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함을 자랑하는 교회

볼모로 잡혀 박스에 담겨질 허물 그리고 그 위에 뿌려질 피

(고후 11:30, 개역)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후 12:9, 개역)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3:9, 개역)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갈 6:14, 개역)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11-13 19:06:03,

잠11:30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이고 지혜로운 사람이 생명나무이다 생명나무에서 열리는것들이 생명나무 실과이다 그 실과는 사람을 말한다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는다 사람을 얻을려면 지혜로운 사람을 얻어야 한다 그것이 생명나무이다 계시록에 나오는 생명나무가 이런것들이다 지혜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생명나무로 나온 것이다

답변 :

(잠 11:30, 개역)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성화론자들은 종교꾼들의 사고방식을 종합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업적과 실적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자신의 성공담으로 교인들까지 압박해 가는 겁니다.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라고 했을때에 예수님에 대한 독보성을 두고 말합니다.
그분의 지혜가 바로 십자가요 남을 살리는 율법의 완성을 두고 말합니다.

그런데 업적 위주로 보고 있는 의인 흉내내는 자들은 사람을 얻는다 라는 것을 정치적은 자기편 만들기에 집착합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만들려고 했던 결과처럼 말이죠. 소유로 시작해서 소유로 시작하니 얻는다 생명나무 조차도 법적으로 즉 행위로 숙제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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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3 19:10:25,

하나님의 지혜는 생명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다 크고 강한 나라를 만들고 아브라함 믿음안에 있는 모든자들이 복을 받을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생명속에서 살아져서 지혜로 나타나서 다른 사람이 볼때에 저것이 의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올바르게 분별하며 적용시킨 삶이다라는것이 나와야 한다(웬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모습이 떠 오릅니다)

답변 : 그래서 자신만만하게 예수님까지 동원해서 율법사 자신의 의를 그렇게 달성한 의를 과시 했습니다. (선한사마리아 비유 눅 10장) 예수님 앞에서는 배설물이요 똥덩어리 였습니다. 모든 말씀은 예수님 홀로만 완성하도록 된것인 것을 자기가 지켰다고 나오니 웃끼는 소리죠. 정작 너희들은 용서의 대상이요 강도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자요 갇혀버린 포로임을 아무리 예수님이 강조해도 소 귀에 경 읽기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명령어를 언제든지 자신들의 선택적 자유권으로 행할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능성이 없다고 선한 사마리아를 들이대시니 예수님을 죽을려는 본심이 비로소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그 본심 안 캐면 아무도 캘 자 없습니다. 본인 스스로도 말이죠. 그정도로 불쌍한 강도 만난자들이 인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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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3 19:12:44,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생명나무이니까 그리스도인 생명나무에 붙어 있으면 우리가 생명열매가 되어야 한다 세상만민이 우리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되어 있다 아브라함안에서 받았던 복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로 말미암아 복을 받도록 되어 있다 우리가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 의와 공도 복 자체가 되었을때 우리를 통해서 우리와 함께 있는자들이 복을 받을수 있다

답변 :
예수님을 자신의 판단 유무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생명나무란 반드시 선악과 나무를 앞장세우고 선악과나무를 뛰어넘어서야만 생명나무에 접근할수 있습니다. 즉 아무도 못 붙들도록 차단했고 없애버렸습니다.
없애버린 생명나무는 이제 예수님의 독점성에 달려 있습니다.
이 독점성의 강조가 도리어 엉터리로 자신들이 생명나무에 붙어있는냥 가짜들의 확장입니다.
그들이 더더욱 확장 됨에 따라서 생명나무는 희소가치가 높아지며
그들이 가능성을 더더욱 강조함에 따라서 생명나무는 더더욱 접근 불가가 되는 겁니다.

그들이 생명나무에 대한 자신들의 주체성을 강조함에 따라서
생명나무는 이런 주체가 된 인간들에게 어떻게 외면 받고 버림받고 머리둘곳 없었는가를 더더욱 드러납니다.

생명나무의 대상이 된다는 말을 아무리 말해도
그들은 생명나무 마저도 선악과 나무처럼 따먹을려고 따먹는 자아에게 주체를 두기 때문에
생명나무가 자신들을 다루도록 내버려 두지 못하는 겁니다.

그만큼 불안해서 죽기를 무서워서 생명나무도 자기 손아귀에서만 놀아나길 바라는 장난감으로 만들고픈 겁니다. 마치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말하는 자기자신이 주권사상을 말했다는 이유로 아무도 자신을 못건드리도록 바벨탑화 하듯이 인간의 모든 행동 하나 하나 생각 하나 하나가 선악적인 법적인 겁니다. 소유하면 당첨 행하면 당첨 숙제하면 당첨이라는 강박관념인 겁니다. 만약 소유 못하면 자신들이 견디지 못해서 그렇게 소유 못한 사람을 보면 가만히 두질 못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에게까지 인자의 모습으로 오니 소유못했다고 정죄해 버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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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3 19:16:31,

기도하는 삶에서 하나님의 영적 교제가 가까워진다 성경을 통해서 원리적인것은 알수 있다 기도를 통해서 알수있는건 지금 이 사건속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의 즉각적인 대답을 통해서 알수 있다 원리적인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건 현장에서 중요하다

답변 :

무슨 불교의 도 딱는 천번 만번 절 하는 겁니까? 즉각적인 대답? 얼마나 성령을 무시했으면 마치 소유할수 있는 가능성으로 주장하겠습니까?

