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소원과 인자 

가인이 열심과 정성으로 제사를 드렸다.
아벨도 양과 기름 분리로 제사를 드렸다.

미래에서 아벨의 제사에 완료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렇다면 가인은 그 미래의 영광인 완료를 보고 기뻐하면 된다.

문제는 자신이 비교되었고 그 차이가 벌어짐에 대한 불공평적이다는 법의 생각을 부여하기 시작한다.

누구는 편애하고 누구는 미워하느냐 이다.

맞다 법적으로 그렇게 밖에 해석이 안된다. 다른 해석이 나올수 없다.

이제 가인은 아벨을 선택한 그 미래와 싸워야 할 언약을 상대로 이겨야 하는 비언약의 세계를 주장하게 된다.

(창 3:15, 개역)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남녀가 똑같이 남남으로 태어나거나 똑같이 여여로 태어났다면
구지 남녀 라는 구별과 차이를 둘 이유가 없다.

인간 쪽에서의 차이 차별이 없는 불공평이 없는 상황이라면 더 이상의 문제가 필요없고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신도 필요 없이 자력으로 다 해결해 줄수 있는 입장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차이를 이미 창세전에 계획해 두셨다.
이제 여자는 뱀과의 차이를 드러내는 약속의 기능을 드러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차이가 없는 뱀과 다를바 없는 뱀에게 속한 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남자는 뱀에게서의 구원자 책임자 역할을 해야하지만
정작 둘째 아담을 드러내기 위해서
철저하게 여자를 뱀에게서 건져낼수 없는 무기력한 자임을 드러내게 된다.
아니 도리어 여자에게서 미래를 보게되는 자기에게서 나올수 없는 생명을 보게 된다.

이렇듯 차이를 드러내는 입장에서 모두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라는 것을 드러내는
피조물의 역할을 톡톡히 감당하게 되어 있다. 진노의 그릇으로든 긍휼의 그릇으로든 말이다.

이 모든 것이 법적으로 보이는 불공평함으로만 보인다면 죄의 소원에 걸려든 자일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을 드러내는 사랑의 세계임을 보게된다면
그 자는 예수님이 직접 새로 지은 눈에 의해서 보게 된 자일 것이다.

자 그렇다면 애초부터 인간을 위한 창조란 없었다.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비창조를 앞세워서 차이를 증거하는 창조로 통해서 알게 된다.

비창조 즉 이런 것을 절대로 만든적이 없다 라는 것을 앞장세워서
이것만을 만들었다 라는 창조를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영광이 되지 않는 목적들을 앞장세워야 한다. 그것이 비창조이다.

예수님은 선악을 아는 인간을 만든적이 없다 라는 것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를 통해서 증거하신다.

오로지 은혜를 아는 자만 만들었다 라는 창조의 목적을 선악을 아는 인간에 대한 비창조와 대비시키면서 증거하신다.

그래서 선악을 아는 인간들은 선악을 암과 동시에 영생의 나무에 손을 댈려고 한다.

부랴 부랴 치워 버리신다.

단절과 차단이 되었다.

이제 죽음으로써 인간은 비창조에 해당되는 피조물로써 낙인이 찍힌다.

바로 이런 비창조의 목적 (하나님이 창조하지도 않은 것들의 목적방향성)
비창조의 소원이 죄의 소원으로 구체화 된다.

가인은 법적으로 아벨의 제사로 발생된 불공평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법적 공평성을 추구한다.
이제 편애나 미움 따위는 없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편애나 미움 따위는 법이 만들어낸 것이다.

자기가 그렇게 불공평하게 보고서 자기가 그렇게 불공평을 제거하는 법적 재판관의 기준이 되어버린다.

바로 그런 법적 소원 법적 목적을 인간은 자아에게 두어버렸다.

그래서 점점 죽음의 그림자를 감추어야 하기 때문에
더더욱 법을 많이 쥐면 쥘수록 법과 가까운
하나님과 같이 되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왜 법을 쥐게 되었을까?

