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 (15; 1- 8)

 

죄악(수치)을 제거하는 어린양의 피 찬양, 이전 것은 지나가게 하는 새노래

계 41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 (계 15, 1- 8).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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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개역)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15:2, 개역)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15:3, 개역)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15:4, 개역)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15:5, 개역)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15:6, 개역)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5:7, 개역)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

(15:8, 개역)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15:1, 새번역) 그리고 나는 하늘에서 크고도 놀라운 또 다른 표징을 하나 보았습니다. 일곱 천사가 일곱 재난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지막 재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것으로 끝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15:2, 새번역) 나는 또 불이 섞인 유리 바다와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유리 바다 위에는 짐승과 그 짐승 우상과 그 이름을 상징하는 숫자를 이긴 사람이, 하나님의 거문고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15:3, 새번역) 그들은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주 하나님, 전능하신 분,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크고도 놀랍습니다. 만민의 왕이신 주님, 주님의 길은 의롭고도 참되십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만세의'

(15:4, 새번역) 『㉡주님, 누가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겠습니까? 주님만이 홀로 거룩하십니다. 모든 민족이 주님 앞으로 와서 경배할 것입니다. 주님의 정의로운 행동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 10:7

(15:5, 새번역) 그 뒤에 또 내가 보니, 하늘에 있는 증거의 장소인 장막 성전이 열리고,

(15:6, 새번역) 그 성전으로부터 일곱 천사가 일곱 재난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들은 깨끗하고 빛나는 모시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있었습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

(15:7, 새번역) 또 네 생물 가운데 하나가,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 채운 금 대접 일곱 개를 그 일곱 천사에게 주었습니다.

(15:8, 새번역) 성전이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에서 나오는 연기로 가득 차게 되니, 그 일곱 천사의 일곱 재난이 끝나기까지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노래 라는 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마치 율법을 지키기 하듯이

의무감에서 또는 법을 지켜야 함에서

또는 양심과 도덕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노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나오는 겁니다.

저절로

 

즉 노래가 주체이고

사람은 그 노래를 통과시키는 스피커입니다.

 

노래 스스로가 저절로 나오게 되면

인간의 입술과 몸은 졸지에 악기통이 됩니다.

울림통 말이죠 공명통이 되는 겁니다.

 

마치 감기가 눈에 안보이지만

그 감기 바이러스가 몸에 들어오게 되면

그 순간부터 몸은 감기의 증상을 나타내는 증상통이 되는 겁니다.

즉 자발적으로 찬양할 자는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이 찬양을 싫어하는 세계를 들추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오는 새노래인 어린양의 노래 모세의 노래는 상대적으로

악마의 세계가 망했을때에 심판당했을때에

부르지 말라고 아무리 입을 막아도

너무 너무 기뻐서

 

십자가의 다 이루셨다는 그 증상 때문에

목격자는 그 증상의 증상통으로써 저절로 울림통이 되는 겁니다.

 

본문을 보니 출 15장의 미리암이 생각나듯이

너무 너무 놀래서 입이 딱 하고 벌어지더니만

저절로 노래가 튀어나오는 겁니다.

 

튀어나오니까 몸이 반응하는

울림통일 뿐이지

 

마치 기타를 치면 그 줄소리가 튀어나올때에

통은 그 줄소리의 증상으로써

음파를 퍼트리는 증폭기의 역할을 하듯이 말이죠

일종의 스피커 역할인 거죠

세례요한이 광야의 소리인 것처럼 말이죠

광야의 노래가 덮쳐져서 말입니다.

 

이 모세의 노래는 미리암이 화답하듯이

마치 한나의 기도와 같고

이 한나의 기도는 마리아의 기도와도 같습니다.

 

즉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가 떳다는 그 이유로

이 땅은 무조건 이유 없이 심판 받아 마땅한 상태로써

모든 죄악 문제가 해결이 되어

이 심판 속에서 구원이 펼쳐진다는 겁니다.

 

오늘 계시록 15장은 일곱나팔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다음 16장 부터는 일곱 대접이 시작 됩니다.

 

부정함이 제거 되는 심판을 받지 않는 이상은

구원은 없다 말이죠

 

한나의 기도와 마리아의 기도는

이 부정함이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가 등장으로 제거 될 수 밖에 없는

심판의 전쟁이 펼쳐진다는 것을 기도함에서 있어서

어서 어서 심판해 주세요 라고

마치 기생라합처럼 행함이 있는 믿음을 펼치더라 말이죠

 

그 결과를 모세의 노래를 통해서 미리암이 화답까지 하면서

저 애굽이 무너졌다고

우와 십자가의 어린양의 피가 옳았네 라고 저절로 노래가 나오는 겁니다.

