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을 갖출 것인가? 무조건인 것을 어떻게 믿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불가능한 일만 제시하는 성령의 일 ( VS 종교는 가능성만 제시)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10-31 10:02:57,

전도서에 보면 헛되고 헛되다라는 말이 갑자기 인간이 헛된자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것도 주님이 깔아놓으신 배경이니 겪는수 밖에 없는거구요

인간 세계에서는 모든것을 깨달았으면 침묵하는것이 당연하지만 주님 나라에선 침묵하는게 아니라 전해야 한다고 하는데요 생명의 말씀이고 생명을 전하는것이니까요

들을자를 위해서 전해야 한다는거죠

답변 :

증인이기 때문에 가만히 못있도록 하신 겁니다. 영이 임하면 외치는데 문제는 그 외치는 내용이 바로 죽음이라는 겁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에게만 들려지기 위해서는 생명을 외치는게 아니라, 죽음 속에 생명을 외치게 됨으로써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만 그 죽음 속에 있는 생명을 듣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자 라는 비밀의 모습을 생명책에 기록된자들은 성령으로써 알게 되고
종교꾼들은 인자 라는 고난받는 종의 모습(종말=모든 가치관의 반대된)을 거부하면서 증거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참선지자 거짓선지자의 양상과 똑같이
평화 평화를 외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반대로 참선지자는 끝났다 라는 종말을 외침으로써 거짓선지자들처럼 인정받는게 아니라 미움 받도록 되어 있기에 미끼로써 숨겨진 배후세력의 실체를 드러내는 겁니다.

왜 미련하고 어리석음을 증거하느냐? 인간의 선악의 법 의식이 이런 미련하고 어리석음에 대해서 견디질 못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마귀만을 상대로 하지 인간들처럼 눈에 보이는 인간을 의식하는 복음은 없습니다.

그리고 전도서의 헛되다 라는 의미는
목적을 가지고 전쟁을 벌리시는 여호와 라는 의미가 없는
인간의 선악의 법적 세계에서 완벽하고 싶어하나
완벽한 법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철저하게 모순 되는
인간의 한계성을 말하는 것인데

바로 그런 인간의 한계성을 사랑만이 지적해줌으로써 헛되다 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사랑이 알려주지 않는 이상은 인간이란 포기가 없기에 헛된 것 자체를 또 의미있게 만들어 내는 생산력을 추구함으로써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을 잠시 쉬지도 않고 일을 하는 식입니다,.

자 그렇다면 바로 그런 안식이 없이 악마에게 사로잡힌 인간에게 그런 인간 구조가 헛되다 라고 알려주는 사랑이 뛰어들지 않으면, 즉 인자가 죽음으로써 눈뜨게 하지 않는 이상은 인간은 헛된줄도 모르고 부지런히 시동을 걸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화론이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인간에게 늘 쉼이 없는 숙제를 던져준다는 자체가 전도서를 무시해서 그렇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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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31 10:10:46,

이것도 주님이 입을 열게 하시면 열게되는 것이고 닫게 하시면 닫을수 밖에 없는 주님의 일방적인 섭리에 달린것이겠죠

우리 교회 목사님도 주님이 임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 안에 있다는것의 의미는 뭔가요

전에는 하나님 안에 주님이 주님안에 우리가 우리안에 주님이 이렇게 연결 시켰는데 이런 의미로 받아 들여야 하는건가요

답변 :

결국 결론은 인간에게 답이 있는 겁니다. 그것을 아무리 외쳐도 받아들이는 최종적인 결정자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숙제가 되는 셈입니다.

성화론자들의 믿음 없음은 바로 이런 부분에서 그 내막을 드러냅니다.

주님이 하시도록 내버려 둘수가 없다는 겁니다.

결국 믿는 것도 내 문제요 신앙도 내 문제이지 내 숙제를 예수님에게 맡겨버린다면 그것처럼 교만하고 방종스러운 게으름뱅이가 되는 부끄러운 구원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니 쪽팔리는 행동을 하지 말자 라는 것이 그들의 취지입니다.

특히 성화론자들의 지도자들을 보면
그 지도자의 모습에 구색을 갖출려면
숙제꺼리를 밑에 하급구조에게 던져주면
이것이 얼마나 구조적으로 안정성을 주는지 모릅니다.

마치 고대종교의 형태들이
인간에게 숙제를 던져주면 인간들은 1년 동안 열심히 하늘의 뜻을 받들어서 농사지은 그 생산물을 바치는데 있어서
신이 내린 숙제를 이렇게 잘 해 왔고 그로인해 복이 내려와서 안정적인 생활을 누릴수 있도록 하는 감사가 서로 서로의 관계에 도움이 준다는 식입니다.

