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달음박질 함도 아니요 원함으로도 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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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1 00:11:06,

하나님을 대면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사람들 가운데서 본다 야곱이 에서를 보니까 하나님을 보는것 같았다 사람속에서 하나님이 발견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사람의 얼굴의 이마엔 표가 있다 하나님의 인을 친 사람은 얼굴에 이미 이름이 있다

답변 :

야곱이 허리가 박살 난 이후에는 더 이상 자기를 챙길 이유가 없게 된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구지 "에서"에게서 자기의 생명을 자기가 챙길 이유가 없어지게 된 겁니다.

즉 그 이전 까지는 에서는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이제는 공포가 더 이상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미 주님으로부터 공포를 맞봤고, 주의 사랑 보다 더 공포스러운 것이 없기에 사랑의 완성을 본 겁니다.

그래서 마치 스데반 집사가 저들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말라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셔서 다 이루었다 라는 완성이 이미 되었기에
그 완성 때문에 ,  주의 우편에 앉아계심을 보고 그 용서를 누리기 때문에 
평화 곧 화목을 말하는 것이지

에서가 하나님의 얼굴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더 이상 너가 공포스럽지 않다 라는 겁니다.
오이디푸스가 더 이상 아니다는 거죠.

에서는 하나님이 무조건 미워한 자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본 듯이 하다고 해서 에서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의 마음상태가 변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마치 욥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달리심을 보고 난 뒤에 자신에게 덮친 애매한 고난이 더 이상
십자가 앞에서는 뻔데기 앞에 주름 잡는 격이 되었으니 심각한게 아니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야곱이 에서에게 주 라고 하는 것도 그 당시의 인사법일 뿐이지
에서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약속을 말하기 위해서 에서는 비언약의 세계에 해당 되는 인물로써 무조건적인 미움을 받게 됩니다.

야곱은 그저 공포에서 사망의 권세에서, 그 포로됨에서 자유케 되었다는 표현으로써 나온 겁니다. 윤리적 해석을 개입하지 마시길

이 무조건을 어떤 이유를 붙여서라도 조건화 시킬려는 의도가 그런 해석입니다.

편애도 무조건이기에 해석불가이고
미움도 무조건이기에 해석불가입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왜 "에서"가 아무것도 잘못 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움을 받는지 신비입니다.

또 왜 야곱이 아무런 의로움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편애를 받는지 해석불가 입니다.

(말 1:2, 개정)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말 1:3, 개정)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롬 9:13, 개정)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것을 이해 가능케 만들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이것 자체가 약속으로 증거되는 겁니다.

성화론자들이 하나님 즉 토기장이가 한 일을 자기들이 하나님을 좋은 이미지를 보이게 할려는 그 악마성 때문에 

자기들의 이미지를 그 속에 숨겨 놓는 겁니다. 이런 윤리 도적적 해석을 하면 자신들이 옳게 보이게 되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이마 표 란

누구든지 다 있는 이마표입니다. 한 쪽은 지옥 가기로 되어 있는 이마표입니다.
그런 쪽이 666에 해당 되는 쪽이고 (가인 족보)

다른 한 쪽의 이마표는 14만 4천에 해당 되는 쪽입니다. (아벨 족보)

결국 인간이 이런 이마표의 원리를 해석하는 그 기준 마저도 자기를 챙기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이 이마표 해석을 자기는 할 줄 안다 라고
그렇기 때문에 너는 내가 가르치는 교회에 있어야 한다는 무언의 강요를 하는 겁니다.

나는 너의 이마표를 볼줄 알기에 너를 하나님을 얼굴 보는 것처럼 너를 하나님 같이 섬기겠다는 사기를 치는 겁니다.

성화론자들의 전형적인 수법이지요

주님으로부터 받은 섬김이 없기에 그 빈자리를 예수님 흉내내기로 때우는 겁니다.

종교가 그래서 위험한 겁니다.
(최고의 성화론자는 불교 입니다. 교리 플러스 실천 입니다. 그들의 실천력을 따라 잡을 길이 없도록 주님은 그들을 배가 시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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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1 00:13:24,

우중충 하지도 않고 생명이 넘치기에 무표정하지도 않고 무뚝뚝하지도 않다 인이 있고 이미 이름도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볼수 있어야 하나님처럼 섬길수 있다 하나님처럼 섬길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의 인을 나타낼수 있다

답변:

거 보세요
인이란 하나님이 찍은 도장입니다. 이미 합격품이기에 합격 될려고 한다는 자체가 도장을 무시하는 사고방식인 겁니다.

