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메섹 멸망과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사 17: 1-14)


 

(17:1, 개역) 다메섹에 관한 경고라 보라 다메섹이 장차 성읍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진 무더기가 될 것이라

(17:2, 개역) 아로엘의 성읍들이 버림을 당하리니 양 무리를 치는 곳이 되어 양이 눕되 놀라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17:3, 개역) 에브라임의 요새와 다메섹 나라와 아람의 남은 백성이 멸절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영광 같이 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4, 개역) 그 날에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그 살찐 몸이 파리하리니

(17:5, 개역) 마치 추수하는 자가 곡식을 거두어 가지고 그 손으로 이삭을 벤 것 같고 르바임 골짜기에서 이삭을 주운 것 같으리라

(17:6, 개역) 그러나 오히려 주울 것이 남으리니 감람나무를 흔들 때에 가장 높은 가지 꼭대기에 실과 이 삼 개가 남음 같겠고 무성한 나무의 가장 먼 가지에 사 오 개가 남음 같으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7, 개역)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자를 쳐다보겠으며 그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바라보겠고

(17:8, 개역) 자기 손으로 만든 단을 쳐다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바라보지 아니할 것이며

(17:9, 개역) 그 날에 그 견고한 성읍들이 옛적에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버린바 된 수풀 속의 처소와 작은 산꼭대기의 처소 같아서 황폐하리니

(17:10, 개역) 이는 네가 자기의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자기의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않은 까닭이라 그러므로 네가 기뻐하는 식물을 심으며 이방의 가지도 이종하고

(17:11, 개역) 네가 심는 날에 울타리로 두르고 아침에 너의 씨로 잘 발육하도록 하였으나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 농작물이 없어지리라

(17:12, 개역) 슬프다 많은 민족이 소동하였으되 바다 파도의 뛰노는 소리 같이 그들이 소동하였고 열방이 충돌하였으되 큰 물의 몰려옴 같이 그들도 충돌하였도다

(17:13, 개역) 열방이 충돌하기를 많은 물의 몰려옴과 같이 하나 주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리니 그들이 멀리 도망함이 산에 겨가 바람 앞에 흩어짐 같겠고 폭풍 앞에 떠도는 티끌 같을 것이라

(17:14, 개역) 보라 저녁에 두려움을 당하고 아침 전에 그들이 없어졌나니 이는 우리를 노략한 자의 분깃이요 우리를 강탈한 자의 보응이니라

 

(17:1, 새번역) 이것은 다마스쿠스를 두고 하신 엄한 경고의 말씀이다. "다마스쿠스는 성읍 축에도 들지 못하고, 허물어진 무더기가 될 것이다.

(17:2, 새번역) 또한 아로엘의 성읍들이 황무지가 될 것이다." 그 성읍들은 양 떼의 차지가 되며, 양 떼가 누워도 그들을 놀라게 할 자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17:3, 새번역) "에브라임은 무방비 상태가 되고, 다마스쿠스는 주권을 잃을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영광이 사라지듯이, 시리아의 남은 백성도 수치를 당할 것이다." 만군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17:4, 새번역) "그 날이 오면, 야곱의 영화가 시들고, 건강하던 몸이 야윌 것이다.

(17:5, 새번역) 그들은 곡식을 거두고 난 텅 빈 들처럼 될 것이다. 곡식을 거두는 자가 곡식을 다 거두어 버린 그 들판, 사람들이 이삭마저 다 줍고 내버린 그 들판, 이삭을 다 줍고 난 르바임 들판처럼 될 것이다.

(17:6, 새번역) 그들은 열매를 따고 난 올리브 나무처럼 될 것이다. 마치 올리브 나무를 흔들 때에, 가장 높은 가지에 있는 두세 개의 열매나, 무성한 나무의 가장 먼 가지에 남은 네다섯 개의 열매와 같이 될 것이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17:7, 새번역) "그 날이 오면, 사람들은 자기들을 지으신 분에게 눈길을 돌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바라볼 것이다.

