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란 어떤 누구도 캐낼수 없습니다.

죽음을 아무도 못 캐도록 하심, 죽음을 아무도 못 깨도록 하심

(마 15:1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11-14 07:58:30,
한가지 물어 볼게 있는데 설교하다가 집사 이름이라든지 권사 이름이든지 자신이 편애하는 자들의 이름을 불러서 그 사람들에게 질문하는 식이나 동의를 구하는 식으로 나오면 그 사람들이 자기교회를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잡아두고 싶은 마음에  그런건가요

답변 :
죄란 어떤 누구도 캐낼수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이 심으시고 주님이 빼내십니다.
그렇기에 일단은 알수 없습니다. 사울왕을 예로 들면 처음에는 겸손했고 여호와의 신 곧 성령도 받았고 소위 갖출 것 다 갖추었습니다.
문제는 여호와께서 사울왕이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사람들이 신앙좋은자를 취사선택해서 뽑았다는 이유로
사울 왕이 아닌 다윗을 주님이 앞장세우면서부터 사울왕이 이상하게 변한 겁니다.
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벨의 제사를 편애한 주님의 일하심이 등장하고 난 뒤부터 가인은 안색이 변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목사가 자기의 열심으로인하여 교회에 무슨 목표를 할때는 일단은 경쟁자가 사람이거나 한다면 여전히 본색이 안 드러납니다. 그런데 교회를 즉 구약의 이스라엘을 여호와 본인이 왕으로써 다루시겠다고 나서는 순간부터 하나님과의 경쟁 상태가 되는 겁니다.

오늘날 목사가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이 목회를 할려고 하실때에 목사는 갑자기 자신의 목회에 예수님이 목회자로써 경쟁이 되어버리니 교회 안에 두 목회자가 생겨버리는 식입니다. 이스라엘 안에 두 왕이 생기는 거죠. 그렇다면 인간 왕과 하나님이 왕 되심과의 그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서 목사 자신은 하나님의 왕 되심에 있어서 인간 왕이 얼마나 방해꾼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기회로써 목사라는 은사를 왜 받았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자기부인의 영의 일에 동원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 목사됨이 자기 목회를 함에 있어서 다른 목회자(인간 아닌 예수님)가 개입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방어적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직분자를 세우는데 있어서 머리 되신 예수님을 보고 세우는지 아니면 자신을 위해서 세우는 지를 그 안에서의 잦은 내분의 갈등과 분쟁을 통해서 알수가 있는 겁니다.

목사 자신이 자기를 세우다 보면 직분자들 또한 자기를 위한 직분을 추구하다 보니
목사가 다룰려고 하다가 도리어 머리 위로 기어오를까봐 걱정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들은 늘 불안한 것이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 빼낼까봐 걱정을 하는 거죠.

그러나 교회 전체가 예수님이 목회자 되심을 바라보고 직분자를 세우게 되었다면
눈에 보이는 목사나 교인들이나 직분자들을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그 용서의 사랑의 빚을 널리 널리 퍼트리는 빚쟁이 고리대업을 펼치게 될 겁니다. 저 타인에게 사랑을 소개하는 것이 직분입니다.

예수님이 목회자 되신 교회의 특징은 사랑을 소개하는 사랑의 빚을 점점점 더 지고
빼도 박도 못하도록 십자가를 증거하는 겁니다.

그러나 사람이 목회자 된 교회의 특징은 무슨 무슨 운동을 자꾸 펼쳐서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쌓는 업적을 남의 눈을 의식해서 자꾸 남길려고 한다는 그 차이가 있는 겁니다.

다말이 언제 요셉이 언제 자신의 의 쌓기에 매진 했나요? 그런적 없습니다.
가인과 사울왕이 아무리 노력해서 거룩을 달성 할려고 해도
예수님의 편애가 등장하는 더 나은 제사가 등장해 버리니까 안색만 변해 버린 겁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나 보다 더 나은 어떤 인물이나 어떤 주님이 벌린 사건이 등장하면 우리는 그만 안색이 변해버립니다. 그것을 교회 속에서 늘 지적 받는 겁니다.

그래서 가짜 목사도 가짜 성도도 가짜 복음도 악마도 주변에 배경으로 깔아놓음으로써
징계를 통해서 매를 대시는 그 사랑을 보도록 하시는 겁니다.

(자 그럼 지금까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미움은 뭘까요?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무조건 미움입니다.
인간 자체가 선악과가 되어 버렸기에 아무리 행위를 겸손하게 해도 그것이 법이 되니
주님에게서는 그것을 만든적이 없다고 정죄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무조건 이유없이 미움이 되는 겁니다.