무시험 합격으로 이미 당첨이 되었다는 뜻인데

그 당첨을 자기가 따로 챙길려고 하기 때문에
당첨자 다운 행동을 해야 그 도장이 지워지지 않게 될 것이다 라는 불안감을
스스로가 자아에 관심을 두다 보니 그런 현상이 생기는 겁니다.

이미 한 몸인데 자꾸 한 몸 되자 하나 되자 라고 주장한다는 자체가 절대로 하나 된 적이 없기 때문에 나오는 모습입니다.
열매주의 또한 그런 방식입니다.

주님이 맺은 열매를 맞본적이 없기에 또 그런 열매를 열매라고 취급도 하지 않기에
자기들 만의 열매관을 열매주의로써 밀어붙이는데 알고보니 그 열매가 정치서열이 되는 식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죽은 자 라는 뜻입니다.

그 죽음을 인간 스스로가 뛰어넘을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지 않도록 예수님 쪽에서 낮아지신 겁니다. 인자로써 뛰어든 겁니다.
그런 섬김을 우리는 싫어합니다. 그래서 죽인 겁니다. 왜냐하면 다른 섬김을 원했던 겁니다.
그 섬김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섬기는 그 섬김을 받아주는 예수님의 섬김을 원했던 겁니다.

즉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해도 죽지 않는
내 쪽에서의 성화를 갖추어서 섬기는 그 섬김을 받아달라
그 받아줌이 바로 하나님 쪽에서의 섬김이다 라고 우기는 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해도 죽지 않는 길은 없습니다.

샬롬 이라는 뜻은 간밤(지난 밤에 하나님의 얼굴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타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휴 죽을뻔했네
얼마나 많이 봐주셔서 불쌍하고 불쌍하고 불쌍하게 여기셨으면 무능자 죽은자로 취급해서 안타죽였다는 겁니다.)

이것을 무시 하기 때문에 독대 가능하다고 보는 겁니다.

그 가능성을 깨뜨리는 것이 바로 인자(심판의 주)입니다.

오로지 주님 쪽에서의 섬김인데 이것이 인간들의 섬김에는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죽여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인이란 이미 창세전에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된 겁니다.

인간의 섬김과 인간의 하나님 얼굴을 대면해도 상관없는 그런 수준이 높아진 것에 따라 그 도장의 의미가 달리지는 인이 아니라 말이지요

그래서 약속에서 [소외 시키는 방식]이 예수님의 섬김이지 인간이 나서면 다 망칠 뿐입니다.

(참 표정이란 표정이 인을 드러내고 나타나는 방식이 아니라 항상 거꾸로입니다.
인 맞은대로 표정이 드러나는 겁니다. 인 대로 그 인의 결정대로 표정이 드러나는 겁니다. 반대로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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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1 00:16:34,

자기가 만나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발견해야 한다 야곱은 축복을 받을려고 씨름한다(섬겨야 한다) 섬길수 있는 사람을 만드신것이다 야곱은 마지막에 축복할수 있는 사람이 된다 진다고 하는것은 섬겨줘야 한다는 것이다 섬김이 아니면 주의 이름을 나타낼수 없다 섬기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하나님처럼 보여야 한다고 합니다

답변:

야 참나 점점 갈수록 가관이네요 그 목사는 자기가 평상시 주장했던 것 보다 더 위선적으로 변하는 것 같네요
그만큼 다급한 겁니다. 불안해 하는 겁니다.
목회 실패 가 두려운 겁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까 싶어서 불안하고 목회 실패할까봐 겁이나서 자신이 야곱처럼 붙잡고 씨름을 해서라도 축복을 따 낼려고 복 달라고 외치고픈 겁니다.

(롬 9:11, 개정)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 9:12, 개정)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롬 9:13, 개정)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개정)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개정)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개정)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달음박질 함도 아니요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안된다는 그 부분을 그 목사는 정면으로 반대하게 된 겁니다.

