의 백성 이집트야, 나의 손으로 지은 앗시리아야, 나의 소유 이스라엘아, 복을 받아라" 하실 것이다.

 

 

제목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짐승의 대표성으로써의 애굽으로 성경이 강조를 하고 있는데

그런데 이제는 돌아오래요 글쎄

 

아니 요나 선지자처럼 우리가 반발할 정도로

지금 이스라엘을 돌이키시는게 아니라
그렇게 해도 될까 말까인 판국에

아니 글쎄 니느웨를 왜 돌이키시느냐 말이죠

 

이상하지 않습니까?

 

오늘도 중요한 표현이 바로 [그 날에], [그 때에], [그 날이 오면] 이라는 표현입니다

또 또 또 그 날에 ㅋㅋㅋ

 

오늘 분명 이집트에 대한 경고인데

이상하게 경고임에도 불구하고

뭔가 희망을 잔뜩 가득담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소위 우리가 잘 아는 표현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 말이죠

 

(6:1, 개역)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6:2, 개역)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6:3,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6:4, 개역)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6:5, 개역)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6:6, 개역)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런데 이것 호세아 6장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라는 표현이지

애굽아 돌아오라 라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애굽아 돌아오래요 글쎄

앗수르야 돌아오래요 글쎄

이스라엘이 돌아오라

 

이 세 나라가 복되도다 라고 하신다 말이죠

 

(19:24, 개역)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19:25, 개역)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 지어다 하실 것임이니라

 

언제? 그 날에

 

그런데 우리는 압니다.

그런 날은 안 올것이라고 말이죠

왜냐? 그 세나라가 안 돌아올꺼니깐요
그 날이 와도 말이죠

아니 아무리 애굽, 지금의 이집트와 앗수르 지금의 이라크가 아무리 개종을 한다고 손 치더라도

절대로 그들은 안 돌아온다는 것을 말이죠

아니 지금 이스라엘은 그들 보다 더 심한 판국인데 어떻게 돌아오겠냐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가능한 것을 주님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 하시는 겁니다.


바로 초점이 그 날에 때문인데요

 

제가 어제 댓글로 아주 짧게 글을 올렸는데

구스(에디오피아) 멸망에 대한 글을 올리고 난 뒤에

계속 떠나지 않아 생각이 맴돌다가 아 이거구나 라고 올렸는데



광명한 천사의 말(울리는 꽹과리)을 할지라도

http://crosslamb.tistory.com/2018#comment11965073


광명한 천사의 말(울리는 꽹과리)을 할지라도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사랑)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롬 9:29, 개역)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롬 9:29, 새번역) 『그것은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주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이 되었을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 ㉣사 1:9(칠십인역)』

(사 1:9, 개역)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사 1:9, 새번역)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얼마라도 살아 남게 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마치 소돔처럼 되고 고모라처럼 될 뻔하였다.』


이 아무것도 아닌 이 한 씨가 바로 모든 것이다. (지각 할수 없는 비밀, 잠행, 도둑)


즉 상대적인 광명한 천사의 말이란 
구스처럼 모든 힘과 모든 권력 모잘람 없이 완벽을 갖춘
일곱(뿔=심판)을 갖추었다고 하지만 
울리는 꽹과리 상여소리 모든 군사가 들고 있는
무시무시한 무기들은 시끄러운 깡통소리에 지나지 않다고 하고

반대로 사랑 곧 인애와 자비는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 곧 상대적인 
모든 이스라엘은 사울왕을 선택한 입장에서의 대조로써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이다는 것이다.(감추어 놓은 비밀)
(엘리야와 850의 갈멜산 대결처럼)


이 두 이데올로기(잠행; 숨어있는 도둑, 비밀), 두 언약의 싸움이다.


