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죄에 대한 이유 없는 미움 질투 투기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11-11 07:46:37,

베드로의 부인을 말하길 닭이 울기전에 부인해야 한다 닭이 운 다음에 부인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닭이 울면 새 아침이 온것이다 닭이 우는것을 기준으로 해서 그 전에는 시몬의 상태이고 그전에는 어두움의 때이고 그전에는 알지못하던 때이다 닭이 울게되면 새날이 온것이고 새역사가 창조되어진때다 그때부터 주님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지금은 베드로가 부인을 할수 밖에 없다

답변 :

그렇게 되면 예정이나 선택이나 구원마저도 인간이 자꾸 맞출려는 행동 위주로 설명이 되어버립니다.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결정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력으로 닭을 넘을수 없다는 인간의 무능함을 드러냅니다. 그 뒤에도 주님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라고 해버리면 자신의 능력으로 여전히 닭울기전의 모습과 같습니다. 인간은 끝까지 창조에 대해서 관여한적이 없는 무능력한 비창조자에 해당되는 모습을 지닐 수밖에 없는데 자꾸 예수님 이라는 새로운 창조자가 이제 나타나니까 전의 여호와 창조자 버리고 유행따라 예수 라는 새창조자를 흉내내기 시작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인간의 본능입니다. 종교는 곧 인간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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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1 07:48:09,

주님을 세번부인해야 시몬상태에서 나온다 베드로 상태가 되어지니까 주님을 안다 닭이 울고 나니까 새날이 온다

답변 :

종교란 곧 성화론이란 항상 인간의 업적과 실적을 위주로 인간의 행동여부에 민감하게 검토합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넘어오든, 아브람 상태에서 아브라함 상태로 넘어오든 예수님 이라는 이름을 드러내기위한 비창조자인 피조물에 해당됩니다. 창조주와 왜 차이나는지를 늘 창조를 모방하는 그 모습을 통해서 차이를 드러냅니다.

복음이란 바로 진짜 창조주를 만남으로써 자신이 가짜 창조주 행세만을 한 것을 늘 발각당하고 무능함을 고백하는 기도의 집으로써 성령의 공격대상 징계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 라고 합니다. 교회란 일종의 박스 로써 나의 무능함을 담기 싫어하면서도 성령에 의해 담겨지는 겁니다. 반면에 종교란 예수님 흉내 영웅흉내 말씀지키기 계명수행완성 뭐든지 인간의 업적을 담고자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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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1 09:09:06,

눅10:4과 22:36절을 10장일땐 주님이 함께 하시는 때이며 은혜의 때이기에 너희가 신경 쓸게 없지만  22장은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실것이기에 내가 너희를 떠나게 된다 시대가 바뀌었기에 네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때는 진리시대이다 그렇기에 주님이 제자들에게 당부한 말씀이다 

답변 :
항상 그런 부분을 인간에게 숙제를 던지는냥 다들 해석해 버리는데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시대 구분을 시간적인 흐름으로 볼게 아니라
그 반대로 미래에서 덮친 것을 보라는 겁니다.

22장까지는 마치 광야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얻은 획득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원망한 증거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이 얼마나 믿음이 없음을 획득하여서 그 불의한 모습을 인자라는 박스 안에 담는 모습니다.
10번 이상의 원망덩어리를 3가지 증표로써 증거궤 안에 담죠, 깨어진 십계명 두돌판, 만나를 담은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 이것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께 대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증거물입니다.

바로 이 3가지 증거물에 여호와는 충성을 합니다. 그 위에 피를 바른다는 의미가 뭔가를 보여주고자  40년 동안 뺑뺑이 돌고 새세대로 교체 시켜서 숫자 변동 없이 그대로 가나안 땅에 입성합니다.

마찬가지로 22장까지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의 허물을 다 모은 겁니다. 이제 그 동안 모아서 담아 놓은 그 박스 위에 피 뿌릴려고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런 영적 전쟁 남이 아닌 나를 상대로 벌리는 피의 전쟁을
혈과 육의 전쟁으로 오해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피 뿌려짐이 뭔지를 모르기에
주님이 지갑 챙기고 가방 챙기고 칼 챙긴대로 했더니만
불의한 자로 취급받아서 잡히게끔 했다는 겁니다.

