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전쟁이란)

혈과 육의 싸움과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의 싸움인 믿음

(엡 6:12, 개역)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11-06 22:15:13,

성화구원이란 내가 하는게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것이다 나는 그저 그 분의 도구가 되서 행하게 될뿐이다

성화구원란 말을 사람은 오해한다 내가 한다고 생각하는데 주체가 다르다

주님은 사람을 통해서 자신의 영광을 사람을 통해 나타내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의 인격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담는 도구가 될수 밖에 없다

주님은


답변 :

오늘은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볼까 합니다.

마침 c3tv 라는 기독교 방송에 이애실 사모의 성경강좌를 지나가듯 봤는데
거기서 나온 표현 중에 삼위일체와 요즘의 신학이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의 결합과 그리고 세 번째 인격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삼위일체를 이야기 하면서 공동체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썻는데 공동체 가족의 하나님이 공간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분이 또 3과 1이라는 숫자에 표현될수 없는 분이 숫자에 표현되도록 인격화 되었다. 즉 낮아지셨다. 즉 도저히 이해불가이니까 공간과 시간과 숫자를 동원해서 인격화 즉 도통 이해할수 없기에 이해할수 있도록 우리 인간에게 다가오기 위한 의미에서 낮아진 인격화가 필요했다 라는 제가 들었습니다.

자 이런 의미에서 요즘 목사들은 기독교의 위기를 잘 알기 때문에
포용력으로 흡수 빨아들이는 식의 퓨전의 자세를 갖춥니다.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이 정 반대이면서
이것이 퓨전이 되어야 교인 하나라도 붙잡아 둘 수 있고 한 명이라도 삐치지 않도록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바로 이점을 오늘 좀 중요시 할려고 합니다.

왜 삐칠까봐 걱정하느냐 하는 겁니다.

성화구원을 오해할까봐 그 목사가 걱정합니다.

인간의 성화가 바로 이런식입니다. 인간의 숙제라서 그런 겁니다. 늘 미완료이기에

그러나 예수님의 성화란 바로 이런 인간의 성화를 들추어내면서 차이성을 드러냅니다.
즉 오해하도록만 일 하신다는 겁니다.

어려운 인격이라는 표현을 자기들도 이해 못하면서 구지 즐겨 사용하겠다면
쉽게 말해 낮아지심을 인격이라고 우리도 같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즉 인자입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되신 낮아지심이 곧 인자 되심인데
이 인자가 그냥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처럼 낮아졌다 라는 것은
반대로 인간은 절대로 낮아진적이 없는 피조물이 된적이 없는
자식이 된 적이 없는 하나님이 되었다 라는 것을 들추어내는 일을 전담하시는 분이 바로
영이고 그 성령이 바로 이 인자를 앞장세우면서 인간이라고 하는 육체를 다 수씨고 돌아다닌다는 겁니다.

그럼 인격이 된 이 인자는 인간들이 이해가능이 아니라 이해 되고도 남을 정도로 왔지만
인간자체가 이해불가능한 신의 자리를 고집한다는 그 점을
이해 되고도 남을 정도로 낮아지신 어린아이 곧 무시받는 인자로 오신 그 인격은
맞짱뜨듯이 다 밟아버렸다는 겁니다.

이런 입장에서 인간의 싸움은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의 성곽 사수입니다.

그렇다면 영의 싸움은 딱 하나입니다. 그 성곽 허물기입니다.

그럼 혈과 육의 인간 끼리의 싸움은 뭡니까?
바로 누가 더 큰 성을 지니고 있냐 라는 서열 매기기입니다.

이 서열 매기기가 중요한 이유는 (마 4장의 3가지 경제 정치 종교 3가지 마귀의 시험)
인간과 인간 끼리의 싸움 속에서 승리하여 성공해서 살아남았다가 중요한게 아니라

한 곳에 힘을 집결 시켜서 분산된 또는 나약한 성들을 이 집결화 된 성곽에 M&A 합병 하듯이 결집시키자 라는 겁니다. 이것이 먼저 선행이 되면 나머지 조그마한 개인의 성들은 이 큰 성의 섬김으로 인해서 든든한 방어막을 구축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애굽입니다.

