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을 휘둘러 거두라,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14:13-20)

포도주인의 기쁨인 추수 잔치, 종말 잔치, 혼인잔치, 감사잔치 땡스기빙 페스티발 
Thanksgiving Day festival

계 40 낫을 휘둘러 거두라,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계 14,13-20).mp3
9.01MB

(11:21, 개역)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14:13, 개역)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14:14, 개역)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14:15, 개역)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하니

(14:16, 개역)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14:17, 개역)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또한 이한 낫을 가졌더라

(14:18, 개역)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14:19, 개역)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14:20, 개역)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14:13, 새번역) 나는 또 하늘에서 들려 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기록하여라.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러자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들은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그들이 행한 일이 그들을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14:14, 새번역)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그 구름 위에는 '인자 같은 분'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날이 선 낫을 들고 있었습니다. / 7:13

(14:15, 새번역) 또 다른 천사가 성전에서 나와서,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분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낫을 대어 거두어들이십시오. 땅에 있는 곡식이 무르익어서, 거두어들일 때가 되었습니다."

(14:16, 새번역) 그러자 구름 위에 앉은 분이 낫을 땅에 휘둘러서, 땅에 있는 곡식을 거두어들였습니다.

(14:17, 새번역)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왔는데, 그도 역시 날이 선 낫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4:18, 새번역) 또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는 불을 지배하는 권세를 가진 천사였습니다. 날이 선 낫을 들고 있는 천사에게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날이 선 그 낫을 대어, 땅에 있는 포도나무에서 포도송이를 거두십시오. 포도가 다 익었습니다."

(14:19, 새번역) 그래서 그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서,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를 만드는 술틀에다가 던졌습니다.

(14:20, 새번역) 술틀은 성 밖에 있었는데, 그것을 밟아 누르니 거기에서 피가 흘러 나왔습니다. 그 피가 말 굴레의 높이까지 닿고, 거의 천육백 스타디온이나 퍼져 나갔습니다. / 300킬로미터

 

 

천사가 낫을 휘둘러서 땅의 포도를 거두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포도 틀에 담구어 지근 지근 밟아서 포도주를 짜는 마치 추수때의 모습입니다.

이 장면을 볼 때 마다

빅뱅의 노래가 생각 납니다.

머릴 비워라 여기 붙어라 불을 지펴라 리릴리 라 라 라

 

물론 아무 상관 없는 노래입니다.

그냥 개사해서

낫을 들어라 포도를 거두어라 포도가 익었느니라 리릴리 라라라 ㅋㅋㅋ

라고 흥얼 거린 것이 그냥 중독되는 노래처럼 머리에 떠오르곤 합니다.

 

심판이라는 것은 느닷없이 도둑(잠행)처럼 지각 불가능하게, 원인 없는 결과로 옵니다.

즉 전혀 예상치 못한 바 이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판의 의미는 [이미 다 익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나타나는 증상이다 말이죠

다 익었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사야서를 우리가 하고 있는데

[그 날]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 때], [그 날이 오면] 가 되었다는 거죠,

그래서 나타나는 증상들이다는 겁니다.

그 증상이 바로 심판이다 말이죠

이 끝을 미리 당기는 겁니다.

 

그럼 익지도 않는 철에
우리는 아무리 봐도 아직 준비도 안되었는데
익지도 않은 것이 분명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무화과 나무에게 열매를 내어라 라고 하시니까

열매를 내지 못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해서 말라죽게 되어버리니
(마치 일만달란트 용서의 비유에서 용서의 왕 중의 왕 이라고 증거해놓고
다시 가로지르기로 횡단해서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그래서 구체적 보편성으로써 용서의 왕 중의 왕으로 증거하는 비유, 비밀처럼 말이죠)

하도 하도 신기해서 제자들이 반복해서 묻습니다.


(
11:11, 개역)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

(11:12, 개역)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1:13, 개역)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1:14, 개역)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1:15, 개역)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1:16, 개역)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11:17, 개역)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1:18,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1:19, 개역) 매양 저물매 저희가 성 밖으로 나가더라

(11:20, 개역)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11:21, 개역)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11:22,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11:23,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11:24,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11:25, 개역)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아니 말이 되는게 단 하나도 없어요, 너무 너무 없다 말이죠

 

문제는 때가 되지도 않은 익지도 않은 때에 와서

다짜고짜 무화과 나무에게 열매를 내어 놓으라고 명령 한다면
열매를 내어놓을 무화과 나무가 세상에 어디있겠냐 말이죠

 

이게 이미 말도 안되는데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열매를 내어놓지 않는다고 말라 죽어라 라고 하니까

진짜로 말라 죽더라 라는 겁니다.

