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이루었다 vs 하나님을 모독하는 완악함 (16:17-21)

 

일곱 번째 천사의 일곱 번째 대접으로 나타나는 실상, 껍데기를 벗겨버리는 실상

계 43 다 이루었다 vs 하나님 모독 (계 16,17-21).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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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 개역)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16:21, 개역)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16:17, 새번역)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니,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다 되었다" 하는 큰 음성이 울려 나왔습니다.

(16:21, 새번역) 그리고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 위에 떨어지니, 사람들은 우박의 재앙이 너무도 심해서, 하나님을 모독하였습니다.

 

(16:17, 공동) 일곱째 천사가 자기 대접에 든 것을 공중에다 쏟았습니다. 그러자 "다 되었다." 하는 큰소리가 성전 안에 있는 옥좌로부터 울려 나왔습니다.

(16:21, 공동) 그리고 무게가 오십 근이나 되는 엄청난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은 그 우박의 재난이 너무나 심해서 하느님을 저주하였습니다.

 

(16:17, 쉬운) 일곱째 천사가 대접을 공중에 쏟아 붓자, 성전 보좌에서부터 큰 음성이 울려 나왔습니다. “다 끝났다.”

(16:21, 쉬운)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들이 하늘에서 쏟아졌습니다. 사람들은 우박 때문에 재난이 너무나 커서, 하나님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너무나 끔찍한 재난이었습니다.

 

(16:17, 현대인) 일곱째 천사가 대접을 공중에 쏟자 성전 보좌에서 `다 마쳤다.' 하는 큰 음성이 울려 나왔습니다.

(16:21, 현대인) 또 무게가 약 50킬로그램이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에서 쏟아져 사람들 위에 떨어졌습니다. 그 우박의 재난이 너무 엄청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저주했습니다.

 

(16:17, 현대어) 일곱째 천사가 대접에 든 것을 공증에 쏟았습니다. 그러자 '이제 다 끝났다' 하는 음성이 하늘의 성전 보좌로부터 들려 왔습니다.

(16:21, 현대어) 또 무게가 약 45킬로그램이나 나가는 우박이 마구 쏟아져 땅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습니다. 이 무서운 재난을 맞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저주하였습니다.

 

 

지난 시간에 회개치 않는 자들이 아마겟돈에 모인다고 했습니다.

거짓선지자들에게 속은

그 거짓

그 속임수에 속은 자들이

상대적으로 참된 것 곧 밝히 또렷히 보이는 십자가를

사랑을 훼방하고자

되도 않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울리는 꽹과리 곧 무기들의 달가닥 소리를 내면서

무기잡은 자들을 모으는 장소가 바로 아마겟돈입니다.

 

반대로 이 아마겟돈의 반대가 되는 것은 뭡니까?

맞습니다. 바로 주의 사랑만 쫏아가는

일찍 죽임당하신 어린양만 졸졸졸 쫏아가는

주께서 눈물 흘리신 그 사건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마치 이사야가 3년 동안 발가벗고 다녔듯이

이제는 통곡하면서 눈물 흘리는 그 회개의 사건 속으로 들어가듯

장대 높이 달린 어린양의 피 흘리심을 바라보기 위해서

회개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 이 일곱 대접을 때려붓는 이 상황을 감사하면서 찬양하는 겁니다.

 

마침 지난 주에 말씀을 나누고 난 뒤 여운이 가시지 않아서

 

(16:21, 개역)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이 부분을 나누었습니다.

어머니께서도 이 부분을 보니 욥이 생각났다고

저도 저도 그거 말하고 싶었다고 서로 막 좋아라 했지요

 

욥은 애매한 고난 속에 들어가게 되니까

세 친구들이 욕을 합니다. 어서 회개 하라고

너가 저주 받은 것은 회개를 하지 않아서 그렇다 라고

그러나 욥은 그게 아니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떳기에 자신은 무조건 죄인의 자리에 놓여지는

이 자체가 이미 회개 속에 놓여졌다는 겁니다.

