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의 수, 사람의 수, 666 vs 총명 있는 자 (13;11-18)

계 37 666 vs 총명 있는 자 (계 13,11-18).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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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1, 개역)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13:12, 개역)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13:13, 개역)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13:14, 개역)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13:15, 개역)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13:16, 개역)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3:17, 개역)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13:18, 개역)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

 

 

(13:11, 새번역) 나는 또 땅에서 다른 짐승 하나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어린 양처럼 뿔이 둘 있고, 용처럼 말을 하였습니다.

(13:12, 새번역) 이 짐승은 첫째 짐승이 가진 모든 권세를 그 첫째 짐승을 대신하여 행사하였습니다. 이 짐승은, 땅과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치명상에서 나음을 받은 그 첫째 짐승에게 절하게 하였습니다. / , '죽음의 재앙'

(13:13, 새번역) 또 그 짐승은 큰 기적들을 행하였는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에서 불이 땅에 내려오게도 하였습니다.

(13:14, 새번역) 그리고 그 첫째 짐승을 대신해서 행하도록 허락받은 그 기적들을 미끼로 해서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미혹하였습니다. 땅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칼에 맞아서 상처를 입고서도 살아난 그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고 말하였습니다. / 또는 '칼의 재앙을 받았다가도'

(13:15, 새번역) 그리고 둘째 짐승이 능력을 받아서 첫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넣어 주고, 그 짐승의 우상으로 하여금 말을 하게도 하고, 또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죽임을 당하게도 하였습니다. / 또는 ''

(13:16, 새번역) 또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할 것 없이, 다 그들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였습니다.

(13:17, 새번역)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사람, 곧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을 나타내는 숫자로 표가 찍힌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팔거나 사거나 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13:18, 새번역) 여기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각이 있는 사람은 그 짐승을 상징하는 숫자를 세어 보십시오. 그 수는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데, 그 수는 육백육십육입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육백십육'

 

 

짐승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은 총명이 없다는 겁니다.

총명함 으로 만이 짐승에 대해서 다 안다는 거죠

 

단순히 지식 수준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의 지혜를 넘어서는 것이 총명함이다 말이죠

마치 모든 인간이 산당을 높은 산마다 신비롭게 함으로써 세우지만

절대산에 못 미치는 겁니다. 곧 시온산입니다.
이 시온에서 율법이 나오지 다른 산에서는 안 나온다 말이죠.

 

그러니 오히려 이 시온산을 말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미친 듯이 높은 산을 찾아서 산당 곧 종교를 세우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것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이죠

저마다 더 높게 더더더 높게 지음으로써 더더욱 거룩함을 높게 높게 하듯이 말이죠

 

그것이 다니엘서에 나오는 네 짐승이다 말이죠

이 우상에게 경배 안하면 불에 집어넣는 죽임을 펼치는 겁니다.

 

살인을 펼친다는 말은 결핍 상태인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 깨진 장독대를 채울수가 없다 말이죠.
가인의 제사가 그래서 승부를 의문의 번제와 제사로 거는데
늘 결핍 상태라 안색이 변하여 살인의지를 펼치게 되는 겁니다.
더더욱 정당하면 할수록 말이죠 더더욱 의롭게 제사 드리면 드릴수록 말이죠.

반대로 도리어 죽임을 당한다는 말은 충만하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겁니다.

 

그러니 억지로 살인을 한다고 해서 부족해서 죽이는 것이 아닌것이고

억지로 죽임을 당하는 순교를 당하고자 해도 충만해서 죽음을 당하는게 아니다는 거죠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기에

행함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행함이 아닌 믿음을 보여주기 위해

총명함이 없는 베드로에게 총명함을 집어넣기 위해

마귀에게 죽임을 당하는 위치에 놓이게 하는 겁니다.

 

죽임 당한 어린양의 자리인 광야 곧 죽은자의 자리

꼬끼오 세 번의 자리에 말이죠

그 삼일의 간극 속에서 예수님의 흔적을 보게 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니

마귀가 아무리 고소 고발 송사를 해도

먹혀들지 않는 겁니다.