그것도 억울하게 불의한 강도로써 그 증거물로써 3가지가
범인이 되도록 한 겁니다.

마치 요셉이 막내 베냐민과 아버지 야곱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끝까지 간첩으로 몰아가듯이 말이죠. 이것이 불의한 청지기의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않는 자는 남을 살릴수 없다 라는 취지로써 다말의 이야기와 중요하게 다루는데 있어서 불의함을 앞장세운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제자들을 자신이 이 땅을 악하다 라고 규정하는 이 땅의 적군으로써 쳐들어 왔다면 그를 따르는 제자들 마저도 이 땅의 주인을 결박시키는 강도 예수님과 한 패거리로 취급받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통해서 봤듯이 때려죽어도 예수님과 한 패거리가 되기 싫은 본성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빼도박도 못하도록 하늘의 간첩으로 증거물을 저당 잡히도록 했던 겁니다.

이렇게 불의하게 예수님과 한 패로 인정하는 마귀의 세계에서 규정하는 것은
제자들이 자신들이 예수님과 한 편입니다 라고 자기쪽에서 한 편으로 만들지 못했다 라는 것을 명확하게 규정하기 위함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인간은 자기 업적에 놀아나게 됩니다.

한 패거리 강도로 만들도록 예수님 쪽에서 불의한 물건에 충성하지 않았다면
제자들은 이 땅에서 빠져 나올길이 없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칼 들고 이제 주와 함께 죽으러 전쟁하러 가자 라고 주도 죽으면 나도 함께 죽겠노라 라는 인간의 순교망상을 일찌감치 차단하는 겁니다.

(눅 22:33, 개역)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요 11:14, 개역)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요 11:15, 개역)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요 11:16, 개역)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제자들은 늘 무시로 자기의 믿음을 드러내어 마귀와 싸울려는 자세를 취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거 예수님께서 차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님의 질문에서 바로 그런 취지로 나오기 때문에 막아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에게는 적이 없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의 적으로써 취급받을 쨉도 안됩니다.

문제는 인간이 이런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마귀의 손에서 끄집어 내겠다는 취지입니다.

결국 적을 새로 형성하는데 편애 때문에 적이 졸지에 생기는 겁니다. 질투가 생기는 거죠

아브라함이 3나라 4나라의 연합 싸움에 끼여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졸지에 롯이 포로당하는 바람에 롯 일병 구하기가 벌어지는 겁니다. 이유는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양을 건지는데 있어서 하필이면 딴 세상의 구덩이에 빠진 겁니다.

동시에 양이 잘못해서 딴 세상의 구덩이에 빠진 것 뿐인데
예수님은 자기 편애의 양을 빠뜨렸다는 이유로 가만히 있다가 작살이 나는 겁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를 하나님이 애굽족속 바로 족장 속에 집어 넣고
그들의 습관대로 그냥 사래를 아내로 취한 것 뿐인데

감히 하나님의 신부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작살을 내버리는 겁니다.

이런식의 자작극으로써 예수님은 마귀들이 노는 마당에
자기 양이 그 속에서 길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자기 양을 나무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양의 잘못까지 합쳐서 마귀에게 묻겠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물음을 통해서 비로소 사랑을 자기 쪽에서 출발하는 방식을 다 포기케 하는 진짜 사랑이 덮침 질투를 보게 됩니다.

죄 악에 대한 이유없는 질투 그것이 없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이 볼모 작전은 부정을 앞장세워서 덮썩 물어서 법적으로 고소케 하는 작전은
베드로의 허물을 잡도록 일부러 마귀 보라고 한 겁니다.

저당 잡히라고 3가지 준비물이 있는 것을 마귀를 상대를 못하는 제자들의 마귀가 심은 것을 뽑아 내기 위함입니다.