이것이 회개의 사람으로 태어난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난 자이고

반대로 욥의 세친구들은 회개를 지켜야 저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종교

곧 신으로부터 미움받으면 안되기에 회개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바로 이런 마음 때문에 대신 미움 받는 분을 쳐다보는 회개의 마음이 전혀 안 덮쳐진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끝을 약속을 환상을 끌어 당겨짐을 당해 보여짐을 당하는

거지 나사로와 같은 자가 아니다는 겁니다.

 

이미 천국이 덮쳤기에 거지의 자리에서

회개의 자리에서 주의 영광을 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회개 해야 천국 또는 복이 오는게 아니라

그것 때문에 지옥간 부자는 회개를 소유하죠 우와 억수로 믿음좋죠 억수로 회개 잘하죠

그래서 지옥인 겁니다.

부자청년은 율법 지킨 것을 소유하죠 말씀을 자꾸 소유해요

그것이 가짜 말씀

예루살렘이라는 약속의 터전에 살면서도 왜 약속인지를 몰랐던 것이

고난을 통해서 밝혀지는 겁니다.

그래서 회개를 해야 천국간다가 아니라

 

이미 천국이 왔기에 천국이 덮쳐졌기에

회개의 자리에 놓여 질 수밖에 없는

그래서 애매한 고난의 자리에 놓여진 욥을

욥의 세친구는 반대로 해석함으로써

엉터리 약속 엉터리 하나님 관이 들통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욥을 보고 남편 욥을 보고 차라리 하나님 저주 하고 죽어버려라 라고

아내가 외치죠

그 모습이 바로 오늘 본문 21절을 보고 생각이 났습니다.

 

너무 너무 진노가 심하니까 차리리 하나님 저주 하고 죽었뿌라 라는 겁니다.

 

앞의 글 이사야 22장 환상의 골짜기 예루살렘에 사는 거주민도 똑같습니다.

어차피 앗수르 군대가 잠시 물러났을 뿐 이 군대를 이길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차라리 어차피 내일 죽을껏 오늘 겨우 살아났것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다 죽자 라고

욜로 파티를 벌리는 겁니다.

한번 뿐인 인생 오늘만 살자 라고 말이죠

이미 과거에서 다 유행했던 것 허무하게 다 지나간 것이

다시 유행하다가 또 다시 그 유행이 끝났다 말이죠

그 정도로 의문의 반복 뿐이라서

불확실한 미래에 목숨 걸때가 없는 젊은이들이 이런 유행이나 또 반복하는 겁니다.

의문 뿐인 세상이니 뭐 하나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목숨 걸만한 것 하나 없으니 말이죠

 

천국에 십자가에 목숨 걸어야 해서 나오는게 아니라

천국이 덮쳐져서 또렷함이 밝히 보이니까

누구에게? 욥에게

누구에게? 눈물 흘리고 또 앞에서는 발가벗고 3년 동안 벗은 몸으로 돌아다니는

우는 선지자 이사야에게 또렷함이 덮쳐지니까

 

상대적으로 욥의 아내는 차라릴 하나님 욕하고 죽었뿌라

 

(2:9, 개역)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2:9, 새번역) 그러자 아내가 그에게 말하였다. "이래도 당신은 여전히 신실함을 지킬 겁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서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 , '찬양하고서'. 1:5의 주를 볼 것

(2:9, 공동) 그의 아내가 그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도 요지부동이군요? 하느님을 욕하고 죽으시오."

(2:9, 쉬운) 그 때, 욥의 아내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신앙을 지킬 것입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려요!”

(2:9, 현대인) 그의 아내가 와서 말하였다. `당신이 이래도 진실을 고수할 셈이오? 하나님이나 저주하고 죽으시오.'

