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의 가면 벗기는 인자

인자를 앞장 세우는 성령 vs 천국 망상을 절대로 포기 못하고 들이대는 인간들

인자란 너의 가면을 벗긴 진짜 너의 모습이 바로 이 모습이야 너의 실상이야 거울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10-30 16:50:56,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자들은 죽어서도 주님의 영하고 같기에 그냥 주님에게 스며들게 되는것이다 그것이 주님에게 안식하게 되는것이고 그러면 주님은 원래 자체로도 큰분이지만  우리로 인해 더 힘을 가지게 되는것이다라고 하는데 이건 어떻게 봐야 하나요 들어보면 다 맞는말인것 같거든요

답변:

이제는 듣다 듣다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듣게 되는 군요.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입니다.

성화론 자들은 항상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의해
특히 하나님의 형상 회복을 항상 그런식으로 파악합니다.

보다 나은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것?
이것은 어쩌면 바리새인과 우리들과 다 같은 인간 근본에 깔려있는 욕망인데

질문 속에서도 나타났듯이 영을 하나의 물질 개념으로 (그냥 물질 개념으로 취급해 버리면 저급한 의미겠죠 그러나 수준 높아지고 싶다는 그런 강박관념으로인해 자신들이 물질식으로 이해를 해 버리니까 그런 존재론적으로 보는 겁니다.) 파악하다보니 소유개념이 되고 소유개념이 되어버리면 인간이 다룰수 있는 인간의 숙제 개념이 되어버립니다.

그런 사유는 철학에서도 나타납니다. 모든 종교는 영을 인간이 도를 닦아서 득도하거나 성장하게 한다면 신에게 가까이 간다는 그런 욕망이 성화론에서는 신의 성품에 가깝게 실천의 행함을 보이겠다는 취지가 깔려 있다보니 그런 강박관념에서 인간도 뭔가 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영이란 어떤 종교에서도
특히 유대교에서도 영 개념을 파악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최종적인 신학도 성령이 마지막 때에 부어지면
그동안 단절 되었던 모든 막혀진 것들이 다 해결이 됨으로써
그동안 멀어졌던 하나님과의 친밀성이
하나님이 부으심으로써 우리는 부어짐을 당하는 그릇으로써 담겨져 주는 그릇이 되면
모든 것이 다 회복된다는 회복성을 최종목적에 두고 있습니다.

(욜 2:28, 개역)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 2:29, 개역)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하나님 형상 회복도 바로 이런 취지로써 그때에 부어지는 성령이 임한 자의 모습을
미리 지금 성령이 임한자 답게 보다 가까운 모습을 추구하는 겁니다.

이 얼마나 멋들어진 종교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문제는 이런 우리들을 포함한 바리새인의 생각에 태클을 건 예수님이 항상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서만 인도함을 받는데
놀랍게도 너희들은 영 부음을 받을 가치조차도 없다고
아예 자신만이 영의 독점성을 주장하고 나섭니다.
(즉 요엘서의 예언은 예수님에게만 부어주겠다는 겁니다.[마치 새언약은 인자에게만 독점적이듯이] 그렇다면 인간들은 그런 예수님을 죽인 입장이라면 성령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합니다. 꿈도 꾸지 않았던 자기를 부인하는 자가 예수님 혼자만 받아야만 하는 영을 선물로 받는데 그 선물이 인자의 길로 가는 인자의 모습이지 인간 좋아라고 주어지는 성령 따위는 없습니다. 인자의 길을 얼마나 시시하게 봤으면 그 중간 과정 다 짤라먹고 바로 천국에서 영의 흡수 따위를 운운한다는 자체가 참으로 성화론자 답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성화론자들이야 말로 인자를 얼마나 무시하는지 모릅니다. 솔직히 성화론도 인자의 모습 닮아가자 라는 주장은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결국 자기들의 취사선택으로 골라서 흉내내기에 바쁘기에 위선적으로만 가면이 더더욱 많아 질 뿐인 겁니다.)

그리고 그런 일방적인 주장의 알리바이를 형성하기 위해서
인자를 어떻게 대하느냐를 두고서 너희들의 망상적인 생각을 도리어 육이라고 고발합니다.

인자는 마치 법궤가 반드시 인간의 원망 거리 3가지를 반드시 담아야 하듯이
인자는 인간이 선택된 자로써 감추웠던 그 죄악마저도 증거물로써 인자의 신체에 담아야하듯이 인자는 구약으로 치면 법궤 상자입니다. 뭔가를 담아야 됩니다. 인간이 인자를 잘 대접했더라가 아니라 죄악을 담아야 하고 그 확정적인 증거물을 담아야 합니다.

그 알리바이 형성이 바로 인자를 앞장 세우는 겁니다.

그래서 인자 해석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저주에 대한 해석이요 죽음에 대한 해석입니다.

위의 질문 속에서 보듯이 항상 죽음을 빼버립니다.
늘 생명을 추구합니다.

저주와 죽음을 빼버린 아니 아예 염두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질문입니다.