자 이것이 현대에서는 목사가 아는 만큼 교인들이 따라와 주면
교인들은 그 목사가 내려준 숙제를 함으로써 신의 중보자와의 관계가 화목하게 원만한 관계를 이룸으로써 개개인의 가정의 안정적인 복을 추구하게 되는 겁니다.

자 이것이 바로 바알종교입니다.

어제 질문의 답변을 하면서 느낀점이

신이 숙제를 던지면 인간들은 거기에 대한 응답을 함으로써 생산물을 바치는 식

이런 모든 구조는 인간 행위의 근본이 되는

일종의 섹스교와 같은 겁니다.

바알이라는 신이 하늘에서 씨를 뿌려주면 인간들은 그 씨를 땅에서 잘 키워서 생산해냄으로써 자기의 생산물을 바침으로써 다음해의 씨앗도 보장받고 생산을 하는데 있어서의 햇빛 비 등등을 천지지변의 해악성이 물러가도록 해달라는 식의 일종의 쌍방의 계약이 제사 속에서 거래로 자리잡는 겁니다.

성화론자들이 행함에 있어서 포기를 못하는 이유는 그 행함을 통해서 버리지 말라는 버리면 안된다는 당신의 법을 내가 준수했기에 만약 버리게 되면 당신 스스로가 당신의 법을 어기는 식이 된다는 그 댓가성을 담보를 걸기 때문입니다.

자 그런데 그런 담보에 마치 지난 번의 볼모 작전처럼
예수님 본인이 또 그런 담보를 치는 인간의 세계 속에 자신의 담보를 치는데 있어서
십자가를 담보로 삼아버립니다.

인간의 종교방식 계약방식대로 담보를 치는 식이지만 정작 인간이란 그 계약의 당사자를 제거함으로써 계약을 이룰려고 합니다.

결국 일방적이다 라는 불평은 사실상 인간의 속성을 드러내는 식입니다.

도리어 예수님의 이런 담보 작전이 아니였다면 인간의 가장 공평성을 앞세운 가장 거짓된 정의를 알길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의외로 모순적으로만 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
예수님의 공의인 십자가가 아니면 인간은 쌍방적인 계약을 앞세우면서 늘 계약을 파기시키는 일방적인 불공평성의 죄악을
예수님이 그들이 보기에 악의 모습 곧 인자의 모습이 아니였다면 인간은 가장 정의롭고 거룩한 모습의 가면을 지적해 줄 자는 이 땅에는 아무도 없는 겁니다.
우리가 잘 아는 북한의 사이비 집단을 보면 알수 있듯이 오늘날 모든 종교는 이런 사이비성을 감출려고 가장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들로 아무리 포장을 해 보아도 그 근본이 탐욕인 우상이듯이 그 근본을 예수님 앞에서는 감출수가 없는 겁니다.

또 예수님은 그 감추어진 포장을 예수님 외에는 못 벗기도록 하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포장 술에 넘어가는 인간들은 할 말이 없는 거죠

자기 욕심에 자기가 넘어가는 식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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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31 10:14:08,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요술방망이처럼 저절로 되는게 아니니 주님의 방법대로 성실하게 노력해야 한다고 합니다  주님은 마음을 보시지 행동여부를 안본다고 하거든요

답변 :

성령론이 틀리기 때문에 불안한 그런 마음을 뭔가로 자꾸 채울려고 하는데
믿을 것은 자기의 행동 밖에 없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차이성을 봐야 합니다.

어떤 인간도 가만히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공동분모를 깔아버렸기 때문에
인간은 평생을 죽음을 해결하는 생명에 대한 숙제로 평생을 소모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숙제 중에 하나가 진리가 무엇이냐?
또 생명이 무엇이냐?
그래서 만들어 세우는 것이 신이요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그 신과 종교의 특징은 반드시 죽음과 진리에 대한 해결책이기에 생명을 해결했다 라고 하지 않으면 그 종교와 신은 도태 되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결국 인간의 자발적 선택권이지요.

그 자발적 선택권에 맞추어진 성령론이 바로 유대인의 성령론임을 어제 말했고
그것이 바로 악령론입니다. 아까 말한 섹스교의 방식과 같은 거죠. 바알종교

음양의 조화

어제 말했듯이 성경의 성령론은
인자를 앞장세움에서 그 인자를 어떻게 숨겨진 악마의 세력들이 다루르냐 라는 그 내막을 다 공개해버리는 입장에서 성령이 일하신다고 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성도를 성령님이 다루실 때 인간의 개인 성숙도인 성화를 목적으로 할까요? 아니면 악마의 실체를 드러내는 일회용 소모품으로써 사용하실까요?

성령님은 노시는 분도 아니요 쉬지도 않고 지금도 부지런히 일 하십니다.

이런 성령님의 일하심의 단절이 바로 성화론자들의 성령론입니다. 그게 바로 성화론이지요.