전쟁 마저도 혈과 육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기에

반대의 어리석은 십자가 전쟁을 홀로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미래의 완료가 덮치는 방식입니다. 이미 승리를 선언하고 하는 희한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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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1 09:12:04,

은혜시대와 진리시대를 왜 구분하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제가 들어온바로는 진리시대란 말씀이 육신이 되는 시대를 말하는것 같은데 그래서 결론적으론 주님의 인격이 채워져야 한다고 말하는것 같습니다

답변:

그러니까요 제가 그 구분이 웃끼는 헛소리라고 말하는 겁니다.
은혜도 진리도 어디까지나 인간이 포착한 그 손아귀에 벗어나면 나 이해 못할꺼야 이해 안할꺼야 라는 자기들의 장난감으로 만들기 위함이지요 그래야 그 은혜로 그 진리로 사람들을 다루겠다 라는 겁니다.

은혜도 진리로 인간의 업적으로 또는 자신의 믿음의 업적으로 다룰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강박관념을 숨긴채로 드러낸 겁니다.

마침 이 부분에 대해서 잘 다룬 교회를 장악한 인간들의 모든 행동들이 잘 드러낸 강의가 오늘 대구 강의 였습니다. (081111 지옥의 하나님 132p 업적(실적)주의 교회정치 vs 무능함의 기도 집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8대구/대구081111지옥의하나님p132.mp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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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1 09:14:32,

창세기에서 나오는 여호와가 신약에 와서는 주님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주님은 사람을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만드실려고 창조하신것이라고 하거든요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인격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자신의 의로 만든 인격이 아닌 새언약 안에서 주님의 말씀으로 채워진 자연스러운 인격을 말하는것 같습니다

답변 :

바리새인이 언제 자신의 의로 그 인격을 만들려고 했나요 그런적 없습니다.
그들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하나님 형상 회복에 매진한 겁니다.

오늘날 성화론자들도 마찬가지이고
교회 다니는 모든 자들도 이것이 본능이기에 어쩔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형상이란 결국 창조자의 손에 달린 겁니다.
그 창조자를 내가 규정하겠다고 나서기 때문에 자기의 원하는 이미지를 부여한 겁니다.

만약 성화론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사람을 창조한다면 어떻게 지을까요?
놀랍게도 선악을 아는 인간으로 창조합니다.

바로 이런 인간의 비창조성을 들추어내는 창조를 예수님이 비창조의 대립으로써 창조를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예정하고 창조하고 만드신 유일한 것은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선악을 아는 인간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창조 이미지를 늘 허물어 버리기 때문에 십자가야 말로 악취나는 걸림돌이기 때문입니다.

그 깨끗한 이미지를 지닐려는 연기의 가면을 쓴 시아버지 유다를 며느리 다말이 악취와 똥오줌의 배설물을 뒤짚어쓰지 않으면 유다는 구원 받을 길이 없습니다. 자신의 창조가 우상임을 알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믿는 하나님을 가짜로 만들고자 십자가에서 가면 벗긴겁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인데 이 하나님을 인간들이 믿거나 흉내내거나 지난 과거의 버릇처럼 창조할려고 해도 도리어 그 창조물에서 공격을 받게 될 것 같으면 하나님을 조각하는 그 버릇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고맙게도 인간이 만들어내는 하나님을 우상으로 규정한 십자가를 예정했기에

인간들이 장난치듯 가지고 노는 하나님을 이제는 십자가 때문에 만들수가 없게 되었다고
십자가를 미워할 수 밖에 없도록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곧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제물로 삼는 버리시는 하나님이 아닌 인간들의 구원의 하나님은 인간의 장난감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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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1 09:24:49,

성화구원론자들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것 같습니다  눅에서 말하는 겉옷도 인격으로 말하고 있으니까요

크고 비밀한 일도 주님이 우리와 하나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구요

모든것이 주종에서 아버지와 아들로 만들기 위해 주님이 붙히신것이고 주님의 인격까지 장성해야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된다고 하니까 말입니다

답변 :

그러니까 인간들의 장난감 예수죠

그래서 제가 강도 예수와 한 패거리로 빼도박도 못하도록 하니까
제자들이 실망 절망 했죠

겉옷이 무슨 인격입니까? 그거 팔아서 칼을 구입해야 하는데 강도 되기 위해서 충실해야 하는데

결국 예수님을 자신들의 선악기술로 포장할려고 하다 보니

세상으로부터 미움받아야 할 이유를 본인들이 다 제거해 버리다 보니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기를 왕으로 삼아서
그런 자기 믿음에 중독되어서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잘 믿니 라는 자기 최면에 걸려든 겁니다.