애굽의 10가지 재앙은
곧 그들의 신을 허물기 인데
정작 그 신들이 보호하고자 하는 최종적인 마지막 보루가 마지막 신이 바로 인간 이라는 겁니다.
즉 신이라는 시스템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인 셈이지요

개구리 재앙 다산 신 왜 다산이 필요할까요? 숫자에 얽매일 필요도 없는 신인데
그러나 인간은 이 다산이 필요합니다. 신이 된 것을 과시하는 유일한 증거죠

돌을 떡덩어리 되게 하는 기적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인간 자체가 늘 메시아를 꿈꾸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구원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이런 예가 많지요 영혼의 의사가 목사다 영혼의 아버지가 담임목사다 라는 이유도
정작 자신이 의사의 대상이 되는게 환자가 아니라 남을 고치는 구원자 이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그런 차원에서 제가 성화론을 공격하는 이유도 주님의 성화에 대상이 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 자신이 중보자가 될려고 또는 전도 당해야 할 입장이 남을 전도하겠다고 달려들고 자신이 용서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꾸 남을 용서할려는 위치에 서고파 한다는 의미에서 성화론이 정반대로 간다고 한 겁니다. 그 내막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될려는
또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운운하지요

그 정반대가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그런 선악적인 생각인 선악의 바벨탑을 늘 공격하는 공격자 입장이고

인간은 늘 요새를 방어하고 사수하는 입장입니다.

그런 생각을 제대로 드러내는 것이 성에 잡입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투입 되니까 인간들의 모든 내막들이 다 들어나는 겁니다.

원수의 성문을 연 거죠

자 그럼 인간이 도구가 된다는 말은 어패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도구 필요 없이 할 수가 있거든요
오히려 도구는 방해가 됩니다. 쓸모짝도 없습니다.
즉 이 쓸모짝도 없다 라는 부재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도구로 삼는데

도구가 되니까 그 도구의 가치를 또 주장합니다.
저번에 그릇 론에 대해서 똑같은 방식이듯이 그릇 숙제가 되듯 말이죠


2008-11-06 22:20:07,

그래서 주님은 사람이 없으면 당신을 드러낼 방법이 없기에 허당이다

부부가 서로 결혼해서 자녀를 낳야지만 아버지 어머니를 들을수 있듯이...

그래서 주님은 사람에게 집착하시는 것이다

답변 :

거봐요 그릇 없이는 하나님도 병신이다 이게 그들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병신 안 만들렬려면 우리가 해야 한다 인간 숙제 이게 종교죠
졸지에 가치가 생기니까 돈을 에너지를 넣어야 유지가 되는 겁니다.

바로 그런 모든 인간의 믿음이 인간 자신의 하나님 됨을 드러내는데 동원되는데
그래서 성곽을 쌓고 교회를 짖는데

이것을 공격하는 유일한 분이 인자 라는 인간의 병을 제대로 아는 자입니다.

죽음을 제대로 해석하는 분은 인자 뿐입니다.
딴소리할까봐 남이 아닌 우리 인간의 개개인의 손에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유일하게 죽음을 제대로 이긴 분은 예수님 뿐인데

죽음도 못이기는 의사가 자꾸 의사 짖을 할려고 하니까

웃낀다는 거죠

제가 방금 이런 이야기 해 놓고
자 제가 이런 내용을 여러분에게 알려 줬으니까 난 가치가 있잖아 라고 나온다면
앞뒤 모순입니다.

내용을 자기가 뒤엎어버리는 거죠.

