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과 달의 차이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11-10 12:48:30,

눅10:4 절과 눅 22:36의 차이를 둔것은 왜 인가요

겉옷을 팔아 검을 사란 뜻과  영적의미가 무엇인가요

(눅 10:3, 개역)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눅 10:4, 개역)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눅 10:5, 개역)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눅 10:6, 개역) 『막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눅 10:7, 개역)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눅 22:33, 개역)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눅 22:34, 개역)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눅 22:35,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나이다』
(눅 22:36, 개역)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눅 22:37,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
(눅 22:38, 개역) 『저희가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답변:

눅 22:35절이 바로 눅 10: 4절을 내용을 언급한 것이겠죠. 그런데 이제는 반대로 36절
전대 곧 지갑을 가지지 말라고 했던 것을 가지라고 하고
그리고 주머니 곧 가방을 가지지 말라고 했는데 이제는 가지라고 하고
신발을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제는 신발을 빠지고 칼을 챙기라고
칼이 없다면 반드시 있도록 하기 위해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취하라고 합니다.
위의 3가지를 반드시 챙기라고 합니다.

그래야 기록된 예언대로 불법자의 동류 곧 강도로 취급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다 라고 했고 제자들은 칼 두 개 있다고 말하니 옳지 그것으로 충분하다 라고 합니다.

3가지 숫자나 상황의 준비됨을 성경에서 상당히 많이 다루어집니다.

다말이 시아버지의 물증을 확보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도장 도장끈 지팡이 라고 끈과 도장을 하나로 묶지 않고 일부러 분리해서 3이라는 의미를 맞출려고 하는 듯 보입니다.

또 출애굽 할때에 애굽쪽은 최종적인 장자재앙으로써 심판이 임하는 반면에
이스라엘 쪽은 아주 이상한 행동을 취합니다.

유월절이라는 피를 기념하는 제사를 드리는데 (사실 이 피 때문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출 12:11, 개역)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그냥 기념하는 제사가 아니라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라고 합니다.

이 상황이 그대로
반영이 된 것이 바로 눅 10장에 70인을 늑대 소굴에 보내면서
평화 곧 안식의 전쟁에 투입 시키는데
지갑 가방 신발을 가지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치 말고
집(집단)에 어느집에 들어가서 문안 곧 평안을 빌라 라고 합니다.

만약 평안을 빌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빌었던 평안을 받을 사람이라면 집에 머물게 하여서서로의 안식이 소통이 될 것이고
만약 평안을 빌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빌었던 평안을 받지 못할 사람이라면 집에 머물지 못하도록 하게 되니 평안이 되돌아 올 것이다 라고 합니다.

마치 시비를 또는 전쟁을 누구 쪽에서 먼저 선포하고 들어오는가 하면
평안을 비는 쪽에서 시비를 걸고 들어오는 겁니다.

구약의 모든 전쟁이 이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로 신약의 상황을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를 고칩니다. 그래서 평안 곧 안식이 주어집니다.
그 마을 동네 집단에 평안 곧 안식을 주어지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네는 안식으로 보고 있지 않고 위기로 보게 됩니다.
그들의 주인을 꽁꽁꽁 묶어서 강도처럼 늑탈하듯이 빼앗아서
공포의 포로됨에서 해방케 해주니까 나중에 딴소리 합니다.

돼지 떼 속에 귀신을 집어 넣어서 강물에 몰살케 만들어 버리니까
예수님을 쫏아냅니다.

모세를 일방적으로 가만히 있는 애굽에 보내어 시비를 겁니다.
피의 제사를 여호와께 드려야 하는데 그 제사를 목격해야할 제사의 피를 발리움 당해야할 내 백성들을 내어놓으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내어놓으면 됩니다. 그리고 다시 노예 시키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뭔가를 세우는데 있어서 정신없는데 그런 일을 시키면 주인을 기분 나쁩니다.
뭐를 세울까요? 인간이 주인됨을 세우는 바벨탑 건립이요 인간 이름을 내는데 있어서
주의 이름 여호와 라는 이름은 하등 쓸모짝도 없는 버림받아야 할 이름이라는 것을

여호와 께서 먼저 선방을 날려서 그들의 범죄를 캐내기 시작하는 겁니다.

아무튼 강도의 입장은 여호와이고 예수님이고

인간들은 빼앗김을 당해야만 하는 물건의 주인됨의 입장입니다.

