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속에서의 구원 (14; 6-12)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VS 성도의 인내 (심판 속에서의 구원)

계 39 무너진 바벨론 VS 성도의 인내 (심판 속에서의 구원) (계 12, 6-12).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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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14:10, 개역) 『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출 14:11, 개역)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출 14:12, 개역)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출 14:13, 개역)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출 14:14, 개역)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14:6, 개역)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14:7, 개역)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14:8, 개역)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14:9, 개역)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4:10, 개역)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14:11, 개역)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14:12, 개역)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14:6, 새번역) 나는 또 다른 천사가 하늘 한가운데서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에게는,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과 모든 민족과 종족과 언어와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이 있었습니다.

(14:7, 새번역) 그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려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가 이르렀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의 근원을 만드신 분께 경배하여라."

(14:8, 새번역) 또 두 번째 다른 천사가 뒤따라와서 말하였습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도시 바빌론이 무너졌다. 바빌론은 자기 음행으로 빚은 진노의 포도주를 모든 민족에게 마시게 한 도시다."

(14:9, 새번역) 또 세 번째 다른 천사가 그들을 뒤따라와서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그 짐승과 그 짐승 우상에게 절하고, 이마나 손에 표를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14:10, 새번역)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 그 포도주는, 물을 섞어서 묽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의 잔에 부어 넣은 것이다. 또 그런 자는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통을 받을 것이다.

(14:11, 새번역)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불과 유황의 연기가 그 구덩이에서 영원히 올라올 것이며, 그 짐승과 짐승 우상에게 절하는 자들과, 또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에도 낮에도 휴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

(14:12, 새번역)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를 믿는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에게는 인내가 필요하다."

 

 

종교 곧 666이라는 짐승의 수를 받은 자인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개인의 자질에 의해 좌우 되는 것이 모든 종교에서 외치는 구원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숙제를 하느냐에 좌우 되는 구원입니다.

성화론자들 개혁주의들이 그래서 마귀들인 거죠.

 

그런데 복음은 개인의 자질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자 이렇게 말하니까 와 막살아도 되겠네 라고 나온다 말이죠

 

아니 그럼 여태까정 막살지 않았다는 듯이 말하는데

그 속임수에 또 넘어가 줘야 할까요???

독자적인 막살기가 아니라

상대적인 한 세트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절대로 막살지 않는 저 마귀와의 대조 때문에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이기 때문에)

죄인으로써 환자로서의 기능으로 누구(의사, 구원자)를 말하기 위한 것이다 말이죠.

바로 요나의 표적을 말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렇게 부정의 부정인 겁니다.
그냥 예수님이 아니라 마귀와의 대조로써의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복음은 그런 허구를 공격하면서 이 허구, 허상, 우상을 무너뜨림으로써 구원을 펼치는 겁니다.
번제와 제사라는 의문 곧 인간의 열심, 행함, 인간의 믿음도 말이죠.

 

자 이렇게 되면 막사는 정도가 아니라

 

바로 이런 종교꾼들인 모든 인간과 싸우고 있는

심지어 막살면 되겠네 라고 마치 막살지 않았다는 듯이 말하고 있는 인간들과 싸우고 있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고자 말이죠.

왜냐하면 우상숭배자들이거든요.

 

그러니 개인은커녕 지금 전체 인간과 싸우고 있는 복음을 봐야할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심지어 나 라는 개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있다고 우기고 있는 [ ] 와 까지도

싸우신다는 거죠

 

그러니 모든 종교에서 외치는 구원교리와 정반대로 안 맞는 겁니다.

개인구원이 없으니까 말이죠

 

전체 판대기를 걸고 싸우는 구원전쟁이니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심판 속에서의 구원입니다.

 

즉 너희 아비가 있는이상 구원은 없다는 것이 되죠

너희 아비가 죽어야 비로소 구원이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복음은 결국 마귀를 제대로 들추어냄에 있어서

상대적인 예수님과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전쟁을 벌리지 말라꼬 벌리겠습니까?

 

숨어있는 마귀를 어떻게 가시화 시키느냐로 구원은 펼쳐지는 겁니다

그럼 당연히 성도는 이 마귀세력과의 한 세트를 구성함으로써

고난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차이가 나도록 되어 있거든요 이것이 거룩 곧 분리작업입니다.