베드로는 오히려 에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

십자가의 영이 덮쳐져서

총명함이 덮쳐져서

육의 소욕과 영의 소욕을 보게 되는 겁니다.

즉 육의 소욕인 짐승의 수를 보게 되더라 말이죠

 

자 그럼 예수님 세 번 부인 하지 않는다고 천국가냐 말이죠 그것처럼 의문의 반복이 또 어디있겠냐 말이죠

 

왜 똥물에 일곱 번 문둥병 걸린 몸을 담그라고 했냐 말이죠

똥물 보다 더 더러운 너의 죄악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다 용서하셨다는 피 용서를 보라는 겁니다.

 

진짜 심판주는 저분 예수님 뿐이다는 겁니다.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라는 저주에 달려죽는 분

 

그래서 3일이라는 죽음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누구의 죽음을 보라꼬?

 

남들이 보기에는 죽는 저주의 길이지만

어리석고 미련하지만

거리끼는 걸림돌이지만

구원을 얻은 성도에게는 이 지혜야 말로 총명함

곧 짐승의 정체를 밝히 보게 되는

그 속임수 꾀를 밝히 보여주는 십자가의 지혜이다는 겁니다.

 

이 총명함을 입은 자는

666과 한 세트를 이루는 상대적인 수인 144000이다 말이죠

12지파의 충만 충만 충만이다는 거죠

12 곱하기 12

 

기능의 의미이지 존재가 아닙니다.

얼마전에 만난 장로님의 부인 권사님께서

공장에서 일할때에 물었던 물음이 아직도 기억이 나네요

 

십사만사천이 너무 적다 라는 거죠

 

또 어떤 이단 종파? 여호와 증인인가?

개네들은 이 십사만사천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 전도를 한다 말이죠

 

아마 다단계판매가 뒤에 나온 것이 애네들 흉내낸 것 같던데

그들 교육책자에서는 카톨릭 교황의 조직도에서 따왔다고 하던데

 

아무튼 전도가 순교 선교가

다단계판매이지 매매 이지

전혀 총명함이라고는 죽어도 안 보이잖아요

멍청하더라 말이죠 종교 라는 마약 뽕 맞은것처럼 눈빛들이 다 풀렸어요

 

성화론자들이 눈이 풀렸고 아무튼 인간 목사의 말을 듣는 자들을 보면 다 그래요

종교이거든요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그 정도로 다 꾀어서 넘어갈 정도의 위력이 짐승에게 있다는 겁니다.

 

죽은자도 살리는 돈의 위력처럼 모든 종교가 부활을 펼치잖아요

그런 기적 보여주면 뿅 가요 다들

 

그런데 이렇게 다들 이 짐승의 꾀에

부족하고 함량미달인 666에 다 넘어가는데

 

총명함이라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미래완료가 덮쳐진 총명함이 임한자에게 만큼은

이 짐승의 꾀 속임수가 먹혀들지 않는 겁니다.

 

짐승이 가만히 둘까요?

 

오직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만이 소통 되는 세상에서

저 미련하고 어리석고 거리끼는 걸림돌인 십자가라는 요나의 표적을 증거하는

예수의 증거를 입혀짐 당한자를 과연 가만히 둘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참다 참다 못해 미끼를 확 물어버린 것이

마귀가 베드로를 물어버리는 바람에

자신의 정체 666이 드러나는 겁니다.

 

어라!

부족하네

참나!! 부족하면서 베드로를 고소하고 송사하고 고발 했었었었요????

 

정작 베드로 자신에게는 예수님의 피 용서라는 충만이 덮쳐지더라 말이죠

이 충만 때문에 저 부족한 함량미달의 짐승의 수 정체를 알게 되었더라 말이죠

 

일체 허물치 않겠다고 모든 허물을 다 덮어버린 그 십자가의 사랑에

뒤 늦게 뒷북치듯이 다 덮어버린 허물을 들추어 본다는 것이

베드로를 훼방하는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공로를 모독하는 근거가 됨으로써

짐승의 정체가 드러나는 겁니다.