그래서 마귀를 투입 시켜야
정신없이 뺑뺑이 돌려야
자아라는 허상에 빠지지 않도록
파라오 왕을 강퍅케 해야
인간들은 고통 속에서 부르짖고
그 부르짖음을 주님이 들으시고 파라오 왕을 패는 겁니다.

자작극이지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들의 자작극을 고집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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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1 09:32:04,

둘로스님은 주님을 제외한 모든것은 주님을 드러내기 위한 차이성을 위해 있는것이고 모든것은 주님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다라고 하는것 같습니다

답변 :

예수님이 자신이 창조주임의 드러내는데 있어서 그 차이로 인간은 왜 창조주가 될 수가 없는가에 대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 자신이 사랑이심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그 차이로 인간은 왜 사랑이 될 수가 없는가에 대한 역할을 하게 되겠죠.

인간의 사랑은 질투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아도취적 소유욕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질투로써 가만히 있는 마귀를 우리 속에 심어 넣고
우리를 마귀에게 포로 잡히도록 해 놓고
자기 양을 포로로 삼았다는 이유로 마귀를 작살내 버리고
자기 양의 허물 마저도 자신이 감당하심과 동시에 마귀에 대한 질투를 제대로 행사하시는 지옥을 창조하심으로써 사랑을 완성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지옥을 만들지를 못합니다.

이제 지옥갈 자는 왜 예수님이 지옥을 자기들을 위해서 만들었는지를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나 지옥에 못가는 거죠. 지독한 아무 이유 없는 미움만을 받은자만이 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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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1 09:35:17,

성화론자들은 자신들이 지금 율법이 아닌 새언약으로 넘어와 새 복음 안에서 주님의 분량까지 자라가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도 주님이 배치시킨 또 다른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모습일까요

답변 :

당연합니다. 새언약의 백성이 새언약의 완성자로써 태어났다면
반대로 새언약이 배격자는 자를 새언약의 완성으로써 미움받은자를 형성하는 겁니다.

놀랍게도 바울서신 곧 로마서 (바울 본인이 율법의 종에서 이제 자유의 종의 그 차이를 드러낸 서신) 이후로부터

목회서신이라는 둥의 별명을 붙이지만 정작 진짜 교회를 말하는데 있어서 가짜 교회와의 차이를 드러냅니다. 진짜 복음(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를 말하는데 있어서 다른복음이 어떤것인가 라는 그 차이를 드러냅니다.

즉 바울신학은 한 마디로 한 몸(결혼) 개념입니다. 그럼 이 한 몸을 말하는데 있어서 그 차이로 가짜 한 몸 (가짜 그리스도의 몸)의 내용들을 대조시키면서 증거하는 겁니다.

결국 복음이란 피를 증거하는데 있어서 그 피와 반대되는 모든 사상을 다 담아서 그 차이로써 증거합니다.

뭐뭐 보다 뭐뭐가 더 낫다 라는 식으로 말이죠.

제사 보다 순종이 낫다
제사를 원치 않고 상한심령
다말 너는 나 유다 보다 낫다
가인의 제사 보다 더 나은 제사인 아벨제사

예수님 자신만이 선악을 아는 유일한 분인데 건방지게 알 필요 없는 선악을 인간들이 알게 되니 예수님을 다 따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선악의 법을 적용치 않고 은혜의 생명나무인 사랑에 뛰어드니까 선악을 아는 인간들이 따라할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뭐뭐 보다 뭐뭐가 낫다 라는 방식으로써

인간의 법 추구가 다 거짓임을 드러냅니다. 질투도 못하면서 사랑한다고 우기는 식이죠.
자기를 미워하면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없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면서 남을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가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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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1 13:48:03,