이제 이 물건(전리품=이스라엘)을 어떻게 빼내는가 어떻게 주인(돈)을 결박하느냐
에 대한 지혜로운 이야기가 마치 불의한 청지기의 충성(사랑)으로 인해
그 불의함이 강도됨이 옳았다 라고 외치도록 찬양토록 하겠다는 취지가
하나님 나라 곧 천국(예수님)이 침투하여서 이 땅의 주인들 손에서 가나안 땅을 점령하듯이
제대로 승리하여서 빼내겠다 구원케 하겠다는 취지인데

가나안 땅의 전쟁이 희한한 전쟁입니다. 반대의 전쟁입니다.

그렇기에 눅 10장에서 늑대소굴에 시비를 거는데 칼과 힘을 가지고서 시비를 거는게 아니라
오로지 모세가 피를 기념하기(피 남편이니까) 위해서 제사를 드르는 것에
이 피의 의미를 모르는 상대방으로써는 반드시 무시 받을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이 전쟁의 유발의 근거 증거물로 삼게 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나 모세나 미끼가 되어서 빨리 물어라 물어라 라고 유혹하는 식이지요
선악과 나무를 안보이는 곳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가장 잘 보이는 곳 동산중앙에 두듯이 말입니다.

여호와가 누꼬 난 모르겠다 라는 파라오 왕의 고백이 이제
여호와의 영광을 유발케 합니다. 오냐 알려주께
그리고 작살내고 한쪽은 일방적으로 구원해주고

그럼 늑대소굴에 일부러 보내는 이유는?
평안 곧 안식을 증거하는 이유는?
난 그런 예수 싫어 난 알고싶지 않아 라는 것을 유발케 하는 겁니다.
오냐 알고싶지 않다구? 제대로 알려주마 라고 작살내고 안식이 뭔가를 톡톡히 보여주는 겁니다.

결국 복음증거란 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도를 심는 겁니다.
약속을 심는 겁니다. 약속을 심으면 약속이 알아서 그 집안을 거들내는 시한폭탄인지
아니면 그 약속 때문에 진정한 안식이 오는지
12명이나 70명이나 그저 시한폭탄 또는 대공지뢰밭을 깔아 놓는 운반책일 뿐이지
12명이나 70명은 그 자체로써 폭발케 하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 집안을 날리거나 또는 안식케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약속의 몫이지 그 사람들은 운반책 그저 메신저 그저 우편배달부 택배기사일 뿐입니다.

자 그렇다면 왜 우편배달부가 중요하지 않느냐 하면
약속(폭탄인지 안식인지)이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우편배달부도 이 약속의 내용에 해당되면서 전달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본인들 조차도 그 약속을 담고서 증거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희한한 내용 곧 약속을 믿어야 할 판국에 놓여있지
건방지게 이 약속을 남에게 믿도록 해야할 입장이 아닌 겁니다.
본인들이 도리어 믿어야 할 판국에 놓인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사도행전의 결론을 자기가 여행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많이 믿도록 했다 라는 결론을 절대로 낼수 없고
예언대로 믿을자 믿고 안 믿을자 안 믿는다는 예언된 대로의 상황이 벌어진 것을 정작 본인이 믿어야 하는 겁니다.(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자꾸 인간은 자기가 뭔가를 해 버리면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에 뭔가 보탬이 되었다고 착각하는데 그거 아직 무서운 어르신 못만나봐서 그런 겁니다. 자기가 전하는 것이 지옥과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지옥과 천국이라는 두 회오리 태풍 쓰나미를 자신이 직접 격고 박살이 나고 다시 살려줌을 당하는 입장에서 증거하게 되니까 건방지게 자기에게 공로를 일체 돌릴수가 없는 겁니다. 육의 자랑이 육의 행함이 일체 안 나오고 도리어 영의 일에 철저하게 소모품이 되는 식입니다.)

자 그럼 가나안 전쟁의 특징이 뭐냐 하면 힘의 전쟁의 반대입니다.
일부러 힘 없는 전쟁을 반대의 상황을 추구하는 겁니다.
예로 기드온이 군사를 뽑을때에 숫자를 자꾸 적은 쪽으로 뽑습니다.
자꾸 세 번씩이나 많다 줄여 줄여 줄여 라는 식으로
손에 물 댄 것이 거룩하냐 입을 바로 물에 수그려서 마시느냐 그거 일체 중요하지 않고 무조건 숫자 적은 쪽입니다. 그렇다면 힘을 전쟁 숫자의 전쟁이 될수 없기에
전쟁의 승리 가망성 가능성을 높일까요? 줄일까요?
줄여버립니다. 오로지 죽고자 하면 살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는 믿음의 전쟁 방식으로 일부러 반대만 뽑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자기의 선악을 포기해야할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숫자 많고 힘이 많은 것이 승리가 된다는 선의 사고방식
숫자 적고 힘이 없는 것은 패배가 된다는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는 악이 된다는 부정함이 된다는 그런 선악의 생각에 무조건 반대로 행하는 겁니다.