 

꼴에 그것도 심판이냐 라고

진짜 심판주는 너가 아니라 주님이다고

심판자 행세 하지 말라꼬

 

겨우 죽일수 있는 것 육체 뿐인 주제에

나를 지옥도 못 보내는 것이

뭘 심판 하겠다고

 

진짜 나를 제대로 심판하실 분

나를 제대로 지옥 보내실 분은

내 죄 때문에 지옥에 갔다 오신 분

예수님 만이 제대로 된 심판 하실 분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곱 곧 똥물에 일곱 번 담군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예수님의 증거

곧 십자가라는 참 지혜만이 총명으로써

꾀 속임수 함량미달인 사람의 수 짐승의 수 666의 내막을 제대로 보게 된다 말이죠

 

예수님의 사랑이? 인애와 자비가 덮쳐진 자에게만이 말이죠

물론 마귀는 그 성도를 죽여버립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도리어 예수님과 같은 운명 속에 집어넣을 뿐이지

3일만에 다시 사는 십자가의 흔적만을

예수의 증거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자기 꾀 자신의 속임수를 알아보고 눈치 챈 자를 내버려 둘수가 없는 거죠

그 소식이 퍼져 버리면 안되니까 빨리 죽여 버리는 겁니다.

 

그런 힘을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겁먹게 만드는 거죠

 

그것 조차도 그 꾀!, 그 속임수가 들통나기 두려워서 그런겁니다.

얼마나 부족하고 결핍이고 함량 미달이였으면

그것을 감추고자 의문의 반복을 죽도록 하겠냐 말이죠

이것이 번제와 제사를 추구하는 우상숭배자들입니다.

 

바로 이런 종교와 국가라는 짐승에게로부터 자유케 된

포로되었다가 갇혔다가 억눌렸다가 자유케 된

희년 곧 기쁜소식인 복음이 덮쳐진 자에게는

 

너무 너무 충만해서 부족한게 없어서

결핍이 없어서

죽어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충만해서

스데반이 죽을때에 천사의 모습과 같을 정도로

하늘의 천군 천사들의 찬양과 함께

 

저들의 죄악을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얼마나 충만 하냐 말이죠

 

(7:49,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7:50, 개역)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7:51, 개역)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7:52, 개역)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7:53, 개역)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7:54,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7:55, 개역)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7:56, 개역)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7:57, 개역)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7:58, 개역)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7:59, 개역)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7:60, 개역)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충만하니까 부족함이 없으니까 그런 찬양을 곧 주의 인애와 자비를 찬양하는

예수의 증거를 몸에 담고서 끝까지 찬양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는 오히려 불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운명입니다.

저들은 속고 있어요 불 속에서는 죽음 속에서는 예수님도 없고

춤출수도 없고 노래도 못하는 불이 입술을 다 구워버려서 오징어 구울 때 말리듯이

혀를 놀릴수도 없고 소리 자체도 안나오도록 목도 다 태어버린다는 것을

 

너무 너무 저들은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 앎이 선악이지, 법이지, 우상이지, 허구이지!!!

 

은혜는 아니잖아요 십자가의 지혜는 아니다 말이죠 총명함 곧 성령의 생각은 아니다 말이죠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불 속에라야 진짜 찬양과 춤이 나온다 말이죠

 

? 불이 중요한게 아니라 예수님도 그 속에 들어와 계셨다 말이죠

 

베드로는 예수님이 친히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내어준 죄 값을 치르신 피 옷을 입혀주시고자

마귀에게 잡혀 오라고 하셨다 말이죠

그 마귀의 속임수의 내막을 보여주시면서 말이죠

 

이 십자가의 지혜라는 총명함과 짐승의 수 666이라는 함량미달의 가짜 심판과 한 세트를 구성해서

제대로 심판주가 누구인가를 보라는 겁니다.

