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란

2008누가복음 2008. 11. 7. 02:08

이름이란

하나님이 어떤 이름에 주목을 하고 있다는 것은 곧
그런 하나님을 흉내내는 인간들이 자기의 이름에 집착하는 것을 통해서도 알수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은 비밀이 되었다.

그리고 언약 속에서

아브라함 언약 =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 언약 = 이삭의 하나님
야곱 언약 = 야곱의 하나님
모세 언약 = 모세의 하나님
다윗 언약 = 다윗의 하나님
새 언약 = 예수님

누구 누구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으로써 인간의 이름이 가입이 되는 것은
바로 인간들의 자기 이름에 대한 목적을
언약은 바로 그런 인간의 목적을 들추어냄으로써 그 차이로 예수님의 이름과 대비시키는 것이다.

죄란 인간 개개인이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이 규정하는 죄에 의해서 인간의 목적이 드러난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이름이다.

그렇다면 그 죄의 반대인 의는 예수 라는 이름에 목적이 된다.

이름이 중첩되었고 압축파일로써 압축된 것들을 펼쳐 보면
아브라함의 죄 이삭의 죄 야곱의 죄 모세의 죄 다윗의 죄 모든 인간의 죄를 유일하게 규정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의 / 이삭의 하나님의 의 / 야곱의 하나님의 의 / 모세의 하나님의 의
/ 다윗의 하나님의 의 / 모든 인간의 십자가의 의

를 완성함으로써 의로 인해서 죄가 완성이 된다.

이런 이름 속에 인간의 모든 활동들이 압축 되었듯이
그 이름에 대비된 은혜도 그 상대적인 이름으로써 모든 이름을 무릎꿇고자 활동하는 이름 앞에 그 내막이 드러난다. 죄란 오로지 예수님에 의해서 들추어지며 규정 되듯이 인간의 사변에서 나오는 죄란 없다.
그래서 인간이 자아라는 이름 곧 허상에서 충실한 이유는
이름에 충실하신 여호와를 흉내내고자 따라하는 것이다.

어제 중요한 그 설교를 통해서 이 어렵다는 이름의 의미가 이제야 조금 감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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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rossvillage.tistory.com/entry/새-이름-이사야-62-1-3


새 이름

2008년 11월 5일                                    본문 말씀: 이사야 62:1-5

(사 62:1)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사 62:2) 『열방이 네 공의를, 열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사 62:3)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사 62:4)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사 62: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이 인간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 인간이 기대하거나 만들어낼 수 없는 새 일을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여기서 드러납니다. 불신자들에게는 순전히 자신이 기대하고 자신이 원했던 것, 자신이 해내었다고 해석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기에 비해서 신자는 자신이 기대하지도 않았고 원치도 않았던 새로운 것이 자신에게 도달되어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선물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런 점에서 신자는 불신자와 견줄 바가 못됩니다. 이 새로운 것이 오늘 본문에서는 면류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영광스러운 면류관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잠시 창세기 2장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때에는 인간쪽에서 유혹을 가질 때였습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만 한 것이 인간을 유혹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것은 너무나 영광스러워서 더 이상 성도로서는 유혹거리가 사라질 수밖에 없는 토대를 형성합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성도의 영광스러움에 매혹을 갖고 계십니다. 즉 “나는 너 때문에 산다. 너를 볼 때마다 나 하나님은 만족스럽다” 할 정도이십니다. 물론 성도에게 뭔가 가미되었습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얻고자 하는 것들이 가미된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것이 주어졌습니다. 그것이 뭘까요?

그것은 ‘새 이름’입니다. 새로운 이름이 주어졌다는 말은 모든 약속과 말씀이 성취된 상태가 되어 그대로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에게 있어 ‘이름’이라는 어떻게 지어지는 겁니까?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집에 강아지를 하나 사놓고서 금방 이름을 짓지 말아야 합니다. 제대로 이름을 지으려면 그 개와 약 10년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같이 살다보면, 그 개의 습성이나 버릇이나 외형의 특징들이 나올 것입니다. 납작하다든지, 먹을 것만 챙긴다든지, 낯선 사람이 와도 짓지 않는다든지 하는 성격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특징과 성격을 모두 한데 모아 함축시켜서 최종적으로 붙이는 묘사가 그 개에 합당한 이름이 될 것입니다.