(2:9, 현대어) 그러자 아내가 말하였다. `그래,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믿음을 지키고 있단 말이에요. , 속 터지는 양반 다 보겠네. 차라리 하나님에게 욕이나 퍼붓고 죽는 편이 더 낫지 않겠어요?'

(2:9, 가톨릭) 그의 아내가 그에게 말하였다. "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그 흠 없는 마음을 굳게 지키려 하나요?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려요."

 

또 환상의 골짜기 예루살렘 사람들 곧 이스라엘 백성들은

욜로 파티 어차피 한번 뿐인 인생 내일 죽을꺼 뻔하니까 먹고 죽은 귀신 땟깔도 좋다 라고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다 죽자 라고 나오더라 말이죠

 

(22:13, 개역)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도다

(22:13, 새번역) 그런데 너희가 어떻게 하였느냐? 너희는 오히려 흥청망청 소를 잡고 양을 잡고,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내일 죽을 것이니, 오늘은 먹고 마시자" 하였다.

(고전 15:32, 새번역) 내가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웠다고 하더라도, 인간적인 동기에서 한 것이라면, 그것이 나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만일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할 것입니다. / 22:13

(22:13, 공동) 그런데 너희는 도리어 기뻐 날뛰고 소와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내일이면 죽을 몸, 실컷 먹고 마시자." 하는구나.

(고전 15:32, 공동) 내가 설혹 에페소에서 맹수와 싸우는 위험을 겪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적인 동기에서 당한 일이라면 내가 얻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내일이면 죽을 테니 먹고 마시자." 해도 그만일 것입니다. / 이사 22:13, 56:12.

(22:13, 쉬운) 그러나 보아라. 오히려 백성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소와 양을 잡고, 고기와 술을 마셨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내일이면 죽을 테니 먹고 마시자라고 하였다.

(22:13, 현대인) 오히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소와 양을 잡아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내일 죽을 텐데. 먹고 마시자.' 하였다.

(22:13, 현대어) 그런데 너희는 오히려 환호성을 외치며 잔치를 즐기고 소와 양을 잡아먹고 마시며 발작하듯 떠들어댔다.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오늘 먹고 마시자!'

(22:13, 가톨릭) 그러나 보아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면서 " 내일이면 죽을 몸, 먹고 마시자." 하는구나.

 

그 정도로 절망적이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허상으로 가득찬 허구인 인생의 실상이 들통나는 모습입니다.

오로지 자아 밖에 모르고 있지

약속을 모르는 겁니다. 약속의 땅 환상의 골짜기인 예루살렘에 살아도 모르는 겁니다.

 

앞의 글 이사야 22장에서 조금 첨가 할려다가 여기에 지금 첨가해 보면

 

바로 글 초반부에

[바로 예루살렘이라는 환상의 골짜기는 그런 의미이다는 거죠]

로 시작하는 문장 문단 끝에 다시 삽입하여 첨가할려고 했던 부분이 뭔고 하니

 

예루살렘과 죽은 나사로 이야기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내가 부활이다 라고 하셨다 말이죠

그런데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꾸 부활교리를 암요 암요 믿고 말고요 부활교리 믿숩니다

라고 우깁니다.

우리 그거 성경공부해서 습득 소유 했습니다. 부활교리 백점 맞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오빠 나사로는 이미 벌써 죽었습니다.

왜 늦게 왔습니까 라꼬 멱살 잡고 오빠 살려내라 라고 하더라 말이죠

 

(11:24, 개역)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바로 이런 모습을 들추어내시고자 회개의 자리에 놓으시고자

일부러 3일 동안 안 가셨던 겁니다.

일부러 늦게 지체를 하셨다 말이죠

그 마지막날 종말이라는 다 이루었다는 지금 확 땡겨버리고자 말이죠

내가 부활이다고

그런데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겁니다.

 

(11:6, 개역)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11:6, 새번역) 그런데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앓는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그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르셨다.