인간이 성화를 달성하면 거룩해 지고 성화 못되면 비거룩해 진다는 생각들을 그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기 위함이지요.

자 이제 이런 내용을 이해하게 된다면 밑의 질문들의 답도 쉽게 이해 되겠지요.

자 눅 10장의 평안을 비는데 전혀 평화스럽지 않는 안정감이 없어 보이는 식으로 증거합니다. 구약의 참선지자가 미래의 영광이 덮쳐버렸다면 뭔가 좋은 이미지를 풍기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풍겨버립니다. 풍채 없고 흠모할 모양 없듯이 말이죠.

자꾸 이 땅을 뜨자 라는 식으로 빈지갑 빈가방 맨발로써 이 땅에 머물면 안돼 빨리 뜨자 라는 것을 전하는 것이 평안이라고 하니 누가 그것을 평안이라고 해석을 하겠습니까?
그렇게 못 받아들이지요. 그런데 이게 문제는 맞습니다. 그것이 평안입니다 라고 받아들이는 자는 함께 먹고 더불어 마시는 식입니다.

그런데 만약 안 받아들이면
이 땅에서 왜 떠야 하는지를 너를 파라오 왕처럼 강팩케 만들어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빨리 뜨자 라는 메시지를 무시했다는 취지로써 이 땅이 천국의 공격대상으로 그대로 보여주는 출애굽 의 상황 애굽의 박살 심판을 너의 집안 곧 너의 주인을 결박케 하는 강도의 입장으로써 부정적으로 다가오는 입장으로 톡톡히 보여주겠다 라고 합니다.

자 그럼 이것은 이제 이해가 되는데

이 상황에 이제는 완전히 반대의 상황인 눅 22장의 모습은 그럼 뭔가?

이게 참 신기롭습니다. 마치 위에서 설명한 것을 제자들이 이제야 눈치챈냥 아 그때의 그 상황이 이제야 본격적으로 실행화 되는 구나 라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자 그럼 공격 우아 돌격 앞으로 전쟁의 승리의 내막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듯이 하나하나 쏙쏙히 보여져야 할 것을 기대하면서 제자들은 또는 성경을 보는 우리들은 이제야 실행이 된다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아니 그런데 예수님은 갑자기 지갑 챙겨라 가방 챙겨라 칼 까지 반드시 옷을 팔아서라도 구입해서 갖추어라 라고 합니다.

완전히 반대의 상황이 되는 거죠.

힘을 갖추지 말라는 일부러 힘 없는 전쟁을 추구하는 가나안 전쟁의 특징이
이제 거꾸로 되는 듯이 보입니다.

힘을 도리어 갖추라고 보이게 되는 거죠.

그런데 사실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마치 가나안 정탐을 하고 난 뒤에 12지파가 전쟁도 개시하지도 않았는데
개시한냥 또 더 웃기는 것은 마치 다 이긴냥 너희 지파는 이 땅을 차지했구나 너희 지파는 이 땅을 가져라 라고 웃끼지도 않는 소리를 하게 되는 겁니다.
이기지도 않았는데 뭘 가져요? 이겨야 전쟁을 실행을 해야 땅을 차지하든지 말든지 하지
전쟁도 하지도 않은채로 이미 다 갈라먹는 겁니다.

이런 웃끼지도 않는 배분에 역시 말도안되는 소리에 어쩔수 없이 동참한냥 우리들의 품성을 드러내는 자들이 있습니다. 즉 험난한 곳은 피하겠다고 제일 안정적인 곳을 가질것이라고 하는 자들 (단 지파)입니다. 어차피 말도 안되는 소리면 땅 다 차지하겠다 라고 안 나오고 더웃끼는 것은 웃끼는 소리이다 라고 여기면서도 가장 안정적인 것을 골라서 차지하겠다 라고 나온다면 의식을 안한다 라고 해놓고서는 반드시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마치 충성된 종과 충성치 못한 종 비유처럼 충성치 못한 자가 당신은 무서운 분이다 라고 의식을 하면서도 은행에 넣지도 않고 그렇다고 남길려고도 하지 않고 원자금 그대로 땅에 묻었다고 잃은것도 없이 원금 그대로 주겠다는 발상처럼 바로 그 선악의 사고방식을 유발케 하는 겁니다.