바로 앞의 것은 말이 안되는데

뒤의 것은 진짜로 말한 대로 되어버리니까

 

이것을 아무리 원인 있는 결과로 따져 볼려고 하니까

앞 뒤가 안 맞는 겁니다.


이게 바로 종말이요, 제대로 된 심판이요. 미래에 가서 종말 또는 심판이 오는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종말을 끝을 땡겨버려서 심판을 퍼붓는 것이 진짜 종말의 종말이다는 겁니다.
 

심지어 흔히들 종교에서 가장 잘 꾀는 속임수인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

곧 기적으로 볼 것 같으면

저 무화과 나무의 저주를 말이죠

이것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보통 찝찝한게 아닌 부정적인 의미이다는 것이죠

왜 이런 기적 곧 주여 열매를 내어놓지 않으면 저주하소서 라고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라는 기적은 왜 구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부정의 부정, 종말의 종말이다는 거죠.
인간이 평상시 가지고 있는 종말개념을 깨뜨리면서 새로운 종말을 들고 침략하시는 겁니다.
천국도 그래서 침노 하는 자의 것이다 라고 하시듯이 말이죠.

(마 11:12, 개역)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그래서 자꾸 자꾸 묻는 겁니다.

마치 큰 숙제가 떨어진 냥 이 문제의 해답을 알고 싶어서 안 미치고는 못 배길 정도로
주님이 일부러 그렇게 만드신 이 십자가(부정의 부정)라는 자작극 속에 다 걸려야 하는 겁니다.

보통 자극이 아니거든요 뇌리에 박혀 버렸으니까 말이죠

 

이것은 심판 곧 종말

곧 끝을 미리 당겨버리는 겁니다.

 

원인을 찾는게 아니라

결과를 땡겨 버림으로써

원인을 없애 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심판이요 종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뭘해도 우리는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이다는 겁니다.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이스라엘 중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봐 버렸으니 타 죽어 마땅하구나 라고 말이죠.

심판 속의 구원이라는 말도

결과로 결과에 이르지

즉 다른 말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지

원인이 되는 역사 곧 인간의 행함에서 행함으로 이르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원인에서 원인으로 이르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아예 원인이 없어요.
결과는 심판 뿐이다는 겁니다.

심판도 원인 없는 결과이고

구원도 원인 없는 결과이기에

믿음도 원인이 없어서

기도하는 대로 다 얻는다고 하시는 겁니다.
무엇이든지 말이죠.

 

(11:23,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11:24,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그래놓고 이미 다 받았데요 글쎄 ~~~

 

문제는 기도 라는 종교행위가 아니라

기도라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성전에서

우리는 뭘 해도 강도의 소굴로 만든다는 것을
우리 자체가 강도의 소굴임을

저 호산나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서 비로소 밝히 보여짐을 당해 들추임을 당하는 겁니다.

즉 원인이 아예 없고

결과가 덮쳐져서 나타나는 이 심판이 옳았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맞고요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저 심판주의 등장 자체가 심판주가 떠버림으로써

나는 무조건 이유 없이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는

뭘 해도 망해도 마땅한 자임을

결과의 등장으로

미래완료의 등장으로

종말의 등장으로

밝혀짐으로써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나를 꾀냐 라는 그 속임수
이 속임수의 내막을 낱낱이 들추임을 당하는 겁니다.

나를 내가 속이고 주님도 속이고 다 속이는 이 속임수의 실체

바로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그 실상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믿음으로써 밝혀 버렸다는 겁니다.


그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바로 예수님 아니냐 말이죠

참성전의 등장으로

무조건 한세트로써 우리는 강도의 소굴로 들추임을 당하는 겁니다.
가짜성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그 속임수를 말이죠.

 

이게 믿음이다 말이죠

 

강도짖을 해야

그리고 그 강도들이 아지트로 교회를 삼아서 강도의 소굴이 되는게 아니라

그래 되면 원인 있는 결과다 말이죠


아닙니다
. 이유 있는 강도의 소굴이 아니라

무조건 이유 없는 강도의 소굴로써

우리는 뭘 해도 손만 대었다 하면 강도의 소굴로 만들더라 라는 겁니다.