(17:8, 새번역)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제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들의 손가락으로 만든 아세라 상들과 태양 신상은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17:9, 새번역) 그 날이 오면, 그 견고한 성읍들이 폐허가 될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도망 친 히위 족과 아모리 족의 성읍들처럼, 황폐하게 될 것이다.

(17:10, 새번역) 이스라엘아, 네가 하나님 너의 구원자를 잊어버리고, 네가 피할 견고한 반석을 기억하지 않고, 이방 신을 섬기려고 이방의 묘목으로 '신성한 동산'을 만들었구나.

(17:11, 새번역) 나무를 심는 그 날로 네가 울타리를 두르고, 그 다음날 아침에 네가 심은 씨에서 싹이 났다 하여도, 네가 그것을 거두어들일 무렵에는 흉작이 되어, 너의 슬픔이 클 것이다.

(17:12, 새번역) 가련하다! 저 많은 민족의 요란한 소리가 마치 바다에 파도 치는 소리처럼 요란하고, 많은 백성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마치 거대한 물결이 밀려오는 소리 같구나.

(17:13, 새번역) 비록 많은 백성이, 거대한 물결이 밀려오는 것 같이 소리를 내어도, 주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리니, 그들이 멀리 도망 칠 것이다. 그들은 산에서 바람에 흩어지는 겨와 같고, 폭풍 앞에 흩날리는 티끌과 같을 것이다.

(17:14, 새번역) 그들이 저녁때에 두려운 일을 당하고, 아침이 오기 전에 사라질 것이니, 이것이 바로 우리를 노략한 자가 받을 몫이고, 우리를 약탈한 자가 받을 마땅한 값이다.

 

(17:1, 쉬운) <아람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 이것은 다마스커스에 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보아라, 다마스커스는 망하여 황폐해질 것이다.

 

 

오래전의 도올의 강의에서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한국사람 곧 한민족이 왜 믿냐

한민족은 자기 조상인 단군의 자손이기에

조상을 믿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 한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랬다가 다시 말을 바꾸어서 또 요즘엔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한다는 투로

최근의 강의들은 말을 바꾸었지만

원래 이들 철학자들의 특징이기도 하지요

거짓선지자들이니까 자기도 왜 그런지 몰라

그 역할 기능을 담당해야 하니 말이 수시로 바뀌도록 되어 있습니다

 

제가 왜 초반부터 도올이야기를 하냐 하면

 

이들 말 마따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으로 그치면 딱 좋은데

그러면 말이 돼요

그리고 종교가 돼요

종교는 각 민족의 각기의 신앙대로 하면 되지

남의 나라에 이민을 가면 또 몰라

그렇지 않은 이상은 각 나라의 각 민족의 각기 각 종교대로 하면 참 좋은데

 

문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런 인간들의 수준의 종교성에 머물지 않고

반드시 전세계의 하나님

우주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데 있어서

이 이스라엘과 모든 민족은 충돌 속에 놓여지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당연히 충돌 속에 이미 놓여졌구요

 

 

그러니 도올 말 마따나

이스라엘을 제외한 다른 모든 민족은 우상을 믿어야만 합니다.

 

우상을 믿어야

이 이스라엘과의 차이성으로써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누꼬 라는

내 누군지 모르니 그래 알려줄게 라고

드디어 우상과의 차이로써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활동상을 보게 된다 말이죠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활동 상이 아니라

오늘날로 치면 교회의 활동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자기 신부로 삼은 신랑이신 예수님의 활동상을 친히 보여주시겠다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그것이 전쟁 그냥 전쟁이 아닌 여호와의 이름 전쟁으로 표출되었습니다.

 

과거 고대의 전쟁은 모조리 신들의 전쟁이고

인간은 하나의 장기알 바둑알처럼 배치되는 신들의 전쟁이었다 말이죠

우상의 전쟁 곧 힘의 전쟁이다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전쟁은 그런 힘의 전쟁 우상의 전쟁에서

졸지에 아무것도 아닌

이름 전쟁을 펼치시는 겁니다.

 

이름

 

이름 이게 뭐냐 말이죠
그저 기호 문자일 뿐이다 말이죠
누가 전쟁을 하는데 기호를 들고 하는자가 어디있습니까?