(사 18:1, 현대어) 『[유다에 온 구스 사절단] 나일강 상류의 ㄴ) 구스는 군인들이 가득 찬 나라이지만 그 시끄러운 무기 소리는 그 나라에 들리는 상엿소리에 불과하다. (ㄴ. BC 701년에 유다를 반앗수르의 동맹에 가입시키기 위하여 구스 사절단이 예루살렘으로 왔다)』


(고전 13:1, 개역)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 13:2, 개역)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고전 13:3, 개역)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4, 개역)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 13:5, 개역)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 13:6, 개역)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 13:7, 개역)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8, 개역)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 13:9, 개역)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고전 13:10, 개역)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 13:11, 개역)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 13:12, 개역)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3, 개역)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우리가 흔히 사랑에 대해서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라는 노래가 나올 정도로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 했는데

가만히 보니 그 노래 자체가 우리가 부를때

완전히 반대의 생각으로 불렀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말이죠

 

내가 천사의 말 한다 해도 ~~~ 가스펠 많이 불렀잖아요


내가 천사의 말한다해도

내 맘에 사랑 없으면

내가 참 지식과 믿음 있어도

아무 소용 없으니

산을 옮길 믿음이 있어도

나 있는모든 것 줄지라도

나 자신 다 주어도

아무 소용없네 소용없네

사랑은 영원하네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자랑치 않으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불의 기뻐하지 아니하네

내가 천사의 말 한다해도

내맘에 사랑없으면

내가 참 지식과 믿음 있어도

아무 소용없으니

 

고린도 전서 13장 사랑 장을 따와서 만든 노래의 가사인데

 

여기서 사랑이 이사야에서 나오는 말씀을 통해서 보니

바로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 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흔히 상식적으로 아는 사랑이 아니다는 거죠

물론 교회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리도 실천 해야 한다는 식이다고 생각하지만

아니였다는 겁니다. 그것도 꽹과리 이다는 거죠.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만이 사랑이요 나머지는 울리는 꽹과리 인데

반드시 이 둘이 한 세트가 된다 말이죠

 

그런데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라면 이사야 때에는 이미 다윗이 죽고 없다 말이죠

그 당사자 다윗이 나 아니요 다윗의 후손이다고 했습니다만

 

정작 다윗 때에 그럼 울리는 꽹과리가 뭐냐 라는 겁니다.

 

구스 멸망을 통해서 이 울리는 꽹과리는 군대의 무기 소리로 표현되었는데

실상은 힘과 권력 즉 모든 사람들이 다 부러워 하는 것들이다 말이죠

 

그럼 다윗 당시의 꽹과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만장일치로 뽑은 겸손하기 짝이 없는 사울왕이다는 겁니다.

그리고 실지로 이 사울왕이 이스라엘을 다 장악하는 사고방식으로써

이스라엘 백성 또한 불만 없이 사울왕을 따랐다 말이죠

 

여기에 졸지에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가 난데없이 등장해 버린 겁니다

즉 약속이 등장했다 말이죠

 

졸지에 약속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저들이 어둠인줄 모르고
바리새인처럼 선생인줄 알았는데


약속이라는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의 등장으로

사울왕과 이스라엘 전체 백성들이 어두움으로 드러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 사울왕이 없어진 뒤의 다윗 또한 어두움으로 들통나구요

 

심지어 이사야가 언급하고 있는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 조차도

여전히 저런 거짓선지자의 사고방식이 이스라엘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이 복음 전파를 시작하기 바로 직전에

마귀에게 세가지 시험을 받음으로 인해서

유대인 전체가 마귀에게 장악당한 것이 드러나듯이 말이죠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믿음이 없다는 겁니다.
가짜였고 속임수 였다는 것이 십자가가 밝히 보여주심으로 인해 드러나더라 라는 겁니다.

소위 믿음이라는 의미를 종교에서 말하는 그런 믿음은 달인 들이지만

정작 예수님이 말하는 믿음은 1도 없었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상태를 애굽이라고 한다 말이죠 애굽

그러니 딸랑 이스라엘만 구원한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애굽에서 탈출을 했듯이

압제자로부터

 

포로됨에서 해방을

갇힘에서 자유케 됨을

억눌림에서 풀려남 이라는

 

바로 이 처음사랑

그 어떤 조건도 없이

애굽인이든 앗수르 인이든 이스라엘 인 이든

 

이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로 인해서

그의 인애와 자비로 인해서 고침을 받아라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여호와 하나님이 심판주로써 보여야 하거든요

왜냐하면 사랑을 봤다면

눈에 보이는 이 꽹과리, 군사들의 무기 소리 곧 모든 힘과 권력들이 시시하게 보이고

오로지 두려워 벌벌 떨어야 할 것은 사랑 밖에 없거든요
나를 제대로 심판하고 제대로 거룩을 나타내시는 시온산에서 나온 율법은
사랑 밖에 없다 말이죠 
거룩이라는 분리된 맏물 말이죠.