결국 상대적인 마귀는 고난 속에 못 들어간다는 거죠

십자가의 3일이라는 간극에 못 들어갑니다.

 

지금 이 부분도 일곱 번째 나팔에 해당되는 내용들인데 상당히 길게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일곱 인은 전쟁 준비

일곱 나팔은 전쟁 개시

일곱 대접은 전쟁 마무리입니다.

 

이 한 때 두 때 반 때 라는 3년 반 동안의 간극은

예수님께서 실상을 보라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빈공간으로써의 3일의 간극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다시 사심의 간극 말이죠.

 

당연히 마귀는 이 십자가에 달리지 않고자

십자가가 밝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꾀고 속이는 자리에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곧 잔칫집에 말이죠 그리심산 축복산에 말이죠

 

그런 마귀와의 상대적인 의미로

십자가에 달리는 죽음의 공간인 초상집에

헐벗은 산 에발산에 예수님 (유다)이 올라가심으로써

상대적인 마귀가 가시화 된 겁니다.

마귀의 정체가 이 예수님의 에발산에 저주산에 올라가심으로써 밝혀진다는 겁니다.

좁은 길입니다, 즉 상대적인 넓은 길이 대조로써 말이죠

결국 에발산/ 저주산/ 초상집/ 좁인길/ 십자가의 저주 속 이라는 고난의 자리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설정할수가 없습니다.
안 보이거든요.
원인 없는 결과이지 원인을 인간이 맹글어 낼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일방적인 편파해석인 종말의 영의 소욕입니다.

마찬가지로 지옥도 마찬가지 입니다.
 

당연히 마귀는 그 반대의 산에 올라가겠죠

거룩한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 기적을 베풀라고

천하 만국을 보여주며 다 주겠다고 하고

경제 문제를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진정한 경제 영웅이 되라고 말이죠

 

이런 메시아 사상을 유대인에게 까지 심어서
유대인을 다 장악한 것이 마귀이기에

이 마귀만을 상대로 하신 마귀의 정체를

이 십자가의 간극에서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그러니 사망권세를 깨뜨리지 않는 이상

구원은 없는 거죠

너희 아비가 죽어야 비로소 구원이다는 겁니다.

 

그럼 너희 아비인 마귀가 죽으면 이야 이제 독립이구나 라고 혼자 딸랑 독자적이게 되는게 아니라

 

그 반대인 이 아비 마귀를 죽인 분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구원이 되는 겁니다.

출 애굽에서 탈출만 있는게 아니라 입 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입 예수안, 입 약속이다 말이죠 예수안에 들어가야 구원이 된다 말이죠

 

그러니 십일조 내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말씀을 지키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죠

그런것들은 심판 속에서의 구원

곧 너희 아비인 마귀가 심판 받지도 않았는데 구원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결국 번제와 제사는 심판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의문들은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미래완료로 인해 심판 받아야 합니다.

 

왜 자꾸 모든 인간의 아비 마귀, 너희 아비 마귀라고 강조를 하느냐 하면

너희는 갇혔다 라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갇혔다는 겁니다.

유대인도 다 장악한 판국이니

이방인인 우리는 더 하죠

 

그런데 아무도 갇혔다는 인식이 없어요

그러니 이 포로됨에서 건져 달라고 한 적도 없으니까

부르짖는 자가 없기 때문에

마귀의 세가지 시험을 먼저 해결하고 마귀를 결박하게 빼내시는

출애굽 전쟁을 펼치시는데

그 애굽이 글쎄 인간 자체입니다.

그 인간 자체임을 대표성으로써 보여주는게 바리새인으로써

얼마나 마귀가 이 바리새인을 장악했는지

 

이 바리새인과의 충돌을 통해서 복음이 증거 되는 겁니다.

충돌 없이는 그 차이를 모르는 거죠.

 

그저 구원은 성화론자들처럼 개인의 자질로써 성취해야할 자기 숙제로 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성취 해야할 숙제로 보는 자들은 이 구원을 따 내기 위해서는

막살수가 없는 거죠
의인을 부르러 왔다고 우기고
건강한 자를 부르러 왔다고
존재가 되길 원하지
기능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더더욱 번제와 제사에 목을 맬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로 막살면 안된다고 합니다.

저런 세리와 같이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구분짖기를 하는 거죠.
자기 스스로 말이죠
이런 자들에게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심판주로 보일리가 없습니다.