성화론자들이 사람들에게 자꾸 무엇을 심는고 하니

그 내용을 성경적으로 했으니까 날 버리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적이란

그러니까 널 버리겠다고 나와도 상관없는 말씀이 운동한다는 실감나는 현실을 공짜로 누리는 것인데

자꾸 가치를 매길려고 하니까 공짜 은혜가 아니라

행함이라는 노력의 댓가를 양다리 걸치듯 걸친다는 겁니다. 찐드기 또는 논에서 피 빨아먹듯 마지막에 딱 달라붙는 거머리처럼

100% 올인에 꼭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자기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둘려는 겁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영의 일에 또 이런 일이 있다 라는 것을 항상 증거합니다.
아간의 범죄와(구약) 사도행전에서 아나리아와 삽비라 부부의 행동들이 바로 이런 취지입니다.

믿음도 자기의 영역으로써 자기 믿음을 갖추겠다는 겁니다.
사랑도 자기의 영역으로써의 자기 사랑을 소유하겠다는 겁니다.
용서도 자기의 영역으로써의 자기 용서를 갖추겠다고 7번 용서했는데 몇 번 더 할까요 묻지요

즉 쪽팔리니까 그냥 맨손으로 시집 못가고 맨손으로 결혼 못하겠다는 겁니다.
뭐라도 들고가서 결혼 생활에서 무시 받지 않고 당당하게 행복을 누리고프겠다고 하는 거죠.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서라도 말이죠.

그래서 율법이라는 전남편에게서 아직 제대로 덜 당해봐서 그 따위 소리를 하는 겁니다.

마귀를 풀어 놔야 그 따위 소리를 못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아직 그 부분에 대해서 선을 애매하게 그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따위 소리 하는 목사에게 덜 사기 당해봐서 그런 겁니다.

제대로 당해 봐야 아는 겁니다.

이게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자가 인간의 그런 술수에 안넘어가는 이유는 그 어떤 인간도 인자를 잔인하게 죽이는데 있어서 예외가 없었다는 겁니다. 아무리 그들의 좋은 믿음과 또는 그들끼리에게서 믿음없다라고 취급받는 무신앙자들 곧 두 계열 속에서 양쪽 모두에게서 다 당해본 분이 인자입니다.

죽음을 제대로 당한 겁니다. 자칭 아벨계열이라고 우기는 쪽과 자칭 가인계열이라는 쪽의 양쪽 계열에서 다 짖밟혀본 분이

인자 홀로 펼치는 전쟁에 들어가 볼려면 (인자의 십자가 전쟁)

아직 싸움
전쟁
씨름에 대해서 운운할 입장이 못 되듯이 말이죠

(이 땅에 미련있는 자들이 무슨 하늘을 소망하겠습니까? 유대인이 묵시신앙을 소유하게 된 이유도 땅의 연장선을 하늘에 이을려고 함이지 단절이 아니지 않습니까?)

2008-11-06 22:24:57,

사람은 싸우거나 적대시 할때 상대방과 싸운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껍데기이다 그 속에 있는 영과의 싸움이다

우리는 영적전쟁을 하고 있는것이다

주님은 창조전에 타락한 사탄을 잡아 내기 위해 영적싸움을 싸움을 하고 있는것이다

요샌 어느정도 님과의 말과 근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면서도 아직 차이성은 있지만요

답변:

사단에게 사로잡힌 자가 무슨 영적인 전쟁을 볼 줄 알겠습니까?
그래서 찬양이란 원수가 졸지에 생김으로써 부르게 되는 영적인 사건입니다.
찬양 기도란 졸지에 원수가 생겨서 졸지에 전쟁을 요청하게 되고
그 전쟁의 내용을 자랑하는 겁니다. 이미 이긴 전쟁이기에
전쟁의 내막을 외치는 겁니다.

자기가 전쟁할게 없습니다.

이미 이긴 전쟁이 끝난 전쟁을 왜 또 합니까?