(행 7:48, 새번역) 『그런데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 안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예언자가 말하기를』

(행 17:24, 새번역)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행 17:25, 새번역) 『또 하나님께서는,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복음이 뭡니까 바로 이런 속임수를 밝혀 낼줄 모르면, 무슨 진짜 복음이 되겠냐 말이죠 다른 복음이지!


예수님이 떠 버렸다면

심판 주가 떠 버렸다면

무조건 이유 없이 무화과 나무가 열매를 못 내어놓듯이

강도의 소굴은 함량 미달인 모잘라 모잘라 라는

666 밖에 안되는 짐승 곧 종교와 국가이다 말이죠

 

그러니 심판은 이유 없다 말이죠

그렇기에 구원도 이유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원인 없는 결과인 믿음 속에서는

심판 받아 마땅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유 없이 심판 받아 마땅한 자임을 밝히 보여준

그 십자가가 비추어졌다면

비로소 나의 속임수 내가 속이는 나의 꾀를 밝히 보여주셨다면

그야말로 제대로 된 나의 구세주 곧 구원자

의사

나 같은 죄인을 건지실

이 원수를 용서하실

이 환자를 고쳐줄 제대로 된 심판 주 곧 의사를 만난 것 아니냐 말이죠

 

그러니 죄인이 오히려 믿음으로 주를 보게 되고

마치 실로암 소경 곧 날 때부터 소경이라서 바리새인에게 죄인이라고 정죄 받는 실로암 소경이

예수님을 보게 되고

반대로 의인이라고 소경 아니다 라고 하는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곧 믿음을 못 보는 겁니다.

자기에게 이미 믿음이 있는데 뭐가 아쉬워서 믿음의 주를 바라보겠습니까?

 

누가 나를 제대로 용서하실 심판 주 곧 피 흘리시는 자 이냐 말이죠

 

(11:25, 개역)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용서란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입니다.

이것을 기도하는 겁니다.

아무거나 기도한다고 하니 기도의 달인들인 종교꾼들의 기도가 아니라

무엇이든지 기도 한다는 자체가

이미 완료된 것을 말하고 있지

그것이 무엇이든지 이지

 

원인이 되는 무엇이든지가 아니다 말이죠

 

바로 이것이 번제와 제사가 아닌, 의문의 반복이 아닌

인애와 자비인,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미래완료인 다 이루심을 구하는 겁니다.

 

믿음을 구하는 겁니다.

 

즉 시간이 지나서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잘 자라고 가을에 추수하고 겨울에 곳간 창고에 넣는 이런 역사의 방식이 아니라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가 떠버림으로써

졸지에 봄 여름 가을 겨울 과 무관하게

한 씨가 떳다는 이유로 졸지에 추수때가 이미 되어버린 셈이고
(역사와 시간이 뒤죽박죽입니다. 이것이 묵시의 침범, 천국의 침범, 미래완료가 덮쳐져서
현재를 구성하는 사건
(약속)이다 말이죠.)


그러니 곡식이 또는 포도가 이미 익어버린 상태가 이미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
우리는 아무리 봐도 안 익었는데 아직 때가 덜 되었는데
심판주 예수님이 떳다는 결과로 무조건 이미 익어버린 추수 때 종말로 간주해 버리는
종말의 증상으로 익은 포도주틀 넣어 짜기가 벌어지는 겁니다.

원인이 없이 결과가 덮쳐버렸다 말이죠

 

자 이제 열매를 내어놓으라 라고 하신 이유가 뭘까요?

맞습니다. 예수님이 떳다 라는 증상으로써 벌리시는 사건이다는 겁니다.

믿음이 떳다면
(그래서 행함은 이게 안되는 겁니다. 행함은 때려죽어도 못해요, 믿음은 불가능만, 단절만 추구하거든요)


믿음의 주가 떳다면

무화과 나무는 시간과 역사와 공간과 무관하게 열매 여기 있습니다 라고 내어놓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런데 못 내어 놓았다 그럼 심판 받음으로써

누가 심판주인가를 보여주는 기능을 하는 겁니다.