그저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고백을 못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결국 인애와 자비가 덮쳐진 자는

누가 심판자인지를 제대로 보고 외치는 증인 이다는 겁니다.

이 심판 주를 만나지 못한 이상

저런 번제와 제사 곧 성화론자들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소위 유명 목사들 다들 이렇게 외치더라 말이죠

천국 가야할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이죠

안 그런 목사를 본적이 없어요

 

그러니 이건 뭐 복음이 아니라 불교라

교리 플러스 실천이라

 

이게 바로 우상숭배인 눈에 보이는 것을 쫏고 있다는 겁니다.

허구를 쫏아요

 

실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음입니다.

 

이것을 목사들이 눈에 보이도록 가시화 시키는데 있어서

참선지자들의 한결같은 한 목소리는

심판 속에 다 집어넣는 겁니다.

반대로 거짓선지자는 절대 망할리가 없다 라고 합니다.

 

참선지자는 눈에 보이는 것 족족 다 날려버려요

왜냐?

인간은 보이는 것에 의지 하거든요

 

기대를 걸거든요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했던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쫏아온 자들 또한

우상 숭배자 이거든요

자기를 위한 예수는 무조건 우상이다 말이죠

기적을 봐 버린 이상
그 기대를 절대로 포기 못해서 끝까지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우상으로 삼고자 하는데

 

예수님은 거부하시는 겁니다.

 

? 최종적인 목표점은 눈에 보이는 자기 이거든요

 

그럼 복음은 간단 합니다.

넌 없어 라고 나를 투명인간 만들어 버려요

내가 존재 해야!!  사람들하고 대화가 가능하고
소통 매매가 가능하다 말이죠

그렇게 뭔가를 나눌수가 있는데

존재하지 않는 비존재가 되어버리더라 말이죠

그것이 바로 기능(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이다는 겁니다.

 

기생라합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애굽을 멸망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간담이 녹아서 자기민족 자기신을 다 팔아넘겨버리더라 말이죠

이런 매국노가 어디있겠냐 말이죠

 

아니 여호와를 봤겠냐 말이죠?
못 봤어요
애굽 멸망 소식만 들었는데

그것이 기쁜소식이였던 겁니다.

증상으로만 아는 겁니다.

최고의 나라를! 그것도 애굽을!! 그것도 하루 아침에!!!

 

며칠 몇 달 몇 년을 공격해도 그 큰 성은 어떤 나라도 무너뜨릴수가 없다 말이죠

그런데 말도 안되게 가장 미약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그것도 이스라엘이 포로 갇혔고 억눌린 노예되어 있는 상태에서

시체가 된 상태에서 애굽을 시체로 만들어 버렸더라 말이죠
시체에 깔려 죽는 애굽이니
이것 보다 더 또렷한 것 있으면 나와보라 말이죠.

 

그러니 기생라합이 자기민족 자기 신을 배신하지 않고 배기겠냐 말이죠

눈에 보인 적도 없는 여호와의 이름만을 듣고

그 이름에
모든 것을 걸고서
벌벌 떨고 간담이 녹아서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어서 심판해 주소서 라고

마치 자기자신은 허구인냥

그리고 소통할수 있는 국가 민족
심지어 자신들의 뿌리인 신들까지 다 팔아버리더라 말이죠

내팽겨쳐요 물동이 던져 버리는 우물가의 여인처럼 말이죠

 

아니 애굽에 신이 없어서 망했겠냐 말이죠

애굽의 신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인간의 보호막인 신들이 10개 이상이다 말이죠

 

10개가 넘는 신들이 도대체 이 여호와 하나에 다들 하루 아침에 와르르 무너질 때

 

이것 보다 또렷하고 명확한 밝히 보이는 것 있으면 나와보라 말이죠

 

그러니 성도는 오히려 이 여호와 곧 어린양의 피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실상을 보라꼬

저들 애굽이 멸망당한 판국에 나 까짓꺼 심판 받아 천부당 만부당한 판국에

그것이 뭐그리 심각하겠냐 말이죠

애굽이 망했는데

모든 나라가 이 애굽을 쳐다보고, 부러워 하고,
다 따라하고 애굽처럼 될려고 하는 판국에

그것이 허구 허상 안개로 들추어진 판국에

 

나 라는 허구까짓꺼 대충! 심각한게 없다 말이죠

 

그리고 자신의 원천 뿌리 근원을

저 이름에게 두더라 라는 겁니다.