그럼 편애는 뭘까요? 무조건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는 겁니다.
즉 오로지 예수님에게서만 나오는 겁니다. 다윗을 세우니까 사울이 인간쪽에서 출발한 모든 것이 껍질이 벗겨지듯 속내가 드러나는 겁니다. 아무리 착해도 그것이 악마였습니다.
즉 주님이 창조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주님이 직접 손대고 빚지 않은 것 아무리 인간이 창조를 모방해서 창작해 내어도 그거 똥덩어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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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4 08:24:29,
그리스도가 왔을 때 하나님의 왕국도 왔다
신약의 복음 전파는 우리의 관념과는 정반대인,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시작한다. 즉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4:17)고 말한 것이다. 「가깝다」라는 말은 곧 온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가 왔을 때 하나님의 왕국도 왔다. 그리스도는 왕국을 가져왔다. 이 사람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왕국이었다.

답변 :
성화론자들은 과거 바리새인의 묵시운동인 하나님 나라 운동을 여전히 답습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정작 하나님 나라를 기다렸고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등장하니까 자신들의 하나님 나라가 바로 악마의 나라라고 결론내어 버리는 예수님을 제거해 버립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 나라란 상대적인 악마의 나라를 들추어내면서 쳐들어 옵니다.
그냥 오는 법이 없고 쳐들어 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뉘앙스가 쳐들어 온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인간은 방어자세로써 뭔가를 갖추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 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나라가 하나님 나라를 공격하는 식이 인자의 나라입니다.

이 인자의 나라는 마치 다말의 모습처럼
하나님 나라는 시아버지 유다의 약속의 가문을 사수할려는 방어 자세

그래서 다말의 싫어버린바 된 모습인 창녀의 모습으로써
고상하고 의롭고 깨끗하고 정직하고 거룩한 약속의 가문이라고 우기는
약속의 사람이라는 유다의 허물을 잡고자 3가지 물증을
약속에 담아 곧 다말의 창녀된 불의하게 된 자신의 신체에 담아서
유다를 살리고 약속의 의미를 엉터리로 잡은 것을 새롭게 알려주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팁 하나가 뭐냐 하면
인간들의 믿음이나 의로움 쌓기나 하는 등등은 항상 시간적입니다.
그래서 쌓기가 가능한 겁니다. 시간의 순차적인 행위를 도 닦듯이 딱아서
자신의 행실을 거룩하게 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바로 그것이 거룩이 아닌 겁니다.

거룩이란 미래에서 덮쳐오는 방식이 아니고서는 이루어질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아들 이삭이 아브라함을 살리고
뒤에 난 자식이 아버지를 구원하는 방식인 것처럼

후대의 인물이 과거의 인물을 살립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예수님만을 쳐다본 겁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이 아무리 예수님을 봐도 미래 곧 완료로 보이지 않고
자기들과 똑같은 동시대의 인물 동시간 동공간의 인물로만 보일뿐이기에
아브라함이 쳐다본 미래의 인물로 보이질 않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어떻게 소개하는고 하니
같이 동시대에 동공간에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저분이 너의 미래다 라고 외칩니다.
너의 완료다 라고 외칩니다.
그래서 나는 망해야 하고 그분은 흥해야 한다고 하신겁니다. 종말의 인물로 본 겁니다.
아니! 종말의 선지자 세례요한이 나 아니요 저 분이 종말의 인물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이런 문법 파괴가 어디있겠습니까?
이 분이 너의 믿음이다. 너의 끝이다. 너의 완료다.

믿음이란 어디까지나 자기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너의 믿음이다 라고 외쳐버리면
자기의 믿음을 악마의 믿음으로 여기지 못한다면
도저히 예수님을 나의 믿음으로 볼수가 없고, 나의 종말로 못보는 겁니다. 
바리새인처럼 그저 아브라함 자손인 것을 자랑할 뿐인 마귀새끼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마귀 새끼
즉 난 저런놈들을 만든(창조)적이 없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완료(미래)가 왔다면 자신의 시간(역사,행함), 공간(거룩한 성전, 몸)을 포기 못한다면
자신의 미완료만 계속해서 주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믿기, 행하기, 예배하기, 큐티 하기, 찬양하기, 회개 하기, 금식하기, 기도하기 백날해도 거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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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4 08:31:11,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가 오셨을 때 왕국이 왔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들의 관념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왕국과 함께 거절했을 때 왕국이 연기된 채 교회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는 왕국이 아니요 왕국은 교회 시대 후에 예수의 재림으로 세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는 어떤 근거가 성경에 있기는 하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으로 옳을 뿐이다.