 

전쟁을 할려면 칼과 방패 병거로 싸워야 하고

오늘날로치면 미사일 총 탱크 항공모함 전투기로 싸워야 한다 말이죠

 

그런데 지금까지도 이름 전쟁이래요 글쎄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말이죠

 

이름 전쟁 말이라도 들어봤냐 말이죠

 

더 웃끼는 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 이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면

이스라엘 백성 조차도 뭔소리인지 모르는 이 이름전쟁을

무슨 수로 이방인들이 알겠냐 말이죠

 

더 큰 문제는 이스라엘도 모르고

오늘날로 치면 교회사람들도 모르는 전쟁이고

설사 눈 씻고 봐도 뭔지 모르고

 

그런데 이스라엘도 아닌 개같은 이방인이 이 전쟁을 알아보고

자기 나라 국가 전토지를 팔아 넘겨버리는 기생라합과 같은

행함이 있는 믿음을 펼쳐 버렸다면

졸지에 반박하던 자들이 반발을 못해버린다 말이죠

 

그러니 구체적 보편적인 진리로써의 전쟁이 되고

이름 전쟁이 맞다 옳도다 가 되더라 말이죠

 

 

초반부터 너무 장황스럽게 이야기 했는데

쉽게 말하자면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

 

이 한 씨가, 한 씨앗이 떳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만 국한 된게 아니라

전 세계 전 우주에게 까지 연관성을 끼치는 분이다는 점에서

 

이스라엘도 이 한 씨앗 때문에 바벨론 포로 당해야 하고

반대로 주변 이방나라는 이 한 씨앗 때문에 망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원인 없는 결과이다 말이죠

 

그럼 지난주 모압멸망처럼 경제가 다 날라가 쫄딱 망했다고 울고불고 할게 아니라

오히려 다윗의 가문에 오시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이 한 씨앗을 만났다면

오히려 쫄딱 나라 망해서 이민오고 포로되어 종살이 한다는 자체가

오히려 족히 비교도 안되는

저 풍성했던 포도원 보다 더 충만한 십자가의 피 용서임을

곧 이름이 바로 피용서의 사랑 곧 모든 허물을 다 덮는 사랑을 만났다는 데 있어서

오히려 더 기뻐해야 하는데

십마의 포도나무 가 황폐하게 되니까

저들 모압의 기쁨의 근원지가 다 날라가버리니까

그들의 허풍도 허세도

아무 쓰잘데 없이 다 드러나는 겁니다.

 

(16:6, 개역)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의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 과장이 헛되도다

(16:7, 개역) 그러므로 모압이 모압을 위하여 통곡하되 다 통곡하며 길하레셋 건포도 떡을 위하여 그들이 슬퍼하며 심히 근심하리니

(16:8, 개역) 이는 헤스본의 밭과 십마의 포도나무가 말랐음이라 전에는 그 가지가 야셀에 미쳐 광야에 이르고 그 싹이 자라서 바다를 건넜더니 이제 열국 주권자들이 그 좋은 가지를 꺾었도다

(16:9, 개역) 그러므로 내가 야셀의 울음처럼 십마의 포도나무를 위하여 울리라 헤스본이여 엘르알레여 나의 눈물로 너를 적시리니 너의 여름 실과, 너의 농작물에 떠드는 소리가 일어남이니라

(16:10, 개역) 즐거움과 기쁨이 기름진 밭에서 떠났고 포도원에는 노래와 즐거운 소리가 없어지겠고 틀에는 포도를 밟을 사람이 없으리니 이는 내가 그 소리를 그치게 하였음이라

 

아무리 힘들고 고된 삶이어도

이 포도농사로 돈도 벌고 술도 먹고 모든 기쁨의 원천이었다 말이죠

앞으로 포도농사 잘 되게 해달라고 우상에게 빌고 말이죠

 

그들의 기쁨의 원천을 없애버리니까 울어버리는 겁니다.