 

죽음의 바다를 건넜죠

아무도 원치 않았던 구원이였죠

도대체 뭐 하나 원인이 있어서 나타난 것이 하나도 없었죠

모두가 반대하고 모두다 거부하고 모두가 싫어하는 상황이였죠

원인 이 하나도 없는데 결과가 딱 덮쳐지는 것에서 놀라서 노래 부르는 겁니다.

 

(15:1, 개역)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15:2, 개역)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15:3, 개역)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15:4, 개역)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

(15:5, 개역) 큰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

(15:6, 개역)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 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15:7, 개역)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리는 자를 엎으시나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초개 같이 사르니이다

(15:8, 개역)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15:9, 개역) 대적의 말이 내가 쫓아 미쳐 탈취물을 나누리라 내가 그들로 인하여 내 마음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

(15:10, 개역) 주께서 주의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흉용한 물에 납 같이 잠겼나이다

(15:11, 개역)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15:12, 개역)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15:13, 개역)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15:14, 개역) 열방이 듣고 떨며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15:15, 개역)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15:16, 개역)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 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15:17, 개역)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15:18, 개역)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

(15:19, 개역)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이 함께 바다에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바닷물로 그들 위에 돌이켜 흐르게 하셨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서 육지로 행한지라

(15:20, 개역)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15:21, 개역)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

 