 

무화과 나무가 말라 죽는 저주를 받느냐 안받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부정적인 도구로써 기능을 펼치는 겁니다.

누가 심판 주냐 라는 거죠

그가 똑같이 아무리 인간들의 정성과 거룩실천으로 가득 모은 성전을

아무리 거룩으로 꽉꽉 채워도

말씀 실천 또는 거룩 행함, 충성 봉사, 이웃사랑실천 등등

정작 예수님의 눈에는 강도의 소굴이다는 겁니다.

 

기준이 예수님이 떳다는데 있어서

예수님을 심판의 주로 못 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죽일꼬 라는 생각밖에 안했다는 것이 늘 충돌로써 드러났으니 말이죠.

 

그러니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가 떳다면

인애와 자비가 떳다면

반드시 상대적으로 한세트를 구성하는 번제와 제사에 목을 매는

강도의 소굴이 나타나도록 되어 있는데 있어서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자들이 강도로써 드러나더라 라는 겁니다.

 

이유 없이 무조건 말이죠

원인 없는 결과로 말이죠

 

이것이 기도로 인해 나타나는 겁니다.

기도를 해야 결과를 얻는 무엇이든지 구하는대로 얻는게 아니라

기도 자체가 결과로 덮쳐지니까

무엇이든지 다 얻은거다 말이죠

그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인애와 자비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써 이미 받은 줄 알아라 라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묻습니다.

어 어 어 진짜로 말라 죽었다고 주님께서 말한 대로 되었다고 보세요

저기 저기 말라 죽었잖아요 라고 한다 말이죠

 

자 이렇게 베드로나 우리들은 부랴 부랴 자신의 상태를 점검 할 겁니다.

저 무화과 나무처럼 말라 죽는 꼴을 안 당하고자

원인을 따져 보고자 말이죠

그러니 그 원인을 분석해서

그 원인을 갖추면

조건을 갖추면 저 말라 죽는 결과를 피할수 있다고 보는 것이

인간들의 판단

모든 자아들의 판단 판결 심판이다 말이죠

 

과연 나는 익은 포도주, 익은 곡식, 익은 무화과 나무가 되어서

열매를 맺었는지, 열매를 내어놓을수 있는지 말이죠

 

문제는 역사 시간을 못 넘거든요

추수 때 라는 가을이 되어야 열매를 겨우 겨우 내어놓을까 말까 할 판국인데

 

여름에 이제 익기 시작하는 그 타임에

다 익지도 않는데 무슨 수로 익게 하냐 라는

난제에 빠져 버리게 되는 겁니다.

 

열매를 내지 못하면 저 말라 죽은 무화과 나무처럼

제자들이 놀라서 자신들도 저렇게 될까봐 염려가 되는

그런 모습이 바로 우리에게도 거울 보듯이 보라는 취지로 기록되어 있다 말이죠

 

아무리 따져 봐도 어느 누구 하나 익은 자가 없다는 겁니다.

무화과 나무가 열매를 내지 못해서 저주 받아 말라 죽은 것처럼

우리 또한 그렇게 되는데 있어서

어떤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것이

 

바로 종말이요 심판이다는 겁니다.

 

그럼 우리 또한 강도의 소굴이다 말이죠

진보개혁좌파 기독교 애들이

보수의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것 하나 발견하면 신나서

막 정죄하기 바쁘다 말이죠

그런 기사는 몇 달 몇 년을 우려먹지만

그런데 막상 자기들의 성추행 사건은 몇주 지나면 언론 기사에서 사라져요

더 웃기는 것은 둘 다 의문의 반복인 번제와 제사를 드리는데 똑같은 강도의 소굴인데

서로가 서로를 강도의 소굴이라고 정죄하는데

마침 아무리 몇주 만에 사라지게 만든 기사로 만들어도

또 사건이 또 터져요

부목사 성추행으로 말이죠

 

그냥 차라리 내가 강도의 소굴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하면 되는데

그것이 기도인데

 

그랬다가는 밥줄 다 끊길거 아니냐 말이죠

 

바로 이겁니다 이게 바로 기도이다 말이죠

밥줄 끊겨져도 상관없는 나는 강도의 소굴이로소이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저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심판해 주소서 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기도의 사람은

 

이미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가 떳기에 나타나는 증상물이고

 