 

저들이 망하는 이유는 불뱀에게 물려서 지옥가는게 아니라

군대의 힘인 무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매끈한 근육과 큰 키로 자라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건 육의 죽음 밖에 안될 뿐이고

 

진짜 죽음은 몸과 영혼까지 멸망시키는 자를 두려워 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불뱀에게 물렸음에도 불구하고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봄으로써 낫게 하시는

저 인자를 안 쳐다 봐서 망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이사야 에서는 임마누엘이나

또는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

곧 남은씨

 

또는 구약에서 시온에서 나온 율법 곧 뜨인돌

등등이다 말이죠

 

그런데 진짜 두려워 벌벌 떨어야 한다면

저들 무기 보다 더 무서운 무기를 가졋거나

저들 큰 키 매끈한 근육

흠모할 만한 부러워 할 만한 풍채 아름다움 이어야 하는데

 

전혀 흠모할 모양이 없는 오히려 생각해서 판단해서 나오는게 아닌

자동반사적으로 앗 고개를 돌리고

절대로 때려죽어도 안 쳐다볼꺼야 라고

앗 싫어 싫탄 말이야 라고 싫어버린바 된

모든 저주를 다 받은 자와 같은 모습이다면

누가  떨겠습니까? 아니면 무시해 버리겠습니까?

 

골리앗 앞에서는 심각하지만

어린 다윗을 보면 다들 비웃습니다.

 

말도 안되거든요

 

바로 그겁니다.

이것이 사랑이다는 겁니다.

 

사랑(이새의 줄기에서 난 씨)을 우리는 반드시 비웃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왜냐하면 이미 우리가 우리 손으로 우리의 주인인 우상을 우리가 세웠거든요

두 주인이 있을 수 없잖아요

그런데 그게 바로 꽹과리이고

반대로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해도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가스펠을 엉터리 마음으로 불렀던 겁니다.

 

차라리 저주산 헐벗은산 에발산에 가서

그 심판의 자리에 가서 실상을 밝히 보자 말이죠

 

사랑 없으면 저주요 저주요 라고 상대방산을 향해서 외쳐야 하는데

 

그래 되면 누가 그게 무슨 사랑이고 라고 할 거다 말이죠

 

마치 불뱀에게 물려 죽게 되었는데

지금 긴급처방의 약이 필요한 판국에

지금 장난하냐

뭐 쳐다보기만 하면 낫는다고?

 

그래서 아홉명의 유대인 문둥병자가 예수님으로부터 아무리 고침을 받아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 동안 격리 되었으니 그 결핍 된 동안의 빈자리를 이제는 꽉꽉 채울수 있게 되었다 말이죠

 

그런데 단 한 명의 사마리아 문둥병자는 안 돌아가는 겁니다.

 

(17:15, 개역)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7:16, 개역)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17:17,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7:18, 개역)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7:18, 새번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되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 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

(17:18, 쉬운)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사람이 없단 말이냐?”

(17:18, 현대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뿐이냐?' 하시고

 

아니 당연한 것 아닙니까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이 따로 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 돌아가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께 돌아오는게 아니라

이단 예수에게 돌아가게 되면

 

자기민족과 원수지간이 되는데 여러분 같으면 돌아가겠습니까?

사마리아인은 어차피 돌아갈 데가 없으니 당연하다고 본다 말이죠

 

아니 목숨이 걸린 문제다 말이죠

예수님께 돌아가면 목숨이 위태롭고

비록 그 동안 격리 되어서 가족과 떨어졌지만

그 가족들과 원수지간이 될껀데

누가 돌아가겠냐 말이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야 말로 목숨 거는 정도가 아니다는 겁니다.

 

온 가족이 위태로와 진다는 겁니다.