한마디로 미끼가 되기 싫은 겁니다.

악마의 밥이 되는 싫은 겁니다.

그래서 벌어진 사건이 예수님을 인자로써 십자가에 달아버린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런 결백증 환자들이 악마의 밥은 되기 싫고(미끼)
예수님의 밥이 되고자 그 밥에 어울리는 행동을 갖추겠다고 우깁니다.

이것이 말이 안되는 것이 예수님의 밥이 바로 악마를 잡기 위한 미끼가 되는 같은 겁니다.
그 같은 말을 평생 우기기를 자기가 마치 깨끗한 양인냥 착각을 한다는 거죠.

그래서 지근 지근 밟아버리고자 광야 속에 집어넣듯이
늑대 소굴에 집어넣는 겁니다.

아직 고난의 근처도 안 가봤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유린 당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래야 왜 예수님이 남이 아닌 나에게 지근 지근 짖밟혔는가를 보게 됩니다.

평생을 사기를 치면서 사기 안친냥 우기고
평생을 거룩을 죽여버려놓고 자기의 거룩의 포장을 무시하면 가만히 두지 않는 그 폭력성을
까발리는 겁니다.

바로 너의 모습이라고 애굽 왕을 강퍅케 하시는 겁니다.

여호와가 누군데?

사실은 인간은 자기가 만들어낸 신을 이름을 붙여서 자기가 자기를 믿는 식으로 신앙을 합니다. 그 내막은 이미 아브라함에게서 밝혀 졌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예수님이 누군데? 라는 외침만 할 뿐입니다.

그래서 강퍅케 하시는 겁니다.

남의 교회가 망하든 말든 자기 교회에 목숨 겁니다. 승부를 걸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프랜차이즈로써 퍼져 나가는 식입니다.

자기 교회에 목숨 걸어 승부를 걸 정도의 노력과 실천이라면
한국교회 전체에 목숨 걸어 승부를 걸 것을 내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없습니다. 왜냐? 미쳤다고 죽을 짖을 골라 합니까?

결국 복음도 어디까지나 자기 영역의 복음일 뿐인 겁니다.

자기가 기준이 되어서 그 영역의 라인을 긋고 설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미끼가 되지 않으니까 도리어 그 라인에 걸려드는 미끼를 잡아먹는 식이 되는 거죠.

그러니 도리어 예수님에게 걸려든 겁니다.

볼모 작전을 펼칠려다가 도리어 예수님에게 걸려드는 식입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일하심이 그들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자로써 우리에게 증거되고

그들에게서의 인자란 한마디로 자기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영웅일 뿐인 겁니다.
그래서 이런 영웅을 흉내내는 것이 오늘날 목사들의 탐욕관입니다.

참 그리고 흔히들 쓰는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지 우리의 겉모양을 안 본다고들 하는데 그 의미를 이미 다윗이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겉모양 뿐이고 중심 자체가 없다 라는 것을 성령이 임하게 되니까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 중심은 예수님이기에 우리가 예수님이 아닌 이상 인간은 중심 없이 평생을 겉모양 즉 성화에 미쳐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 모양새의 의도적인 반대의 모습인 싫어버린바 되고 질고(병에걸린)를 알고 흠모할 모양이 일체 없는 이사야 53장의 고난의 종의 주인도 아닌 종 가장 핫바리 하급 계급의 신분으로 오시는 겁니다. 그래야 모든 인간들의 속내가 드러납니다.

가난한 적 조차도 없는 인간들이 어떻게 유일한 가난한 자 한 분을 취급했는지를 말이죠.
고아 과부 나그네는 예수님 뿐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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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31 10:16:12,

주님자체가 영이기에 담을 그릇이 필요한데 그것이 우리고 우리를 통해서 주님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도구가 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다고 하니 이 부분은 둘로스님 부분과 같은데 해석부분에서 갈라지는군요

답변:

그들의 그릇 론은 무엇이 담기느냐에 주도권이 달려있지 않고
그릇 자체에 의미를 두기 때문에

제가 누누이 강조를 한 것이 미끼 개념입니다.
즉 일회용 소모품입니다.

그렇다면 그들과 대조적인 그릇론이 바로
그릇을 깨뜨리기 위해서 주님이 사용하십니다.

왜 깨뜨리느냐? 나 아니요 이 분이 보석입니다 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현존을 부재를 앞장세워서 증거하시는 이유는 언약의 속성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란 창조주를 증거하는데 있어서
피조물 존재 자체를 긍정하는데 있어서 창조주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데 있어서 창조주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은 허무한 것에 복종하면서 원수 갚아달라고 전쟁을 요청하는 종말을 외친다는 겁니다.