답변 :

유대인이 아직 메시야가 오지 않았다는 것을 그 목사가 왕국이 왔다 라고 반증하는 취지로 말한 것이네요

그래서 왕국이란 다른 왕국의 차이를 밝혀내면서 증거합니다.
유대인이 못 받아들이는 이유는 자기들의 왕국이 이미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마 12:26, 개역)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 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막 3:23, 개역) 『예수께서 저희를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

(눅 11:18, 개역)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눅 22:3, 개역)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문제는 다른 왕국이 다른복음으로써 이미 세워졌기에 여전히 메시야의 도래를 기다리는 거죠. 백날 기다려 보세요 오나? 자기들의 메시야는 곧 마귀입니다. 그래서 미완료입니다. 그들의 구름타고 올 인자는 자기들의 자아상입니다. 영웅상입니다. 우상 상입니다. 자기투시요 투사입니다. 선악으로 무화과나뭇잎을 가리우는 자기가 자기를 매로 쳐서 자기 스스로 치유하는 웃끼는 쇼를 하는 쇼 곱하기 쇼는 쇼 하는 장난감입니다.

이 짓을 감사하게도 너무 너무 감사하게도 성화론자들, 그리고 개혁주의자들, 그리고 새생명삶운동 하는 자들, 하나님 나라 운동 하는 자들,

모조리 다 하고 있습니다. 안하는 인간이 없습니다.

미래가 덮치지 않았기에 여전히 자신들의 숙제로써 미완료를 채우기 위한 완료를 향한
밑빠진 장독대에 물 붓기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에 집착하는 겁니다. 신부가 신부 스스로 신부됨에 신경 쓴다는 자체가
신랑을 너무 너무 무시하기에 신랑이 신부에게 무슨 일을 벌리는가에 관심없고 그저 자신의 신부됨에 정신팔려 있는 겁니다. 신부 되어야지 이러면 신부의 모습이 아니야 난 신부 값을 해야돼 라고 신랑이 없는 행동만 골라서 하는 겁니다.
즉 사귐 자체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신랑이 보내준 결혼선물 택배포장 뜯기에도 바쁩니다.
선물 누리기에 바쁩니다. 만나보다 더 나은 참양식을 먹기에도 바쁩니다. 줘도 못 먹냐 말이죠.
미래를 예수님이 책임짐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책임질려고 하니
사랑받는 자의 모습을 흉내내고 연기를 하는 거죠 연기니까 행함 빡에 없는 거죠.
지금의 자신의 모습에 시간적인 공간적인 업적쌓기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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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4 08:32:05,
로마서 14장 17절에서는 오늘의 교회가 곧 왕국(하나님의 나라)이라고 말한다. 교회 생활이 왕국이다. 어떤 의미에서 유대인들은 왕국을 거절한 것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주님은 교회를 세우심으로 왕국을 세운 것이다. 우리는 결코 교회와 왕국을 분리할 수 없다.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주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너는 돌이다. 반석인 내 자신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문이 이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하신 직후에 주 예수께서는 『내가 네게 천국(왕국)열쇠를 주리니』(19절)라고 말씀하셨

답변 :
바로 교회가 하나님 나라 다 라는 말을 하고싶어서 위에서 그렇게 의식을 하는 겁니다.
그다음 부터는 이제 뭐라고 사기칠까요 이제 하나님 나라 값을 해야 한다 넌 그런 값을 가치를 하고 있느냐 라고 사기칠겁니다.

이게 바로 신랑이 없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신랑이 자신에게 뭔가를 해 준게 없기에
자신들이 뭔가를 해서 하나님 나라를 인테리어 장난을 치는 거죠.

그래서 카톨릭이 베드로에게 특별히 교회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1대 교황으로 떠받드는 이유는 베드로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교회라는 정치조직의 명분을 삼기에 좋아서 그런 겁니다. 삼위일체를 그런식으로 사위일체를 감추고자 한 명분이듯이 (결국 삼위일체는 인간을 감추기 위한 완벽철학, 완전신학, 완성교리이듯, 애굽의 10가지 신들은 마지막 장자를 숨기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그래서 10가지 재앙으로 치는 겁니다.)
교회를 하나님 나라 라고 우겨야 자신들이 교회를 장악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언약이 왜 인간들이 국가체제나 특히 성전 중심으로 인한 피비린내 나는 처참하기 짝이 없는 전쟁을 내분으로써 전개시키는고 하니

보이는 성전에 대한 또는 보이는 보좌(왕의 자리)에 대한 집착을
미끼로써 던져주니 성전에 다들 미쳐버리는 겁니다. 자기의 신 됨이 비로소 드러나죠

다윗언약에서 성전은 영 엉뚱한 곳에 있습니다.
미래에서 덮쳐질 다윗의 자손이였습니다. 흠모할 모양 없는 다윗자손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미래의 예수님의 때를 기다리듯이 말이죠.