 

사도바울 보세요

예수님을 믿고난 뒤부터

온 유대사람들이 바울을 어떻게 하면 죽일꼬 하고

끝까지 따라 왔다 말이죠

 

역설적이게도 로마 시민권이 없었다면

벌써 죽었다 말이죠

복음 증거 하기도 전에 말이죠

이 로마 시민권 덕분에 복음 증거하게 되니

이게 불의한 청지기가 아니고 뭐냐 말이죠

 

빛의 아들들은 오히려 이 불의한 청지기를 고소 고발하면서 주인에게 고자질 하고 말이죠

 

오늘 그 역설성이 바로

처음사랑으로써

이스라엘 곧 히브리인 잡족 노예를

애굽에서 끌어낸 여호와 임을 나타내시는데 있어서

구원은

곧 저들 애굽을 심판하시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 애굽 심판 속에서

모든 이스라엘 그리고 히브리 잡족 노예가 애굽 속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 노예 히브리 잡족 속에 애굽인도 있겠죠 뭐 범죄자 라든지 정치범이라든지 등등

그들에게 글쎄 돌아오래요

애굽은 구지 돌아갈 필요가 없이 이미 와 있잖아요 자국 이니까 어딜 간 적이 없겠죠?

아닙니다.
그들 애굽 또한 자국의 정치인들에게 권력자들에게 버림받았다 말이죠

그 잃어버림 속에서 되찾는 분은 예수님 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애굽인아 돌아오라 너는 지금 너의 남편으로 부터 버림받았지?

마치 과부와 같으니 내가 너의 사랑이 되어 주겠다고 남편이 되겠다고

내 백성이다고 표현하고


이스라엘은 기업이니까 고아로써 아버지가 기업무를자 고엘이 되겠다고 돌아오라 라고 하십니다.

비록 이스라엘 이라 할지라도 안 돌아오면 저 애굽 꼴 난다는 겁니다.

사랑 안 쳐다 보면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를 안 쳐다보면 울리는 꽹과리처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거죠.


또 앗수르야 돌아오라 너는 전쟁포로가 된 노예들 히브리잡족의 대표성으로써

너를 섬기는 임금이 없이 떠돌이 나그네가 되었지?

내가 섬기는 임금이 되어주겠다고 한다 말이죠

 

이것이 바로 사랑 곧 처음사랑

곧 출애굽 당시의 애굽을 심판하심으로써

긍휼과 자비를 베푸신

진짜 두려워 해야 할 것이 뭐냐 라고 당당해 하시는 겁니다.


아니 이스라엘은 그렇다 치더라도

애굽은 출애굽 이전의 역사도 있고

앗수르 또한 이전의 역사가 있어도

깡그리 무시하고 너희들의 처음자리는 출애굽 때 야 라고
사랑이


곧 인애와 자비가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너희들의 처음자리라고 하시는 겁니다.

 

저 무기? 저거 울리는 꽹과리야

바로 반드시 한 세트로써 사랑을 펼치신다 말이죠


그래서 애굽왕과 애굽군사 곧 꽹과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겠다고 하시는 거죠.

실상이 뭔지 보라꼬


(출 14:4, 개역)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출 14:17, 개역)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출 14:18, 개역) 『내가 바로와 그 병거와 마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사랑(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은 바로 반드시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말이죠

의인이 아니라 말이죠


그럼 그 죄인이 바로 출애굽 당시의 히브리인잡족인 전쟁포로 노예의 대표성으로 앗수르(나그네)

그리고 자국의 범죄자 애굽인(과부) 그리고 탁란하시고 이스라엘(고아)을 집어넣었다 말이죠


이 고아 과부 나그네의 하나님이 되겠다는 겁니다.

억눌린자 갇힌자 포로된 자에게 기쁜소식이 되겠다는 겁니다.

이 세 나라로 인해서 모든 나라에 복이 퍼진다는 겁니다
. 기능이지 존재가 아니다는 거죠.

마치 일곱인처럼 전쟁준비처럼 말이죠

 

(19:24, 새번역) 그 날이 오면, 이스라엘과 이집트와 앗시리아, 이 세 나라가 이 세상 모든 나라에 복을 주게 될 것이다.