 

주님은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고(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

곧 시공간의 역사를 묻거나 따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인애와 자비를 원하는

곧 요나의 표적으로써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 덮쳐져서

상한심령이 되는 것을 원하시더라 라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보라꼬

이 똥물 일곱 번 담구라고

너의 똥물 보다 더 더러운 죄악을 나 예수가 감당했다는

예수님이라는 상한심령

정직한 영이 없는 나에게 정직한 영을 주시겠다고

내가 뭐라꼬 정직한 영을 주시겠다고

십자가에 대신 저주 받으셨냐 말이죠

이 인애와 자비를 쳐다보라꼬

지옥 불 속에서 타고 있는 나를 건지고자 불속에 뛰어드신

그 주님을

집주인을 결박하고 새간을 빼앗는 도둑같은 사랑님을

나 노래하리라

그의 인애하심과 자비하심을 영원토록 찬송하리로다 라고

 

너무 너무 충만해서 저절로 찬양이 나오는 겁니다.

불 속에서도

죽음 속에서라도

병듬 속에서라도

눈 멈 속에서라도

 

넘쳐나는 찬양을 막을수가 없어요

?

자아도취가 아니라

도파민이 넘쳐서가 아니라

 

동행하시러 세상에나 이 불 속에까정

이 죽음 속에까정

이 광야라는 죽음의 자리에까정

함께 해주시고

함께 먹고 마시고 씹고 뜯고 마시는

이 낮아지심 이 섬기심

이 십자가의 지혜가 옳았다고 아니외치고는 못 배기는

 

3일이라는 간극

삼년반이라는 한 때 두때 반때 라는 고난의 자리가

구체적 보편적 진리를 외치는 자리

죄인으로써 환자로써 의사를 외치는 자리였다는 겁니다.

 

저 보세요 스데반 집사를 죽인 사도바울도

총명함이 없이 어두운 눈으로 스데반 집사를 죽였지만

그랬던 반대자가 도리어 성령을 받아버리는 바람에

스데반의 바톤을 이어받아서

예수의 증인으로써

! 짐승의 꾀를 도리어 들통내는

본인이 그 짐승의 속임수에 놀아나 봤기에

더더욱 악마의 비밀을 들통냄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의 깊이 높이 넓이 길이를 증거하는데 있어서

 

마귀는 겨우 사단의 가시만 박을줄 알았지

그것도 방해라꼬 겨우 몸 병들게 할 뿐이지

 

그의 십자가의 사랑을 외치는 것을 막을 길이 없더라 말이죠

 

기껏 함량미달의 부족한 결핍이 죽이겠다는 허풍 뿐이지

짐승은 우상숭배자들처럼 질질 짜더라 말이죠 울 뿐이다 말이죠

모압처럼 말이죠

 

오히려 막으면 막을수록 방해하면 방해할수록

더더욱 충만한 십자가의 피 용서의 증거를

그 증인들

그 허다한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을 막을 길이 없어 막 쏟아지는 충만 충만 충만

흘러 흘러 넘치더라는 겁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자 있겠냐 말이죠

 

아니 나의 죄악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렸는데

이것 보다 더 또렷한 것 있으면 나와보라 말이죠

흐릿하고 의문의 것들과 이 총명한 것과

비교 되기나 하냐 말이죠

 

어딜 그런 의문의 것

함량미달의 것으로 꾀냐 말이죠

 

얼마나 충만하면 1212

그렇다고 딱 십사만 사천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손가락 세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일만달란트나

770이나

이것은 상대적인 수를 들고오는 사람의 수와 비교가 안된다는 의미로써

부정의 부정

인간의 부정함인 곧 함량미달인 7번 남용서에

그것도 용서냐 라고 770번 우리 동네에서는 7번은 숫자 축에서 안 쳐준다고

연변총각의 개콘 코너처럼 그것도 숫자냐

숫자 같은 숫자를 들고오라는 겁니다.

천 삼백년 묵은 그런 숫자

상대적인 의미로써의 기능 곧 부정의 부정으로써

144000을 언급하시는 겁니다.

 

즉 그 김권사님 말 마따나 너무 적은 숫자로 밖에 안보이는 이유는

이 짐승의 수를 파악 못해서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짐승에게 속아서 그 꾀임 속에 놓여지니

짐승의 수는 모른채 144000을 보니까 현대의 기준에서는 더더욱 작은 숫자죠

사실 이런 수는 없는 숫자입니다.