 

누가 없애버립니까? 다윗의 자손이 말이죠

그러니 오히려 더 기뻐해야지요

저 의문의 반복인

번제와 제사 
그 허구를 없애 주니까 말이죠

번제와 제사 보다

더 나은 제사인

인애와 자비에 오히려 더 가차이 가까이 오게 되었는데

듣기는 들어도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겁니다.

 

모압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스라엘은 어떨까요

모압 보다 더 심해요 글쎄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더했으면 더 했다 말이죠

 

그러니 주변 이방나라 모압

그리고 오늘 나오는 다메섹(아람)까지 치셨다면

 

이스라엘은 깨달아야 할 것 아니냐 말이죠

오늘날 교회들은 깨달아야 할 것 아니냐 말이죠

 

못 깨닫습니다.

맞아요 못 깨달아야 합니다.

기여이 예수님의 죽음까지 가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왜? 중간에 깨달으면 그것 조차도 원인으로 삼아버리니까
또 의문의 반복인 회개 지키기가 될테니 말이죠

아예 다 단절 시켜버립니다. 인간 쪽에서 나올수 있는것 다 바닥을 치도록 말이죠
그래야 오로지 예수님의 죽음으로 부터 오는 구체적 보편적 진리로써의 피 용서만이 크게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 모압의 멸망도 다메섹의 멸망도 결국 곧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저렇게 멸망을 퍼붓는 주님을 두려워 하라 라는 겁니다.

안 두려워 합니다.

그래서 기여이 멸망 속에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 멸망 속에서

이스라엘은 기여이 주님을 찬양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시겠다는 거죠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 백날 구해보라 말이죠
기여이 주님은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저런 허구들 다 거쳐서 왜 허구이고
왜 제일 마지막 종착역에 요나의 표적이 있는지
구체적 보편적 진리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즉 중간에 깨달아 돌아오는 의인이 아니라
끝까지 죄인으로써 의사를 만나는
환자로써 구원자를 만나는
그래야 자기 쪽에서는 없습니다 라고
원인 없는 결과만을 쳐다볼거다 말이죠

찢으셨으나 낫게 하실것이요
주신이도 여호와요 취할이도 여호와임을
이 간극만이 저들 우상숭배자와의 차이로써 구별시키는 겁니다.
이 간극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3 이라는 간극인 예수의 흔적
십자가의 흔적 말이죠
저들 지옥사람과의 차이로 말입니다.

 

멸망 속에 안 들어가면 또 예수님을 우상화 해서

또 자기 배를 위하여 임금 삼고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이나 바라고

또 주님이 싫타고 그렇게 외치는

번제와 제사

무수한 제물들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시 51:16, 개역)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사 1:11, 개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사 1:12, 개역)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 1:13, 개역)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사 1:14, 개역)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사 1:15, 개역)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호 6:6, 개역)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히 10:8, 개역)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행 17:24, 개역)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25, 개역)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거짓목사들에게 속아서 기여이 가져와서

내 마당만 밟는다고 그렇게 싫어한다고 해도

기여이 바치겠다고

바치겠다고

그런 종교화 시키고자 하는 것에

 

주님이 저들의 임금이 되기 싫다고 도망치는

교회에서 도망치는 예수님으로

 

이것이 이름전쟁입니다.

도망치는 예수님

 

교회로부터 도망치시는 예수님

 

오늘 제목으로 해야겠네요

 

자 그럼 당연히 오늘 나오는 다마스커스(다메섹)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어떤 이미지를 남겼는고 하니

 

(왕하 16:10, 개역) 아하스 왕이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단을 보고 드디어 그 구조와 제도의 식양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었더니

(왕하 16:11, 개역)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모든 것대로 단을 만든지라

(왕하 16:12, 개역)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와서 단을 보고 단 앞에 나아가 그 위에 제사를 드리되

 

유다왕 아하스가 앗수르 왕에게 왔다갔다 하다가

그 중간 경로인 다메섹에서 그만

어마 어마한 신전

그 풍기는 이미지에 그만 뿅 가버립니다.

 

이거 단순히 아하스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임금인 왕, 곧 대표성으로서의 왕이다 말이죠

그 왕이, 그 남유다 왕이 뿅 갈 정도면

백성은 우찌 되겠습니까?