마 20:16 달란트 비유에서 일찍온자나 늦게 온자나 똑같이 받아간다 이것이 기본구원이고 은혜이다 달란트는 하나님의 의이고 이것은 영접하면 된다

눅19장 열므나 비유에서 기본구원은 받고 그것을 가지고 나가서 일하고 남겨온 므나는 그 사람이 수고 하고 일하고 애쓴 그일에 댓가이고 수고한 결과다

답변:

비유의 특징은 반드시 죄를 들추어내는데 있어서 화를 돋구어 내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항상 비유를 듣고 나서는 친해볼려고 성질죽여서 다가온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나 사두개인이나 서기관들이 항상 듣고나면 찔려서 그 찔림에 대한 화 풀이를 복수와 적개심을 유발케 한다는 데 있어서 비유란 없던 악마성을 만들어내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비유 풀이를 보면 그런게 없습니다. 없기에 한 패거리인 겁니다. 마치
한 율법사가 어떻게 하면 큰 계명을 지킬수가 있나요 라고 물으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그동안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온 자신의 큰계명 지킨 것을 과시할려는 예수 볼모작전에 도리어 자신이 예수님에게 말려듭니다.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 비유를 통해서 이 율법사의 그런 선악의 법의 생각을 가로막아버립니다.

예수님의 이런 비유의 목적은 한 쪽은 이유 없는 막아섬의 미움과 동시에
한 쪽은 이유 없는 알려주심의 편애를 일방적으로 하심으로서

자신의 창조성을 인간의 창조성 흉내와 대조 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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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1 13:54:59,

남겨온 므나는 그 사람이 수고하고 일하고 애쓴 글이에 댓가이고 수고이다

그래서 열므나를 주면서 열고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일한 결과가 권세로 나온것이다 권세는 존재에서 나온 권세이다 한 므나를 가지고 일한 결과가 열고을 다스리는 권세가 되고 실력 자격이 된다 권세는 그 사람의 인격이고 실력이다 일하면 일할수록 남기면 남길수록 그 사람의 인격 실력이 늘어난다 아무도 빼앗아 갈수 없다

답변 :

성화론자들의 비유 해석은 한결같이 인간 업적 강박관념입니다. 못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믿으면 할수 있거든이 무슨말이냐 믿는자라면 할 수 있다 라는 최면을 거는 식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런 해석은 다 엉터리입니다. 만약 실적 업적 위주 라면 불공평 자체가 있으면 안됩니다. 모든 비유 속에는 이미 불공평으로 출발합니다. 그렇다면 선악은 그 불공평을 자신들의 선한 업적으로 해소할려는 데 있어서 바리새인이나 성화론자들이 예민하게 작용합니다. 천신만고의 노력과 수고 끝에 달성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무 댓가와 이유 없이 저 불의한 자를 위해 그 공로를 주라고 합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화가 나고 불공평에 대한 자신의 억지로 참아왔고 그 불공평을 넘어선 자신의 긍정적인 업적을 무시한 예수님의 불공평함에 드디어 본색을 드러냅니다.

즉 불공평은 내가 왜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 즉 구원자가 아니냐 라는 겁니다.

왜 나는 도리어 창조자 신이 아닌 피조물일 뿐인 소모품이고 그저 구원자가 찾는 죄인일 뿐이냐 라는 불공평함을

자신이 공평케 하기 위해서 업적을 달성할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마귀죠.
예수님은 그런 마귀성을 끝까지 추적해서 파 내실려고 달려드는 이상
내가 뭔가를 달성했다 라는 업적주의인 법적인 사고방식은 예수님에게 안 통합니다.