그 반대인 자는 곧 한 세트는

자꾸 역사적으로 1이 있어야 2가 있고 2가 되어야 3이 되는 식으로

용서를 받을려면 강도짖을 끊어야 용서 받을 수 있고

강도짖을 끊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용서 받을수 있다고 보는 거다 말이죠

 

아닙니다. 이미 벌써 용서가 먼저 덮쳐졌기에

미래완료가 덮쳐졌기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 받았기에

나는 강도의 소굴이로소이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라는 고백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의 결과로 인한 증상으로 나타는데

이것이 믿음인데

 

자꾸 행함으로

순서를 조건 갖추듯이 해야

저런 결과가 나온다고 보니까

원인이 졸지에 있으면 결과 자체가 없어요

그렇게 되면 의문의 반복만 된다 말이죠

 

마치 일만달란트 탕감받은자 바로 코 앞에

내 돈 띠 먹고 도망친 자를 지나가도록 해서

 

자기는 일만달란트 탕감받아놓고서는

자기 돈 띠 먹고 도망친 자는 겨우 석달 막노동 월급 삼백데나리온 한 천만원?

환율로 따지면 그때 그때 달라지니까 시간으로 따지면

일만달란트는 16만년 일해서 갚는 빚이고

삼백데라리온은 석달치 노동의 빚이니까

 

원인을 따져 버니까 졸지에

원인 없는 결과로 덮쳐진 용서가 날라가 버려요

결과가 날라가 버려요

용서가 날라가 버려요

괜히 원인을 갖추니까 졸지에 의문이 되어버려요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십자가의 피 용서를,

그 믿음(예수님, 사랑,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

졸지에 흐릿하고 모호한 울리는 꽹과리로, 우상으로, 군사들의 무기 땡그랑 깡통소리로

그 의문 덩어리로 만들어 버리더라 말이죠

 

원인을 괜히 갖추니까

결과는 아예 없어요

다람쥐 챗바퀴 돌 듯이 의문의 반복 뿐이더라 말이죠

 

자 다시 설명하면

익은 상태가 되는 추수 때가

종말때가

우리가 예상하고 준비하는 그런 때가 아니라

 

앞의 글 이사야 글에서 그날이 오면

그날이 우리가 준비해서 맞이할 수 있는 그날이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했고 준비도 못한 그날이 도적(잠행, 비밀, 숨겨진 포착불가능한)처럼 불쑥 왔을때에

우리는 준비해서 예수님을 맞이하는게 아니라

백부당 만부당 저 무화과 나무처럼 말라 죽어 마땅한 이 심판주를 만났다는데 있어서

졸지에 이미 익어버렸다는 겁니다.

 

참 제가 말해 놓고도 말이 안되요

앞 뒤 논리가 전혀 안 맞아요

 

역사의 흐름으로 시간의 흐름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서로 종말이 오는게 아니라

그런 종말은 봄이 있어서 여름이 있고 여름이 있어야 가을 겨울 그리고 종말

이게 종말이 아니라끝이 아니라

심판이 아니라

미래완료가 아니라

그건 여전히 역사의 반복

의문의 반복이다 말이죠

 

처음부터 종말 곧 심판이 있어서 그 증상으로 가을이라는 추수 때가 불쑥 봄에 쳐들어 오고

여름에 쳐들어 오고 겨울에 쳐들어 오는 묵시 또는 믿음이 바로 종말이요 심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가 떳다면

무조건 추수 때 가 이미 되어버린거다 말이죠

 

포도를 거두고자 낫을 휘두른다 말이죠

 

그날이 되는 겁니다.

 

심판 곧 죽음이 그러합니다.

이 죽음을 우리는 싫어하지만

우리가 태어나서 곧 봄이죠

그리고 무럭무럭 자라서 청소년이지요

그리고 장성해서 청장년이지요

그리고 인생을 마감하는 노년이지요

 

그런 어린아기 청소년 청장년을 거쳐서 노년이 되어야만 죽는게 아니잖아요

 

태어나자 마자 죽는 아기도 있고

무럭 무럭 잘 자라야 하는 청소년때에 죽는 아이들도 있고

노년이 되지도 않았는데 청장년때에 죽고

노년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안 죽을려고 별에 별 시도를 다 하는데도 불구하고

막지도 못하고 가는자도 있고

 

그러니 이 죽음이야 말로 불쑥 불쑥 이 모든 것을 깨뜨리는 것이 되어버리더라 말이죠

그러니 누가 이 심판 이 죽음을 누가 좋아라 하겠냐 말이죠

 

그런데 이 심판을 또 예외적으로 좋아라 하는 자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종말의 무리인 성도 곧 교회이더라 라는 겁니다.