그러니 부러워 죽죠

 

자 이 모습을 보고 있는 여호와

여러분이 만약 그 여호와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사랑은 시기입니다.

질투이다 말이죠

불처럼 강렬합니다.

(아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아 8:7, 개역)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왜 예수님이 미리 그것도 미리 알고

임금 삼을줄 알고 도망치실까요

 

임금 삼아 드릴께요 라고 다가오는 것 받아주는게 사랑일까요

냉혹하게 쳐 버리는 그래서 아예 도망치는

때려죽어도 나는 너의 하나님이 안 될 거야

너의 임금이 안 될 거야 라고

내 마당만 밟는다고

고개를 돌리고

기도해도 안들을 거야 라고 귀를 막고

눈을 막고

 

뭐 하나님이 인간처럼 삐지기나 하고

지지배처럼 왜 이런 모습을 보이는가?

 

사실은 우리 속에 있는 우상을 겨냥한 것이다 말이죠

 

절대로 안 속겠다는 겁니다.

인간의 꾀에 말이죠

 

바리새인이 저 마다 거룩하다는 것 잔뜩 가지고 올 때 마다

주님은 절대로 안 속겠다고

그 속임수를 들추어내시듯이

 

철저하게 그 속임수의 내막을 다 드러내는 겁니다.

 

자 그러니 666 이라는 짐승의 수, 사람의 수를 모른다면

144,000이라는 찬양의 수도 너무 적다고 걱정이 되어 잠도 못 잘정도가 된다 말이죠

상대적인 한 세트로써 알아야 되는데 모르니까 속임수에 다 넘어가는 겁니다.

찬양이 뭔지, 안식일의 주인이 뭔지 모르는 것이 된다 말이죠

 

속임수를 모르는데 어떻게 진짜를 알겠습니까?

물에 물 탄 듯 그게 그거로만 보일께 아니겠냐 말이죠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이나

요나의 표적이나 그게 그거라고 볼 꺼다 말이죠

 

그럼 진짜 거룩은 이 두 표적, 두 언약을 또렷하게 차이나게 단절 구별 시킬 것이다 말이죠

 

자 그러니 번제와 제사 냐 VS 인애와 자비냐

이 둘의 차이를 모르면 물에 물 탄 듯 그게 그거다 라고 볼 것이고 본대로 썩어버릴테니 구분이 안간다 말이죠.

 

이것이 또렷하게 구분 구별이 되는 그 차이성이 복음이 하는 일이다 말이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깨는 겁니다.

율법을 예수님이 도말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안식일 지키는 자들에게 가서 안식일의 주인으로써

안식일 지키기를 깨뜨리는 겁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다 말이죠

 

안식일 지키는 자들에게서는 때려죽어도 안 나오는 것이 사랑이다 말이죠 곧 안식의 주인이 안나와요
안식이 없어요 안식이 뭡니까 평안 아닙니까 그런데 안식일을 지켜야 하니까 못 쉬죠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게서 안 나오는 것이 사랑이다 말이죠 곧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게서 안 나오는 것이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하늘의 자유하는 예루살렘에서 나옵니다.
그러니 땅의 예루살렘은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곳이어야 하죠
하갈처럼 계집종이 그 땅에 산다고 그 땅에 사는 것 자체가 구원인줄 알듯이
오히려 예루살렘에서 죽는 자가 진짜 산 자이신 천만인의 어미이다 말이죠

 

이것이 역설적이게도

말씀을 지키는 자들의 입술에서 안 나와요

나는 사랑이 아닙니다 라는 말을 못해요

못하니까

의사가 필요가 없지요

정작 말씀을 지키면 지킬수록 우와 나는 순 엉터리일 뿐이구나
이 말씀은 오직 예수님만이 지킬수 있도록 되어 있구나
졸지에 지키면 졸지에 예수님과 경쟁이 되도록 되어 있구나 라는 것을