남자가 군대 같다 오면 살아나왔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여자는 지겹도록
남자의 성공담인냥 듣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자기가 살아난게 아니라 누가 살려준 이야기들 뿐입니다.

바로 이 차이입니다.

성화론자들은 누가 살려준 분이 없기에 자기의 이야기 곧 자기가 얼마나 성화 되었는가를 외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살려준 자 라면
예수님이 어떻게 나를 상대로 나를 적으로 삼아서 전쟁에 이겼는가를 외칩니다.

내가 원수 이거든요 이게 찬양입니다.

다윗언약이란 바로 인간이 왕됨을 하나님 됨을 포기한적이 없기에
졸지에 그 왕의 인간성전(요새:캐슬)을 어떻게 깨 부수고 허물었는가를 외치는 자가

바로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이 죄인은 나를 이렇게 허물었습니다 라는 것만 외칩니다.

그런데 성화론자 중에는 이런 자들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신비롭습니다.

그리고 죄인보다는 이제 의인 다운 삶을 살아봐야 되지 않느냐 라고 외치는 겁니다.

그리고 더 이상 죄인과 십자가 라는 용어를 앞장세워서 자신의 이중성을 드러내지 말자 라고 나옵니다.

현실적인 자아를 외치는데 그것이 성화된 자아 라는 겁니다.

이 자아를 현실적으로 갖추자 라고 합니다.

제대로 믿는 자아 로써 말이죠 (이게 바로 사실입니다. 진리가 아니라=진리냐 사실이냐)

그래서 보다 나은 자아를 성화시키는데 있어서
이제 과거의 죄인 이라는 의미와 십자가 라는 것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더욱 나은 자아를 추구해야 하기에

그런 말뿐인 용어인 십자가 죄인 이라는 용어에 머물지 말고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또 이미 과거가 된 십자가와 죄인이라는 의미는 이제 현실적인 내일을 준비하는 자들에게는 퇴보적인 신앙만 될 뿐이지 (특히 예정론)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고 방종하게 될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주장을 너무나도 자칭 기독교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종교의 사람들에게서 한결같이 듣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자 그럼 예수님의 믿음은 바로 이런 인간들이 하나님과 같이 된 그 속성의 내막까지 다 들추어내기 위해서 십자가의 피만을 앞장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필요합니다.

왜 인간이 가짜 피조물인가를
그 속에 뭐가 들어있는가를 다 들추어내면서 증거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이 새로 창조한
창기 세리 강도를 통해서 이 가짜 피조물인 선악을 아는 자들과 대조 시키는 겁니다.

어떻게?

중간에 낑겨 터져 죽어도 상관없는

법과 법에 의해서 죽는 자로써 말이죠.

이것 외에는 예정 된 게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자의 모습이요 주님의 새로운 인간을 찍어내는 주틀 본이 되는 겁니다.

붕어빵을 찍어내기 위해서 이 인격?이라는 주틀로써 찍어냅니다.

천국에는 의인은 없구요
천국에는 죄인뿐인 창기 세리 강도들이 가득차 있습니다.

예수님의 나라에는 알곡들이 없습니다.
아무리 봐도 쭉정이 가리지들 뿐입니다.

알곡은 구지 긍휼이 필요 없거든요.

자기가 자기 발을 씻고 깨끗해 질 인간이 어떻게 하늘나라를 탐내는지를
우리는 전남편에게 제대로 당해 봄으로써 그 내막을 알게 됩니다.

종말이란 바로 이런 전쟁의 상황만을 밀어붙이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 더러운 발을 씻는 자와
아무리 해도
자기 더러운 발을 자기 스스로 씻을 수 없는 자를 둘로 나누는 상황이 바로 종말입니다.