 

앗싸 죽자 죽여라 제발 죽여다오 라고 말이죠

 

마치 다윗이 주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고자

기록된 말씀만 기록이 되어 있는대로 펼쳐지게 해 달라고

막 죽어나가요

막 울어요

주의 병에 담았다고 앗싸 좋아라 하더라 말이죠

실상이 이미 떳기에

허상은 빨리 빨리 철거 당해야 한다고

이 역사는 철거 수거 되듯이 말이죠

 

이 의문의 몸뚱아리를 철거해 주시는게 얼마나 감사하냐 말이죠

백날 천날 천년만년을 지나보세요 이 의문의 몸뚱아리는

밝히 보이는 또렷함을 나타낼수가 없도록 되어 있어요

이 쓰레기는 이 냄새나는 똥덩어리는 오히려 속 시원하게 철거 수거

쓰레기 차가 와서 수거하는 것이 속이 후련하다 말이죠

 

이것이 믿음의 주에게 용서 받은 자들이

지금 이 천사들의 활동을 보고서 아주 신나는 겁니다.

 

포도가 익어다고 낫을 휘두르고

거두어 들인 포도를 포도틀에 넣어 지근 지근 밟아 짜는데

그 피가 300 킬로 즉 온 동네를 적시는 겁니다.

즉 확정적이다는 거죠
종말의 잔치가 온 동네 구석 구석 다 퍼지는 겁니다.

 

또렷하다는 겁니다.

의문이 없다는 겁니다.

 

그 어떤 자도 반발할수 없는 힐문 할수 없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확정된 사항이다는 겁니다.

완료이다는 겁니다. 따져볼테면 한 따져 보라는 겁니다.

 

이것 보다 더 또렷한게 어디있어요?

속이 다 후련해

드디어 이 의문의 반복이 마침이 되니까 말이죠

그러니 이 강도의 소굴과 같은 나를 제대로 심판하시는 저 심판주가

나의 구세주이다는 겁니다.

 

왜 이들은, 이 죽음을 다들 기피하고 꺼려하고 싫어라 하는데

성도 곧 성령(예수의 영)을 받은 자는 이 죽음을 좋아라 하느냐 말이죠

 

그야말로 말 그대로 예수의 영이 덮쳐졌기 때문에

죽음이 다가 아니다는 예수님의 마음이 그들에게 그릇처럼 담겨져 있다는 겁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면 뭐가 끝이냐 말이죠?

내 죽음이 중요한게 아니라

주의 눈물이 주의 병에 담긴 이 기록된 말씀대로 되어간다는

원인 없는 결과인 또렷한

십자가의 피 용서의 다 이루심이다 말이죠

 

누가 그 끝을 미리 앞당겨서 끝이야 빨리 와라잉 이라고 확 땡겨 버리냐 라는 겁니다.

 

이 심판이야 말로

이 끝 이 죽음이야 말로

비로소 허구를 거두어 내고

실상을 밝히 보는 구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초상집에 가라 라고 잔칫집에 가지 말라고 한다 말이죠

반드시 뭐뭐뭐 아니요 뭐뭐뭐 라고 말이죠

허구와 실상을 한 세트로 구성한다 말이죠

 

그럼 심판을 외친다는 것은

반대로 거짓인 마귀와 허구인 우상은 심판이 아닌 구원을 외치도록 되어 있다는 거죠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외쳐요

속임수 또는 꾀 말이죠

 

참 이상하죠 바리새인 곧 모든 유대인들이

이런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요구한다는 자체가

그들은 단 한번도 하나님을 믿은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다고 자부하는 것은

바로 자신들이 말씀에 적힌 문자를 실천했기 때문이다는 거죠

 

캬 이 문자 실천

이게 사람 미치게 만드는 겁니다.

 

의문만 가득 모은 똥덩어리 배설물만 까가득 모았다 말이죠

 

자 그럼 문자를 실천

그것도 그냥 문자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했다 라고 하면

이 사람들이 저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저는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는 의인이라고 하겠습니까?