저 말씀을 지키는 저 바리새인을 보여주심으로써 알게 된다 말이죠

회개란 시간의 순서의 인식에서 오는게 아니라
정반대로 미래완료에서 옵니다.
남겨진 씨에서 온다 말이죠
그러니 자기 반성, 과거 반성과 정반대 입니다.
미래에서 덮쳐지는데 어떻게 반성이라는 의미를 붙일수 있겠습니까?
반성과 전혀 차원이 달라요
미래완료를 못 쳐다보는 것을 회개 하는 것이 회개다 말이죠

 

오늘날 목사들이 나는 목사 아닙니다 저 분이 목사입니다 라는 말을 못해요

 

? 나는 살아 있고 저 분은 이미 죽었거든요

그러니 걸림돌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나는 내가 봐도 보이고 남들이 봐도 보이는데
저분은 내가 봐도 안보이고 남들이 봐도 안 보여요

그럼 보이는 나를 내가 봐도 삭제되었구나로 인식이 되어야 하고 남들이 봐도 어 저 사람 저 목사 삭제당했네 누가 삭제 시켰지 라고 인식케 만들려며는

반드시 보이지 않는 분을 나에게 보이도록 증거해야 하고
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분을 보이도록 증거해야 합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이 기능을 맡았던 자들이 이스라엘이였거든요

 

탁 걸렸어요 목에 탁


다들 보이는 것에 다 넘어가 버렸어요 다 속임수에 넘어가요

십자가는 전혀 밝히 안보이는 겁니다.

십자가를 밝히 보여야 하고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 죽는 저 것은 안개로 만들어야 하니
이 성령의 일을! 무슨 수로! 누구에게 나타났겠는가 말이죠 불가능 밖에 없어요
성경은 가능한게 단 하나도 없어요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때려죽어도 나는 목산데 목사인데 왜 나를 목사로 안 알아주냐 라는

푸념만 늘어놓는 것이 목사다 말이죠
가능한 것만 외쳐요

단절을 못 외치고, 개방을 외쳐요 글쎄

그래야 눈에 보이는 교회가 돌아간다는 겁니다.
유지 될수가 있다는 겁니다.
가장 믿음 없는 자가 목사를 해요 글쎄

대접해 달라는 거죠

미움 받을 생각을 안해요

오히려 미워하는 놈에게 3대도 모잘라서 7대가 망한다고

한국교회가 얼마나 미신이냐 하면 없는 속담까정 만들어가면서 ㅋㅋㅋ

그 정도로 덤비는 사람들이 많다 그 속임수를 눈치 챈자들이 많다 라는 거죠
그러면 또 다른 속임수를 준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저 교회질서 무너질까봐 말이죠

오히려 교회질서를 무너뜨리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 말이죠

안식일 지키기를 글쎄 예수님 본인이

안식일 주인으로써 깨뜨리는 겁니다.

 

예수님만 나타나면 그 착하디 착한 자들이

예배당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죽일꼬

낭떠러지에 떠밀어 죽이고자 하는 양의 탈을 쓴 늑대로 돌변해요

원인 없는 결과로써

자기도 몰라! 왜 그러는지!

갑자기 돌변해요

 

자 이사야의 심정이 바로 그겁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앗 때문에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날려버려요

그럼 이스라엘만 그런가 주변의 국가들 조차도

이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 때문에

졸지에 다 날라가는 멸망 당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기뻐하는 자가 과연 누가 있겠냐 말이죠

한 씨 가 떳다는

원인 없는 결과

곧 미래에서 완료된 그 십자가라는 요나의 표적 때문에

임마누엘이 떳다는 이유로 말이죠

 

이스라엘만 휘말리는게 아니라

주변 나라 다 휘말리는 겁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아 보라는 겁니다.

실상을 보라는 겁니다. 허구는 무너지고 실상만이 또렷함을 
약속만이 또렷함을 말이죠.

 

약속이 얼마나 두려운가를!!