도리어 예수님을 법적으로 죽여야 알리바이를 형성하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 모든 비유는 인간의 선악의 판단에 악에 해당되는 부정함만을 앞장세우시는 겁니다. 죽음만을 앞장세우고 불공평함을 앞장세우고 악한세대규정만을 앞장세우고 불의한 창기 세리를 앞장세우고 이유는 딱 하나 법 쥔 놈들은 이유없이 무조건 미워하는 겁니다. 자 그럼 난 법 안 쥘꺼야 라고 또 법 안 쥔 것을 지키는 법을 추구하게 되니
그것 또한 공격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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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1 13:58:24,

열므나 열고을 다스리는 권세로 인격과 존재로 만드심 인격적인 보상은 그 만큼 주신다 하나님의 공의는 일한데로 갚아준다 믿음데로 했느냐 믿음데 대한 보상이 있고 돈을 쫓아 가면 영생에 대한 보상이 없는것이다 생각만 바꾸면 온전히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는 인격과 실력이 있어야 누릴수 있다.

답변 :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만으로 가는 하나님 나라와 지금 현재에 누리는 나라를
자꾸 업적과 실적과 행한 공로의 가치로 누리겠다 라는 사고방식은 여전히 사망에 종노릇 하는 버릇을 죽음이 두려워 버림받을까봐 법을 억지로 지킨 버릇을 하늘에 가서 까지 똥칠할려는 치매현상입니다.

교회란 자신의 무능함을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등 주님의 창조성에 무능한 비창조자에 해당되는 나는 창조자가 아닙니다. 나는 가짜 창조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라는 고백을 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물을 교회 라는 박스에 담는 것이 바로 성령의 일이요
은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사를 반대로 해석하게 되니 은사를 업적 쌓기를 가능케 해주는 기술능력으로 취급하는 겁니다. 방언을 못했는데 방언 할수 있는 은사 곧 기술을 이제는 습득하게 되어서 이제 방언의 업적으로 쌓을수 있으니 나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으니 날 무시 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목사도 집사도 장로도 다 그런 식의 해석으로 직분을 해석하는 겁니다.

그러나 은사란 남의 허물을 부정함을 담아내고자 하는 일종의 박스입니다. 다말이라는 박스 안에 유다의 허물이 담겨져야 합니다. 그리고 다말과 유다는 불 속에서 누가 그 허물을 덮는가 너는 창조자가 아니냐 신이 아니야 그런데 왜 선악을 알고 있니 라는 선악을 알 필요 없어 업적 필요 없어 라는 그 무능함에 감사토록 율법 외부에서 오는 의 사랑 긍휼로써 자신의 무능함을 예수님과의 비교로써 알게되는 것이 은사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죽음 속으로 몰아가죠 정금이 아닌 불순물 주님이 심지 않은 선악의 생각을 제거하기 위해서 죽음 속으로 불 속으로 들어갔을때에 자기 속에서 빠져나오는 그 불순물을 보고서는 기뻐하는 겁니다. 행복해 하는 겁니다. (롬 4장 다윗의 행복)

결국 인간은 죽기 싫어서 은사라는 기술을 획득해서 또 성과달성이라는 업적주의의 법칙을 교회에 까지 와서 죽도록 쉬지도 않고 안식이 없이 경쟁하는 겁니다.

그 지옥의 짖인 자기 이름 집착을 천국에 까지 다달아서 할려고
바벨탑을 짖고 교회를 세워서 미친 듯이 남까지 소경으로 만드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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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1 14:00:35,

새 예루살렘 성은 단장된 신부의 모습이고 완정된 인격이다 신랑의 마음에 꼭 맞는 신부이다 완벽하다 인격이 완전하다 그래서 144규빗으로 나온다

혼인잔치를 통해 두 인격이 하나로 되늰것이다 하나님의 인격으로 이루어진것이다 그것을 이루시는 분이 처음과 나중이신 주님이다

답변 :

그래서 하나 되자 한 몸 되자 라고 우깁니다.
주님은 그 반대입니다. 내 몸 어디있노 라고 하나 되자가 아닌 이미 하나임을 찾습니다.
나와 한 몸인 자가 누구냐 라고 했을때에
다들 저마다 한 몸 되자 운동에 목숨 걸고 매진했기 때문에 다들 자신있게 저요 저요 라도 당당해 했는데
정작 예수님은 참나 누가 니 한 몸이라고 웃끼고 있네 라고 쳐다도 안보시는 겁니다.