 

졸지에 자아라는 우상에게 그동안 속았다는 겁니다.

아니 속은 줄 알면 다행이지만 여전히 속은 줄도 몰라요

 

사도바울 보세요

십자가가 밝히 보이니까

속은 줄 알지

밝히 보여주지 않으면

속은 줄 누가 알겠냐 말이죠

 

그러니 밝히 보여주는 그 십자가가

아니 사도바울 자신의 실천에서 나왔던가요?

아니면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나

십자가에 죽기 까지 복종해서 나온 겁니까?

 

그러니 실천 개념은 물건너가 버린 겁니다.

역사나 시간 또는 공간이 배경으로 받쳐주는 행함이겠습니까?

오로지 믿음이다는 겁니다.

 

자 이 믿음도 결국 유대인의 믿음과 정반대가 되는 거죠

의인되어야 하고 건강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유대인의 믿음에 곧 바리새인의 믿음에

바리새인을 통해서 다 들통난 바이지요

자신들은 모세의 제자이지 예수의 제자가 아니다 라고

실로암 소경하고 글쎄 씨름을 해요

약한 자만 골라서

이길만한 자만 골라서

지 보다 강한 자는 절대 안 골라요

예수님 한테는 하도 당해서 안 덤벼요

유대인 전체가 하나가 되는 날에 덤빌려고 벼루고 있다 말이죠

울리는 꽹과리 곧 군사들의 무기를 모아야 하거든요

 

오늘날로 치면 성화론자들 개혁주의자들이지요.

건강과 의인됨을 모아야

저 예수님의 믿음인

십자가의 죽음

십자가의 저주

십자가의 심판 곧 하나님의 심판을 물리칠수가 있다 말이죠

훠이 훠이 저주야 심판아 종말아 썩 물러가라

나는 이레에 두 번 금식 했고

십의 일을 내었고

저 세리와 같이 토색하지 않는

하나님께 감사한 생활을 하는 자 이다

 

훠이 훠이 저주야 심판아 썩 물러가라!!, 종말아 죽음아 저 세리 한테나 가버려 ~~~~

저 매국노 저 죄인 저 토색하는 자인 세리 한테나 줘 버려 ~~~~

 

그런데 반대로 저 세리는 맞습니다 저 심판 받아 마땅한 자임을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 또렷하거든요

밝히 보였거든요

그 밝히 보인 미래완료 때문에

그 원인 없는 결과 때문에

무조건 이유 없이 나는 죄인인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 중의 괴수이다는 겁니다.

왜 나 같은 죄인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합니까??? ~~~

라고 우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외침이 떳기에

그 증상으로 이 세리는 우는 겁니다.

 

십자가는 누구껍니까? ~~~~ 제껍니다 저 세리 꺼 아닙니까?

그런데 왜 죄 없으신 당신이 왜 달리십니까 말도 안됩니다 라고 한다 말이죠

 

자 이런 고백은 세리처럼 이런 회개(기도)를 아무도

그 어떤 인간도 하지 않으면 뭐라 할 말이 없는데

 

아니 성령을 받은 자들이 다 같이 한 결 같은 고백이 이렇더라 말이죠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회개(기도) 말이죠

 

심판 속에서 실상을 봐버리니까

저런 허구 허상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더라 말이죠

이레에 두 번 금식이 자랑 꺼리에 안 들어요 전혀 심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배설물이다 말이죠

정작 진짜 심판이요 진짜 불 앞에서

마땅히 타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저 심판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가 떳다는 이유로

고백해서 고백꺼리를 준비해서 나오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한 씨가 떳기에 그 증상으로

자신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회개가 나오는 겁니다.

심판 주가 보이니 안 외치고는 못 배기더라 말이죠

 

? 시온에서 율법이 나오는 것을 봐버렸거든요

자신의 숙제가 아닌

 

외부의 침범이다 말이죠

외부에서 벌어지는 일을 봐버렸어요

세상 사람들 눈에 안보이는 것을

자기는 봐버렸어요

 

아니 보고 싶어서 봤나요? 아니거든요

그냥 보여짐을 당한 겁니다.

 

이사야가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곧 심판 받았구나 라고

 

하나님의 영광이 덮쳐지니까

여섯 날개를 가진 천사가 감당이 안되어서 그 영광을 가리고 있는 판국에

인간은 마땅히 타 죽어야 한다 말이죠

 

거룩이 완벽해야 겨우 살아남을까 몰라

거룩이 1도 없어요

0.0000000001 겨우 될란가?