(롬 8:20, 개역)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롬 8:21, 개역)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 8:22, 개역)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롬 8:23, 개역)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그래서 고난과 인내 속에 뛰어드는 순종이 곧 영에 의해서 등떠밀리는 이유는
창조주를 증거하는데 있어서 창조물인 자기를 공중분해 하는데 영의 일에 동원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화론자들의 그릇론 또는 도구 쓰임론을 보며는
자기의 존재 가치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식이라는 말도 안되는
모든 종교의 신관 곧 우상성을 주장하는데 있습니다.

자 그렇게 되면 그릇 노릇을 못하게 되면 예수님도 이만 저만의 손해가 된다는 겁니다.

주님 손해 보는 것 없습니다. 그릇이 제대로 안 굽혀 지면 그냥 깨면 됩니다. 손해 보는 것 없어요. 어차피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데 뭐가 손해인가요?

결국 인간이 그 창조성을 창조주에게 맡기질 못하겠다는 심뽀를 그렇게 감추인 겁니다.

그릇은 깨는 재미로 있는 겁니다.

자 우리 모두 접시를 깨자

그것이 바로 히 11장의 믿음 이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라는 보석을 담은 그릇들이 어떻게 보석을 증거했는지를 보면

믿음이라는 보석이 담겨지니까

투박하던 그릇들이 성화가 되어서 유리그릇이 되어서 유리그릇 속에 있는 보석을
순도 100% 선명하게 고해상도 고화질의 풀HD 로 하나도 숨김없이 보여줄수 있으니까?
유리그릇이 되자 라는 것이 성화론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보석은 그런 그릇들의 소망과 달리 보석 자체가 자기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나무그릇 돌그릇 머그잔 쇠그릇 어떤 그릇이든 상관없이 그릇 속에 들어가서
그 그릇 자체를 깨뜨리고 박살냄으로써 보석 자기가 자기 스스로 보석 다움의 진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유리그릇이 되어 증거하는 증거보다 더 확실하다 라는 겁니다.

유리그릇이 되어서 증거하겠다는 발상은
이미 수제자 베드로가 항상 보여준 겁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자신도 물 위에서 예수님도 물 위에서 둘 다 물 위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면 예수님의 영웅성이 더욱더 부각된다고 볼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 그릇을 깨뜨립니다. 물에 푹 빠져 죽여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살립니다.

그래야 그릇이 그릇 주제를 알게 됩니다.

베드로가 건방지게 그릇 주제에 누가 담겨지느냐를 보면 될 문제를
보석 스스로가 빛을 발하는데 있어서

자기가 무슨 재주로 그 빛을 같이 발하겠다고

건방지게 7번 용서 했는데 얼마나 더 용서해야 하냐고
성화를 외친 겁니다.

용서 하는 주체는 예수님 뿐입니다.

인간이란 용서의 주체가 되면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용서 받아야만 할 대상인 주제에
피조물인 주제에
항상 창조주에 대한 결핍을 채울려고 흉내를 내지만 정작 그 내막은
자기가 원하는 창조주가 아니였다는 이유로 창조주를 죽였으니
정작 그 내막은 누가 창조주 였나요>?
인간입니다.

피조물이 없어요

그릇이 없다니깐요

전부다 보석 흉내를 내고 있어요
그래놓고 그릇이다 라고 겸손을 떠는데 그것이 바로 신이다 라는 증거입니다.
그 겸손 떨고 순종 티 내는 것이 바로 신이니까 건드리지 말라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건드려야 합니다. 죽여 버려야 합니다. 깨뜨려야 합니다.

깨뜨리고 박살을 내야

아브라함이 비로소 눈 뜨 듯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본인이 그릇도 되고 본인이 보석이 될려고 했고 1인 2역
그래서 겨우 해 놓은 것이 약속을 이루었다 라는 용서를 7번 이상 했다 라는 주장이 바로
이스마엘 이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자신이 보석됨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아브라함의 그릇을 깨뜨리는 식으로 증거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서 도저히 나올수 없는 이삭을 놓는 겁니다. 어떤 작전? 볼모 작전, 씨받이 작전, 탁란 작전

육에서 육을 놓는 방식 밖에 모르는 보석이 된 그릇의 한계를 딛고
육을 깨뜨리면서 영의 일인 보석만 증거하는 식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제 자기를 쳐다보지 않고 미래의 예수님을 믿음으로 보게 됩니다.

자기가 믿음이 아니었다 라고 가장 믿음 없는 자임을 알게 된 거죠,.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별명을 붙인 이유는
또 볼모 작전 즉 걸려들 놈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이였죠.

누가 너희들을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하더냐? 저 돌들이 웃겠다.

저 돌들이야 말로 피조물인데 너희들이 피조물이라고? 너희들은 신이 된 악마야
라고 세례요한이 모든 욕을 퍼붓는 겁니다.

그릇 되는 것이 마치 겸손한 티를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보석을 삼킬려는 짓입니다.