큰자가 어린자를 섬긴다는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야곱은 사랑 받아야 하고 에서는 미워하시는 겁니다.

즉 야곱이 누구를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야곱을 섬기기 위해서 이런 약속을 벌리게 되는 겁니다.

만약 야곱이 성화론자들이 말하는 그런 인간형으로 된다면 야곱의 유언은 엉터리가 되는 겁니다.

야곱은 섬기는 자가 내가 아니요 예수님이다 라는 것을 약속에 담아서 증거해야 하기에
유언 속에서도 누가 섬기는 자의 섬김을 받는자인가 라를 것을 유언으로 담습니다.

당연히 유다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행동 유무와 상관 없이 이미 창세전의 유언대로 받는 겁니다.

자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오시는데 다른 이방인에게로 보냄을 받은적이 없습니다.

(마 15:24, 개정)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그런데 정작 유대인은 약속의 정신은 없고 껍데기만 그 목사처럼 완벽하게 섬기는 자로써 계명을 완수 했을 뿐이지

섬기는 자가 누구냐 라는 것을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웬걸

개같은 이방인 여자가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제발 날 좀 섬겨 달라고 외칩니다.

예수님이 바로 섬기는 자로써 큰 자가 어린자를 섬기는 그 약속을 완성하고자
자신의 섬김을 받을 자를 찾고 있는데 정작 유대인은 아무도 예수님의 섬김 영접 긍휼히 여김을 아무도 받지 않고

오로지 유대인만 받도록 되어 있는 섬김을 이방인이 도리어 원하고 있는데
제대로 원하고 있었던 겁니다.

맞습니다. 저 유대인 아니요 약속의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긍휼을 먹고 삽니다 라고

섬김의 의미를 오늘날 까지 성화론자들 조차도 해석 못하는데
이 개같은 이방인 여자가 제대로 해석을 하는 겁니다.
섬김 그 단어 뜻 풀이 못하는자 누가 있을까요 그러나 막으시는 겁니다.

(마 15:25, 개정)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마 15:26, 개정)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마 15:27, 개정)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마 15:28, 개정)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그야 당연히 주님이 심었기 때문에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오늘날 약아빠진 기독교인들이 이런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복음을 적용할까요?
아닙니다.

섬기는 자는 오로지 예수님 뿐입니다. 저 보세여 주님이 절 섬겼어요 저를 영접해 주셨어요 라고 증거하지 않고 (개같은 이방인 여자가 그렇게 외쳤지 부자 청년은 자신의 섬김 점수를 예수님에게 자랑할려다가 섬기기는커녕 마귀였다는 정체가 밝혀진 겁니다.)

반대로 내가 얼마나 잘 섬겼는지 얼마나 잘 성화 되었는지를 보라는 겁니다. (부자청년)

즉 자녀가 아니다는 증거입니다.

(막 7:27, 개정)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막 7:28, 개정)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자녀란 부모의 마음이 심겨져 있습니다.
주님이 언제 법을 많이 끌어 모아 저축하라고 했나요? 그것은 사생아의 특징입니다.
자녀란 그저 부모에게 도와 달라고 관계성을 부각하지 독자적인 따로국밥을 형성하지 않죠.

이것이 바로 악한 세대인 바리새인들이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배격한 이유입니다. 경쟁으로 본 거죠. 이유는 법을 형성하기 위한 따로 국밥 갖추는 조건 갖추기 때문입니다.

님의 대부분의 질문 속의 그 목사의 사고방식은 섬김이 누구인가를 말하는게 아니라
섬김의 조건을 갖추자 라는 식의 모든 질문 자체가 그 목사의 사고방식 자체가 조건 갖추기입니다.

섬김을 통해서 자기 챙기기의 수단으로 본 겁니다. 그게 법이요 그것이 생계수단이 되는 겁니다.

도리어 섬김이 내 속에 일체 없다는 것을
율법을 통해서 제대로 짖밟혀 본적이 없기 때문에

법으로 도리어 남을 정죄하고 돌아 다녔기 때문에 그 따위 사고방식을 교인들에게 심어넣는 겁니다. 광명한 천사 다워야 하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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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1 00:20:43,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통치할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다

생명안에서 한지체가 되는것이다 성경의 결론은 한몸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 몽이 우주적 교회를 만든다는 것이다 우주적 교회를 말하는것이다


답변:

무슨 도를 아십니까 라고 길거리에서 검은 옷 입은 청년들이 외치는 우주적 몸을 말하는 것 같네요

에베소서의 우주적 교회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것이 오늘날 인간들이 교회를 장악하는 의도입니다.