그런것처럼
이제 본격적으로 개시 할 줄 알았는데 다 이루었다 라고 완료되었다 라고 게임 끝 이라고 합니다. 승리 완료 라고 합니다. 아니 게임 이제 할라카이 끝났다고 하니 어리둥절 합니다.

그런데 그 승리의 내용들이 부챗살처럼 이제 펼쳐집니다. 그 승리의 내용이 뭔고하니
안식의 완성 평화의 완성이 뭔고 하니

지갑 챙기고, 가방 챙기고, 칼을 들어서
강도 패거리로 잡혀야만 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너희들이 잡을려는 강도 여기있다 빨랑 잡아가라입니다.

도망치거나 숨거나 잡히기를 지연시키는 그런 것이 일체 없이
저쪽에서 빨리 강도잡을수 있도록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서
여기 있다 어디보노 여기 있다 카이 라고
자수도 아니면서 나 잡혔다 라는 것을 승리처럼 안식완성처럼 평화완료처럼 추구하더라 말이죠.

그럼 우리는 반대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무슨 안식 완료이고 평화가 되는 것이고.

오히려 그 시점부터 제자와 예수님과의 사이가 내분이 일어난 냥 멀리 멀리 간격이 멀어지게 됩니다. 도망쳐도 소용없이 붙잡히고 평안은커녕 도리어 적군이 아닌 아군 쪽에서의 체계성 없음과 나약함과 어리석음과 무의미함과 3년 동안 따라다녔다는 것 아무소용없이 다 날라가버리듯이 허무하게 느껴지도록 도리어 평안은커녕 절망과 절망의 지옥 깊숙이 빠져들게 뭔가 팔이 어긋맞은냥 자신들이 애굽파라오 왕처럼 작살이 나는 식으로 꼬로박게 되니
겉잡을수 없는 그 상황에서 베드로는 벗어날려고 아무리 꼬끼오 꼬기오 꼬끼오 울어도 벗어날 수 없는 깊은 수렁 속으로 빠뜨리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인간이 눈치챈 선이나, 또는 이러면 안돼 절대로 그럴순 없어 라는 악처럼 느껴지는 부정함 결과의 그 선악의 시나리오와 전혀 상관없는 승리 완료입니다.
도저히 완료 라고 수용 못하는 완료로써만 승리하신 겁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완료, 승리)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고
그가 죽임을 당함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 방식으로써만 일을 하시니
결국 제자들은 눈치를 챈게 아니라 끝까지 눈치를 챌수 없도록 하시는 겁니다.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도저히 믿기 불가능한 것들의 일만 터트리는 약속이라는 폭탄인 겁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강도 여기있다 라는 취지와
또 이미 승리 완료 했지요 라는 취지로써
승리한 군사들이 승리를 외칠때에 칼을 높이 높이 드는 것처럼
기드온의 칼이요
사실상 칼은 없었습니다.
칼은 승리의 주체입니다.
예수님의 승리가 이런식으로 완료 되었습니다 라고 칼을 높이들면서
나도 이 승리에 동참했습니다 웃샤 웃샤 라고 승리의 함성을 외치는
이미 외쳤다고 칼을 쥐게 하신 겁니다.
희한한 전쟁 승리죠 칼 한번도 안 휘두르고 승리했다고 칼을 높이 들어서
내가 봤습니다. 내가 산 증인입니다. 라고

승리는 주님 혼자 다 이루고
그 완료된 것을 공짜로 칼 들었다는 이유로 완료를 퍼붓는 겁니다.

(삿 7:20, 개역)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하고』

거봐 거봐 십자가가 승리했잖아 라고 말이죠. 뿌뿌뿌 나팔을 부는 겁니다.

좀 설명이 길었는데 좀 정리 해보죠

앞의 눅 10장의 상황은
약속이라는 의미를 뭐뭐로부터 빠져 나오는 상황으로써 증거한 겁니다. 애굽 탈출
이 땅의 탈출
그런 의미에서 탈출자의 모습을 반영한 모습입니다.
빠져나와야 할 곳에서 머물지 않는 모습을 반영합니다.

그러니 가질 필요 없지요. 신도 지갑도 가방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눅 22장은
뭐뭐로부터 빠져 나와서 어디어디에 들어가는 입성의 상황을 말해주는 겁니다.
이미 입성했으니 입성한 증거로써 갖춘 모습인 겁니다.
무엇을 갖추었을까요? 포로됨에서 해방을 갇힘에서 자유를 눌림에서 놓이게 함을 희년을 누리는 자의 모습인 자유입니다.
그 자유가 이 전쟁의 완성 전쟁의 승리(칼) 이미 평화는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을 선언하고서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믿음이라는 겁니다.