보석은 어떤 그릇이든 상관없이 보석 스스로가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보석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냐 라고 나사렛이라고 보석의 가치가 낮아질까요?
그럼 보석이 예루살렘 수도 서울에 가면 보석의 가치가 높아집니까?
바로 그렇게 보는 자들이 법을 손에 쥐어서 자기를 챙기는데 사기치는 자들이 아닙니까?

보석은 지옥 속에서도 그 가치가 달리지지 않고 유리그릇을 만났다고 해서 더 진가를 발휘하는 것도 아닙니다.

즉 그런 그릇론이 여전히 용서를 무시하기 때문이요 보석을 무시하기 때문에 나오는 선악의 발상입니다.

워낙 이 부분을 그렇게 사기를 치기 때문에 강조를 해 봅니다.

(고후 4:7, 개역)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에게 있지 않다 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그릇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그릇을 깨뜨리시는 겁니다. 깨짐으로써 외쳐지는 증거가 바로 우리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습니다 라고 외치는 거죠. 깨질 때 마다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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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31 10:21:53,

우리가 주님의 도구이기에 주님의 영광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저 짐승과 흙에 불과 하니 주님의 영광은 삶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죠

그것도 외식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에서 말이죠 그런데 그것도 주님이 주셔야지 내 열심으로 하면 안 된다

답변:

그래서 사도바울이 열심은 내게 있었으나 지식을 쫏지 않은 까닭이다 라고 과거의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였던 모습을 고백을 합니다.

즉 죄와 죽음에 대해서 모르고 생명에 전부를 올인하면 된다고 본 겁니다.

(롬 10:2, 개역)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고전 13:2, 개역)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지식이란 곧 신부에게 신랑이 졸지에 생겼다는 의미이지 공부의 학문의 량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즉 지식이란 신랑이 생겨버리면 게임 오바다 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과거 사울 이었을 적에 열심은 무엇인고 하니 바로 율법이라는 전남편에게서 나온 신부의 모습이였다는 겁니다.

이 전남편인 율법이 죽음으로 인해서 두 번째 남편이 생김으로써 자기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라고 합니다.

자 그렇다면 바울은 신부 문제가 아니다 라는 취지로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신랑에 관한 문제입니다.

전남편 율법이 신부에게 요구하기를 거룩하라를 요구했는데
보석이 아니라 그릇이라서 거룩 자체가 없는 줄도 모르고 거룩의 요구를 실행할려고 하다보니
가짜 거룩을 주섬 주섬 다 끌어모아서 옷을 지어 입고 있으니 그것이 거룩한 옷인냥 하나님의 형상 회복인냥 우기고 있더라 라는 거죠.

그러면 그럴수록 마귀집단이 되는 겁니다. 그런 옷을 갖추면 갖출수록 바리새인처럼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고 십일조 금식 한다고 우기니깐요.

그냥 솔직하게 그런 세리처럼 아무리 내가 만들어 보아도 거룩한 옷이 안 되고 옷이 깨끗하게 안되더군요 라고 벌거벗은 임금님에게 있는그대로 말하는 아이들이 되면 될것인데

너도 나도 겉치레에 빠지다 보니 벌거벗은 임금이라는 법 덩어리가 임금의 명분을 갖출려고 하다 보니 백성들도 뻔히 벌거벗은 줄은 알지만 임금 건드렸다가는 감옥에 가기 때문에
바리새인 건드렸다가는 세리 더러운 사마리아인 취급 받을 줄 뻔히 알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보다 더 위선적인게 어디 있나요

오늘날 성화론자들이 법을 쥐면 쥘수록 교회에서 아무도 못건드리는 위치에 서게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니까 마치 자기들이 옳은 줄로 알고 기준 모델인냥 착각하더라 라는 거죠.

그런 행동들이 실지로 겸손의 티를 낼려고 개혁주의 인물들 경건주의의 신앙 인물들의 삶을 흉내내자고 따라해 보자 라고 나오는데 다 사기입니다.

그냥 벌거 벗은 자입니다 라고 너도 나도 불뱀입니다 라는 인자의 외침만 들으면 됩니다.

남 용서할 입장이 아니라 그냥 용서 받는 입장만 되면 되는 겁니다.

왜 긍휼의 대상만 되어야 하는가?
긍휼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인간은 법을 쥐게 되기 때문입니다.