자 바로 믿음이란 부재(누락되어야 할 것)을 앞장세워서 실상을 증거합니다.
뭐뭐뭐 아니요 뭐뭐 이다 라고 증거 합니다.
솔로몬 성전(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아니요 예수님

(눅 12:27, 개역)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참성전은 곧 예수님 뿐입니다.
그래서 참성전의 실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가짜 성전의 내막을 다 들추어내어야 하는 겁니다.

교회든 12자파 이스라엘이든 뭐든 누락 되어야 할 겁니다. 심지어 피조물도
창조주 라는 실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피조물 조차도 누락 되기 위해서 피조물로써 지음 받은 겁니다.

이런 주님의 창조 솜씨에 너도 나도 다 걸려 넘어짐으로써
인간이 창조하는 교회와 (성전건립, 운영, 보존사수)
예수님 본인이 세우는 참성전과의 차이로써

교회의 의미를 드러내시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의 연합(하나 됨=한몸 되자) 시도가 얼마나 그 속에 살인의지를 담고있는지를
가짜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주님 쪽에서 한몸의 완료를 이미 완료된채로 이루시는 것과의 차이를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인간 쪽 출발이 지독한 미움이고
주님 쪽 출발이 지독한 편애인데

아무리 봐도 인간은 자기 쪽에서 출발한 순차적인 것이 믿음직 스럽지

미래에서 차이성을 들추어내면서(자존심 상하는 자기부인을 확정짖는) 다가오는 것은 전혀 믿음직 스럽지가 않은 겁니다. 무조건 걸림돌이요 불공평하고 불의한 모습으로만 일관하기에 인자의 모습이 싫은 겁니다.

가인은 아벨의 제사가 믿음직 스럽지 못하기에 주님의 선택에 불공평하다고만 할 뿐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이룬 이스라엘 국가체제가 유일한 미래인데 또 거짓선지자들이 이런 국가체제에 수호를 빌어주고 절대로 망할 리가 없다 평강 평강 평강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 라고 외치니 더할 나위 없는데
꼭 참선지자들이 더 나은 나라가 있다 라고 그 더 나은 나라 때문에 현재의 나라를 날려버리는(누락) 그 삐딱한 소리에 듣기 싫어서 죽여버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도통 안 믿겨지고 안 땡기는 겁니다. 그거야 당연한 것이 이미 믿겨졌고 아주 잘 땡기는 것이 기존의 이스라엘 국가 체제와 성전이 있으니까 뭐가 아쉬워서 미래의 나라를 원하겠습니까?

바리새인이 배격한 원리도 똑같고
오늘날 교회를 인질로 삼아서 교회운동을 펼치는 자들 또한 다 똑같은 겁니다.

믿음 것이 없기에 지금 현재의 것을 주장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것에 사활을 거는 겁니다. 즉 오로지 자기 믿음 외에는 믿을게 없다는
어떻게 보면 불쌍하기 짝이 없는 주님의 사랑의 세계를 편협한 자아 곧 허상인 자아에게 철저하게 갇혀서 자아의 세계만을 주장할 뿐인 겁니다. (이미 구약에서 다 밝혀낸 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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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4 08:32:19,
오순절 때와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다 왕국에 들어가도록 문을 열기 위하여 왕국의 열쇠를 사용함으로써 교회를 세웠다. 이렇게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 거기에 왕국이 있었다. 교회는 왕국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왕국은 장차 온전히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여기에 왕국의 실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교회 생활이다

답변 :
사도행전은 인간들의 행위는 일체 없구요 영들이 장기알을 다루듯이 축구공을 차듯이 인간을 배치시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영의 일이란 가르는 행위를 하는 겁니다. 인간은 못합니다.
영은 바로 이게 육이야 라고 가르고 이게 영의 결과야 라고 가릅니다.
거기에 동원된 축구공인 사도바울이 시도행전의 결말을
예언대로 즉 영의 일대로 되었다고
귀 있는자 듣고 귀 없는자 못듣는구나 라고 자신의 전도 결과로 전도 제대로 못했다거나 저사람은 내가 전도 할수 있었는데 결국은 안 들어서 안타깝다 라는 자신의 행위 여부가 아니라.