그 목사 새끼 마귀새끼 네요

기도와 금식과 나아가서 찬양이란 나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비로소 아는 것이
기도요 금식이요 찬양입니다.

내가 원수였고 그 원수를 사랑한 분은 예수님이였으니
나는 아니요 예수님이 옳았습니다 라는 것이 찬양입니다.

이 십자가의 정신을 담은 것이 기도요 금식인데

무슨 그런 헛소리를 하는지 한사람을 아예 종교마약꾼 만들려고 작정하고 달려드네요
작정하고 달려드는 사기치는 놈 이길자는 아마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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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3 19:20:06,

그것은 하나님과의 평소에 다져진 기도하는 삶속에서 이루어진다 기도는 지금 바로 이 현장에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전해들을수 있다 살아있고 성령의 감동이 있는 생생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은 기도하는것이다 지금 내가 해야할것인지 하지 말아야 할것인지 하나님의 직접적인 도움을 현장에서 바로 받을수 있는것이 기도라고 하는것이다

답변:

그래서 기도란 평소에 다져지고 쌓여있는 것 마저도 다 날려버리는
자기부정의 참예입니다. 영은 육의 소욕을 죽이거든요.
그리고 육은 영의 소욕을 죽입니다.

그 목사는 육체의 행위로 영의 소욕을 죽일려고 가르치네요
왜냐하면 남을 가르칠수 있다는 위치에 있다고 착각한 겁니다.

목사란 남들이 들키지 않는 죄를 남들이 다 눈치채도록 들키고 싶지 않은 죄를 들키는
자기부인의 자리입니다. 그것을 은사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은사 곧 직분이 기능기술자 직업자리가 되다 보니
업적과 실적을 남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실패하면 안된다는 입장에서 위선의 가면을 쓰면 쓸수록 남을 속이는데 성공할수 있다고
가르치는 겁니다.

그래서 교인 하나 하나가 돈으로 보이고 자신들의 실적으로 보이는 겁니다.
그거 사라질까봐 늘 두려워 불안해 하는 겁니다.

그거 다 날려버리시는 일이 성령의 일입니다.
반대로 인간 목사들의 특징은 강도의 소굴 만드는데 전념합니다.
개혁이라는 이름의 강도 소굴이지요. 그래서 성령이 나서지 않으면 어떤 누구도 그 갇혀있는 포로됨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난 벗어났다고 우기는 놈도 여전히 갇혀 있습니다. 매일 매일 구원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루자 라는 사도바울은 여전히 자신은 오늘 예수님이 찾아 오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자신의 무능함을 예수님과 비교하면서
성령의 도우심만 바랬습니다.

도대체 한국 개혁 주의 목사들이 어느정도의 수준이기에 사도바울보다도 더 뛰어날 정도로
예수님이 날마다 찾아옴 보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찾아낼 정도로 분별력이 뛰어난지? 뭐 하긴 분별력 조차도 훈련으로 다져졌다고(첫번째 질문의 얻었다 라는 표현과 지혜자 마저도 얻어야 한다 라고 할 정도니 원) 하니 아무도 왠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깔아 놓은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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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3 19:22:01,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살아있는 핫라인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용건이 있어서가 아니다 당연히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열린 마음을 통해서 습관적인 기도를 통해서 날마다의 삶을 통해서 이 선이 살아 있는가 점검을 해야 한다

답변 :

연예인들이 자기의 연예생존을 위해서 라인을 형성을 하듯이 기도로 하나님과 라인을 형성한 동아리클럽을 형성자들의 대표성이 바로 유대인입니다. 구약 곧 옛언약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의 모든 행함을 다 담은 그릇입니다. 어떤 인간도 이런 행동과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주님이 포착해 놓은 죄악을 담은 항아리입니다.

그래서 옛언약을 무시하는 자들이 종교꾼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죄악 하나 하나 세밀하게 파 해치는 여호와가 싫은 겁니다. 그래서 신약의 예수를 자신들이 취사선택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이름을 주지 않았다는 예언이 성취되는 겁니다.

자신들이 취사선택한 그 이름이 바로 인간의 모든 이름을 펼치시는 분이기에
왜 예수라는 이름이 나의 이름과 결합할 수가 없는 이름인가를
예수 라는 이름에 톡톡히 당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지금 자신들이 예수 라는 이름을 취사선택한줄 착각하고 있지만 당해보면 다시는 그 이름을 부르고 싶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그 대책이 자신들의 이름이 행한 그 공로를 예수 라는 이름을 따와서 가리우는 방식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를 깨 보면 그 이름이 인간의 이름으로 가득차 있는지
예수님의 이름이 가득차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성령은 바로 교회 깨는 마치 오늘 수능인데 울릉도 호박 엿을 깨는 엿치기를 하시듯
그 속에 성령의 열매 인지 아니면 인간 장로들의 유전의 열매로 가득차 있는지를
매일 매일 죽이는 방식으로 다가오시는 겁니다.