긍휼의 대상만이 두 번째 신랑의 신부이고
나머지는 여전히 율법의 아내로써 음부 노릇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번주 수요설교가 그래서 중요한 겁니다. 새언약 개념 조차도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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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31 10:27:32,

그렇다면 이렇든 저렇든 다 주님손에 달린게 아닌가요

제 생각도 이미 주님에 의해 결정난 운명론 같은데 우리 목사님은 그건 아니라고 하니 참 애매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이유가 성경을 통해 우리를 알아가는 과정이라 하는데 알아 봤자 육이구나라는것과 왜 주님일수 밖에 없는지라는 결론밖에 안 나오는거 아닌가요

성경을 통해 우리는 캐어봤자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라는것인데

답변:

네 그래서 늘 운명론적으로 이야기 한다고 욕을 많이 먹는 이유가 그러합니다.
예정론을 말해 버리면 주님 혼자 일할 숙제만이 있고 우리는 없다는 것에서
인간들의 정신상태가 헤이해 진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저들이 말귀를 못 알아먹는 것 또한 감사한 일이 아닐수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 혼자 일할 숙제에 우리가 대상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깨어지고 박살나는 감당이 불감당인 일들만이 덮치는 일들이 수두룩 한데
멍청하게 가만히 있다고 본다는 자체가 워낙 성령님이 그들을 다룬적이 없기 때문에 나오는 소리입니다.

용서할 주체나 입장이 되지 말고
용서의 대상이 된다는 말은
자아의 자존심을 뭉개버리는 자아지우기를 주님이 쉬지도 않고 한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자아의 육을 죽이시는 성령님의 일이 없고
자기가 자기를 득도하기 위한 채찍질의 연기학원만을 잔뜩 다녔기에

성령님의 일에 대해 아예 모르고 악령론만 외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연기를 할까요? 연기를 그냥 하는 자는 없습니다, 그 댓가를 추구하기 때문에 스타가 되면 성공했다 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거죠.

인간이 행함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그 행함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그 행함에 따른 보상에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할 이유가 없지요

그래서 성령님은 그런 주장을 하는 자들과 반대 주장을 하는 인자를 앞장세우게 되면
껄끄럽게 반대의 대립의 상황이 그들이 원치도 않았는데도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성령님은 임하지 않고
도리어 성령님이 반대의 주장을 하는 사람을 바로 옆에 붙이게 되면
어쩔수 없이 그에 따른 행동들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저런 주장은 잘못 되었다 라는 반박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말이죠.

자 이렇게 주님은 부지런히 일하십니다.

설사 인간이 아무 행동도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해도
마귀를 집어 넣으시면서 까지 모든 인간들을 복음의 영광을 드러내는
진노의 그릇 긍휼의 그릇으로써
마음껏 사용하십니다. 손해 절대로 보시는 법이 없을 정도로
사랑을 드러내는데 부족함 없이 넉넉히 써먹으시는 겁니다.

위에서 말한 피조물 개념 조차도 반대로 잡고 있기 때문에 (물론 창조주 개념 조차도 반대인 엉터리죠) 쓸데없는 걱정을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을 걱정해주는냥 사기를 치는거죠.

얼마나 주님을 그동안 무시해 왔으면 그 버릇이 여전히 남들까지도 소경으로 만드는 짓인줄도 모르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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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31 10:31:57,

전 요새 말씀을 들으면서 이 모든말이 헛것이라면 내가 왜 이말을 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과 성경도 우리의 생각과 반대의 해석이라면 그리고 접근 불가라면 어차피 내 맘대로의 해석인데 왜 봐야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주님은 들을귀 있는자를 위해 열어 놓으신것이지만요

답변:

인간이 왜 선악과에서 벗어나지 못하느냐를 지적해 주시기 때문에 철저하게 모순덩어리 임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결국 님의 그런 회의적인 결론이 최종적으로 자아만을 남기기 위해서 육체가 알아서 발악을 해주는 겁니다. 성령이 없이도 인간이 알아서 눈치채고 발악을 할 정도면 왜 빌라도와 가룟유다가 자살했는지를 알수 있을 겁니다. 끝까지 자아를 포기 못해서 자아의 자존심을 남기고자 자살한 겁니다.

그렇다고 반대로 종교에 자아를 영원히 숨겨버리는 바리새인의 전부를 올인하는 자세를 갖추어 본들 주님이 출발하지 않는 사랑이라면 어디까지나 소유욕일 뿐이다는 겁니다.

인간이란 예수님을 사랑한적이 없고 도리어 내가 사랑함으로써 소유할려고 장악하고 지배할려고 하니 그 중간에 개입이 생기는 겁니다.

님은 이렇게 해도 들켰고 저렇게 해도 들켜버렸으니 이것이 차라리 솔직한

곤고한 자임을 알게 하시는 성령님의 불도져 밀어붙이기 방식이겠지요.

그렇다고 그 곤고한 자임을 아는 것이 또한 고정이 되어버리는 기념비가 될 수 없습니다.