상대적인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그래서 죄의 소원을 늘 넘고자 법을 점점점 더 깊게 쥐고서 법으로 자기를 가리워야만
남으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게 된다.

사랑은 이제 법이 있는 세상에서 살수 없게 된다.

저 마다 자기방어를 위한 법만으로 자기를 사수하는 세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신도 자신의 그런 뜻에 부합되는 신으로써 적용이 된다.

이마표로써 자기를 방어하는 무화과나무잎으로써 사용한다.

아무도 나를 건드릴수 없도록 방어막의 요새 성이 되어달라고 말이다.

사랑이 없는 그 빈자리를 대신하여
튼튼한 성곽으로 가득 채운다.

인간의 믿음 또한 행함 또한 사랑의 빈자리를 대신 채우고자 결핍을 넘어설려는 달음박질이다.

(롬 10:2, 개역)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채울려고 하면 할수록 그 구멍은 더욱더 커진다. 지옥이라는 스올 구멍이 더더욱 죄의 소원으로써 덮치게 된다.

결국 예수님의 상대적인 인물로써 유대인은 죄의 소원이 덮쳐진
갇혀있는 인간으로써

하나님께 향한 열심은 덮쳐졌으나(죄의 소원)
지식은 좇은 것이 아닌 (십자가의 지혜가 덮쳐지지 않은)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의 상대적인 세력인
죄의 소원이 덮친 뱀의 후손으로써 유대인들이 동원되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죄의 소원은 어떻게 넘길 것인가?

가인의 후손에게서 어떻게 죄의 소원을 이길자가 있는가?

그렇다면 이 죄의 소원(데스노트)를 이긴자를 봐야 할 것이다.

그 분이 바로 인자 다.

(마 23:35, 개역)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눅 11:51, 개역)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이 인자를 쳐다보지 않는 자는 예수님이 퍼부은 저주의 소원에 또 말려들게 된다.

아벨의 피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다 감당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저주를 이길 것인가
예수님까지 직접 나서서 퍼붓는 저주인데 말이다.

간단하다. 참으로 뻔뻔스럽게 간단하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게 보이는가?

의외에 간단하다 아주 아주 간단하다.

그 데스노트에 예수님을 적으면 되듯이

죽지 않는 자를 적으면 된다.

즉 예수님 이름으로 아벨의 피부터 사가랴의 피 까지 즉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사만을 쳐다보면 되는 것이다.

자 그렇게 되면 내가 드리는 제사 내가 드리는 믿음 행함 이 모든 것을 버리면 되고
오로지 예수님이 직접 드리는 제사만을 앞장세우면 된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12제자들의 3년 동안의 동행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이끌어주시는 예수님의 믿음만을 본 자는 자기 믿음의 회의를 느끼고 버리게 된다.

반대로 자기의 믿음과 제사를 끝까지 예수님의 믿음 앞에서 주장한 자는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할수 없게 되는 걸림돌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멈추어 버린다.(니고데모)

즉 죄의 소원이란 죽음 앞에서 그 내막이 드러난다. 그 비밀이 공개 된다.
죽음을 넘지 못하는 자기의 제사 자기의 믿음 자기의 행함 자기의 사랑을
예수님이 직접 드리는 제사 예수님의 믿음 예수님의 행함 다 이루었다 라는 십자가 앞에서
여전히 고수하고 주장하는 것이 죄의 소원이다.

이유 없이 그냥 붙들고 있다. 이유는 딱하나 안 믿겨지기 때문에 자기의 믿음만이 믿겨질 뿐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믿음을 예수님의 믿음이 박살냄으로써 비로소 죄의 소원을 넘어갈수 있다.
죽음을 넘어가는 길은 죽음을 이긴 그 이름이 나를 이끌어 당기는 것이다.