미래의 영광(완료)가 덮친 참선지자들이 정작 완료되었다고 외쳤지만 자신들의 신체에는 무엇을 담습니까? 심판을 담지요

예수님이 지금 그렇게 보여주는 겁니다. 승리다 야호 해 놓고서는
잡히죠
매맞죠
못박히죠
찔림당하죠

이게 무슨 승리냐 말이죠.

결국 승리는 믿도록 하기 위한 승리가 아니라
거봐 거봐 못믿지롱 라고 불가능성을 더더욱 구체화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지혜는 어리석음만으로만 갑니다.
인간이 믿을만한 것에 반드시 걸림돌서만 거리끼게 하는 찝찝함으로만 완료가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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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0 12:52:23,

참 그리고 검 둘은 무엇을 말하는것인가요

답변 :

강도 여기 있습니다. 잡아가세요 바로 접니다 라는 이 의미가
얼마나 자유 롭나요.

어느정도로 자유로우냐 하면 죽어도 상관 없을 정도로 자유롭습니다.

결국 칼은 예수님의 승리 곧 기드온의 칼이요 라는
왜 승리가 되었는데 라는 물음에
주님이 제물 되심으로써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었어 라는 답을 증언함으로써
승리의 요인을 칼 그런데 그 칼이 전쟁의 승리요인인데 자신의 희생
그것이 바로 피 흘림 이였다는 겁니다.

즉 믿음이란 항상 부재를 앞장세우는 실상입니다.
기도온의 칼이 우리 눈에는 현실이지만 정작 기드온의 칼은 없구요 또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없음에도 불구하고 없다는 것이 있다고 우기는 모든 것들을 허상임을 밝혀내는 실상을 드러냅니다.

결국 기도온의 칼이여 라는 의미가
제자들의 지갑 가방 칼을 챙겨서가 절대로 아니요
지갑 가방 칼과 전혀 상관 없이 주어진 진짜 자유가 벌리는 승리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승리이다

아 그럼 그분이 옳았고 우리는 틀렸구나
그래 그분만이 옳았고 자유자였어 그리고 반드시 나는 아니였어 틀렸어 라는 것을 반드시 집어넣음으로써 영의 소욕에 육의 소욕이 왜 아닌가를 부재성을 반드시 앞장세우면서 증거하죠.

칼이든 지갑이든 허리띠든 지팡이든 뭐든지 그것을 챙겼냐 안챙겼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것들은 하나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그럼 달을 쳐다보라는 화살표일 뿐인데 우리는 달은 안 쳐다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옳냐 틀리냐에만 따지는 겁니다.

결국 칼도 누락성을 띄는 의미입니다. 방향성만 드러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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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0 12:56:33,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바꾸는 능력이 말씀이다

하나님 말씀을 생활속에서 사용하는것이 가장 능력있는자가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삶으로 바꾸는것이다 그것이 섬김이 되는것이고 전쟁에서 섬김이 가장 이길수 잇는 큰 무기이다  이것이 영적인 전쟁의 특징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를 통해서만 진리로 나타날수 있다 물론 생명이 있는 교회를 말하는것이지요

답변:

그래서 위에서 설명을 좀 길게 한 겁니다. 메신져는 본인이 전쟁에 승리해야할 조건을 갖출려고 하면 안됩니다. 메신져는 그저 누가 승리했느냐 라는 소식을 배달 할 뿐입니다. 그런데 재주는 예수님이 다 부리고 돈은 승리의 공로는 인간들이 챙겨버리는 그런 방식이 바로
성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삶이라는 의미를 부각시키는 이유 입니다.