내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어딧노 라고 외치니까

저 구석에서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전 귀신 들인자입니다.
저는요 눈먼 소경입니다.
저는요 문둥병자입니다.
저는 과부입니다.
저는 개같은 이방여자입니다. 저를 가까이 하시면 안됩니다 떠나소서

정작 아무리 봐도 한 몸 이기는커녕 아예 처음부터 한 몸 되자의 운동에 탈락됨이 마땅한 자들이

예수님의 일방적인 편애로 한 몸이라고 여김을 받는 상황이 바로
종말의 상황인 역전의 팔을 어긋맞게 하시는 상황이요 그것이 종말의 때에 벌어진다고 마 25장의 3가지 비유가 다 동일하게 그런 입장입니다.

누가 봐도 저 사람은 예수님의 신부야 그럼 그럼 맞고 말고 그 사람이 한 몸 될려고 그렇게 평생을 바치고 늘 십일조 하고 두 번 금식을 했으니 저런 깨끗한 사람이 예수님의 한 몸일꺼야 내가 장담한다.

어머 어머 저 인간! 교회에 또 왔네? 귀신은 뭐하남 저 인간 안 잡아가고
아이구 역겨운 냄새는 뭐야, 도저히 참을수가 없네
저런 더러운 인간은 절대로 예수님과 한 몸이 될수 없는 더러운 인간이야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일하심을 인간의 선악의 판단에 의도적으로 비켜갑니다.

왜냐하면 그 선악의 판단을 이유없이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항상 인간의 선악의 판단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일치성을 추구합니다.

그러니 안 미워하고는 못배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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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1 14:02:58,

하나님은 처음에도 그것을 계획하셨고 나중에도 그것을 계획하셨더 인격의 완성을 얘기하는것이 처음과 나중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안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만물을 다스릴수 없다 만물이 굴복을 안 한다 성도는 수 많은 과정을 통해서 연단을 통해서 결국는 다스리는 자가 되어진다

답변 :
거 봐요 항상 일치성을 추구합니다.
제발 다스릴려는 하나님 흉내낼 생각 하지 말고
다스림이나 제대로 받으세요

예수님이 인자의 모습으로 오신 이유는 다스릴려고 한 모습이 일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해석이 참으로 위험합니다.

마치 종교들 속에서 카스트 계급 실적 주의를 따져보면 자신의 위치를 항상 정당화 하는 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형상 회복을 외치는 개혁주의는 기껏 이 땅을 기독교 문화롤 정복할려는 속셈을 그런 식으로 감추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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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1 14:06:07,

주님에 의해 시작된 일이기에 주님에 의하여 끝난다 하나님의 복을 가진 사람들 드림이 되어진 사람들은 주님께서 시작하신 일이기에 이 통치로서 만왕의 왕이신 그분과 함께 왕노릇하는 통치자로서 삶을 시작도 주님이 하셨기에 끝도 주님께서 맞추신다 이것이 주님의 영광이다 주님의 영광은 통치다 만물에 대한 통치다

답변 :
방금 자신들이 다스려야 한다 해놓고 또 주님을 결부 시킵니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죠.
통치 개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검을 겉옷을 앞아서라도 사라 라는 자신들이 영적인 전쟁의 공로자인냥 착각하는 거죠. 예수님이 일부러 세상 경찰 불러서 강도 잡아가라고 하신 겁니다.

강도로 잡혀 십자가에 죽어도 상관 없는 영광이 이미 완료 되었기 때문인데

이것을 믿을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인자가 높이 달려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당한 구원을 추구할려고 저런 걸림돌이 되는 구원은 더럽다고 취급하는 겁니다.

일부러 더럽게만 판단되어지는 구원만 이루시는 겁니다.