(요 2:13, 개역)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요 2:14, 개역)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요 2:15, 개역)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요 2:16, 개역)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요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18, 개역)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요 2:1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20, 개역)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 2:21, 개역)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은 유월절을 이런 식으로 이루시고 인간들은 날 지키기로 예수님과의 승부대결의 상대로 그 대결구도에 놓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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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3 19:25:16,

기도는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긴밀해지는것이고 우리의 기도의 힘도 훨씬 더 강해진다 속전 속결이다 기도를 날마다 하고 있는가 살펴보라 기도가 습관이 되지 못하면 아무리 하나님께 매달려도 응답이 지연될수 밖에 없다 눅 22:39에 보면 습관을 좇아가 나옵니다

답변 :

(눅 22:39, 개역)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그 목사는 뭘 말해도 거짓말만 하네요

예수님의 습관을 성경에서 찾아보세요 나오나? 안 나옵니다.
예수님의 습관이란 날마다 자신을 죽여서 남을 살리우는 율법 완성에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제도나 아벨의 제사나 모두 자신의 제물됨을 말하고 있으니 습관이라고 붙여도 당연한 의미입니다. 반면에 인간의 습관은 그 정반대의 모습이였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친히 제물이 되심에 참예하는 제사장 직 마저도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방식으로 정반대로써 마귀놀이만 해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질문 자체가 어떻게 그리 딱 들어맞게도 마귀 장난을 저렇게 당연하듯이 자랑하고 있는지 너무 너무 그 놀이가 재미 있으니까 교인들에게 까지 같이 하자 라고 나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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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3 19:27:16,

주님이 하나님과의 기도에서 즉각 응답되었던건 라인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처엄 육적인 기도는 하지 말라 하나님과의 라인을 살려놓고 기도할 준비를 하고 있으라 필요할때 한방에 연결되는것이다

답변 :

인간의 기도 중에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세요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라고 기도하는 자는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구원에 대한 알리바이 형성을 위한 행위로써의 기도 찬양 예배 그거 자랑하고 전념합니다. 그것도 죄인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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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3 19:30:42,

기도가 습관이 되지 못하면 바로 시험에 빠진다 시험에 빠지면 악을 경험하게 된다  눅 4:13에서 주님이 세가지 시험을 이길수 있었던것은 그 앞에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십일 주야의 기도로 인해 시럼을 통과 할수 있었던것이다

답변 :

시험은 예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시험에 드는 이유는 자기욕심에 자기가 미혹되어서 자기 꾀에 자기가 빠져서 그런것이라고 합니다.

(약 1:2, 개역)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 1:12, 개역)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약 1:13, 개역)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약 1:14, 개역)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예수님이 마귀의 3가지 시험을 이기신 이유는
유대인들이 마귀에게 미혹되어 있음을 드러낸 겁니다.
40일 동안 준비 기도를 해서가 아니라
40일 동안 자기부인을 해서 자기를 더 이상 챙길 필요가 없다 라는 것을
40일 날짜 채운다는 의미가 아니라 죽음에 뛰어드는 자기부인의 의미입니다.

시험이란 자기를 챙길려고 하면 할수록 시험에 듭니다. 자기를 더 이상 챙길 필요 없은 분이 어떻게 마귀의 3가지 시험 경제 종교 정치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는지
그 희생과 자기를 버림당하는 그 제물되심을 통해서 증거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그가 버림을 당함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라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지

그 목사는 또 반대로 제발 좀 너 자신을 챙겨라 라고 자기가 마귀에게 미혹당해 시험당한 것을 남까지 시험에 빠뜨리고 있네요

그만큼 불안한 시대에 자기 손으로 이룬 종교적인 공로 바벨탑이 무너질까봐
목사 다움을 자기가 스스로 든든하게 하겠다고 나오는 욕심 때문에
그 탐심인 우상을 교인들에게 까지 심고자 함입니다.

인간은 교회를 삼킬려는 욕심을 죽어도 못 버릴 정도로 마귀에게 미혹된 자기자신에게 미혹된 정도로 음부의 권세가 그들을 이기고 있는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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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3 19:33:28,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지 않는것이 시험에 든것이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가 하는 자체가 이미 시험에 든것이다 시험에 들면 마음이 강팍해지고 말도 사나와 진다 악한씨는 우리의 육체와 성질이 같기에 거름주고 노력하고 애쓸필요가 없다

답변 :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지 못했음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 긍휼의 대상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어떻게든 살아왔다고 그 억지성을 주장한 것이 이미 시험 든 겁니다.
말씀을 살면 살수록 성취감 실적 업적 달성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가 이렇게 클 줄 몰랐다 라고 깜짝 깜짝 경끼를 일으킬 정도로 놀래서
주여 감사합니다. 저런 지옥 속에 절 빼내주시다니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라고
자신이 지금까지 지켜온 모든 말씀 행함 마저도 다 남에게 나누어 줘 버립니다.

그러나 부자청년은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줄 모르기 때문에
말씀을 자신의 지킴 여부 만을 따지는 장난이나 치고 있는 겁니다.
늦게나마 예수님께서 지옥과 결부 시키면서 가난과 결부 시키면서
너가 과연 음부의 권세마저도 이기는 말씀을 제대로 지켰는지를 봅니다.

그러나 부자청년은 근심하고 돌아섭니다.

그렇게 지적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보는게 아니라
여전히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실적 업적을 남겼느냐 못 남겼냐 성공했냐 실패했냐
의 여부만이 결정되는 자기자신만 쳐다보았기 때문에 근심해서 돌아선 겁니다.

예수님 마저도 선악과로 본 겁니다. 아무리 생명나무로 다가 와도 그들 자신들이
선악과 나무가 되었기 때문에 자기를 선악과 보듯이 예수님 마저도 선악으로 보는 겁니다.