 

~~~

허걱 ~~~

 

[] 이게 노래래요 글쎄

이전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완전 정반대 극과 극이다는 겁니다.

새로움이란 이전 것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나올수가 없다는 거죠 한 세트이니까

우리는 그저 놀래서 자동반사로 튀어나오는 소리인데

이것을 어린양의 노래 라고 하시더라 라는 겁니다.

 

다른여인들이 찬양하는 것에 미리암이 저절로 화답합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 저 애굽의 강퍅한 자를 바다에 던지셨다고 말이죠

 

그 정도로 불가능한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세상에 누가 죽음을 이기느냐 말이죠

누가 저 애굽, 저 큰 성 바벨론을 이기냐 말이죠

 

그런데 이 어린양의 피가 옳았다고

아무도 안 믿는데 어린양 홀로 저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다는 겁니다.

누가 믿었으리요?

누가 믿겠느냐 말이죠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53:1, 쉬운)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59:1, 현대어) [이스라엘의 죄악을 책망하는 설교]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팔이 짧아서 너희를 구원하지 못하시며 귀가 어두워서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너희의 호소를 듣지 못하신다고 생각하느냐?

 

어린양은 우리가 반드시 비웃었던 무시했던 무능하다고

그 정도로 애굽은 강해서

우리 마음 속에 박혀 있는

늘 우리 맘에 떠나지 않는데

그 불가능한 것을 해냈지 말입니다.

 

누가?

 

어린양이!!

 

이것이 요나의 표적이다 말이죠

죽고자 하신 분이 진짜로 살아난 실상이고

살고자 하는 우리는 속임수 곧 허구로 드러났다는 겁니다.

 

자 그러니 일곱 인은 전쟁 준비

마치 출애굽사건에서

10가지 재앙을 퍼부으면서 바로왕을 강퍅케 만들고자

10가지 재앙을 퍼붓듯이

붉은 말을 탄 천사

녹색 청색 검은 색 등등

 

그리고 일곱 나팔은 드디어 전쟁 시작 개시로

이스라엘이 움직임을 당하는

작살을 꼿아서 어린양의 피가 땡기는

때려죽어도 이 애굽에서 빠져나갈 생각이 추호도 없는

죽어도 애굽에서 죽지

광야에서 안 죽을란다 라고 했던

바로왕의 강퍅함과 다를바 없는 이 완악한 백성을

자신의 피 곧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자

아무도 원치 않는 이 구원을

심판 속에서 펼치시는 겁니다. 오로지 피 영광을 위해서 말이죠

여기에 인간은 전혀 보탬이 된적 없이 그저 원망 밖에 없다 말이죠

그렇게 저 애굽을 멸망 시키고 빠져나오는

그 하이라이트 최정절의 장면이 바로

유리 바다

홍해

죽음의 바다를 건너는 장면이다 말이죠

 

그리고 출 15장에 미리암의 노래가 끝나자 마자

광야에서 바로 원망이 튀어나옵니다.

 

그렇듯이 계 16장 부터는 일곱 대접 곧 전쟁 마무리를 통해서

일곱나팔에서 3분의 1만 건드린 것은 이제 아예 대접 채로 다 퍼붓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광야에서

마치 채로 걸러내듯이

광야에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지만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처럼

 

다 걸러내는 기능이 일곱 대접을 통해서 벌어지는 겁니다.

광야를 거쳐 가나안 정복을 할때에 다들 거부했다 말이죠

죽음을 건넜고 홍해를 건넜듯이

마치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3가지 시험을 이기셨듯이

오로지 믿음으로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또 광야를 건넜음에도 불구하고 요단강을 건넜듯이

 

이제 저 가나안을 정복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기를 무서워 한다는 자체가

약속의 정신과

어린양의 피 흘리심과 안 맞으니

여전히 우상 곧 애굽의 사고방식이 있는 것이 들통남에 있어서

일곱 인 때 아니 전쟁준비때의 출애굽기에서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린 것처럼

일곱 대접 때에 즉 광야에서 10(14)가지 원망을 받아내듯이

세가지로 함축해서 증거궤 박스 안에 담아서

 

이 부정함을 제거 곧 수치를 물러가게 함으로써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피 용서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 수치 제거에, 모든 허물을 덮는 피 용서에 비로소

음녀 여자 짐승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용 짐승 거짓선지자 와의 영적전쟁인 최후전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곧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지는 겁니다. 곧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겁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큰 성 바벨론은 무너지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

어린양의 피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라는 그 증상들이 펼쳐짐에도 불구하고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가 떳다는 그 결과로

이런 원인 없는 결과로 인한 증상들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안 믿겨지니까

도저히 믿을수가 없으니까

 

믿음으로 다가가지 않고

행함으로 다가가게 되니까

이 말도 안되는

원인 없는 결과에

자꾸 원인을 만들려고 하니

무슨 소리인지를 모르는 겁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겁니다.

모든 상황이

그 어떤 역사도

이 약속이 벌리는 사건

어린양의 피가 벌리시는 사건에서 벗어난적이 없는데

그들의 눈에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다른 것이 보이는 거죠

눈에 보이는 교회 장사나

또는 그 강도의 소굴을 만들고자

수치를 자기 스스로 가리도록 거짓선지자의 미혹에 빠지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곧 이 말은 우리 속에 다른 주인이 자리 잡고서

여전히 요나의 표적을 무시하고

여전히 애굽을 부러워 하는

애굽이 아무리 멸망 당해서 사라져도

나 다시 돌아갈래 애굽으로 돌아갈래 라고

광야에서 원망했던 그 속성들이

일곱 대접을 통해서 낱낱이 밝혀 지는 겁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들은 어린양의 피 중심으로 벌어지는 증상들로써

 

반드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어린양의 피 증상들이다 말이죠

진노의 그릇은 진노의 그릇으로써

긍휼의 그릇은 긍휼의 그릇으로써 말이죠

 

그러니 뭐 하나 부담 가질것이 단 하나도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사랑의 증상으로 나타나니까 말이죠

 

그러니 부담을 가지게 되면

울리는 꽹과리에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는

또 뭔가를 준비하고 지켜야 하고 대비해야 하는 부담만 커지게 된다 말이죠

 

누가 노래 부르고 싶어서 노래 부릅니까?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다가 갑자기 사람들이 고함을 치는 순간이 오면

그 사람에게 왜 고함을 쳤습니까?

 

~~~

 

고함을 칠려고 준비하셨나요? 라고 물어보면

아무도 아뇨 라고 한다 말이죠

그런데 다들 한 사람도 아닌

여러사람이 그 순간에 동시적으로 고함을 치게 되면

감탄을 하게 되면

영화 내용이 뭔가를 봐야 한다 말이죠

그 사람에게 물어 볼게 아니라 말이죠

 

우리는 어린양의 피 의 내용을

약속의 내용을 봐야 한다 말이죠

 

그 내용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아 그래서 저절로 노래가 튀어나올 수밖에 없구나 라고 한다 말이죠

 

새노래 이다는 겁니다. 너무 너무 충만하기에 입이 떡 벌어지는 겁니다.