그런 전제가 될려면

선택은 당연한 거고
부활도 당연한 거고
천국도 이미 당연하기에
하나님과 같은 큰 분의 성품에 맞도록
우리의 성화론 영이 주님의 영에 스며드는
그야말로 금상첨화의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품성이 예수님에게 스며들도록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야 말로 주님에게 도움이 되는 기쁜일이 되는 큰 공로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부자청년의 사고방식과 똑같죠)


마침 어제의 설교 내용이 바로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
유대인(가짜 신부)과 (인간 쪽에서 신부의 품성을 갖추는 방식)
예수님 자신이 직접 만드는 신부 (가짜 신부와 대조적인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방식)

두 신부의 모습을 인간 쪽에서는 구별 자체가 의미 없고
예수님 쪽에서 신부를 어떻게 만들어 가시느냐 라는 내용으로 새언약을 설교 했더군요.

자 그럼 그 신부의 모습을

예수님이 미리 맛배기로 보여줬습니다.

바로 인자의 모습인데

영이란 유대인들 마저도 도저히 파악 못하는 방식으로 왔습니다.
유대인이 파악 못했을 정도면 오늘날 성화론자들이 백날 연구해도 성령 개념 다 엉터리입니다.

영이란 인자의 모습을 통해서 증거했는데
인간이라는 육이 절대로 흉내 못내고 도리어 억수로 방해하고 적극적인 거부성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인자가 육들을 자극하고 다닌다는 겁니다.

일일이 수시고 돌아다니는 식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하는 영이란 바로 인자라는 육의 모습으로 온 것이 영이고
반대로 유대인 곧 모든 인간이 생각하는 영이란 육의 모습을 벗어버리는 성화의 모습이 영이라고 보는 겁니다.

즉 하늘에서 이 땅에 꼬로박아서 죄를 전담 곧 독점적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모든 죄악을 어깨에 매고자 지옥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영이고 곧 인자의 모습이고

반대로 유대인은 이 수준 낮은 땅의 죄에서 벗어나 하늘의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고자 하는 성숙의 단계의 최고의 수준이 되고자 영에 가까운 사람이 되자 피조물이 되자 라는 회복운동입니다. 이것도 부자청년

자 그래서 예수님이 영문 밖에서 죽으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꼬로박아서 그 지옥과 같은 곳을 천국으로 새로 형성하시고

인간들은 바벨탑이든 뭐든 거룩이라는 명분으로 하늘에까지 닿아서 그 하늘을 지옥으로 만들고자 하는 자기 이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입니다. 이게 성화죠

결국 성문 밖에서 죽으시는 이유는 그들의 거룩한 장소 천국이든 성전이든 뭐든
무조건 악마의 아지트로 규정하기 위한 겁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저주의 장소에서 죽으심으로써 사랑을 완성해 버렸다면
도리어 생명나무를 철저하게 차단했던 것처럼
그런 성화론자들이 그런 천국을 형성했던 자들이
도저히 못오도록 철저하게 막는 기능을 여전히 하는 식으로써
지옥 속에 죽음 속에 저주 속에 예수님 나라를 완성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성화론자들은 일체 접근 불가죠
그들뿐만이 아니라 어떤 인간도 접근 불가입니다.
부자청년이 근심하고 돌아갔죠

이런 접근 불가를 전제로 하지도 않고
미리 김칫국을 마시듯이
죽어서 천국가면 예수님의 영과 나의 영과 같은 영이기에 서로가 서로를 스며들 듯이
크로스 합채 하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겠는가

이게 바로 망상입니다.
(부자청년의 망상=말씀소유 율법소유 성령소유 행함소유 믿음소유 하나님 자기편
뭐가 또 부족하겠습니까? 그래도 혹 모르니 구원에 감점이 될만한 것을 보완하고자 예수님에게 물었는데 제대로 걸려든 거죠. 그 망상을 깨뜨리는 것이 인자가 할 일입니다.)

이런 망상이 기독교를 이미 장악했습니다.

우리로 인해 큰 분이 더 힘을 가지게 되지 않겠냐 라는 발상 자체가
그 배후세력의 의도는 그런 큰 분도 우리가 충분히 조종 가능하다는 식입니다.

그게 삼위일체 교리가 교회 조직 시스템 방어의 정치 싸움에서 형성되는 과정에서도 나타났듯이 말이죠.

결국 믿음도 자기 믿음으로써 하늘 나라도 자기가 구상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거야 말로 제대로 된 마약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말합니다.

영이란 예수님이 육으로 오신 사건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영이 되고픈 욕망을 육이 되신 예수님이 인자의 모습으로써 고발하는 그 실족케 하는 복음에 다 넘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넘어뜨린 그분이 다시 일으켜서 보여주는 인자의 세계를 다시 봐야 합니다.

그분이 찢으시고 그분이 다시 싸매어 주심으로써

인자에게 벌어진 사건을 우리에게 부어지시는 그 십자가의 의미가

모든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망상적인 천국을 다 차단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자가 그러했듯이
성령을 받은 성도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참선지자의 외침과 같습니다.

종말을 외치는 겁니다.