그것 자체가 미혹 된 겁니다.
법에서 못 빠져 나오는 거죠. 그 목사는 이미 미혹된 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무서워 한다면
이미 심판 받은 자들에게서 나오시던가
님이 탕감받은 것 나누어 주던가

아무리 심각하게 말해도 농담으로 듣겠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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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3 19:34:19,

말씀 아닌 것들은 우리안에서 너무 잘 자라는데 단 한가지 생명의 말씀을 우리안에서 질식해 죽어버린다

답변 :
인간이 자신을 선악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악을 자기가 어떻게 판단하는고 하니
모든 종교에서 보는 악과 죄나 사망이나 죽음 욕심 탐심 모두 같은 식으로 해석합니다.

이거 기적입니다. 어떻게 죄가 같은 식으로 해석이 되는지 신비로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죄는 사망은 욕심은 예수님의 독점적인 해석 외에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알려주시지 않는 이상 자기가 판단하기를 말씀이 아닌 것이 우리 안에서 너무 잘 자란다고 보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생명은 우리 안에서 질식해 죽는다고 합니다.

얼마나 생명을 무시했고 연약해 빠진 생명이였으면 그렇게 해석할까요?
자신들의 불안증세나 결백증을 마치 생명에 대한 해석에까지 엉터리로 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가 놀랍게도 성화론자들입니다.
기도 안하면 어떻게 되고
기도 하면 그 반대로 되고

자신들의 믿음 없음을 남에게까지 반드시 심는 그 믿음이 너무 너무 놀라울 정도입니다.

어두움이란 빛을 드러내기 위해서 반드시 빛에 의해서 등장해야만 하는 엑스트라다입니다.
그 엑스트라다만 보고 벌벌벌 떨어서 주인공의 활약상을 하나도 안 보고
자신들의 단도리만 하려고 하니
이것이 감독에게 좌우 되는 시나리오 입니까? 아니면 출연 연기자 기준의 시나리오입니까?
주인공 아닌 주제에 맨날 주인공 행세 하고파서 그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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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3 19:36:28,

기도를 습관화 한다는것은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밭을 부드럽게 계속 갈아 엎는것이다  습기를 주어야만 우리안에서 성장할수 있는 반면에 가라지와 같은 악한것들은 누가 와서 슬쩍 말한마디 하고 가면 요동을 친다 안에 자리잡는다

답변 :

결국 농사도 자기가 짖는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물 주는 이가 없으면 말짱 허사요
가리지를 심는 것도 주님이시오
바람도 눈도 빛도 밤도 다 주님에게 해당되는 겁니다.

인간들은 주시는 것 줘도 안 받고
그저 자신의 농사행위로만 추수 할려는 자기 열매만을 거두고 싶어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이 거들나야 더 큰 농사꾼이 있음을 보고 자신 마저도 그 큰 농사꾼의 기르시는 작물에 불과 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더 나은 농부 더 큰 농부가 얼마나 지혜로운줄 모르기 때문에
믿을 것은 자기 지혜 밖에 없다고
늘 선택의 귀로에 서서 자기 행위 가려내고 취사선택하고 늘 미혹 되는
없는 자아라는 허상에 늘 빠져 시험 속에서 살고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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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3 19:39:53,

기도의 핵심은 내가 원하는것을 이루는게 아니라 아버지가 원하는것을 기도하고 이루는것이다 하나님의 원대로 이루어지길 기도 할때에 천사가 와서 수종을 든다 눅22:43 에 나옵니다

제자들이 기도하지 못하고 잠든 이유는 슬픔을 인하여서이다

답변 :

(눅 22:42, 개역)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눅 22:43, 개역)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눅 22:44, 개역)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그 목사는 반대로 해석 했네요

항상 자신들의 탐욕을 기도로써 실적 업적 달성을 추구하다 보니 나중에 그 도박에 삑사리 날까봐 항상 흑기사를 또는 찬스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라는 예수님의 부르짖음을 그것마저도 자신들의 기도 변호에 덧붙여 버립니다.

그래서 흑기사처럼 돕고 도우니까 걱정 말고 자신의 탐욕에 미혹된 대로 마음껏 기도하라 라는 정당성을 강력하게 주장해야 교회에 자신의 야욕을 달성할 수가 있는 겁니다. 교회에 대한 목회자의 탐심은 딱 하나입니다. 교회 생존입니다.

어떻게든 교회는 생존해야 한다는 겁니다.

교회가 망하면 자신들의 믿는 하나님도 망한다고 은근히 심어서 세뇌 시키고 있는 겁니다.

다시 한번더 말합니다. 하나님은 망하는 분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망할까 하는 두려움을 그런식으로 가리우는 겁니다. 그게 기술입니다. 이 기술을 습득한 자들이 목사들입니다.

자그래서 천사들이 돕는 겁니다. 왜 도울까요?
예수님이 기도 잘 하도록 돕는게 아니라.
예수님의 기도 내용대로 이루기 위해서 돕습니다. 어떻게 죽이시는 제물삼고자 돕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 제사장이 되어서 예수님을 어린양 제물로 삼는 식으로
제물 삼고자 십자가에서 버리고자 천사들이 동원되는 겁니다.

즉 천사 곧 영의 활동이란 육에 대한 죽임으로 일관 합니다.
은사를 제가 죽음에 뛰어들도록 주어진다고 했듯이
자기부인케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는 자기부인을 한 기도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겁니다.
끝까지 결국은 자기긍정이 되는 겁니다.