교회를 손아귀에 쥐면 곧 우주를 손아귀에 잡아 삼키는 식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인질로 삼아서 이 교회가 절대성을 보여주면 자기의 생계는 보장되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미 한 몸이기에 죽어도 상관없고 살아도 상관없듯이
교회를 허물어도 상관없고 다시 세워도 상관없기에

허물어도 한 몸은 변함없이 누리게 되고
다시 세워도 그 한 몸이 더더욱 한 몸이 되었다는 의미를 붙일 필요도 없이
원래 한 몸이였음을 허물어나 다시세우나 변함없이 주님 쪽에서의 섬김으로 이미 완료된 겁니다.

즉 개혁 할 필요가 없는 것이 교회요
성화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이미 넉넉한 승리를 누리는 것 뿐인 교회이다는 겁니다. 한 몸 한 지체

이것은 곧 몸은 머리를 말하기 위한 것이다는 겁니다. 머리로써 결정 되는 것이 몸입니다.

머리의 증상 징후이거든요.

머리로 끝난 문제, 완료가 다 된, 다 이루었다 라는 겁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으로 끝난 문제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미완료로 보기에
자꾸 미완료에서 점점 더 나은 완료로 나아가자 라는 취지로 하나 되자
한 몸 되자 라고 우기는 겁니다.

한 몸 되자 할 필요가 없이 이미 한 몸 이라니깐요? 몸을 보고? 아니지요 머리로 게임 오바
머리를 보고 끝난 겁니다.

이미 한 몸인데 뭘 또 하나 되요?

이미 결혼 했는데 자꾸 결혼 해달라고 하나 되자 라고 생때를 쓰는 겁니다.

즉 결혼생활을 못 누리기 때문에

불안해서 결혼식으로 자꾸 한 몸을 되자 라고 우기는 겁니다.  한 몸 됨을 확인 할려고 하는 겁니다.

그럼 그 결혼식 없으면 동거 중이면 사랑 안하는 것일까요?

즉 정말로 한 몸이라는 사랑에 관심 없고
결혼을 통해서 자기의 요구인 조건을 원하고 있다는 겁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듯이 말입니다. 공포죠. 두려움이지요.

사랑을 누리면 될 문제를

사랑 하자 사랑하자 라고 자꾸 사랑을 실천하자 라고 합니다.

결혼을 통한 조건을 보겠다는 심뽀입니다.

폐물에 관심이 많다는 겁니다. 그거 없으면 불안하다는 뜻인 겁니다.
열쇠가 몇 개냐 그거 따지겠다는 이유죠

소유물로 그 불안함을 떨져 버리겠다는 겁니다.

아파트 열쇠 자동차 열쇠 그 열쇠가 많으면 많을수록 자기가 안정감이 될 것이다 라고 보는 겁니다.

도리어 그런 것들이 더 불안한 겁니다. 모래 위에 짖는 집과 같다는 겁니다.

전형적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요구한 기적과 같은 겁니다.
그런 기적이 악한세대임을 자인하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성화론자들은 자기가 열매를 내지 못하면 불안해 하는 겁니다.

예수님만 조건 갖출게 아니라 자기 쪽에서도 조건을 갖추어야 결혼생활이 유지된다고 보는 거죠.

그게 사랑입니까?
서로를 죽이는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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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1 00:23:34,

하나님의 영광의 빛은 우리안에서 상대성을 몰아낸다  상대성을 만드는것이 지식의 나무 선악과 나무이다

상대성이 사라지면 공평하게 대하게 된다고 합니다 주님이 악인에게나 의인에게나 햇빛을 골고루 주듯 말이죠


답변 :  (선악나무를 의식한다는 자체가 선악적인거죠. 이미 한 몸인데 한 몸 되자 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어야 생명나무에 대해서 그 차이가 드러나는 겁니다.

생명나무는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통하지 않고서는 알 길이 없도록 막혀져 있습니다.