참잘 되었군요 라고 본인이 정작 영의 일에 믿어야 할 판국으로서
두 패로 가르는 그 영의 일에 목격자로써 그냥 본대로 증언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선악을 아는 인간들은 그동안 못했던 아름다운 성전 꾸미기를 이제 오순절을 통해서 막힌 담이 허물어 지듯이 뚫혔으니 이제 그동안 하지 못한 숙제를 열심히 하자 라고 또 업적 위주로 나옵니다. 마치 선하게 보이겠지만 육의 일 외에는 장로의 유전 외에는 안 믿겨지기에 말릴수가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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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4 08:34:04,
이 내용을 인터넷에서 읽었는데 이것도 로마서를 볼모로 삼은 교회사수인가요

답변 :
로마서는 바로 그짓의 대가인 바울이 왜 그것이 아닌가를 정작 자신이 그 일에 도사였기에
그 내막을 복음과의 차이로써 증거합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행함이냐 믿음이냐 라는 의미로써 가짜복음인 다른복음과 진짜복음인 십자가와 대립 시키는 겁니다.

또 우리는 진짜 교회 되자 이래 나오면 미완료죠
원래 우리는 자나깨나 가짜 교회만 좋아합니다. 그래서 미래에서 참성전 예수님이 늘 간섭하지 않는 이상은 인간 쪽에서는 답이 없습니다. 맨날 세워 봤자
법적 교회
선악적 교회 뿐입니다.
자기 투사 교회
자기 구원 용 교회 뿐입니다.
우상(하나님 나라) 교회

그들 속에서 우리가 볼모로 잡히는 주님의 배치가 있든 말든
우리는 주님 손에 철저하게 주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소모품으로써의
진노의 그릇 과 긍휼의 그릇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지어주셨다는 그 자체로써
감사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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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4 08:38:15,
사람에게 다스리는 권위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의 완성은 머리인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를 포함한다. 하나님의 의도의 완성은 머리와 함께 이루어질 뿐 아니라 몸과 함께 이루어진다. 음부의 문은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마 16:18).

답변 :
그 반대죠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이고
그리고 사람 속에 뭐가 심겨져 있고 왜 갇혀있는가를 말씀문자지키기에 집착하는 이유까지 다 들추어내는 예수님과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어떤 교회도 죽음을 이기지 못하기에 교회 자체에 집착하는 겁니다.
참성전되신 예수님만이 음부의 권세를 이겼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음부의 권세를 이긴 예수님이
미래로써 완료로써 덮쳐지는 값없이 주어진 선물을 받는 자에 놓여질 뿐이지
한 몸 이룰려고 하는 자는 선물 받은 연기만을 할 뿐이지요.

그래서 수셔보면 압니다.
금인지 도금인지 슬슬 긁어보면 알도록 되어 있습니다.
선물을 공짜로 받았다는 것에서 감사의 자세인지 아니면
당연한 선물 받을 만해서 받았다는 소유를 자랑하는지를
광야와 죽음과 고난 속에 집어 넣어보면 다 알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물 속 성령 속 불 속에 집어넣는
물세례 성령세례 불세례입니다.

자신들이 인자 되신 예수님의 박스에 저당잡힌 허물과 그 위에 뿌려진 피를 제대로 본 자라면 자기구원을 자랑하는게 아니라 주님의 희생만을 십자가만을 자랑 합니다.
자기구원은 남들 또한 같은 욕망으로써 듣고 수용할 수가 있지만
십자가를 자랑하면 남에게 거리끼게 하는 본색들이 다 들어남으로써
나도 그 상자에 저당 잡혀야 하남? 싫어 난 안 잡힐꺼야 난 불뱀이 아냐 난 절대 안 쳐다 볼꺼야 라고 주님의 죽음을 인정 못하겠다는 증거입니다.

왜 하필이면 교회에 대한 정의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죽음과 결부 시키느냐 하며는
사랑의 정의를 죽음 보다 강한 질투의 사랑이라고 정의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상대적인 것의 차이입니다.