(사도바울이 그것을 깨달았거든요 영의 일의 결론은 바로
귀 있는 자 귀 없는 자를 예언된 대로 나누시는 것을 구체화 하는 것임을 말이죠
그것을 볼려면 자기 신체가 한 것을 싹 다 잊어버릴 때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모든 수고와 전도를 그렇게 해놓고 그런 결과를 봤다면
자기가 전도한 그 행함을 얼마나 하잘 것 없이 쳐다 봤으면 그런 고백을 성령이 덮쳐서 하게 되었을까요? )

(행 28:24, 개역)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행 28:25, 개역)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행 28:26, 개역)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행 28:27,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행 28:28, 개역)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행 28:29, 개역) 『(없음)』
(행 28:30, 개역)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행 28:31, 개역)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그래서 막을 놈들이 없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할 전쟁은 없구요 자기는 도리어 목격해야할 증인의 입장 뿐이고
성령이 어떻게 예언을 이루는지를 보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한 일이 없다 라고만 나올 뿐이지요

그래서 이방인에게 넘어가는 겁니다.
이방인을 믿게 하기 위해서 말인가요? 아닙니다.
더욱더 못 믿도록 하기 위함이지요.

자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두 말할 것 없지요

마치 선택론 운운할때에 이스라엘은 이방인은 당연히 빼버렸듯이
이제는 거꾸로 된 입장인 겁니다.

원가지도 안 아끼는 판국에 접붙인 가지가 뭐 잘났다고 말이죠.

그래서 창기 세리 강도를 앞장세워서

더더욱 인격 즉 낮아짐 즉 못믿도록 안믿겨지도록 이해안되는데 더 안되게끔

구원이 인간의 손에 포착이 더더욱 불가능하게 이방인의 세계에 들어가서 그 안되는 불가능성의 진가의 맹위를 떨치는 겁니다.

그래서 막을 자 없는 겁니다.

(히 11:38, 개역)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히 11:39, 개역)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히 11:40, 개역)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사람을 인간으로 보시지 마시고 인자로 보세요

인자를 당할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 히11장이 아니라
히11장은 이렇게 지독스럽게 예수님 자신의 믿음을 밀어붙여서 당한 자들이 이런자들이니
이제 더 좋은 것을 예비 받은 자들인 오늘날 신약의 사람 곧 종말의 사람들은
더 좋은 예비로써 더 확실하게 제대로 당하도록 하겠다 라는 운동력있는 말씀 스스로의 다짐 반드시 그렇게 하고야 말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제 죽었다 복창하고 당할 일만 남았습니다.

(참 전쟁 곧 싸움 곧 화냄이란 그 목적에 따라 다릅니다.
화냄의 목적이 있습니다. 전쟁의 목적이 있습니다.
참 재미있게도 참선지자의 화냄과 거짓선지자의 화냄이 따로 국밥이 아니라 서로 연계된 입장에서의 화냄이요 목적이 드러나는 겁니다.

참선지자는 미래의 영광이 덮쳤기에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의미를 둔 다는 자체를 다 날려버리고 미래가 왔다 라는 것으로 끝내자 라고 합니다.

반면에 거짓선지자는 바로 그런 참선지자의 행동에 화를 냅니다.
어떻게 현실을 무시하고 자아를 무시하고 하나님이 일하시는가에 대한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 라는 주장이
상대적으로 거짓선지자가 방어하는 입장에서 변호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하얀악마입니다. 그런반면에 역사 속에서 보여지는 참선지자의 그림은
그야말로 검은 쓰레기를 자기 신체에 담는 모습 뿐입니다. 그래야 현실을 날려버리는 것에 실감이 나지요. 온갖 더러운 죄를 자기 신체에 다 담아버리니까 땅에 더 이상 새것이 없다 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무엇 때문에 화를 냄으로써 그 사람의 인생의 목적이 드러납니다.

돈이 없고 돈 없는 자신을 자책하는 자는 돈이 목적인 자입니다.
자신에게 깨끗함이 없고 선한 것이 없다 라는 것에 화를 내는 자는 의인이 목적입니다.(성화론자들) 그래서 바리새인들에게 일부러 공격대상이 되도록 현장에서 잡힌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이 배치시키는 겁니다.
지나가는 안개에 집착하고 그 안개 때문에 화내는 자는 자아가 목적입니다.