성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성도가 받은 새 이름은 없었습니다. 그 대신 특징과 형용사가 붙었습니다. 예를 들면, 구약 성소에 일하던 자가 대제사장입니다. 그 대제사장에 복장에 보면, 어깨에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가슴팍에도 12개의 보석이 달려있는데 그 보석 하나하나마다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져있습니다. 따라서 대제사장이 걸어가거나 이동할 때마다 12지파 지파가 같이 이동하는 셈이 됩니다.

이 대제사장은 장차 오신 메시야의 그림자요 견본인물입니다. 하지만 아직 새 이름은 없습니다. 다만 형용사만 붙습니다. ‘거룩한 대제사장’이라고 말입니다. 즉 ‘거룩함’이라는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기대하고나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과 약속에 준해서 주어질 것입니다.

거룩함 뿐만 아닙니다. 영생, 천국, 구원, 죄용서, 자비, 공의, 영광 이 모든 것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실려서 그 실현될 시점만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종착점에 터져 나온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인 ‘주의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이름이란 단순한 한 인격에 초점이 있는 이름이 아니라 모든 약속의 실내용이 다 농축되어 있는 개념입니다.

사람의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이름이란 단지 출생할 때만 붙여놓은 그 시절의 호칭이 아닙니다. 앞으로 그 인간이 살아가면서 스스로 목적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달성해가는 동기로서 작용하는 것이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예를 들면, 누가 여러분에게 욕을 한다면, 여러분은 기분 나빠할 것입니다.

냉철하게 물리적으로 따지고 보면, 욕이라는 것은 일시적으로 공기 중에 흩어질 소리 에너지에 불과합니다. 글로 써놓아도 기껏 잉크 자국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해서 우리들 마음을 힘들게 할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의 명예와 위신과 체면을 위하여 살아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이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는 것은 모두 자기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 이름이라는 개념을 뜯어보면, 거기에서 숱한 과거의 행적들이 촘촘히 적재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인 영욕이 개인의 이름 안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하나님의 약속의 집합체로서 나타났습니다.

우리 성도가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의 결정체가 바로 성도로 하여금 새로운 이름에 부합되는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에게는 ‘말씀 완성’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성도가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곧 자신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말씀을 지켜서 새 이름을 따낸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이름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대단히 만족하십니다. 따라서 성도는 오직 그 이름, 즉 그 이름 안에 들어있는 말씀의 완성으로 촉촉이 젖셔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늘 자신의 이름을 지워야 합니다.

마치 옛 도장을 가지고 와서 새로 이름을 파달라고 도장 파는 사람에게 맡기면 그 사람은 쇠톱으로 옛 이름을 말끔하게 지워버리게 됩니다. 이처럼 주의 이름을 부르려면 자신의 이름을 말끔하게 지워버리는 일이 되는데, 자기 이름을 지워버린 것은 곧 자신의 판단과 자신의 행위에 그 어떤 의미를 두지 않고 지워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말씀을 지킨다고 우기게 되면 행동하는 자와 그 행동이 과연 말씀에 부합되는지 판단하는 자와 동일 인물이 되어버립니다. 북치고 장구치고 혼자 다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말씀에 대한 판단은 임의대로 분류하게 되는데 예를 들면, “이 말씀에 대해서 잘 지켰다. 그거 그렇다, 최선을 다했다, 위대했다, 노골적으로 죄 지었다 등등”의 수준으로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주의 이름이 모독받게 됩니다. 즉 하나님이 주신 완성적 수준이 인간의 자기 이름에 준한 일방적 판단으로 무시당하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즉 “이런 죄인을 보고서도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다니! 이는 다 주의 이름에 의한 용서와 거룩과 공의로움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이름이 주의 이름을 모독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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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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