자기부인이란 인간 곧 육이 할 수 없기에 도리어 공격 대상이기에
성령이 개입하는 겁니다.

자 이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밖고자 천사들이 동원 되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밖히는 판국에 우리들은 예외가 될까요?

우리들을 십자가에 못 밖고자 예수님이 처소를 예비하신 겁니다. 그 다음은 너희 차례다 라고 말이죠.

그렇다면 기도는 내 스스로 자기부인 할수 없는 무능함을 기도하는 겁니다.
마치 성전에 두 사람이 기도하는 모습을 주님이 왜 알려주시는지를 깨닫게 하시도록
천사와 성령이 동원되는 겁니다. 그 어려운 해석 불가의 성전의 두 사람 비유를 깨닫게 하시도록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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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3 19:41:38,

슬픔은 가장 싫어하는것의 단어다

주님은 아버지의 원대로 되길 원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이 죽는것이 가장 큰 슬픔이고 가장 싫어하는것이다

제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것이 슬픔이다 그것때문에 잠든 것이다

답변 :
거보세요 죄를 자기들의 행동 여부로 분별하고 판단하겠다는 취지죠
예수님이 그들을 잠재워 버리고 또 책망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최근 눅 10장의 12제자와 70인들이 정작 앞에서는 귀신도 쫏아내고 하더니 그 뒤의 사건은 아주 무능하고 도리어 책망 받죠. 그 이유는 제자와 70인들을 대표성으로 해서 인간들의 감추어진 속내를 들추어내고 주님의 하신 일에 철저한 소외성과 무능함을 증거하기 위한 예수님의 일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기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의 기도가 얼마나 무능함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것을 제자들이 대표적으로 인간들의 기도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에 관심이 없음을 제자들을 통해서 책망하시는 겁니다.

그 목사는 예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자세는 관심 없고
기도 자체에 승부를 걸어라 라는 탐욕을 가르치고 있으니 자신의 욕심을 드러낸 겁니다.
결국 교회 잡아먹겠다는 취지입니다.

성화 성화 라고 하지만
제가 만나본 성화론자 대부분이 교회를 인질로 삼아서
교인들을 뺨때기 때리면서 강간하고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럼 그것이 노골적으로 안 드러나도록 감출려고 한다면
도리어 역으로 교회 자체에 목숨 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때려 죽어도 포기 못하겠고 예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의가 이루어 짐에는
목사 당사자가 아예 추호도 관심이 없다 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 보니 스톡홀름 증후군처럼 그 목사의 유린당한 자들 또한 자기들의 생존과 구원과 자기가 어떻게 사라질까 싶어서 실패할까 망할까 싶어서 늘 전전긍긍하면서 그 목사에게 꾀여서 늘 질질질 끌려다니게 되는 겁니다.

(고후 11:19, 개역)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고후 11:20, 개역)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제자들이 슬퍼하는 이유는 자기의 구원의 보증수표가 부도 났다는데 있어서의 슬픔입니다.
예수님은 그 반대로 부도 수표가 아니다 라는 것을 이룰려고 십자가에 달리시는데
똑같이 보고도 똑같이 예수님을 격었어도
예수님을 자기가 생각한 구원수표로 착각했고
예수님이 그 착각을 반드시 넘어선 구원을 이룰려고 다가 왔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도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부도난 수표로 본 겁니다.
그런데 처소를 예비함으로써 성령이 오게 되니
그 부도난 수표가 도리어 구원이였고
사람들이 성공한 수표라고 여긴 모든 세상의 화폐가 진짜 부도난 수표임을 알려준 겁니다.
그런데 그 목사는 여전히 부도난 수표가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라고 하니
마약을 단단히 쳐 먹은 모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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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3 19:43:3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것이 내게 있어서 가장 큰 슬픔이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것이고 내 육신이 원하는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것이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것이다 하나님의 원과 내 원이 다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수 없고 섬길수 없다

답변 :

그래서 로마서 7장이 두 법에 의해서 철저하게 샌드위치 찡겨서 죽어봐야 그 다음 8장으로 넘어가는 겁니다.

이 곤고함을 제대로 느껴 봐야하고 육의 무능함 육의 죽음 육의 곤고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다 라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보고 자신의 망함을 자신이 못박힘을 보라는 겁니다.

그 곤고함 뒤에 일방적으로 쳐들어 오는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라는 뜻은
예수 밖에는 오로지 정죄 밖에 없는 두 법이 자기를 사로잡는 철저한 죽음 뿐임을 정죄함 뿐임에 대비되는 의미라는 겁니다.
 

(롬 7:23, 개역)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8:1, 개역)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 목사는 마약 먹은 증세처럼 웃었다가 울었다가 헤헤헤 했다고 펑펑펑 울었다가

말씀 해석을 이랬다 저랬다
그러나 참 감사하게도 십자가의 의미는 죽어도 안 나오네요

자기자신에게 껄끄럽게 다가오지 않았기에
구지 남에게도 걸림돌을 제시 못하는 겁니다.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결국 오늘날 현대종교인들은 종교적으로는 맨날 유대인 흉내내고
꼴에 또 이방인의 지식을 추구하다 보니 미련한 말씀이 될까 싶어서 지혜롭게 단도리 해 보나

십자가 자체가 기적의 반대인 수치요(거리끼게 하는 결코 자랑 못하고 당당하게 내세우고 싶지 않는 허물덩어리 그 자체이고 =법궤 3가지 증표처럼)

지식층에게는 무식하고 미련하기 짝이 없는 어리석음 뿐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증거한다는 것 자체가 자기 생존 뿐만 아니라 존재감 자체에 위기를 가져오는
자살 행위가 되는 것이기에

아무나 흉내 낼수가 없도록 한 겁니다.

