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08.11.07 16:17

(골 1:24, 개역)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11-07 11:10:07,

주님이 나보다 더 큰일을 할것이란 말을 어떻게 봐야 하나요

시대마다 사람들의 의식이 높아지기에 말씀도 그만큼 더 깊어지고 확장되기에 그렇다고 하는데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것은 그리스도의 고난만 채우다 가는것이다 하는데요

답변 :

구절이 생각이 안 나서 비슷한 구절을 찾아봤습니다.

(마 11:11,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눅 7:28,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뭐뭐 보다 더 크다 라는 말은 항상 상대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겁니다.

즉 예수님 보다 더 크다 라는 말이 아니라

성령의 일 자체가 이미 샘솟는 끊어지지 않는 관계에 따른 것이기에
양적인 의미를 오히려 올무처럼 사용될 수밖에 없도록 오해를 유발하는 식입니다.

마치 더 나은 제사처럼 말이죠

또 실제로 양적이다 라고 해도

많이 탕감받은자 일수록 많이 사랑한다는 의미가
사랑의 무한대를 상대적인 한계를 지닌 인간의 사랑과 대비시키는 의미겠죠

즉 인간의 사랑은 항상 조건부 이다 라는 것이겠죠.

그래서 원수 개념을 해소할려고 하지만

주님은 그 반대로 원수개념을 해소하는게 아니라 더더욱 원수 만들어서
자기의 탕감 능력을 극대화 시키는 거죠

자 이런 의미에서 영의 일에 대한 해서을 우리는 정반대로 해석합니다.
이유는 간단 합니다. 인간을 그 영의 일에서 소외 시키고 배제시키면 간단한 문제를
자꾸 그 영의 일에 인간을 자꾸 개입 시킬려고 하기 때문에
늘 미완료로 취급해 버립니다.

시대마다 사람들의 의식이 높아지기에 말씀도 깊어지는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의식은 별로 높아진적이 없습니다.
제자리 뛰기 일 뿐입니다.

사람들 스스로가 그렇게 의식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말씀이란 죄의 깊이를 파고들어야 하기에
말씀에 의해서 죄가 깊어지지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죄를 지어서 죄가 깊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사람들의 의식이 높아지는 것이 시대에 따라 그렇게 된다면
인간들 속에서도 시대에 더 뒤떨어지는 의식이 낮은 자들이 더 많이 생기는 법입니다.

원시 시대 보다 더 못하게 살고 있는 자들이 이 지구에 엄청 많습니다.

앞으로 시대가 흘러가면 갈수록 더더욱 원시 시대보다 더 못하게 살다가 죽어가는 자가 더더욱 많이 태어날 겁니다.

자 그리고 의식이 더 높아지는 자들도 많이 생기겠지만
참 재미있게도 그들에게서 죽음이라는 문제는 더더욱 접근 불가이게 될 겁니다.

예를들어서

황우석 박사가 줄기세포로 모든 병든 세포를 줄기세포의 새로운 것으로 대처하면 인간은 죽음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는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라고 생명연장을 꿈을 꾸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죽음을 파고든 죽음 깊이의 문제가 아니라

더더욱 죽음으로부터 도망칠려는 모습인 겁니다.

의식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점 낮아지는 겁니다.

그 연구과정에서 벌어진 그 모든 배경은 결국 돈이라는 우상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명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또는 죽음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평생연구하고 우상을 평생 숭배할 뿐입니다.

예수님 곧 말씀은 인간들이 포착을 못하도록 더더욱 죽음 깊숙이 저주 깊숙이 지옥 깊숙이 파고 들어갑니다.

불 속에 들어가는 그 불속의 깊이 속에 자신의 생명을 꽃 피웠습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의 의식은 이 양배추의 껍질과 같은 그 죽음의 포장들을 다 벗겨서 더 깊숙이있는 생명을 추구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근처도 가기 전에 불의 화염에 다 타버립니다.

구원이란 화염검을 쥐고 있는 이 영들의 칼을 통과해야 동쪽문인 구원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누구도 근처도 못하고 다 불에 타버려서 자신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우상이었다 라는 사실이 벗겨지는 거죠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들은 내가 다는 지역보다 더 넓은 지역으로 돌아다니면서 더 큰 일을 한다 라는 의미는

양적인 의미의 땅따먹기 도사인 광개토대왕의 영역 넓히기가 아니라
(실제로 너희는 가서 땅끝까지 전하라 라는 말씀을 선교단들이 그렇게 해석한다는 자체가 영의 일을 반대로 해석해서 그런 겁니다. 땅끝이란 원수의 성문을 열 듯이 죽음의 뚜껑을 연다 라는 지옥문을 여는 죽음의 세계에 까지 복음이 증거되는 그 현장에 목격하는 증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건방지게 지옥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불 근처도 못가죠
복음이 어떻게 지옥 끝까지 말씀 스스로가 운동력으로 나를 멱살잡아서 언약의 성취가 되는지를 똑똑히 보라 라는 뜻입니다.)