(11:6, 공동) 그러나 라자로가 앓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서 더 머무르시다가 이틀이 지난 뒤에야

(11:6, 쉬운)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도, 지금 계신 곳에서 이틀을 더 지내셨습니다.

(11:6, 현대인)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들으시고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시다가

(11:6, 현대어) 그러나 곧 그들에게 가시지 않고 계시던 곳에 이틀 더 머물렀다가

(11:6, 가톨릭) 그러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11:17, 개역)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동네사람들이

아니 나사로를 사랑했다메? 사랑했다면서 왜 늦게 오노

사랑 한 것 맞기는 맞나? 라고 비아냥 거립니다.

그리고 동네사람들은 죽은 나사로를 위해 통곡을 한다 말이죠

장례 마켓 시장에 전문적으로 울어주는 울음꾼들이 있잖아요

그 노릇을 해 주는 겁니다.

나사로야 예수는 너를 배신했지만 우리는 배신 안 하마 라고 말이죠

 

예수님께서 이마를 띵 치면서

아이구야

아이고 아이고 쪽팔려

저들의 눈물을 보고 민망해서 쪽팔려서 우시는 겁니다.

저들의 눈물에 반대하는 반대로써 눈물 흘리신다 말이죠

 

(11:32, 개역)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11:33, 개역)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11:34, 개역)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11:35, 개역)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11:36, 개역)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11:37, 개역)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11:38, 개역)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11:39,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실상입니다.

오늘날 환상의 골짜기, 교회들의 실상입니다.

약속을 안 쳐다보고서

간판만 교회이다는 거죠

환상 곧 묵시의 터전이다는 거죠

 

예수님이 부활이시다를 말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예루살렘인데

환상의 골짜기, 묵시의 터전, 약속의 땅인데

성령의 전인 성도인 우리 인데

그것이 신랑 되신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인데

그저 교회 부동산만 차지하고서는 교회라고 우기고 있었더라 말이죠

 

다 이루었다 라는 십자가라는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십자가를 외치도록 되어 있는데

도리어 속임수, 인간의 꾀가 드러나더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고난이 덮쳐지니까 약속이 안 나오고

우상이 나오더라 말이죠 울리는 꽹과리가 막 나와요

 

너희는 성령의 전인줄 모르느냐????

너희는 말씀 곧 묵시의, 계시의, 환상의 성전인 줄 모르느냐?

 

(고전 6:19, 개역)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이 말은 너희 자체가 회개의 전이다는 겁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는 겁니다.

 

즉 상대적인 강도의 소굴과 차이나는

 

그런데 자꾸 강도의 소굴이 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는 겁니다.

? 회개가 안 나오니까 말이죠

 

자 이렇게 말하니까 회개? 그거 자신있다고 외치는 겁니다.

우리 보다 회개의 달인이 어디있냐 라고 한다 말이죠

십의 일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 하고 하고 하고 하고

그런데 천국이 없어요

 

그런데 정작 화로다 나여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외치는

회개의 달인들에게 토색하는 자라고 정죄 당하는

매국노 세리 친일파 친로파 세리는 오히려 천국을 외쳐요 글쎄????

 

이상하잖아요 뭔가 팔이 어긋맞게 뒤바뀐 모습이다 말이죠

 

천국이 덮쳐졌기에 천국을 말하기 위해서

회개의 자리에 놓여지는게

 

정작 회개를 지키기 했다고

회개의 달인이라고 하는 자들에게는 천국이 안나와요

 

욥이 회개의 자리에 놓여지는데 있어서

정작 욥에게는 또렷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다 이루었다고 외치시는

예수님이 나오는데

곧 긍휼이 나오는데

천국이 나오는데

 

회개하지 않는다고 정죄하는 욥의 세 친구에게서는

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것이 나오지 않더라 말이죠

그저 의문의 반복인 회개를 지키기 하는 마일리지를 쌓아야 한다고 우길 뿐이다 말이죠

 

오히려 그것은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라 라는 것과 같다 말이죠

? 어차피 회개 눈물 금식 기도 4종 세트로

꺽으신 뼈를 살릴 길이 없거든요

 

그럼 이 꺽으신 뼈를 과연 기뻐할까요?