성화론자들이 망상적인 좋은 이미지로써 기독교문화로 세상을 정복하겠다는 이쁜 꿈을 꿀때에
참성도들은 바로 그런 망상을 깨뜨리는 미움받을 짖만 골라서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인간의 계산에서 나온 미움 받을 짖이란 자기 스스로 참을수 있겠지만
죽지는 않습니다.
종말의 영이 임하면 죽어도 상관없는 미움받을짖을 외침으로써 숨어있는 배후세력이 덮썩 물도록 하는 어두움의 실체를 구체화 시키는데 활용되는 미끼가 되도록 하시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실상을 드러내는데 미끼가 활용이 됨으로써
그 미끼는 자신의 신체에 심판을 담도록 되어 있는데

무슨 선한 문화를 세상에 퍼트리겠다고 소꿉놀이로 장난을 치는지

이런 단체는 무조건 다 사기 집단으로 보시면 됩니다.

얼마전 친환경단체 일종의 선한 문화 추구죠 이런 아름다움 뒤에는 항상 검은흉터를 감추고서 주장한다 라는 것을 보시면 됩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가 에덴동산 같았더라 라는 것처럼

(창 13:10, 개역)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과거 몇 년 전에 시드니가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뽑혔는데 그런 보도기사가 나간 후에 얼마후에 시사프로그램에서 그 내막을 뜯어보니 오히려 지옥같은 삶을 사는 도시하수구에서만 지내는 청소년들을 취재한적이 있습니다. 또 이렇게 말하면 어디든 먼지털면 먼지 안나오는 곳이 없다 라고 하겠지만 그런 취지가 아니라 인간이란 항상 긍정적인 것을 자랑할때에는 항상 그만큼의 어두움을 감추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최근에 두바이의 지상낙원을 많은 매체에서 홍보했는데 상대적인으로 그 속에서의 건설인부들은 완전히 개같이 취급받는다는 시사프로그램을 본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주님이 의도적으로 인간의 숨기고 싶어하는 것들을
반대로 내세우고 싶어하는 그 자랑 속에 항상 깔아놓는다는 겁니다.

인간이 그런 양면성을 감추고 싶어하고 또 일관성있게 행동하고파도
문제는 예수님이 심어버리는 이상
그런 양면성에서 어떤 인간도 벗어날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할례 곧 세례 라는

연합이라는 문제는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독점권에 해당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가까이 다가왔다고 앞장세우는 짖 꺼리들이

겨우 하는 짖이 자기의 수치를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우고 그 무화과 나뭇잎의 고급성을 자랑하고 얼마나 얼마나 많이 감추었는가를 자랑한다는 점입니다.

(고전 1:27, 개역)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개역)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개역)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치 못하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이 인자의 모습으로 오신 겁니다.

바로 이런 영의 일에 관심도 없기 때문에

육의 욕망을 영이라고 우기고 그 육을 천국에서 예수님에게 까지 스며들게 하겠다는 이 놀라운 인간의 꿈이 인간들에게 먹혀들지 않고는 못배기는 거죠.

정작 진짜 영의 일은 인간들에게 먹혀들 리가 만무 하고요.

자랑치 못하도록 하는 영의 일을
반드시 인간들은 자랑하도록 어쩜 그렇게 딱 떨어지도록 일을 하는지
그들도 모릅니다.

영으로써 주님이 이런 일들을 벌리시기 때문에 그들은 그 일을 해야만 하고
그렇게 주장 해야만 하는 겁니다.

그것이 육의 자랑이라고 영의 말씀이 밝혔기에 영대로 실행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 참 여기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죽음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인간의 죽음은 죽음이라고 취급하지도 않습니다.

인자의 죽음만을 죽음이라고 정의합니다.

이런 죽음도 넘어서지 못하는 주제에 죽음 너머의 세계를 운운하고 여전히 땅의 생각을 하늘에게 까지 알박기 하는 그 이유를 드러내지 못하면 늘 휘둘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믿음도 인간의 믿음을 운운한적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의인의 믿음은 예수님 뿐이며 예수님의 믿음만이 사는 겁니다. 그렇다면 죽음도 믿음도 예수님에 의해 새로 규정되는데 그 차이성이 인간들의 죽음과 믿음에 대한 해석과 차이 나는 식으로 규정 됩니다.

인간들은 자기 믿음에 도취되어 있을 뿐이지
죽은 적도 없고 믿음적도 없고 특히 평생을 믿고 이스라엘 전체 역사가 믿었지만
예수님만이 그들의 믿음을 가짜로 규정했습니다. 아무도 눈치 못챈 것을 말이죠.
그러므로 인간은 믿음적도 없기에 다시 살지도 못합니다.
죽음도 엉터리로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무화과나뭇잎을 여전히 고수하면서 정의내립니다. 지금의 모든 신학과 교리가 바로 그런 식입니다.

(합 2:4, 개역)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17, 개역)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히 10:38, 개역)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요 11:25,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롬 14:8, 개역)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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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에게 있어서의 인자개념(유대묵시문학의 인자 운동)

http://crosslamb.tistory.com/201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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