이제 성령님의 일하심의 흐름에 우리는 청룡열차 타듯이 그 로울러에 흐름따라 누리면 되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겁니다. 통로일 뿐입니다. 지나가는 것을 붙잡는 종교꾼들도 구경하고 영원하지 않는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인 누락될 교회로 사기치는 목사들도 구경하면서 우리는 그저 저런 지옥불 속에서 건지시고 청룡열차 테워주시는 그분의 사랑을 감사하시면 되는 겁니다. 내가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지옥을 만들고 사람들을 사로잡아서 놓치 않고 놀아줘 놀아줘 하는 저 처량한 목사들을 구경하면서

왜 주님 께서 목숨까지 버리시면서 저 속에서 건지시고 저들의 실체를 보여주시는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보석만을 자랑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회의를 이것 보다 더 심하게 하시고 더더욱 더 큰 회의 속에 빠져서
도저히 헤쳐 나올수 없다 하더라도

그러든 말든 변함없이 동일하게 일관된 해와 공기와 밤과 낮을 허락해 준다는 그 놀라운 기적에 그저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입이 떡 벌어지는 그 큰 사랑에 그냥 무릎이 날라가 버리고
몸뚱아리가 날라가버리고 머리통이 날라가 버려도 주님의 약속은 멈춘적이 없다는 그것에 감사하시면 되는 겁니다.

다시한번더 강조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이 사랑을 심어서 주님을 사랑케 하셨으니 내 주체가 사랑한적이 없고 그런 주체 또한 없다 라는 것을 아시면 됩니다. 주님이 심은 사랑, 주님이 찾는 식입니다. 옳치 내가 여기에 심었었지 찾았당 !! 당첨

(요일 4:10, 개정)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18, 개정)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 4:19, 개정)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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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31 10:39:07,

지금도 내 생각과 삶을 통해서 육을 철저히 맛보고 주님을 경험해 가는데 내자체가 성경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서 성경의 여러 모습과 비교하며 가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 아무튼 지금은 무기력 상태인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 과정을 통해 주님은 또 어떤길로 저를 내몰지 모르겠지만 주시는 만큼 겪어 나가야 하기에 이끄시는데로 이렇든 저렇든 주님의 범주안에 있는것들이니까요

답변:

자아를 무엇인가 건드리면 반응하기 마련입니다. 자기 집을 도둑이 빼앗는데 가만히 있는 자아가 없죠 그러니 꿈틀 꿈틀 거리는 겁니다.

무기력요?

그거 사기입니다.

언제는 뭐 무기력 안했나요? 마치 예수님 때문에 이제야 무기력 해 졌다고 뻥치면
자아는 어쩔수 없이 당했다고 변호 받겠다는 심뽀일 뿐입니다.

자 그렇다면 자아를 핑개거리를 찾고 지옥에 가더라도 혼자 가면 안되는 겁니다. 물귀신 작전을 펼쳐야 합니다. 즉 자기의 소유물입니다. 자기 집, 자기 방안의 가구 티비 책 거울 자기가 입던 옷 자기가 길들여 놓았던 동물 수많은 자기의 재산들을 고스란히 도둑에게 다 빼앗기면 안되기에 건질수만 있다면 하나라도 더 건져내는 나의 소유물을 구원해야만 하는 주인 다움을 펼쳐야 합니다.

이제서야 내 자체가 성경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게 아니라 원래
원래 인간 자체가 하나님입니다. 성경 말씀입니다.

교회에 다니면 다닐수록 더욱더 그것을 감추고 살 뿐이고
세상에 살면 살수록 성경과 상관없다고 본다는 자체가 그런 심뽀인 겁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삶의 기준을 보면 유일한 최종적 목적은 자아입니다.
그렇다고 교회 다니면 달라질까요? 그 목적 또한 자아입니다.

자아를 어디에 소속이 되든 누구를 믿든 상관없이 자아를 위하지 않는 행동들이 없었습니다.

그래놓고 이제와서 그렇게 말을 한다면
핑개에 지나지 않지요

그렇지만 그 핑개를 통해서
자기의 겹겹이 껴입은 무화과 나뭇잎의 실체를 하나식 보게 되는 기쁨도 보게되는 겁니다.

이제 우리는 이 껍질 벗겨지는 재미를 누려야 합니다. 주님이 아프게 매를 대시면서
하나 하나씩 벗기시는 그 사랑에 탄복할 수 밖에 없도록 아니 이런 죄도 나에게 있었나 하고 깜짝 깜짝 놀라고,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죄 마저도 흰눈같이 깨끗하게 씻게 하신 그 피의 능력에 더 깜짝 놀라지 않고는 못배기는 그 사랑의 울타리에 철저하게 갇혔다 라는 것을

이제는 자아의 종이 아니라 사랑의 종이 되어서 누리게 되어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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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31 10:48:06,

근데 이 세상 모든 자체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쓰여지는거 아닌가요
사탄도 마찬가지구요

다만 선한쪽으로 쓰이냐 악한쪽이냐로냐죠

다들 이왕이면 선한쪽이고 싶어하는게 사람의 마음이겠죠

바울이 말했듯 내가 이 백성을 위해 지옥으로 가도 좋으니 구원하소서의 사랑은 오직 주님외엔 없는데 자신이 그존재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상태이죠

답변:

그러니까 선악이라는 것이 허상입니다.