이 꺾으신 뼈라는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데

도리어 거리끼는 걸림돌로써 마귀는 속임수를 펼치는데 있어서

구원 얻은 우리에게는 이 꺽으신 뼈가 하나님의 영광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환상

계시록이라는 계시

묵시의 실상이다는 겁니다.

 

즉 상대적으로 한 세트가 되는 눈에 보이는 역사

우리가 믿고파 보고파 하는 역사는 허상으로 드러난다 말이죠

 

(2:28, 개역)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28, 새번역) "그런 다음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2:17, 개역)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2:17, 새번역)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들과 너희의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 2:28-32(칠십인역)

 

 

(2:26, 개역)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를 기이히 대접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2:27, 개역)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2:28, 개역)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29, 개역)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2:30, 개역)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2:31, 개역)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2:32, 개역)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2:17, 개역)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2:18, 개역)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2:19, 개역)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20, 개역)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21,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2:22, 개역)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2:23, 개역)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2:24, 개역)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25, 개역)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26, 개역)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2:27, 개역)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28, 개역)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2:29, 개역)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2:30, 개역)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2:31, 개역)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2:32, 개역)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2:33, 개역)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2:34, 개역)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2:35, 개역)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2:36, 개역)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2:37,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2:38,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2:39, 개역)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2:40, 개역)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2:41, 개역)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2:42, 개역)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마침 몇주 전에 형님네 가족이 와서 말씀을 나누다가

꿈 이야기가 나왔는데

제가 조카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2:17, 개역)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2:18, 개역)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자녀들은 예언하게 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남 종과 여 종은 예언하게 된다고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마지막 때에 곧 끝을 확 당겨버리면 이렇게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주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지는데

자녀가 예언한다는 것이 말이 안되는게

상대적인 역사에서는 부모가 예언해야 됩니다.

 

즉 부모가 자녀에게 어떤 길을 가야하는가를 보여주는 예언자이다 말이죠

길 안내자

그런데 거꾸로 그건 역사이고 묵시의 세계에서는 거꾸로 자녀가 부모에게 길 안내를 해요 글쎄

(아버지 아브라함이 제물이 되어 이삭을 살리는게 아니라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을 살리는 겁니다. 결국 이 요엘 2장의 의미는 행 2장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다 이루었다는 내용을 우리에게 부어주신다는 거죠

또 어른 사울왕이 이스라엘은 인도 하는 안내자가 아니라

어린이 다윗이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안내자로써 골리앗을 물리친다는 겁니다.역사를 의도적으로 깨뜨리는 성령의 세계 곧 다 이루었다는 묵시라는 종말을

끝을 확 끌어 당기는 것이다 말이죠)

 

또 역사에서는 젊은이가 꿈을 꾸고 생명이 활활활 타오르는 불타는 청춘은 말이죠

늙은이는 이제 곧 죽게 되니 환상 곧 역사의 끝을 바라보고 기대하는 것이 역사에서 벌어지는 상황인데

 

이것이 거꾸로 되어서 젊은이는 애늙은이처럼 자꾸 죽어나가는 환상이 덮쳐지고

반대로 늙은이는 불타는 청춘처럼 꿈으로써 활력이 넘치는 생명의 말씀을 외치게 되더라 라는 겁니다.

 

완전 역사와 반대되는 모습

곧 반대를 위한 반대이다는 겁니다.