마치 옛언약인 율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새언약을 알수 없습니다.

왜 헌 부대가 아니라 새 부대 이어야만 하느냐 라는 겁니다.

즉 새부대는 죄문제를 겨냥해서 나온 겁니다.

죄란 율법이 아니고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율법이 가입된 이유가 바로 죄를 규정하기 위함인데

인간들 곧 인간 대표인 유대인들은 죄에 가두어진 전형적인 모습을
반대로 착각하는 율법을 쥐었기에 거룩하다 라고 착각한 겁니다.

율법이 하나의 전남편 노릇을 해야
인간은 아무도 율법을 행할 수가 없음으로 인해서
잃어버림을 당하는 고아 과부 나그네와 같은 외부에서 건져주지 않으면 안될 자인

저주 속에 있는 갇혀 있는 포로된 자임을 보여줌으로써

건지는 자가 의미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건질 필요성이 없는 건강한 자가 되어버리면
의사는 그 상대적인 환자 라는 의미에서 의사가 의미가 있지
환자가 없는 세상에 의사 백날 되어본들 소용이 없는 겁니다.

남자란 여자가 있기에 상대적인 의미이지 여자가 없는 세상에서 무슨 남자가 의미가 있겠나요

그래서 인간 쪽에서 상대적인 의미를 없애고 불공평성을 제거한 공평성을 자기들이 주장하게 되면

결국 모든 판결의 기준이 성화된 인간이 그 기준이 되는 겁니다. 공평을 유일하게 주장하니까요

그게 역사 속에서 수도 없이 시도된 바입니다.

문제는 그 공평성을 주님이 늘 깨뜨렸습니다.

그래야 인간이란 뭔가에 갇혀 있는 상태이고
포로된 입장이며
개같은 여인처럼 긍휼이 아니면 한 시도 못사는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 라도 베푸는

도움을 주는 자
섬기고 있는 자

의사

고치는 자
사슬을 끊어주는 자
용서하는 자

등등이 의미가 있도록 전쟁의 상황으로 늘 배경을 깔아버립니다.

자유민주주의가 공평할 줄 안 것은 인간의 착각일 뿐이고
자유민주주의가 얼마나 불공평하다는 것을 예수님이 배경으로 깔아 놓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대상이 되도록 하는데

이상하게 성화론자들은

자기들이 의사 짖을 할려고 하고
자기들이 공평과 평화를 외칠려고 하고
자기들이 불공평을 없애버리겠다 라는 기독교 문화 운동으로 세상을 정복할려는 탐심을
포기한적이 없고
자기들이 남을 가르칠려고 한다는 겁니다.

결국 도리어 대상을 찾는 식입니다.
대상이 되는게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계명을 예수님 외에는 못 지키도록 했는데
자기들이 사랑의 위치에 설려고 하니까
원수를 발생 시켜야 하는 겁니다.
자기가 의사가 될려고 하니 환자를 발생시켜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거짓선지자들이 평화 평화를 외치면서 대충 고치는 이유가 바로
아무리 잘 고쳐도 계속 환자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도록
그렇게 되니 자기들의 기반이 든든해 지는 겁니다.
남의 아픔이 자기의 안정을 보장해 주게 되는 겁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그것을 노리는 겁니다.
성화라는 법 실천을 하면 할수록 인간이란 늘 부족함을 느끼기에 그 결핍을
목사 자신에게 늘 상담해 온다는 그 빌미를 노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악마 라는 증거입니다.

그것이 섬긴게 아니라 볼모로 잡고 있다고 주님이 일부러 붙여준 겁니다.
단물 빠지면 언제든지 반토막 이상이 나도록 자기들이 키운 자들이 호랑이가 되도록 하시는 겁니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지는 식입니다.

물론 못 깨닫도록 귀 막게 하신다면 나가는게 아니라 서로 서로가 법으로써 유지되도록 서로를 이용케 만듭니다.

유일하게 소외 되는 것은 법의 세계에서 도저히 살수 없는 말씀만이 소외될 뿐입니다.

법만으로 교회를 가득채우는 자들이 많다는 것 자체가 주님이 열심히 일하시고
말씀이 부지런히 운동력있게 쪼개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반드시 그 속에서 희생자가 발생하도록 되어 있으니까요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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