주님 쪽으로 다 흐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주님만이 쥐는 선악을 우리가 법을 쥘 필요가 없는 겁니다. 주님만 법 쥐는 것이 영광 그 자체입니다. 쓸데 없이 인간이 법을 쥐게 됨으로써

비 창조와
비 언약과
비 사랑과
비 믿음과
비 거룩의 실체를

예수님의 언약 완성을 통해서 그 차이를 알게 되는 겁니다.

그저 인간은 선악을 다룰줄 모르면서 도리어 선악에 갇혀서 평생을 선악에 휘둘려 살 뿐입니다. 법에 농락만 당하는 겁니다. 힘을 다룰줄 모르면서 힘을 소유하고파 도리어 힘에게 평생 농락 당하는 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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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31 10:49:34,

이렇든 저렇든 다 감사함인데 요샌 저를 포함해서 헛되고 헛되나니가 참 많이 실감납니다 ㅋ

답변:

[헛되다]와 [감사함]이란 그 반대의 상황인 절대로 헛되지 않은 가치있는 것들을 완벽하게 추구 했는데 누가 홀라당 허무하게 다 태워버렸을때에

내가 내 스스로의 실수로 인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철저한 간섭으로 전부를 올인한 것이 날라가 버렸을때에 비로소 헛되다 라는 것을
외부의 작용으로 인해 아는 겁니다.

내 실수로 인한 헛됨은 결국 다시 시도하고 다시 허물어진 건물을 세우면 그만인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허물어진 성벽도 아무리 쳐도 다시 바벨탑을 세우고 다시 허물면 국가를 세우고 다시 집단을 세우듯이 세우지 않으면 자아란 의미가 없기에 이유없이 세워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못 세우면 묵시에서까지 손을 대어서 하나님 나라를 건축하겠다고 달려드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 헛됨이 있을 수가 없지요.

성령이 오셔야 비로소 처소가 예비 됨으로써 그 전이 완성이 되는데 성령이 직접 짖는 전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아를 붕괴 시켜버리고 세우는 성령의 전 곧 우리 곧 교회입니다.

즉 성령의 전이란 육체의 전이 허물어 졌다 라는 배제성을 앞장세우면서 증거 됩니다.

그렇다면 그 전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자기를 쳐다보지 않겠지요.
헛되다 라는 것을 제대로 알았으니깐요

그 성령의 전은 예수님만 자랑하고 예수님만 쳐다 보도록 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쳐다 봤자 시험들 뿐이고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기에 헛됨에서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헛됨을 뼈저리게 알았기 때문일 겁니다.

자아의 성숙 성화? 그것도 헛됨을 알기에

주님의 성화 성령님의 성화를 보게 될 겁니다.

감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감사할 조건만을 갖추는 것이 인간의 감사입니다.
그것이 다 날라가 버려도 도저히 감사할수 없는 조건 뿐인데도 감사가 나온다면 그것은 내가 조건을 갖추어서 나온 감사가 아니기에 비로소 범사에 감사 라는 말씀이 덮친겁니다.

스데반 집사는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자들을 보고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알지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자아를 잊어버리고 천사의 얼굴로써 잔다 라고 표현합니다.

특히 복음을 제대로 증거 했는데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성경지식에 정반대로 증거 했습니다. 그 내용이 사도행전7장인데 놀랍게도 오늘날 성화론자들의 주장과도 정반대 됩니다. 그래서 거슬려서 미움받아 죽임을 당합니다.

즉 조건에 맞는 감사란 그거 다 사기입니다.

내용도 감사할 조건이 없고 그렇다고 남들이 감사하게 듣는것도 아닌 도리어 열받아서 죽이게 되니

감사는커녕 스데반 혼자 성령에게 뿅가서 혼자 감사할 뿐이지 아무도 감사하지 않는 겁니다.

바로 이 아무도 감사하지 않는 정반대의 상황에서
성령님은 감사를 심는 얄미운 짖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랬을때에 과연 감사가 나오느냐 라는 거죠.

아무리 그동안 감사를 훈련해도 그거 다 뻥이라는 말을 제가 하고픈 겁니다.

종교인이라서 말버릇처럼 배인 장난말이지만 주님 만큼은 이 감사에 대한 양보 없이 독점적으로 감사케 하십니다. 그거 당하면 님이나 저 또한 뼈도 추리지도 못할 정도로 감사가 조건없이 나오게 되니 얼마나 무서운 의미인줄 모를 정도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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