얼마나 고상하나요? 통치 다스린다. 한 몸 되자

다 마귀 사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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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1 14:09:02,

만물이 주로 부터 나왔다 시작의 근본이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께로 부터 나왔다

구원은 그분께로 돌아가는것이다 아버지가 내안에 내가 너희안에 너희안에 내가 있는것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인격안으로 들어갔다는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답변 :

우리를 통하지 않고요
인간들이 하등 이 창조성에 무능함을 표현하는 구절이 바로
로마서 11장의 만물이 주로부터 왔고 주로 말미암았고 주께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이 창조성 이 하나님의 일을
인간들은 하나님과 같이 된 자신들의 창조의 무능함 흉내냄 그리고 사람의 일에 집착 하는 장로의 유전과 대비 시키는 의미입니다.

(롬 11:6, 개역)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누가 먼저 이 창조성에 부합될 자가 있느냐 라는 겁니다. 오로지 순종은 주님으로부터 시작 되었고 그 반대의 불순종과 대비함으로써 인간은 불순종 뿐임을 증거하는 겁니다.

(롬 11:34, 개역)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롬 11:35, 개역)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롬 11:36, 개역)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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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1 14:10:25,

주로 부터 나와서 주를 통과하여 주께 돌아가는것이 영광이다

돌아가려면 과정이 같아야 하고 길이 같아야 하고 출발에서 과정부터 마지막까지 같은게 주님의 영광이고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것이다 이것을 주님께서 만드시겠다는 것이다

답변 :

아까전에는 인간을 통한다 해놓고 또 다시 주를 통한다 하고 말 바꾸네요 ㅋㅋㅋ
그래서 흉내내었고 그래서 말씀 지켰다 라는 흔적을 남길려고 하는 겁니다.

솔직하게 그 출발부터 방해 해 왔고 과정부터 마지막까지 끝까지 방해 해낸 당사자가 도리어 큰소리로 행했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남들이 다 눈치채는 그런 넓은 길의 반대인 좁은 길 부정한 길 불의한 길
자기 부인을 하는 길만 골라가신 겁니다.

주님은 인간들이 선악을 끝까지 포기 못한다는 것을 아시기에
그런 뻔한 해석에 도통 알길이 없는 그 반대의 길인 고난의 길로 가시는 겁니다.

홀로 완성하기 위함입니다. 흉내내면서 따라 오라는 길이 아니라.
홀로 완성했기에
그 길로 이끌어 당깁니다.
이끌림 받는 주제에 남보다 이 길을 가라 라고 말하는 자는 그 길을 사실상 안 가고 있기에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나는 도저히 갈수 없는데 자꾸 땡깁니다. 난 이 길을 싫은데 말이죠 라고 솔직하게 말해야지
자꾸 연기를 해 버리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 넓은 길 가놓고 큰 소리 치는 거죠.

좁은 길 한 발작이라고 갔다면 그런 길을 갈려는 자기자신에게 예민하지 않습니다.

율법사가 큰 계명 지켰다고 나왔을때에
진짜 계명을 지켰다면 감히 난 지킨적도 없다고 나올 정도로 무시무시한 계명인데
인간이 계명을 자기 소유로 삼은 듯이 말한다는 자체가
계명을 얼마나 무시했으면 그렇게 말하는지를
계명 자체가 인간을 이끌고 가는데
인간이 계명을 다루어서 이끌고 간다고 보니
주객을 반대로 뒤 바꿔 보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런 인간들을 다 사단이라고 취급하시는 겁니다.

정말 계명을 지켰다면 자기가 미워 죽습니다. 얼마나 계명 말씀을 우습게 봤는지에 대해서
몸서리 칠 정도로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대가리 바짝 땅에 엎드려서
그저 살려주세요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잘못 건드렸다고 벌벌벌 떨겁니다.

(사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6, 개역)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사 6:7, 개역)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빌 2:5, 개역)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개역)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개역)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개역)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9, 개역)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개역)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개역)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12, 개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심판과 저주를 인자가 자신의 신체에 담았듯이
성령의 일이란 우리 육에 이 낮아짐 죽기까지 복종하심을 심어버리겠다 라고 하는 겁니다.

나의 낮아짐이 아니라(이래 되면 인간 성화죠) 주의 낮아짐(예수님이 나 보다 낮아진 분입니다.), 나의 복종이 아니라 주의 복종을 심는 겁니다. 완료된 채로 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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