큰 일 자체가 너를 잡아서 빠지지 않게 놓치지 않게 제대로 멱살 잡았으니 도망갈 생각 말아라 라는 뜻입니다. 즉 큰 일이 주체이고 너는 그 큰 일에 당해야 할 판국이다는 겁니다.

성화론자들이 해석 근처도 못가는 이유는 항상 주체를 반대로 해석 합니다.

인간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 인간을 멱살 잡고 빼도박도 못하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자꾸 인간은 운동력 있도록 해석을 하고 (인간숙제)
고난이나 큰 일이나 등등의 성경의 모든 개념을 인간숙제의 대상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웃기는 소리죠
도리어 숙제의 대상이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즉 인간은 죽어 있다는 겁니다.
죽은 주제에 자기 주제를 파악을 못해서 나오는 소리입니다. 갇힌 주제에 무슨 숙제를 해요

그래서 큰 일 곧 성령의 일 또는 은사란

인간의 숙제로도 건드리기 싫어하는 죽음을 자꾸 건드린다는 겁니다.

(조금의 힌트를 드리자면

특히 여자들의 찬양이 또는 어린아이의 찬양이 특이한점이
전쟁을 붙여놓고 자기는 쏙 빠진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중간에 낑기는 의미와도 같은 의미입니다.
부정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가
바리새인에게도 뻔히 걸리고
예수님에게도 뻔히 걸리면서도
자신의 죄악을 놓고
두 세계의 싸움을 붙이게 된다는 식입니다.

한나의 찬양 마리아의 찬양도 마찬가지
예루살렘 입성 때의 호산나 라고 부르는 어린아이의 찬양도
예루살렘에서 벌어질 제대로의 두 세계의 싸움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마리아는 성령이 임해서 이제야 제대로 하늘의 전쟁을 보게 됨으로써
그 하늘의 뜻을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찬양을 합니다.

그리고 정작 본인은 싹 빠집니다.
마치 동물의 세계에서 암컷이 있다는 존재 자체로
두 수컷이 괜히 싸움붙게 되는 사랑의 전쟁을 보여주듯이 말이죠.

자 그럼 누가 이 죽음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느냐에 따라 생명이라는 사랑의 결실 곧 평화를 이룬다는 겁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여자라는 존재는 두 세력을 싸움붙임으로써 약속의 언약의 속성에 목적두게 하지요. 그래서 찬양이란 누가 원수 문제를 해결하느냐입니다.

그렇기에 첫아담은 그 여자를 하나님 때문이라고 탓을 돌립니다.
내 뼈중의 뼈요 살중에 살이라는 한 몸의 의미를 자발적인 자기 챙기기 라는 이유로
한 몸을 거부한 겁니다. 한 몸이라는 아주 신비로운 사랑의 세계를 거부한것이고.

누가 이 내 뼈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는 한 몸을
저주라는 죽음 문제를 해결하면서 이루는가를
고난에 뛰어드신 분을 통해서 보는 거죠.

일부러 고난 아니 고생할려고 하지 마세요
고난 마저도 자기를 알아달라는 취지로써 인간은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은사 마저도 자기의 숙제로 보고 있으니 이미와 아직의 긴강상태라는 미완료라고 우기는 헛소리를 하는 겁니다. 완료를 제대로 못 봤기에 제대로 율법에게 당해봐야 그 딴소리 못하는 겁니다.)

영의 일이란 죽음에 뛰어들도록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난이지

인간 숙제의 고생과는 다릅니다.

지금 그 목사는 고난을 고생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참으면 된다고 보는 거죠.

억지로 참아 본들 그것이 도리어 목사의 한을 품는 그 한 풀이가 교인들 자기교회에 얽매이도록 하는 겁니다.

오늘날 성화론자들의 모든 행함들은 인간의 한 풀이 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렇게 정의로운 나를 안 알아주면 가만히 안두겠다는 겁니다.

복음이 제일 싫어하는 인간들이 정의롭고 선하고 착하고 바른소리 하는 인간이지요.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닙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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