제가 분명히 칼은 하나의 방향성을 나타내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귀하다는 이유로
남들이 달을 가리키지 못한다는 이유는 그 손가락 만큼은 가리킬수가 있다는 이유로 자꾸 특별나게 취급할려고 한다는데 있다는 겁니다. 성화론자들이 예수님이 구원시킨 나 이기에 나를 특별나게 취급해야지 멋대로 취급하면 안된다는 식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승리완료 해 놓고서는 본격적인 처참함 속으로 몰아붙이는 자유를 발휘했을때에 제자들은 예수님과 그렇게 가까이 지냈던 그 사이가 엄청나게 먼 분이 그동안 가까이 와 주셨다 라는 것을
자신들이 넘을 수 없는 그 강이 덮쳤을때에 비로소 안 겁니다.
아무리 가까이 갈려고 해도
그 하찮은 닭의 울음소리 조차도 못 넘어설 정도로
그렇게 먼 분이 그동안 가까이 해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 그럼 몸도 일종의 손가락이요
교회도 다 손가락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면 될 뿐이지
손가락 자체를 옳게 선하게 만드느냐에 승부를 거는 것은
영적인 전쟁을 하는 자가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영적인 전쟁은 영만 할 뿐입니다 라고 고백할때에
그 고백하는 육은
영에게 제대로 당해 봤기에 전쟁의 대상이 제대로 되었기에
육의 소욕이 박살이 나서
저분이 나를 이겼습니다 라고 나오는 것이지
영의 전쟁을 육의 소욕으로 끌어 당겨버리니까
거꾸로 영의 전쟁을 자기가 완료시킬려고 하니 영원한 미완료로 취급하는 겁니다.
맨날 하는 헛소리가 이미와 아직의 긴장상태 라고 헛소리를 하는 이유는
완료가 안 덮쳤서(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인간의 선악으로 완료를 흉내낼려고 하니까 뭐든지 인간 숙제로 만들어 버리니까
그런 교회는 그 숙제를 도와주는 학원일 뿐이고 수강생과 수상료 챙기는 자들의 관계로만 있을뿐인 겁니다.
그들의 학습내용중에 영적전쟁 이라는 학습이 교리화 되었고
성화의 삶이 교리화 되었고 그리스도의 인격 갖추기 섬기기 이 모든 것이 교리화 되었기에
달성해야만 하는 교과과정으로 취급되는 겁니다.

피를 무시하는 자가 남이 아닌 교회인 셈이지요. 아니까 모르면 차라리 무시하지나 않지만
한 입으로는 존경하나 마음으로는 살인하고픈 마음 뿐인 겁니다. 자아를 부인 못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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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0 13:20:20,

주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함으로써 교회가 탄생된다 교회는 세상의 정사와 주관자들에게 하나님의 지혜와 복음을 전하는 바로 그런곳이다

생명의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바꾸는 역사가 주님의 삽자가를 통해서 나왓기 때문에 엡 3장에서 교회 역할이 나오는것이다

답변:

교회의 존재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마치 아벨의 족보의 내용처럼 자기부인의 영의 활동 곧 성령의 은사란 미래의 영광이 이미 완료 되었기에 죽어도 상관없는 자유를 보여주는데 있어서 죽음 곧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함을 보여주기 위해 남들이 넓은 길로만 가는 생존의 세계로 가는 가인(영웅)의 족보의 모습이 아니라, 죽는 길로만 골라 가는 원치 않는 길 좁은 길로만 가도록 하기 위한 은사인 영의 일이 덮친 겁니다.

그래서 아벨의 족보는 죽었더라 죽었더라 족보이고
가인의 족보는 살았더라 살았더라 족보입니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것은 죽었더라 라는 족보가 계속 예수 안에서 즉 다른 말로 믿음 안에서 살았더라 족보로써 이 땅에 계속 증거가 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가인의 족보는 살았더라 족보임에도 불구하고 죽어있는 실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늘 아벨의 족보를 의식하면서 나온다는 겁니다.

아벨의 족보를 증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퍼트려짐을 당하는 거죠.
그들은 그것을 착각하고 복이라는 둥 하나님의 은혜라는 둥 착각하죠.

제가 왜 이런말을 하는고 하는 바로 그런 착각을 그 교회가 가인의 족보의 모습으로써
교회 존재 자체의 정당성을 두고서 그렇게 성경말씀을 운운하더라 라는 겁니다.

아벨의 족보가 그래서 죽었더라 라는 의미를 그 교회는 모르고
정반대로 가인의 족보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모습이니
그게 무슨 교회입니까? 강도의 소굴이지요.

제가 손가락 이라는 의미와 칼의 부재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교회의 개념은 누락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했지
정반대의 사상인 존재의 정당성 가치성으로써 교회됨을 말한적이 없습니다.