(19:25, 새번역) 만군의 주님께서 이 세 나라에 복을 주며 이르시기를 "나의 백성 이집트야, 나의 손으로 지은 앗시리아야, 나의 소유 이스라엘아, 복을 받아라" 하실 것이다.

 

구원을 받아라 구원의 주를 바라 보아라 가만히 서서 말이죠

누가 구원받고자 하는 마음이 애초부터 없었다 말이죠


오히려 이 애굽에서 절대로 안 벗어날꺼야 라고 했던 자들이다는 겁니다.

차라리 애굽인 손에 죽었으면 죽었지 광야에서 안 죽겠다는 겁니다.

누가 구원받고자 하겠습니까?
아 나는 갇혔구나 포로되었구나

살려주세요 라고 심판 속에 놓여졌음을 아는 자가 외치지

아프지도 않는데 누가 의사를 부를 리가 없다 말이죠

 

이런 주님의 활동 일하심 약속의 움직임은 전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가운데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 하는 군대들의 무기 곧 울리는 꽹과리인데도 불구하고

그거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즉 애굽왕과 애굽 군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시고

 

정작 우리가 휴지처럼 취급하는 그 사랑 곧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를

두려워 함으로써 돌아오라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구원 곧 돌아오라 라고 하신다 말이죠

 

그 날에 곧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가 나타나는 날에 말이죠

 

자 지금까지 보시고

여러분은 이들 애굽 앗수르 이스라엘이 돌아올것이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택도 없다고 보십니까?

 

그렇죠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택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만 오히려 신났어요

돌아올 것이라고

 

아닌데 주님 착각하고 계십니다

다들 절대로 안 돌아 올겁니다 라고

 

우리 모습을 우리가 잘 알기에

안 돌아 올 것이다 라고 여기고 있고

주님만 바보 같이 저렇게 잔뜩 기대하고 설레고 있음에
우리가 오히려 안타까워 하는 마음이 든다 말이죠

 

그런데 사실은 처음사랑이란 곧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이란

 

미래완료에서 덮쳐지는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이기 때문에

 

주님은 바보야 바보야 왜 인간에게 기대할까 안 돌아올껀데 왜 돌아온다고 착각하시지 라고

우리가 염려하고 있지만

? 우리 조차도

내 꼬라지 내가 봐도 안 돌아온다고

절대로 나는 주님에게 돌아갈 인간이 못된다는 인간 같지도 않은 자 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사실상 주님은 우리의 그런 돌아오는 행위나 뉘우침이 아니라

그런 기대가 아니라

걱정마세요 아예 기대 안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피만 믿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 피가 돌아올 자는 돌아오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것도 충만 충만 하게 말이죠

 

그게 바로 탕자의 비유이거든요

얼마나 맏아들은 탕자가 절대로 안돌아올 것이다 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 푹 놓고 있었다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매일 매일 돌아오기를 맨발로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울리는 꽹과리가 아닌 사랑이다는 겁니다.

처음사랑

 

바로 이런 처음사랑으로 출애굽을 실행하셨다는 겁니다.

울리는 꽹과리인 애굽을 심판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랑 말이죠

 

이 기준에 의해서

 

불뱀에게 물렸는데 쳐다 본다고 낫습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라는

모든 사고방식을 깨뜨리도록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입니다.

 

그것을 이사야가 이 한 씨를 기준으로 해서 애굽에게 외치는 겁니다.
앞의 글에서 다룬

구스에게도 외쳤고

다메섹(아람)에게도 외쳤고

모압

바벨론과 블레셋에게도 외쳤다 말이죠

 

인간에게 기대걸고 돌아올 것이다 라는 기대로 외친게 아니라

 

그래 되면 원인 있는 결과가 되고요

그건 또 다시 울리는 꽹과리 의 제 2의 버전이고요

의문의 반복이고요

 

그 반대에 미래완료에서 오는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를 기준으로 해서 외친다 말이죠

 

그렇게 되면 탕자가 이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안 돌아오고는 못 배긴다 말이죠

 

그 예상치 못한 일에

오히려 맏아들이 울리는 꽹과리를 잔뜩 모은 것이 들통나는 겁니다.