그런 이사야도 타 죽어야 마땅함은

 

이유 없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정도로 또렷하고 밝히 보이기 때문에

자기 라는 속임수 거짓 가짜 됨이 저절로 밝혀지지

자기가 잘못을 해야지만 그때서야 심판 받는게 아니다 말이죠

그렇게 되면 원인이 있게 되니까 결과가 없는 거죠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것이다 말이죠

원인이 있으니

 

이사야는 원인 없어요

결과만 있을 뿐이다 말이죠

밝히 보이는 하나님의 영광 말이죠

 

그러니 이유 없이 무조건 심판 받아 마땅한

불에 타 죽어 마땅한

화로다 화로다 나여

감히 이스라엘 중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봐버렸네

눈이 남아나질 않는구나

무조건 죽어 마땅하구나

이유 없구나 라고 회개 할때에

 

즉 회개란 하나님의 영광이 떳기에 나오는 증상이지

 

잘못을 뉘우치고 깨닫고 반성해서 나오는게 아니다 말이죠

회개 조차도 원인 없는 결과다 말이죠

 

십자가가 밝히 보이니까

십자가가 다 이루었다 라고 외치니까

무조건 나는 아니요 그가 옳았다고 외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심판받아 마땅하다고 하는데

왠 반전

반전을 노린게 없어요

그렇게 되면 또 원인이 있게 되는거죠

 

그 부정한 입술을 제단 숯불로 지져 버리더라 말이죠

 

오늘 나오는 천사들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독자적인 활동 자체가 없어요

즉 원인이 없어요

결과 밖에 없어요

그들이 제단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즉 외부에서 지시는 받고 있지

인간처럼 개인의 판단에서 나오는게 아니다 말이죠

천사 자체가 개인이 없어요

이름이 있는 천사는 기능을 말하고 있지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판단으로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기에

외부의 지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 개인의 의를 기준으로 하는 겁니다.

남을 심판할려면 판단할려면 자기자신의 의를 기준으로 하니까 말이죠

 

그러니 전혀 외부의 지시가 없어요

제단에서 안 나와요 그래놓고 성전을 거룩으로 꽉꽉 채웠데 글쎄?

그러니 강도의 소굴 맞잖아요

즉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인애와 자비가 없다는 겁니다.

의문의 마침이 없이 번제와 제사 곧 울리는 꽹과리만 반복하고 있다는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 하는 그런 것을 꽉꽉 채우는 우상의 산당으로 만들더라 말이죠

 

이거 우리에게 익숙한 우리의 버릇 아니냐 말이죠

이거 심판해 주세요 라고 하는 자 없잖아요

주여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서 빨리 내 민족 내 가족 내 우상 어서 빨리 심판해 주세요 라고

집문서 땅문서 국가문서 다 팔아넘겨버리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펼치는 기생라합과 같은 자를

눈 씻고 찾아보세요 아무리 찾아봐도 교회에 없어요

혹시 또 몰라 상대적으로 교회사람들이 그렇게 저주하는 사람

마치 실로암소경처럼 날 때부터 소경이거나

아니면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하는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그 사람 여기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딱 한 분 밖에 없어요.

 

농사꾼이 씨를 뿌릴때에 무엇을 목적으로 뿌리겠습니까?

열매를 거두고자 함이 아니냐 말이죠

그러니 추수 때가 가장 기쁘다 말이죠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아낌없이 다 주셨듯이

그 기쁨이 이루 말할수 없이 기뻣듯이

 

우리 또한 포도주 틀에 포로로써 담겨져서

지근 지근 빫혀서 피를 내어

일천육백 스다디온 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사망의 권세에 까지 퍼져 퍼져서

이 기쁜소식이 퍼져서

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또렷함이 퍼져서

이 울리는 꽹과리가 아닌 사랑이 풍성하게 온 세계 구석 구석에 퍼져서

 

주님께서 이렇게 나를 위해서 피 흘리셨다고

이 용서를 증거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나를 위해서 이렇게 우셨습니다.

눈물 흘리셨다고

주의 병에 담는 겁니다.

? 이것만이 기록되어 있거든요

 

다른 것은 기록 되지 않거든요

또렷한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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