교회가 그 누락됨을 성령의 전으로써 자기부인이 된다는 것은
머리가 자기부인을 본으로써 보여줬기에 자연스레 신부는 신랑되신 머리가 가는데로 이끌림을 받게 되는 것이지 저기부인을 숙제로 해서 신부의 조건을 갖추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부인이 신부 됨의 조건이 되는 셈이니 그것이 또한 법이요 선악이요.
사랑과 상관이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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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0 13:22:25,

이것을 이루어지게 하는것 사명을 가져야 하는게 교회이다 이것이 아니면 교회는 필요없다 주님이 하시다가 남긴일 주님은 자신의 몫을 완성하셨지만 우리는 우리의 몫을 완성해서 우리의 몸을 구원으로 채워야 될일이다 그것이 우리가 이루어야 할 남은 일이다

답변 :

남은 일은 없습니다. 사명이란 바로 남은 일이 없다 라는 아는 것이 사명입니다.
얼마나 그런 사명이 없었으면 또 안 믿겨지면 억지로 그 사명을 자기 신체에 담을려고 하기에
그렇게 되면 사명이라는 것을 이루었기에 그 사명의 댓가를 바랄 수밖에 없는 육체의 법에 빠지게 됩니다. 댓가 없이 사명을 완수하신 분은 예수님이라면
우리 또한 사명이라는 조건을 남에게까지 과시하면서 자기를 인정받을려고 할 것이 아니라.
정작 내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주님이 다 이루신 그 사명을
주님이 홀로 다 하셨습니다 라고 외치는 사명 뿐인 겁니다. 그것을 다윗은 행복 이라고 로마서 4장에 언급합니다.

정작 이 사명은 무시하고요
주님을 따라하는 자기 사명을 봐 달라고 자기 봐 달라고 우기는 겁니다.

아직 영이 뭔지를 몰라서 자꾸 육에서 영을 보게 되니 그것 밖에 해석을 못하는 겁니다.

불안해서 그런 겁니다. 교인들이 사명감이 없으면 자신을 왕따 시킬까봐 겁이나서 그런겁니다.

왕따 되고 목사 대접 안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예수님 혼자 다 이루었습니다. 그 증거가 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라고 대조를 증거하는 식인데

대조가 아니라
도리어 일치 시킬려고 하니까
바리새인과 다를바 없는 위선만 자꾸 늘어가고 법만 자꾸 늘어갑니다.

참으로 불행 스럽게도 단 한 개라도 제대로 지키면 모르겠지만
단 한 개라고 숙제를 사명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성령이 알려준 적이 없기에
자꾸 헛짓을 하는 겁니다.

손가락은 달이 아닙니다. 달이냐 아니냐 라는 헛된 논쟁에 빠지지 마세요
차라리 이 손가락은 달이 될수 없다 라고 달을 가리키면서
부재성 누락성을 외치세요

달을 가리키라고 만들어준 피조된 손가락을 자꾸 건방지게 달로 만들려고
성화론자들이 어쩌면 더 믿음이 좋은 듯

(이것은 여담으로 그릇 개념을 저번에 말한적이 있는데
과거에 이런 그림을 꿈에서인지 아니면 눈깜고 있다가 연상된건지 잘모르겠지만
아하 이거다 라고 생각한 것이 있는데

무엇인고 하니 우주에 다이아몬드 행성이 떠 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것을 자세히 클로우즈업 해 보니그 커다란 다이아몬든에 뭔가 다닥 다닥 붙어 있는 것들이 있는데
쪼그마항게 비일랑 말랑하게 붙어있는것들이 바로 그릇들이였습니다. 돌 그릇 유리그릇 온갖 그릇들이 붙어 있는 겁니다. 결국 그릇이 다이아 몬드를 담은게 아니라 다이아 몬드가 그릇을 붙들고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사명이 없다면 즉 베드로를 위해 예수님이 기도하는 사명이 없다면 베드로는 아무리 자기가 기도의 사명으로 무장해도 마귀가 데리고 가버립니다.
빼앗기지 않는 분은 예수님의 사명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지
내 사명을 이룰려고 하는 나의 사명이란 없습니다. 이미 다 이룬 예수님의 사명만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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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0 13:25:47,

심판의 말씀도 있어야 되고 영적 북돋음을 주는 능력있는 말씀도 있어야 된다 주님이 가신 이후에 그일을 우리가 담당해야 한다 주님이 계실때에는 주님이 이렇게 사는것이다 본을 보여 주여야 햇지만 이제는 그 하나님의 말씀인 검을 써 가면서 세상과 싸워 이기고 악한 영들을 우리가 이겨서 사람들에게 복을을 가르쳐 주고 사랑으로 섬겨주어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라가 되어지는 전대가 충분해야 한다 밑천이 든든해아된다 즉 인격이 채워져야 한다라는것이죠

답변:
심판의 말씀도 있어야 되고 라고 말하는 뉘앙스가
구원시킬려고 무지 애를 쓰시는 주님이 하도 우리가 말을 지독스럽게 안 들어서 어쩔수 없이 매를 대시어 겁주어서 라도 구원시킨다 라는 취지로써 심판이 있다는 식이
개혁주의자들의 보편적인 생각입니다.