팔이 어긋맞게 바꿔치기 당한 거죠
시온에서 율법이 나오면
졸지에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인줄 아는 자는 긍휼을
반대로 의인인줄 건강한 자인줄 아는 자는 진노를 받더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스펠 내가 천사의 말을 한다 이런 노래 부르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정작 심판 받아 마땅한 탕자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쳐다본게 아니라
그래서 사랑 없으면 안된다고 노래한게 아니라

 

맏아들처럼 나는 사랑을 실천했으니까 또는 실천해야만 한다 라꼬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으니까 또는 어기지 않을려고 하는 마음자세로


저 살진소 금가락지 새신발은 나에게만 베풀어야 한다는

그 강퍅함이 도리어 들통나는

울리는 꽹과리만 (남들이 부러워 하는 남이 인정해 주는) 잔뜩 모았던 것이 들통나더라 말이죠

 

바울 이전의 사울로 치면 배설물 똥덩어리만 잔뜩 모았던 겁니다.

 

우리는 이 사랑이라는 이 기준에 의해서 지금 출애굽했듯이

지금 이사야의 애굽에 대한 경고 또한

이 기준에서 펼쳐지는데 있어서

 

마치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처럼 우리는 그 똥물에 6번 까지 몸을 담구어도 모를 정도로

7번 비로소 담구어야만 이 심판주를 보게 되는

비로소 때려죽어도 6번까지 아무리 억지로 몸을 담구어도 인정하지 못했던 것을

7번 담구어야 즉 일곱은 심판과 거룩은 이 분 밖에 없다는 뜻이거든요


비로소
7번 담구어야 이 똥물이 나 나아만 장군 보다 더 백배 천배 만배나 깨끗하고

이 똥물 보다 더 더럽기 짝이 없이 죄인인 나 나아만 장군은
아뿔사 이 똥물 보다 더 백배 천배 만배나 내가 더 더럽다는 것을 일곱 번째 담구니까 비로소 알게 되고

 

비로소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를 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가 떳음으로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회개해야 천국이 오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천국이 이미 왔기에 회개가 증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은 당당하게 애굽아 돌아오라 라고 하신다 말이죠

과부의 하나님 곧 고아 과부 나그네의 하나님이 떳다 라고

비로소 십자가에 다 이루심
밝히 보이는 십자가의 사랑이 떳기에

고아(기업을 받을 이스라엘)
과부(원수임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받는 사랑받는 백성 애굽)
나그네(섬기는 임금이 없어서 떠돌이가 된 자에게 임금이 되어주시고자 앗수르를 주님 손으로 지었다는 겁니다.)
가 그 증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주님이 안 남겨 두셨다면 벌써 벌써 소돔과 같았다 말이죠 벌써 지옥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탕자의 마음이 아버지의 인애와 자비를 쳐다보고

주여 심판해 주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이 피에 부합된 환자 죄인으로써 돌아오지

의인으로써

건강한 자로써 돌아오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심판 받아 마땅한 심판 주에 부합된 자로써 돌아온다는 겁니다.

 

심판과 무관한데 누가 장대 높이 달린 구리놋뱀을 쳐다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심판 속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계시록에서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을 통해서 말이죠

 

? 이미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가 떳거든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거든요

그 증상으로 탕자가 나오도록 되어 있고

반대로 맏아들은 절대로 못 돌아오도록 되어 있듯이

 

오늘 애굽에 대한 경고를 통해서

애굽아 돌아오라

앗수르야 돌아오라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 기준이 떳거든요

 

이 기준을 보고

자신의 육체가 소속된 역사와 시 공간을 무시하고

그 울리는 꽹과리를 무시하고

 

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친

저 사랑을 보고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보고

 

벌벌벌 두려워 떠는

나의 죄를 심판하시는 심판주를 만났다고

물동이 던지면서

내 죄 용서 받았다고 새노래를 외치는 자가

 

이 애굽의 경고를 나에게 하시는 경고로 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 심판주가 보이는 자에게는

 

그의 인애와 자비하심이 영원하리로다 라는 새노래를 부르게 되는 찬양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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