그 목사는 끝까지 목사이고 싶어하고 영적아버지 영혼의 의사이고파 하는 겁니다.
만약 그들이 병낫을때에 누가 고칠수가 있을까요?
자신들 또한 언제든지 병날 수 있는 환자임을 모르기 때문에
자리 빼앗길까봐 싶어서 목사라는 은사 마저도 정치화 하여 성벽을 굳게 높이 높이 쌓는 겁니다. 그것을 그들은 성화라고 우기고픈 착각을 하는 겁니다.

성령의 성화란 바로 그 높이 쌓은 성벽을 허무는 일만 전담하시는 분이니 참 멋지신 분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예비 하신 겁니다. 유일한 보증수표인 보혜사입니다. 인간 자칭 의사들은 자기 병도 감당 못하는 자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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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3 19:47:38,

주님의 승리는 내뜻데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의 고백으로 인하여 주님이 승리하신것이다 이 승리를 이끌어 내시기 위해 주님이 땀을 흘리시고 피를 쏟으신 기도를 한것이다 아버지의 원대로 이겼으니까 십자가에서 죽는일과 삼일후에 부활하는일이 남은 것이다

답변 :

예수님은 승리하실 필요 조차 없을 정도로 이미 승리자로써 오신 겁니다.
문제는 인간들이 인정하기 싫어하기에
그것을 확정짖기 위해서 인간들의 손에 죽어야만 하시는 겁니다.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제물 삼았으니 빼도 박도 못하는 거죠.

예수님의 승리를 지금 현재의 달성으로 표현한다는 자체가
인간들의 자기 숙제의 성화를 예수님에게 까지 적용시켜서 성화론 교리를 어떻게해서든 정당화 할려는 것입니다.

자 그렇게 되면 뻔한 사기술은 그 다음 단계는 뭐냐 라고 달성했고 그 다음 달성 목표를 주게 되는 겁니다.

그 다음일이 부활인 거죠.

즉 십자가 자체가 부활과 죽음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는데
따로 따로 국밥으로 보게 되니
이미와 아직으로 보게 되는 겁니다.

결국 십자가는 이미 예방 주사를 맞았으니까
그 다음은 부활만 남았다고 보니 모든 사고방식이
십자가는 지나갔고
부활이라는 숙제를 어떻게 달성하느냐에 초점을 두게 되는 겁니다.

바로 이런 술수에 말려들도록 십자가는 빨리 빨리 땡처리 바겐세일 하듯이 해야만
거리끼움이 되는 걸림돌을 제시하는 성령의 일관된 일을
본인들이 이 걸림돌을 제거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부활이라는 기적을 추구하는 종교꾼이 되어야만 실적을 남기게 된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은 기적을 요구하는 자가 악한세대요
예수님이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 뿐이라고 한 겁니다.

부활 마저도 인간의 숙제로 둠으로써
인간의 가능성이
믿음이라는 명분아래서 펼쳐지게 됨으로써 실적 남기기 경쟁이
교회 안에서는 이 경쟁이 불붙게 되니 목사로써는 이것보다 더 좋은 곳이 없는 거죠.

교회야 말로 목사 개인의 욕망의 꿈 아지트입니다. 알고보면 그 목사를 세운 교인 또한 자기들의 야망을 꽃피우고자 하는 교회 삼키는 작당들의 터전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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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3 19:48:57,

육신을 벗고 당신의 본래 모습인 영광의 몸을 얻게 된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계기였다 제대로 된 기도는 에고를 포기하게 참기도다 생명의 씨가 역사못하는것은 에고 때문이다

답변 :

옷 이라는 것을 인간이 감싸고 있다는 의미에서
저는 최근에 박스라는 차원에서 그 의미를 말했습니다.

박스 또는 그릇

선악을 담아버린 박스가 인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자기들이 선악이 된 이상 예수님을 보는 시각도 선악으로 보게 되니
예수님을 자신들의 박스에 담는데 있어서 선악으로 담아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자라는 모습으로 오셨고 인자의 옷을 입음으로써
인자 속에 인간들을 담으실때에 뱀 불뱀의 모습으로 담아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개코, 오로지 마귀 모습만 불뱀 모습만 담아버리니
그 박스를 싫어버린바 될 수 밖에 없기에
인자를 십자가에 못 박게 되는 겁니다.

나의 진짜 모습은 하나님의 영광의 옷 영광의 회복된 옷이 아니라.
너는 불뱀이야

너는 원수야 라고

사랑만이 유일하게 나의 진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것을 지적 받은 자가 예수님의 옷으로 할례 곧 무화과나뭇잎(스스로 가리운 선악 옷)을 벗겨버리고 예수님의 옷으로 입히시는데

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음 받은 새피조물 새옷을 입은자를 교회라고 하고
이 교회는 자기도 원치 않는 것을 박스에 담게 되고 또 담기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전으로써 성령의 일에 동원이 되는데
박스가 되는 겁니다.

남의 허물을 담아서 그 허물 위에 뿌여진 피를 보자 라는 종말의 유일한 피조물인 교회가 되는 겁니다.