 

그리고 남 종 여 종 에게 라고 했는데

종 이라는 소속 곧 주인의 소속으로 언급했는데

남자의 주인은 소위 군대처럼 국가가 주인 노릇한다 말이죠

곧 역사가 시공간이 주인 노릇하는 오이디푸스로써 말이죠

그런데 그 주인의 종으로써 작용하는 것이 역사인데

글쎄 성령이 임하면 국가라는 주인을

조직이라는 주인을

소속이 되어 있는 그 주인의 종으로써의 남자가

도리어 종이 주인의 막막한 미래의 길을 안내하는 자로써 예언하게 된다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요셉처럼 말이죠

때로는 다니엘처럼 죽을수도 있고요

안내 해 줘도 시기하는 자들로부터 죽임 당하는 상황이 벌어지죠

네 맞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처럼 이 다 이루었다는 또렷한

십자가의 사건이 미래에서 덮쳐져서 반복이 된다는 겁니다.

 

여 종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 아닙니까?

요즘은 여자가 남자의 머리이지만 ㅋㅋㅋ

그런데 며느리 다말이 글쎄 시아버지 유다 라는 주인을

도리어 인도하고 있고요

길을 열어주고 있어요

아니 왜?

시아버지 유다는 약속을 엉터리로 생각하고 있어서 죽어 있는 셈인데

그 죽은 시아버지 유다를 살리기 위해서 유다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순간 까지도

이 회개의 십자가의 자리에 시아버지를 놓고자

살리고자 대신 죽임을 당하는 이 모습이 바로

여 종에게 부어지는 성령이다는 겁니다.

역사는 이 모습들을 해석을 못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해요

 

역사의 반대로 펼쳐지는 성령의 일들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왜 일곱 대접을 퍼붓겠습니까?

 

종말 파티 곧 십자가의 다 이루었다를 확 끌어당기는 겁니다.

실상을 또렷히 밝히 보이는 다 이루었다는 끌어당기지 않으면

종말을 끝을 미래완료를 끌어당기지 않으면

 

상대적인

역사라는 허구

이 의문의 반복

이 울리는 꽹과리에 다 속아 넘어간다 말이죠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마귀는 속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를 못 보도록 속이는 것이

너 믿음 가짜로 밝혀졌어

예수님은 너를 사랑했는데

너는 그래 너 혼자 살자고 예수님을 버리니? 이런 나쁜놈아 라고

제대로 속임수를 펼칠때에

이 역사를 이 허구를 심을때에

 

마침 어머니께 월요일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머니! 베드로에게 너가 나 예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라고

누가 세 번 부인토록 만들었다??

 

우와 어머니께서 예수님 이라고 했다 말이죠

베드로도 아니요 마귀도 아닙니다.

예수님입니다.

그래놓고 이 상황에 반드시 누가 이 상황에 개입하도록 되어 있냐 하면

숨어있는 마귀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나타나요

여전히 숨어 있어요

속이는 자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속이는 자를 확 들추어내는 방식이

너는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럼 가룟유다는 가룟유다는 마귀가 가룟유다를 잡아 올 필요가 없어요

이미 밥인데, 이미 진노의 그릇인데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놓고서 마귀를 잡느냐 하는 문제이다는 겁니다.

베드로의 개인적인 믿음 곧 소유화 된 믿음이 거들났을때에

마귀가 베드로를 잡아 옴에 있어서

바로 이것 때문에 내가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었지 않았느냐 라고

마귀까지 보여줘야 비로소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다는 것이

보이는 겁니다.

 

자 그러니 주님의 믿음이 대단한 겁니다.

베드로의 뻔뻔한 믿음이 대단한게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

마귀에게 마귀 들으랍시고

나 베드로 너를 사랑해서 나 죽었잖나 ~~~ 자나 자나 잖아

너 이거 보이니? 밝히 보이니? 또렷히 보이니 라고 말이죠

 

주님이 뻔뻔한 겁니다.