 

주변 국가에게 몽둥이를 쥐어주는 것이 저들이 쥐고 싶어서 쥐는게 아니라

주님이 쥐어준거다 말이죠

왜 그것이 그들에게 약이 아니라 독이 되니까 말이죠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쥐어주더라 말이죠

? 이스라엘아 그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이 바로 독이다 라고

왜 독을 부러워 하느냐 라고 말이죠

이레에 두 번 금식 십일조 하는거 그거 다 독이라고

 

그럼 이스라엘은 바로 이 요나의 표적

주의 인애와 자비를 보라고

인애와 자비가 뭐냐

바로 주변의 나라까지

멀쩡하던 자들이 갑자기 하루 아침에 멸망하는 것까지 보여주시면서 까지

너 이스라엘을 돌이키시겠다는 이 징계

이 고난

이 십자가의 삼일의 간극 자체가

 

주님의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를 광야로 몰고가신다 말이죠

주의 인애와 자비를 보라꼬

 

심판주는 저들 몽둥이를 쥔자들이 아니라

십자가에 너의 죄악에 대신 달려 죽는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이라꼬
(물론 여기서도 죄란 미래완료 개념이지 어떤 사기꾼 장로처럼 골프치고 술 담배하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의사가 규정하지도 않은 병은 병도 아닌데 환자 자기 멋대로 자기병명을 진단 못하죠
의사도 아닌 것들이
내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은자도 아닌 자들이 죄를 규정해요 글쎄 실로암 소경을 소경이라고 말이죠)

 

뭐가 또렷하냐 말이죠

주님은 참 당당하시다 말이죠

 

십자가가 또렷한지

 

저 속임수 우상이 또렷한지


대 놓고 붙이십니다.

 

그래서 다메섹을 멸망시키는 겁니다.

유다왕 아하스 왕이 다메섹의 화려한 신전에 뿅간 것

그거 질투 시기 하시기에

불같이 강해서 불 보다 강해서

저 부러워 하는 것 한 순간에 다 불태워 버리니까

저 부러워 하던 우상 더 부러워 해 보라는 겁니다.

저렇게 새까맣게 불타서 안개처럼 허무하게 되었는데도 너 부러워 할꺼냐 라고 말이죠

 

저들 마귀가 가만히 안 있죠

계시록에서는 우리를 불 태워 버리겠다고 마지막 최후결전으로

바다 모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이게 이름 싸움이다 말이죠

사랑 싸움

 

뭘 믿고 이 전쟁에 놓여졌냐 라는 겁니다.

그냥 우상숭배해서 매매해서

잘 먹고 잘 살면 되잖아요

 

이름 그게 뭔데

아무것도 없는데

왜 이 이름에 목숨 거냐 말이죠

 

이 아무것도 아닌 이름에 목숨만 안 걸면

매매하고 살수 있어요

종교신앙생활 할수도 있고요

목사하고 싸울 필요도 없구요

주변 나라와 친하게 잘 지낼수 있어요

 

 

왜 이 이름 때문에

매매도 못하고

우리가 부러워 하는 것 다 불태워 버리고

왜 그러냐 말이죠

 

이게 우리의 솔직한 심정이다 말이죠

 

자 그래서 다메섹 너 부러워 하는 나라의 실상을 제대로 보여줄게 라고

주님이 다메섹을 건드리시는 겁니다.

 

실상을 보라꼬

허상 허구 신기루 안개를 보지말고

 

똑똑히 저들의 실상을 보라고

 

주님은 당당하십니다.

왜 없는 우상이라는 속임수를 왜 부러워 하냐 라꼬

 

그러니 징계 안하셔야 겠습니까?

징계 하셔야 겠습니까?

 

사랑이라면 질투 하시는 겁니다.

 

그 꼴 못 보겠다고

 

우상이라는 속임수에 빠지는 꼴을 못 보겠다고

 

다메섹의 멸망을 보고 돌아오라고

 

어서 돌아 오라

 

들으라 이스라엘 하나님을 사랑하라 라고

 

외치다 외치다 죽으신 겁니다.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다 우시다 우시다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죽음인 십자가를 지고 가는

십자가의 전쟁을 펼치시는 예수님 어린양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이 손에. 이 눈에 아무증거, 그 어떤 것도 없이

이 이름 하나 어깨에 매고서 이 약속의 궤 박스 곧 예수님의 죽음인 십자가를 매고서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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