교회란 남의 허물을 박스에 담고
또한 예수님의 박스에 늘 자신들의 허물이 저당잡혀서 예수님의 박스에 담기게 되는 겁니다.

이런 성령의 일만이 남아 있지
인간들의 종교적인 행함만은 그 차이로써 일부러 주변에 깔아 놓습니다.

자기가 자기 그릇을 유리그릇 만들겠다는 허상을 늘 보여주면서
성령의 전으로써 박스 위에 피가 왜 뿌려지는 그 십자가의 사건만을 반복할 뿐입니다.

다윗을 저당 잡고자 우리야 박스 밧세바 박스 이름없는 아기 박스에 담았습니다.
남들이 들키지 않는 그 허물이 저당 잡힘으로써 다윗은 비로소 율법 외의 한 의를 쳐다보게 됩니다. 인자 박스입니다. 제사 보다 나은 상한심령 번제 보다 나은 인애와 자비를 비로소 대상이 됨으로써 보게 됩니다. 이제 이 다윗이 알게 된 박스를 확장하게 되니
이스라엘 국가 전체와 이스라엘 백성의 허물을 담는 다윗언약을 기준으로써
참선지자의 박스에 담겨져야 하고
참선지자들은 죽기 살기로 이스라엘에게서그것을 저당 잡아야 하는 겁니다. 마치 자기를 버린 원수를 살리기 위해서 요셉이 은자시험으로 볼모작전을 펼치듯이 말이죠.

이처럼 교회란
서로 서로가 성령으로써 교통하기 위해 성령이 이런 일들을 벌립니다.

서로 서로에게 허물 잡히도록 저당 잡혀야할 꺼리를 잡아야 하고
그 허물을 떠벌리는 것이 아니라
정작 그 허물을 캔 당사자가 자신의 신체 박스에 담아서 자기의 피가 아니라
자기의 기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써 허물이 다시는 보시지 않는 다는 그 말씀의 운동력을 정작 본인이 믿어야 할 판국에 놓여지도록 하시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나도 죄인입니다. 나 목사 아닙니다 나 죄인입니다.
그리고 당신도 죄인입니다. 아무리 나에게 목사라고 대우해 줬다고 해서 죄인 아닐수가 없습니다. 그리니 당신도 죄인입니다. 그래서 지금 눈에 안 보이는 예수님 만이 이 두 죄인을 담당하실 유일한 분입니다. 라고 눈에 보이는 자신들은 아무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만을 현존하시는 분으로 내세우게 된다면
자신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기에 심각한 것이 없는 겁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자신들이 현존하기에 거기에 꼽사리로 예수라는 인물을 인형처럼 부적처럼 사용하는데 그 심각성이 있는데
그 목사가 하는 지금 까지의 모든 말이 자꾸 예수님을 빼버리고
현실에서 심각한 문제 해결의 당사자는 자꾸 목사와 교인 이 둘의 존재만을 부각 시키는데 있는 겁니다.

다시 강조해 봅니다.

교회란 서로의 허물을 감추이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도 들키지 않는 허물을 교회에서 선포 되는 말씀으로 들킴으로써(이것 때문에 은사와 직분이 있는 겁니다.) 그 허물을 누가 박스에 담고 누가 그 박스에 누구의 피가 흘러서 덮어버리는지만을 증거하고 교통하게 소통하는 그 분의 피만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피에 관심이 없다 보니 인간들의 업적 실적 그것으로 정치화 되고 서열화 되고 누가 잘 믿고 누가 잘 성숙 되었고 누가 아직도 어린 성도이고 누가 그 어린 성도를 잘 양육시키고 앞에서 이끌어 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그야말로 인간들의 꿈의 공동체 동아리 형성만이
이 척박한 광야 생활에서 유일한 쉼터 건설이 된다고
스트레스 해소 센터 (단전호흡 수련원) 세우기 에 미쳐 있는 겁니다.

 
*

(롬 6:8, 개역)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고전 15:31, 개역)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딤후 2:11, 개역)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세례 곧 연합 즉
함께 죽고 함께 살기 위해서

물로써 죽이고 물로써 살리고
성령으로써 죽이고 성령으로써 살리고
불로써 죽이고 불로써 살리는

물세례 성령세례 불세례는
바로

주님이 함께 나의 허물을 저당잡기 위해서 나의 진짜 모습 불뱀의 모습으로 오셔서
나의 모습을 상자에 담고 또한 예수님이 인자로써 십자가의 상자에 담기셔서

물에서 죽고 성령으로써 죽고 불로써 죽임을 당해서

다시 물에서 다시 살리시고 성령으로써 다시 살리시고 불 속에서도 다시 사는

함께 다시 삼으로써

타인에게도 이 관계성에 놓이게 하는 겁니다.

마치 다말이 불속에서 죽지 않도 다시 사는 부활 곧 함께 사는 사랑은
바로 유다의 허물을 끝까지 저당 잡아서 불 속에서 허물을 태워버리는 약속을 끝까지 이루었듯이
(물론 다말 흉내 낼 입장이 아니라 도리어 다말에게 저당 잡힐 대상이 되어야하지요)

이제 요셉은 자기를 죽인 살인자 형제들을 살리기 위해서 약속 곧 피의 정신 희생정신 제사 아닌 상한심령 번제 아닌 인애와 자비인 약속의 정신을 뽑아내기 위해서 끝까지 물 속으로 불 속으로 형제들을 지옥과 같은 원수 속으로 집어 넣습니다.