광야도 없듯이 독수리 날개가 뜨지 않는 이상 광야도 없죠

이 독수리 날개가 바로 출 19장의 여호와 아닙니까

예수님 아닙니까

 

(19:4, 개역)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19:4, 새번역) '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

(19:4, 쉬운) 너희 모두는 내가 이집트 백성에게 한 일을 다 보았다. 그리고 독수리가 날개로 새끼들을 실어 나르듯 내가 너희를 어떻게 나에게 데리고 왔는가도 보았다.

(19:4, 현대어) `내가 애굽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또 내가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어떻게 내게로 데리고 왔는지 너희는 다 보았다.

 

예수님께서 지옥에서 불 타고 있는 우리를 위하여 이 죽음 속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144000이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는 겁니다.

당연히 짐승의 수 사람의 수도 뭔지 모르고요

 

아니 지옥에서 소돔과 고모라 속에서 빼내시고자

남겨둔 씨가 아니였다면 우리는 벌써 소돔과 같았다 말이죠

의인 50명 의인 10명 다섯 5, 2, 하나 1 도 없었는데 말이죠

 

그런 판국에 144000이라면 12지파

곧 동서남북 333 333 333 333 양사방으로 찬양대 곧 다윗의 찬양대가

우주 끝까지 주를 찬양하는 찬양이 온 우주를 덮고도 남을 정도로

충만 충만 충만 하다는 겁니다.

우주찬양대 이니 얼마나 많겠냐 말이죠

 

까까득 해요

너무 너무 충만해서

끝이 안 보여요 끝이

 

이 남겨진 한 씨 곧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 때문에

남은자가 세상에나 다 죽은 나무 그루터기에서 나는 겁니다.

 

반면에 짐승은 무슨 놈의 조건이 그리 많고

그렇게 그 조건을 갖추고자 온갖 것 다 갖추고

힘과 권력을 다 가져도

소용이 없어요

모압처럼 소용이 없더라 말이죠

 

(16:14, 개역)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가라사대 품군의 정한 해와 같이 삼 년내에 모압의 영화와 그 큰 무리가 능욕을 당할지라 그 남은 수가 심히 적어 소용이 없이 되리라 하시도다

(16:14, 새번역)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삼 년 기한으로 머슴살이를 하게 된 머슴이 그 햇수를 세듯이, 이제 내가 삼 년을 센다. 삼 년 안에 모압의 영화가 그 큰 무리와 함께 모두 능욕을 당할 것이며, 남은 사람이라야 얼마 되지 않아, 보잘 것이 없을 것이다."

(16:14, 쉬운) 이제 여호와께서 다시 말씀하신다. “삼 년이 못 되어 모압이 자랑하던 것들과 그 모든 백성의 무리가 다 모욕을 당할 것이다. 이 삼 년은 품꾼이 정해 놓고 일하는 햇수와도 같다. 살아 남는 자가 별로 없을 것이며, 그들조차도 쇠약해질 것이다.”

(16:14, 현대어) 그런데 주께서는 이제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앞으로 꼭 3년만 있으면 모든 사람들이 모압의 영화를 비웃게 될 것이다. 지금 그 나라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살아도 그때까지 살아 남는 사람은 지극히 적을 것이고 그들은 살아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 미래완료인 십자가의 다 이루심에서 땡겨주지 않기 때문에

주의 인애와 자비가, 십자가의 피 용서가

무조건 용서하시는 770번의 용서가 덮쳐지지 않기에

 

백날 해도 함량미달이더라 말이죠 의문의 반복입니다.

 

충만하질 못하고 늘 결핍이다 말이죠

그래서 불안해서 살인을 펼치는데 더더욱 꼬이는 겁니다.

오히려 죽어주면 되요 왜? 너무 너무 충만하니까 말이죠

 

짐승 마귀가 성도를 미워하는 것은 자꾸 자기 사랑하는 식량을 예수님에게 빼앗기니까

자기 세간을 도둑에게 빼앗기니까

이 예수님과 한 패 한 운명 이 된 동행하는 자는 다 미워하는 겁니다.

그 정도로 불안하고

자신의 속임수가 들통나니까 말이죠

 

그러나 그 죽음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8:1, 개역)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2, 개역)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8:30, 개역)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8:31, 개역)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8:33, 개역)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8:34, 개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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