교회 목사가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면서 주님이 나보다 옳습니다 라고 자신과의 차이를 드러내는 복음증인과(그래서 자신이 음부요 자신이 죽음인데 예수님이 뛰어드셨다고 증거)

인간의 보편적인 교회집착 성전사모함 성공 구원 등등의 모든 종교인들의 보편적 성향을 자꾸 자극하고 일깨우고 일하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운운하는 자는
그거 사기꾼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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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4 08:38:53,
성경은 음부의 문(사탄의 능력을 의미함)이 성도들을 이기지 못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만일 성도들이 나뉘어졌거나 개인적이라면 음부의 문이 성도들을 이길 수 있다. 여러분은 교회로 건축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건축된 몸은 결코 사탄에게 패하지 않는다. 사탄은 결코 건축된 교회를 이길 수 없다

답변 :
거 보세요 여전히 미완료 이니까 이미와 아직의 긴장상태 라는 헛소리를 하듯이 완료로 나아가자 라고 하는 겁니다.

성도란 주님이 토기장이로써 빚어낸 겁니다. 그래서 완료 품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영 미덥지 못해서 자기가 자기의 원하는 모습을 성형수술하듯이 해 버립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인으로써 환자로써 창조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영미덥지 못해서 자기가 자기 손의 수술 칼로 의인으로 미남 미녀 엑스라인 보톡스 해서 견적을 내어서 늘 손대기 시작하는 겁니다. 틈만 나면 수술하기에 성형중독인 겁니다.

차라리 못났으면 손댈 곳이 없는데
의인 되어야 하기에 한번 손대니까
창조의 비율이 깨지기 시작하니 자꾸 땜빵질만 하는 겁니다. 그래도 여전히 미완료죠

예수님이 성도 라고 완료 라는 새피조물로 창조 해도
자기가 자기를 보기에 영 미덥지 않으니까 성형해야 한다고 우깁니다.
너도 나도 다 성형 하니가 안 하는 자가 왕따 당하지요
그래서 아예 다들 다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너의 진짜 모습은 이거야 라고 인자의 모습으로써
나의 진짜 얼굴인 불뱀의 모습으로 오니
죽여버리는 겁니다.

차라리 소경이였더면 고쳐줄텐데
소경이 아니다 라고 하니
이미 소경인 겁니다.

성도로 완료(미래)의 의미로써 증거 되듯이
마귀자식도 이미 완료(미래:예정)의 의미로써 증거 됩니다.

이 둘이 건널수 없는 강이기에 종교군들은 그거 불공평 하니 바꾸어 보겠다고 몸부림 치는 겁니다.

(롬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개역)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7, 개역)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온땅에 전파되는 것은 이미 완료됨을 증거하지
앞으로 한 몸 이루자 라고 증거하는 자는 다른복음을 증거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교회(신부)를 미끼로한
사단과 영의 전쟁을 사도바울이 목격한대로 증거하는 겁니다.

교회(신부)를 중심으로한 양 쪽 세력의 전쟁이 벌어지는 거죠. 서로 차지 할려고 말이죠.

여기에 무슨 교회가 할 일이 뭐가 있나요? 영적인 전쟁이 안보이기에
혈과 육의 씨름만 할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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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4 08:39:19,
이 사람들은 성경을 인용하여 드러내놓고 성전사수를 외치네요

답변 :
그 사람들이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진노의 그릇도 완료된 채로 배치되었지
미완료 진노의 그릇이 더더욱 실수와 잘못과 실패로 진노의 그릇으로 완료되는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완료로써 진노의 그릇 값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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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4 09:12:54,
『그리고 아직 땅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 이것은 하나님과 함께 협력하여 일할 사람이 없었음을 뜻한다(고전 3:9 참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나치게 영적이다. 그들이 너무 「지나칠 때」에는 표면적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들은 표면적인 영적으로 『성령이 모든 것을 하시므로 우리는 아무 것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틀린 것이다. 당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다.

답변 :
거 보세요 결국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라는 선물의 의미와 배치되는 사상을 말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고전 3:9, 개역)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여기서는 동역자 라는 의미가 같이 농사 짖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농사짖는 밭의 역할로써 하나님이 심은대로 뿌린대로 드러내는 하나님이 움직이는 로봇인 집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 로봇의 의미가 자유의지에 손상이 갈까봐 거부하겠지만
로봇 된 것이 얼마나 기쁜줄 모르기 때문에 자유의지라는 헛소리를 운운하는 겁니다.

인간은 자유가 원래 없습니다. 오로지 사랑의 빚진자로써 사랑의 노예냐 아니면 마귀의 노예냐 둘 뿐입니다.

구원이란 율법으로부터 자유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율법으로부터 자유라고 해서 독자적이면 그 독자성이 또 법인 셈이지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말은 저절로 자유케 하신 분의 노예 종 시다바리 가 된다는 뜻입니다.