 

다 이루었기에

십자가가 밝히 또렷히 보이기에

 

동시에 의문의 반복인 울리는 꽹과리인

속임수

나의 꾀

인간의 꾀 거짓 영들의 속임수가 다 낱낱이 밝혀지는 겁니다.

 

자 애굽이 이제 일곱 나팔을 통해서

여리고성처럼 와르르 다 무너졌습니다.

 

다시는 이 애굽이 일어서지 못하도록 말이죠

 

그런 애굽을 광야에서 이스라엘 히브리 잡족들은 늘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이

광야에서 들추어지는 겁니다.

그것 까지

일곱 대접이 다 멸하시는데 있어서

얼마나 고맙습니까?

 

와 맞군요 사랑은 진짜 확실하군요

너무 너무 또렷하니까

 

이 사랑이 없으면 진짜 진짜 울리는 괭과리 맞군요

허구 맞군요 허상이군요

이 허상 우상을 우리 속에서 제거하시고자

이 십자가의 피는 끝까지 우리는 섬기고자

주의 사랑에서 끊을 자 없도록

주변에 죽음 살인

환란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협 칼

광명한 천사 권세자들 현재 미래 또는 능력들

높음 깊음

이 어떤 것도 주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8:34, 개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광야에서 벌어지는 것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말이죠

이미 일곱 대접이 떳기에

이런 것들이 주변에 깔린다는 겁니다.

주님의 피는 그 정도로 당당해요

주님의 사랑은 그 정도로 가벼운데

얼마든지 와라 누가 끊을수 있나 보자 라고 말이죠

그런데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을 정복 하는 그 하나 하나가

자신의 숙제로 보이게 되면

단 하나도 넘을 수 없는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고 마니

아무리 원망하기 싫어도 원망 할 수 밖에 없는

원망 안하고 광야를 통과하는

엉터리 속임수 성화론이나 따지고 있더라 라는 겁니다.

그 의문을 쌓으면 쌓을수록

강퍅한 바로왕처럼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고자 할 꺼다 말이죠

그런 무거움을 왜 스스로 지고 남에게 까지 지우냐 말이죠

원인을 왜 갖추고자 하냐 말이죠

가면 갈수록 더더욱 거인같은 마귀와 맞짱 떠서 무슨 수로 싸우겠냐 말이죠

우리가 싸우는 것은 단 하나도 없어요

어린양이 이미 다 이기신 것만 뒤를 졸졸졸 따를 뿐이다 말이죠

그 승리의 증상들을 누리는 가벼움 뿐이다 말이죠

 

이 사랑이 또렷하지

 

내가 내 숙제를 하듯이 해 버리면

물론 그런 나 라는 자아도 없는데

자아가 졸지에 생기면

살려고 하지 죽고자 하겠냐 말이죠

아무튼 울리는 꽹과리만 잔뜩 모으게 배설물만 모으게 된다 말이죠

 

그래봤자 근심하고 돌아서는 부자청년일 뿐이다는 겁니다.

그냥 주여 제가 가난한 자입니다.

저에게 주님의 사랑을 나누어 주세요

당신만이 부자 이십니다 라고

얼마나 가볍냐 말이죠

 

율법 어릴적부터 다 지켰다고 해 놓고서는

가난한 자에게 전재산을 나누어 주라는 예수님 말씀에

졸지에 거리끼는 걸림돌에 탁 하고 부딧히니까

자신이 울리는 꽹과리 소음에 지나지 않는 허상으로 들통나더라 라는 겁니다.

 

그것을 지적 받는 이 일곱 대접이 있다는 것에

얼마나 감사한지

신나게 이 심판 속에서의 구원

왜 심판 받아야 마땅한지

아 여전히 애굽적인 속성을 주께서 싫어하시고

번제와 제사를 싫어하시고

인애와 자비로써

상한 심령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끝까지 사랑 하시겠다고

끝까지 책임 지시겠다고 하시는

이 또렷함에

 

마귀의 속임수가 어떻게 들통나는지를

우리는 같이 징계 받으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누리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 받는 그 행복을 누리면서 말이죠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4:10, 개역)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4:11, 개역)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4:12, 개역)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4:13, 개역)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4:14, 개역)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4:15, 개역)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4:16, 개역)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4:17, 개역)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4:18, 개역)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4:19, 개역)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4:20, 개역)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4:21, 개역)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4:22, 개역)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4:23, 개역)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4:24, 개역)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4:25, 개역)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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