이것이 첫사랑 처음사랑이다 말이죠
원인 없는 결과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 받았다는 그 피 흘리심 말이죠

 

아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 용서를 베푸실 때 무슨놈의 조건을 요구하시던가요?

처음 사랑은 간단합니다.

잊어버리셨나요?

간단해요

 

다시 애굽을 일으켜 포로 되게 하신뒤에

그 포로됨에서 자유케 하시는

저 부러워 죽는 애굽을 하루 아침에 무너뜨렸을때에

그 상실감과 동시에 실상을 보게 됨으로써

내가 허구에 빠졌었었구나 라고 그래 저건 안개야

진짜 나의 심판주는 예수님 뿐이야 라고

심판주를 만난 것이 기쁜 것이 처음사랑이다 말이죠

 

내 죄를 심판 할 줄도 모르는 것들은 다 가짜다 말이죠

 

지금 제가 심판주 라고 했지

구원의 주 라고 안했습니다.

 

심판주가 먼저 제대로 된 거룩으로써 심판 하심으로써

그 뒤에 긍휼을 베푸시는 겁니다.

찢으셨으나 낫게 하신다 말이죠

 

그럼 참선지자는 심판주를 증거할까요 구원의 주를 증거할까요

이거 중요합니다.

 

심판 주입니다.

 

오히려 거짓선지자들이 구원의 주를 증거해요

저들 모든 종교처럼 말이죠

그리고 심판주를 증거하면 교회조직에 도움 안된다고 내팽겨처 버립니다.

 

그러니 참선지자는 그야 말로 인기는커녕 도리어 사람들로부터 위협을 자처하는 식으로 간다 말이죠

 

눈에 보이는 것 아예 절대 인정 안해주니까 말이죠

그 처음이 자기자신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자신의 신체에 심판을 가득 채우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심판을 몰고오는 예수님과 참선지자들을 누가 좋아라 하겠냐 말이죠

그런데 이 종말을 몰고오지 않는 자는 가짜다 라는 겁니다.

 

오늘날 신학자들이 현대의 교회는 종말의 단체 라고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알아맞히더라 말이죠

그런데 종말의 단체라고 해 놓고서는

또 개인의 숙제로 구원을 달성해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이 뒤 바뀌더라 말이죠
즉 모른다는 것이 아니다는 거죠 알면서도 돈이 안된다는 겁니다.
교회가 운영이 안된다는 겁니다.

 

이건 뭐 종교학자들 저 마다의 신들을 연구하는 신학자들 다 같은 결론이예요

 

종말의 단체가 교회다 라고 말만 하면 뭐해요

종말을 몰고오지를 못하는데

 

참선지자가 목회를 하던가요?

하루 하루 어떻게 하면 죽을까 밖에 없어요

 

그들에게서는 목사 대접 해주길 바라는 따위는 없다 말이죠
제발 나를 목사로 인정해 달라 봐라 라이센스 자격증 있잖아 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미움 받지? 라는 궁리 밖에 없어요

 

미움 받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우상을 건드리면 다들 화를 냅니다.

 

자아 말이죠

 

아무도 우상 건드리는 것을 좋아라 하지 않아요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의 긍휼을 먹고 살지 않습니까 라고

심판 속에 있어야 마땅함을 아무도 좋아라 하지 않아요

정작 그 심판 속이 구원인데 말이죠 긍휼이요 주의 인애와 자비이지

안 그러면 그저 자나깨나 번제와 제사 밖에 생각 안하거든요

벗어날 길이 없어요

갇혔다니깐

 

그저 천주교처럼 사제랑 가까이 친해서

이 사제의 기도 많이 해주는 덕분으로 그저 좋은데 가는 식으로 구원과 천국을 운운해요

 

교회 목사는 더 심해요

 

이것이 미신이 된 교회다 말이죠

 

사제나 목사나 땡중들의 구분 차이성이 없어 ㅋㅋㅋㅋ

 

우상숭배자들이다 말이죠

 

이런 속임수를 밝히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 라는 3일의 간극

한때 두때 반때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저들의 허상 허구를 밝히 보여주시는 겁니다.

 

아뿔사

주가 옳았다고

 

누가 저 허구를 제대로 들추어내었는지를 보라꼬

이 전쟁을 펼치시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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