음부의 권세로부터 자유가 교회가 아니라.
음부의 권세로부터 이긴 참성전의 종이 신부 이다는 겁니다.

결국 내가 사망과 죽음을 이길수 없고 나는 단지 무엇만을 외치는고 하니
난 죽음과 사망을 이길수가 없는데 이 분이 이겼습니다. 그분이 사랑이라는 분입니다. 라고 소개하는 겁니다.
즉 십자가 상의 한 쪽 강도 입니다. 강도가 오늘날까지도 아무도 외치지 못하는 예수님을 외칩니다.
그 성령이 임해 외친 외침을 혈과 육의 싸움을 하는 자들은 그 복음 보다 그 사람이 어떤 행실로 십자가에 달렸는가를 따지다 보니 전혀 귀에 들리지 않는 겁니다. 귀가 있어도 말이죠. 아니 한 쪽 강도는 자꾸 보라는 겁니다. 저 분이 진짜 메시아다 라고 말이죠. 그러나 눈이 있어도 아무도 그가 메시아 인줄 못 봅니다. 십자가(하나님의 저주)에 달리는 자를 누가 메시아라고 보겠습니까? 아무리 눈이 있어도 못 봅니다. 한 쪽 강도만 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건방지게 자기가 죽음과 사망을 이겼다고 예수님의 공로를 가로채거나 또는 자기가 뭔가 보탠냥 까부는 장난치는 놈들이 대부분입니다.

그 장난을 연장까지 합니다. 그게 성화론이요 새생명의 삶이라고 우기는 거죠,

그래서 그 장난치는 것이 결론은 내가 아무것도 안하면 하나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라는 결론입니다.

하나님을 로봇 만들기 위한 수작입니다.

로봇이란 움직이게 하는 조정하는 재미가 솔솔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다루고 있고 조정한다는 것을 믿겨지지가 않기에
자기가 하나님을 로봇으로 조정하는 주객이 뒤바뀐 것을 주장하는 셈이지요.

그리고 결과도 다릅니다. 하나님을 로봇으로 움직이는 자기가 얼마나 대단하냐를 과시하는 놈들이 그런 놈들이고

주님이 나를 로봇으로 다루는 결과는 자기부인을 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래야 로봇으로 삼고 나를 조정하는 그 분이 사랑임을 옳았다 라고 그 실감성이 새록 새록 현실감 있게 작용하는 겁니다.
그 현실감을 선물로써 받은게 없으니 자기가 조종하고 나서는 것이 자꾸 빈자리를 뭔가라도 채울려고 별짓을 하는 겁니다.

(분명히 두 패로 가르는 성령의 일에 장기알로 다루어진다고 말해도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라고 도리어 그들이 안 믿겨지니 헛된일을 채우는 거죠
대부분 채우는 것이 절기와 날과 해 그딴거 지켰다고 자랑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의문의 증서를 찢었는데 하도 지킬것이 없기에 뭔가라도 채워야 하기에 찢은 책을 도리어 본드로 붙여서 자랑하는 거죠 웃끼는 현상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갈 4:10, 개역)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골 2:16, 개역)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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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4 09:13:17,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사람의 역사(役事)와 하나님의 역사의 동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땅을 경작할 사람이 없다면 비를 내릴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답변 :

그러니까 농사짖는, 로봇을 조종하는 대상이 되어야 할텐데 밭이 되어야 하는데
건방지게 자기가 로봇을 조종하고파서 난리인 겁니다.

인간의 믿음 곧 신념은 반드시 조정하고야 말겠다 라는 대상화 입니다. 동일성 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아주 쉽게 차이성으로 일하시면 됩니다. 인간의 믿음만을 비켜갑니다. 인간이 대상화 하는 예수를 비켜가는 식으로 말입니다. 

인간은 선악의 법을 쥐지 못하면 미쳐버립니다. 그래서 반드시 조종하고픈 겁니다. 하나님 마저도 자기 손으로 조종하고 싶고 나아가서 인간들을 조정하고픈 거죠.

법이 자기를 방어하고 자기를 둘러치는 성벽으로써 칭칭 감지 못하면
불안해 미치는 겁니다.

공격 받을까 싶어서입니다.

왜 하나님과 같이 같은 위치에서 동역하고파 하는가?
가인처럼 남들이 공격할까봐 그래서 이마표 달라고 때쓰는 것처럼
타인을 사랑할 수 없기에 도리어 두려워 하기에 남 눈치 때문에 명분 갖추고
만약 우짜다가 상대방이 힘이 없다면 그때야 비로소 기회다 싶어서
쥐도 새도 모르게 모래에 파 묻어 죽여버리는 거죠.