그러나 법을 도저히 포기 못하는 자들의 특징
참으로 아이러니 하게도 가인처럼 똑같이 돌을(법적 집행권 실행) 들어서 자기의 제사
자기의 교리 자기의 신앙 자기의 교회 자기의 행함을 끝까지 변호하고자
법을 어긴자를 심판하게 되어 있다.

가인은 아벨을 돌로
성전 사수자는 스데반을 돌로
율법 실천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돌로

이 동일한 모습은 율법이라는 명분 아래에서 죄의 소원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그러나 그들 속에는 죄의 소원을 이긴자는 아무도 없다.

(창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율법을 아무리 제대로 지켰다 하더라도 죄의 소원은 왜 이길수가 없는가?

(롬 7:21, 개역)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22, 개역)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개역)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5,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성화론자들은 오늘날 죄의 소원이 십자가를 믿는 자기들의 믿음으로 인해 해결 되었다고 하지만 정작 그들에게서의 사랑의 실천이란 사랑이 아니라 법적인 구실을 갖추는 죄의 소원의 전형적인 모습 뿐이다.

사랑을 실천하면 할수록 자신이 사랑이 아님에 대한 자복이 없다. 상한심령이 없다. 그렇다면 이 상한심령이 없다 라는 이 결핍도 결국 무슨 수로든 채워버리면 또 가리우게 되는
제대로 죄의 소원의 올무에 걸려든 것이다.

그래서 남들이 인정하는 믿는자의 구색만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신학적인 학문을 다 섭렵해서라도 갖추게 되는 그 껍데기는 점점점 비밀이 된다.

그 비밀을 간직한 자들의 내막들이 인자의 모습으로 인해 다 들통난다.

바리새인은 실천신학자들이다. 그리고 사두개인과 나머지 성전종사자들은 성전주의이다.

그들의 죄의 소원이 어떻게 드러나는가?

예수님이 그들과의 충돌 속에서 하나 하나 드러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이다. 이 충돌이 없으면 그 비밀은 벗겨질 리가 없다.

우리들도 저들 속에서 이 충돌이 없었다면 그들 속에서 나올수가 없듯이

이 충돌을 앞장세우시는 십자가의 영이 왜 인자를 앞장세우지 않으면
거룩의 무화과나뭇잎으로 가리운 그 가면을 벗겨낼수가 없는지(할례)

인자야 말로 나의 진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죄의 소원이 덮치는 바람에 인자와 가장 거리가 먼
인자를 싫어하는 모습만을 갖추는 모습이다. 이것이 가인의 제사다

그러나 더 나은 제사는 무조건 이유없이 나에게서가 아니라 나의 밖에서
외부에서 이미 완료된 채로 다가온다. 그것이 인자의 모습이다.

인자로써 법궤에 담긴다. 인자로써 십자가에 달린다.

나의 진짜 모습을 십자가에 못 밖겠다는 취지이다. 이것이 아들의 소원이다.

비창조성
선악을 아는 법을 쥔 인간들을 만든적이 없기에
반드시 그런 인간들은 십자가에 못 밖겠다는 취지이다.

그런 자들이 바로
아벨의 피부터 사가랴의 피 까지의 약속의 피에 뛰어들 수 밖에 없는
약속의 소원에 동원되는 자들이다.

즉 아벨의 피부터 사가랴의 피가 남이 아닌 자기 때문에 흘려진 피 임을 알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그 피 속으로 뛰어드는 자들이다.

나의 제사를 버린 자들이다.
나의 희생을 충성을 수고를 버린자들이다.
나의 믿음 행함 사랑을 버리고

더 나은 제사인
예수님의 피에 뛰어드는
예수님의 피만 옳았음을
자아에게서 나오는 것의 부재를 누락을 통해서 보게 된다.

이 인자를 앞장세우는 이유가 이제야 드러난다.

창세전의 계획은 바로 이 인자가 담겨지는 십자가를 예정했기 때문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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