 

마귀가 초정밀 조사해 와도 연연치 않고 한치도 흔들림 없이

광야에서 마귀의 세가지 유혹을 넉넉히 이기셨듯이

베드로 너 이 용서 이 일만달란트 탕감의 용서를 바라볼래

아니면 너의 그 되도 않는 믿음

너가 너 스스로 가리고자 했던 스스로 손할례로 가리고자 했던

그 울리는 꽹과리를 쳐다볼래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이 제대로 된 끝 종말 빨래 끝 다 이루었다는 쳐다볼래 라고

둘이 서로 싸인을 보내면서 마귀 보란 듯이 싸인을 주고 받는 겁니다.

 

마귀가 좋아하는 말

십의 일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토색하는 세리와 같이 않음을 감사하고

회개 눈물 기도 금식 4종 세트 드렸다는

그따위 울리는 꽹과리를 말할게 아니라

 

마귀가 듣기 싫어하는 말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예수님을 세 번 부인케 된 것은 제가 마귀에게 속아서 그런 겁니다 라고

도리어 마귀가 무고 죄로 잡히는 겁니다.

무고한 자를 잡아왔으니 잡혀야지요

 

때린 시어마이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고

법 해석해서 뒤짚어지는 판결이 나는 겁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욕 먹기는커녕 마귀 잡는 미끼 노릇을 했다고 칭찬 받고 말이죠

 

자 그래서 베드로는 이 또렷한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말하기 위해서

마귀에게 잡혀 오는 겁니다.

잡혀오도록 하기 위해셔

주님께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토록

죄인의 자리

회개의 자리에 놓은 겁니다.

 

?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기에

이 끝을 끌어 당기는 주님의 믿음에 의해서 말이죠

 

이것을 마귀는 모독하고 훼방하는 겁니다.

 

욥이 회개의 자리에 놓여진 것은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떳기에

여호와 곧 전쟁의 신이 떳기에 회개의 자리에 놓인 것을

 

울리는 꽹과리들은 그저 차라리 하나님 욕하다 죽어라

회개 안해서 저주 받았다

또 차라리 욜로 한번 뿐인 인생 오늘만 살다 죽자 라고

여기 저기서 주님의 일

주님의 거룩한 전쟁은 안 쳐다보고

 

이 다 이루심이라는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십자가를 안 쳐다볼려고

훼방하고자

속임수에 다 넘어가는

그래서 힘을 여전히 포기못하고 결집해서

회개치 않는 자들을 모으고

속아 넘어간 임금들을 모으는 이 아마겟돈이라는 장소에서

최후의 결전을 펼치고자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를 모으는 겁니다.

 

(11:39,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11:40,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11:41, 개역)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11:42, 개역)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11:43, 개역)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11:44, 개역)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11:45, 개역)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11:46, 개역)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11:47, 개역)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11:48, 개역)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11:49, 개역)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11:50, 개역)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11:51, 개역)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11:52, 개역)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11:53, 개역)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비로소 힘을 결집 합니다. 아마겟돈처럼 말이죠.

 

상대적으로 한 세트가 되는 자들은 이 일곱 대접을 통해서

회개의 자리에서 주님의 십자가가 다 이루었다를 쳐다보는

심판의 자리에서 주가 옳았다고 외치는

이 십자가가 나 보다 옳았다고

여종 며느리 다말이 나 보다 옳았다고

유다 지파의 찬양 곧 구체적 보편적 찬양으로써의 새찬양을 부르는 겁니다.

나는 전에는 이 십자가를 반대했던 자였는데

가만히 보니 이 십자가가 옳았고 나는 틀렸습니다 라고 외치는 것을

구체적 보편성이라고 한다 말이죠

가장 반대자였던 원수가

가장 사랑하는 다 이루심을 외치는 자로써 동원이 되는 것이

 

일곱 대접이 펼치는 사건

곧 다 이루었다는 사건

십자가의 사건을 무한반복으로 역사 끝 우주 끝까지 퍼 붓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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