이런 모든 인간의 목적을 빼앗기고 예수님의 목적이 심겨진자는
싫어버린바 된 인자만을 쳐다본다는 이유로
저런 인간들의 목적과 부합되지 않는 이유로
불뱀 취급 당하는 겁니다.

왜?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 이 세상을 악하다 라고 규정해서 말이죠 이것이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목적입니다. 이 세상을 악하다 규정함입니다.

(눅 6:27, 개역)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눅 14:26, 개역)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눅 16:13, 개역)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요 7:7,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요 12:25, 개역)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 15:18,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 15:19, 개역)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23, 개역)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그래서 그 증거가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셔서 인자를 불뱀 달 듯이
인자를 높이 단 겁니다.

너희들이 이렇게 했지 라고 말이죠.

세상의 목적을 그 속내를 제대로 까발린 겁니다

(요 3:12, 개역)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요 3:13, 개역)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 3:14, 개역)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개역)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개역)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7, 개역)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8, 개역)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19, 개역)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3:20, 개역)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요 3:21, 개역)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이 요3장 15절은 이 땅의 실상을 드러낸다는 매를 대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완벽하게 반대로 해석해 버렸기에 밑에 부분에 세상을 심판을 제대로 규정한다는 의미를 희석시키는 거죠.

간단하게 속는 이유는 문자 때문입니다. 인간의 몸이란 취사선택의 단어를 흡수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화도 성경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부분만 취사선택만 할 뿐입니다. 그 버릇이 바리새인이나 지금의 우리나 다를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수제자 베드로 라 할 지라도 지금 주님이 항상 기도하시지 않으면 정밀조사하면서 부추기는 사단의 목적에 다 넘어갈 뿐입니다. 성화론이야 말로 제대로 넘어간 자들이 아니고 뭐 겠습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그들 보다 나은 것이 단 한 개라도 있습니까?

일체 없습니다. 아니 없도록 일부러 주님이 그렇게 만드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제대로 당해봐야 하는 겁니다. 제 대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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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영웅들을 제대로 보시면 그들이 얼마나 수고와 노력과 그 어려운 정상을 얼마나 힘겹게 이겨내었는지 그야말로 찬사를 보내고 남습니다. 그러나 그 노력이 대상이 없으면 동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타인이라는 동기를 통해서 그 수고와 노력이 나오는 겁니다. 가수들은 자기 노래를 들어주는 자가 없으면 재미없어서 자기가 노래 부를 이유를 망각하게 됩니다. 듣는자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목숨을 걸고 노래는 하는 겁니다.

자 여기서 그런 찬사를 보내는 자들에 의해서 역으로 제대로 짖밟혀 봐야지만
거기서 제대로 이웃이라는 개념이 생깁니다. 진짜 타인이 생깁니다.

그 동안의 자기에게 박수를 보내는 대중은 자기의 투사입니다. 자기의 좋은 이미지에 호응해 주고 자기의 나쁜 이미지를 채찍질 해주는 자기의 확대된 자기입니다. 우상

그런 허상의 대중들에게 즉 사랑이 아닌 법에게 (선악) 철저하게 제대로 짖밟혀 보면
비로소 진짜 타인이 생겨 버립니다. (강도만난 자와 선한 사마리아인)

진정한 이웃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이웃을 내가 똑같이 당한대로 그 이웃에게 행해버립니다. 이상합니다. 자기가 당해 놓고 또 자기가 피해자였는데 도리어 가해자가 되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

그랬을때에

나의 유일한 참 이웃은 나에게서 하나님과 같이 된 그 죄를 제대로 끄집어 내는 자입니다.

이 우상성을 끄집어내는 전쟁을 나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 자는 이웃이 아닙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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