즉 지옥에 대한 개념을 그들은 빼버리는 이유가
어쩔수 없이 겁주기 위함이지
지옥을 보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자기가 예수님을 만들어내기 시작하고
동시에 그런 착한 나를 지도자로 인정해 달라는 취지입니다.

이런 것이 대중에게 먹혀 드는 이유는
인간의 모든 신 개념은 선악에서 짜깁기가 된 신 개념이기에
곧 자기자신입니다. 그래서
자아 개선을 위한 것이지 자아를 박살내는 신이란 왠만해선 거론하지 않습니다.
교인들이 자기를 위협하고 대들때에 최후의 수단으로써
겁주기 위해서 무당들이 최후 보루로 작두를 타는 것이지요.

모세가 그 카다가 가나안 땅 탈락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가 들어가긴 들어가는데 모세의 기능적 역할은 가나안 땅에서 여전히 계속 됩니다. 바로 여호수아가 대신 하는 겁니다.

누가 하든 상관 없이 주님은 모세의 기능을 여전히 발휘 하시면서 모세언약을 진행하신 것이지요.

그런 입장에서 제발 중보자 될려는 탐욕을 목사들은 교묘하게 잘 감추고 있습니다. 그것을 벗겨주는 역할을 하도록 교인들을 세우신 겁니다. 목사를 겁내지 마시고 그 교회의 교인으로써 세워주신 예수님을 겁내면서
왜 그런 목사를 붙여주시는 지를 잘 파악하시고
예수님이 알려준 대로 그대로 목사에게 알려주면
목사가 수긍을 해 버리면 또 2차전에 들어가야 하니 그것도 감사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단판에 쫏겨난다면 그 교회에서 사명을 다 한 것이니 얼마나 가볍겠습니까? ㅋㅋㅋ

저도 그것을 소망하면서 교회 다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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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0 13:28:29,

그리스도의 영광된 인격이 채워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을 전달하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제자 삼겠는가 근데 전 이분을 들으면서 웬지 인격이 안 되어 있어도 목사라는 자리에만 있으면 충분하다라는 생각이 되던데요 ㅡ.ㅡㅋ

답변 :

자아 에 대한 집착을 항상 하나님을 앞장세워서 그 정당성을 그렇게 추구하는 겁니다.
자아란 없습니다.
그렇기에 자기를 부인할 마음이 추호도 없는 그 완악한 마음을 바로 그렇게 밖에 표현 못하는 겁니다.

만약 그런 주장들이 맞다면
그런 인격을 갖춘 바리새인들과 같은 수준 높은 인격자들은 왜 일방적으로 미워하시고

그런 인격과 전혀 일치점이 단 하나도 없는
창기 세리 강도 이런 자들이 천국에 먼저 들어간다고 하실까요?

그 숙제부터 성화론자들 중에 푼 자들이 없습니다.

또 제자훈련이라는 사기 프로그램을 받아들일 정도로 기독교가 가짜인 판국에
예수님이 언제 제자훈련을 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자훈련을 했다고 우기신다면 예수님은 제자훈련의 실패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실패한 제자훈련을 구지 자기네들은 성공시키고야 말겠다고 우기는 그 고집은 또 뭔가요

이것은 신앙과 상관없이 사회인들이 사회생활 속에서 성공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듯이
목사라는 그 위치를 계속적으로 성공유지를 위해서
뭐든지 자기 육체에 끌아모아서 챙기고자 하는 불안증세 때문에
사회에 떠돌던 프로그램이 교회 속으로 들어와서 혼합주의처럼
우상화 된 겁니다. 바알식 여호와 숭배인 셈이지요.

그 정도로 단순히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 아니라 우상을 제개해도 소용 없는
자기 집착에 빠진 겁니다. 자아가 우상 곧 허상 이거든요
우상 이라는 뜻은 약속을 못 지킨다는 뜻입니다.
자아란 약속을 이행 못합니다.
그것을 다윗이 알고서는 행복하다고 기뻐했습니다. 율법을 이행 못함을 아는 것이
얼마나 가볍게 된 것인지 아 괜히 무거운 짐을 진 거죠. 괜히 알 필요 없는 선악을 알고서
자아를 그 선악과처럼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만들려고 한 거죠.
그것이 종교적으로는 자아를 잘믿음자로써 신앙에 성공한 자로써 성경지식을 많이 아는 자로써 만들려고 하는 거죠.

그게 똥 덩 어 리 배설물인줄 바울은 늦게나마 안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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