유다는 자기가 받은 그대로 이제 자신이 박스가 되어서 이 약속을 다말 때문에 담겨진 그 박스 위에 뿌려진 그 피를 증거합니다. 담보물 사랑의 빚을 증거 합니다.

이제 이것이 확대 되어서
이 사랑의 빚이 없는 약속이라는 박스에게 저당 잡힌 사랑의 빚이 없는 애굽 나라는
박스에 담긴 것이 없다는 일방적인 이유로 작살 나고
히브리 인들은 이 박스에 담긴 것만을 어깨에 메고자(앞으로의 가나안 전쟁 약속의 전쟁) 피를 기념하는 제사를 드리겠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미움 받아서 졸지에 박스의 일에 참예가 됩니다.


자 이처럼
사랑의 빚이 되도록 교회 안에서 서로의 허물을 지적하는 은사 로 인해 음부의 권세 너머의 약속을 말하기 위해서 그 약속의 박스가 된 교회 곧 성령의 전은 남의 허물을 담아야 하는 미끼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이 미끼가 되기 싫고 남의 허물을 내가 무슨 권리가 있는가 싶어서 남이 죄를 뻔히 지어도 내 몰라라 해 버리는 겁니다.

물론 자신만을 쳐다 보기에 자기 챙기기도 바쁜 판국에 누가 남의 허물을 캐고 또 감당할려고 합니까? 도리어 남의 허물을 지적함으로써 자기를 높이는데 이용하는 남을 짖밟고자 하는 좋은 처세술을 부리기 좋은 곳이 교회인데 말이죠.

그러나 본인이 정작 예수님에게 사랑의 빚을 졌다면
남의 허물을 감당하라 라는 뜻이 아니라 어차피 못합니다. 괜히 시험 듭니다.
남의 허물을 감당하신 분이 이분입니다 라고 나보다 옳은 분이 이분이다 라고 증거할수 조차 없기에 은사를 줘야만 증거토록 은사를 주십니다. 내가 주체가 아니라 은사가 주체임

(롬 13:8, 개역)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서로가 사랑의 빚을 확대 시키도록 성령을 주시는 겁니다.
나도 원치 않는 사랑의 빚을 지게 되고 또
남에게까지 지워 버립니다. 남에게 까지 지워 버리면
빚쟁이들만 가득하게 되는 겁니다.

예로 목사 라는 은사를 받았다면 나는 이런 죄를 지적 받고 나는 이런 허물을 용서 받은 죄인입니다. 여러분은 아무리 저를 목사라는 껍데기 때문에 저를 대우해도 저는 여러분들이 지적받지 않는 죄를 먼저 지적 받음으로써 이런 용서도 받았는데 여러분들도 용서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라고 목사 자신도 성도들도 자꾸 용서의 대상이 놓이도록 목사가 아닌
은사가 자꾸 인도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날마다 죽노라입니다. 죽노라
죽음 속으로 집어 넣는 겁니다. 이게 은사입니다.
은사는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하나님의 일인 십자가 증거 걸림돌 거리끼게 하는 피를 증거함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의 값 불의한 청지기로써 불의한 죄 값에 충성한 그 죽음의 값을 증거 확대 하는 겁니다.

그 죽음에 동참된 자 만이
주와 함께 죽었고 이제 주와 함께 다시 사는 겁니다. 부활이 따로 국밥이 아니라
함께 죽고 와 연결된 동시성입니다. 날마다 죽고 날마다 다시 사는 이유입니다.

왜 사느냐? 박스로써 살리움으로써 사는 것을 당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다말로써 살리움을 당하게 되니
유다는 그럼 이제부터 무슨 일을 하게 되도록 등떠밀림을 당하게 될까요?
나 이런 사랑의 빚 졌습니다. 라고 약함을 자랑합니다. 못남을 자랑 합니다.

그게 피입니다.

자 이것을 증거하게 되면 그것을 듣는 사람 곧 수용케 되어버리면 그 사람 역시
사랑의 빚을 지게 됩니다.

그래서 요셉의 이야기는 이 빚의 고리대업 이야기입니다.

사랑의 빚 죄 값에 충성한 고리대업자 이야기입니다.

이 구약의 이야기가 구약으로 끝내버리지 않고
사람들이 무서워 하고 싫어하는 구약을
반드시 성령은 교회 속에서 말씀으로 실현합니다.

누가 제일 싫어하느냐 하면 목사가 제일 싫어하죠

성령의 일이 싫고 자기의 목회 성공의 일만 좋아라 하기 때문이지요.

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딤후 2:11, 개역)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미쁘다 라는 말은 시험이라는 말과 정반대라는 뜻에서 자주 언급했습니다.

왜 미쁘냐 내가 내 자신을 챙길 이유가 없어진 상태이기에
왜 그렇게 되었는데?

아 글세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죽었고 또한 함께 살게 하시니까 그렇게 된 겁니다.

나 개인이 아니라 우리 즉 전체 판대기(주틀)를 그렇게 규정해 버린 약속이 성취 되었기에
어떤 누구도 이 주틀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겁니다.

연합이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겁니다.
그러니 개인의 숙제의 부활은 없고
개인이 남의 허물을 용서해야하는 숙제 또한 없습니다. 개인 성화는 더더욱 없구요
도리어 판대기 전체로써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주틀을 형성 했습니다.

이것이 미쁘다 라는 의미고
사적인 개인적인 일로써 보는 자들은 다 시험 미혹 당한 자들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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