주님을 사랑해서 동역하고픈게 아니라
남들이 공격할까봐 싶어서 거룩 뒤에 숨어서 죄를 로봇 조정을 간섭받지 않고 하고픈 겁니다.

결국 다른 터를 짖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고전 3:7, 개역)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고전 3:8, 개역)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고전 3:9, 개역)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고전 3:10, 개역)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고전 3:11, 개역)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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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4 09:25:14,
사람의 영은 하나님의 영이 일하는 곳이다. 로마서 8장 16절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 영과 더불어 증거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사람의 영과 함께 일한다. 디모데후서 4장 22절에서는 『주께서 네 영에 함께 계시기를』이라고 말한다. 주 예수께서는 오늘 우리의 영에 함께 계신다. 이곳이 바로 주님이 거하는 곳이다.

답변 :
사람은 영이 없구요 육입니다. 그 생명은 코에 있으니 코가 유일한 호흡 통로일 뿐인 육입니다. 흙입니다.

이제 영의 일이 시작되면 인간은 육의 소욕대로 또는 영의 소욕대로 일해야만 합니다.
임의로 부는 바람을 내가 로봇 다루듯 조정할 수 없고
오로지 성령만이 우리를 로봇 다루듯 조정합니다.

다윗은 율법을 쥔 자신의 결과를 보고 자신의 육됨을 비로서 보게 됩니다.
그렇게도 육이면서 영이라고 우기면서 정직한 영이 있고 율법을 지키면 된다고 본 것을
영이 아예 하나도 없는 그저 육 뿐임 철저하게 육에 갇혀 있는 자임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정직한 영이 없음을 알고 정직한 영 새 영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신인 협동은 없습니다. 모두다 인간들의 해석이 자기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고파서 그런 겁니다.

그런 이미지가 타인에게 선하게 비취면 종교는 마케팅에 성공함으로써 장사를 원활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종교는 뭔가를 자꾸 소비해야 함으로써 희생제물 곧 에너지가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소모품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으니 점점더 광명한 천사 다워야만 살아남을수가 있고 그렇지 못하면 도태 된다고 보는 겁니다.

영은 딱 하나 뿐입니다.
육으로 오신 예수님인데 바로 인자입니다.

이 인자가 인간들이 싫어하는 모습만 갖추었습니다.

이 인자의 모습으로써  이 땅을 악하다 라고 규정하는 일에 나서시는 겁니다.

(롬 8:16, 개역)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예수님이 이런 인자의 모습 철저하게 육의 모습인 죄인의 모습으로써 영되심과 영의 일을 증거 했다면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영의 개념은 깨끗하고 거룩하고 착하고 선하고 또 그게 선악의 법이니 전형적인 성화론자들의 해석이요 인자의 정반대의 모습이니까

이 땅의 악마성을 들추어내는 미끼가 아니라 또는 타인의 허물을 담는 박스가 아니라
그저 자기 하나 챙기기 위해서 구원의 방정식 숙제를 푸는 착한 학생일 뿐인거죠.

그리고 로마서의 의미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 영됨과 또 하나님 자녀인 것을 증거할 수 없다는 취지로써 오로지 성령이 증명할 뿐이기에
반드시 남들이 보기에는 도통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을 수 없는 모습 뿐이다는 겁니다.
마치 누구처럼?
예수님이 인자의 모습으로 온 것처럼
어느정도로 못 알아 먹느냐?
모든 피조물들이 고난에 쳐하니까 하나님의 아들들 또한 그 고난에 쳐하니까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듯이 오로지 성령만이 증명하지 않고서는
다들 오해할 수 밖에 없다는 취지로써 그 뒷 구절에
부정적인 의미로만 가득 채웁니다.

(롬 8:22, 개역)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롬 8:23, 개역)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심지어

자녀 다 라는 의미를 더 잘 설명해주는 의미가

이런 자가 바로 사도다 라고 하는데
자녀됨도 기쁘지만 사도들도 이 기쁨을 받았는데
세상에나 그 기쁨이 아무리 봐도 하나도 안 기쁜 모습 뿐이다는 겁니다.

(롬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자 결국 자녀나 또는 영이라는 의미는
육의 생각의 반대의 길로 가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영광과 같다는 겁니다.

이미 완료로 미래에서 덮쳤기에 반대의 모습으로 와도 자유로운 모습인데
사람들은 도리어 저주 받았다고 하는 거죠.

그런데 왜 완료이냐 하며는 박스가 되었기에 자신들이 예수님에게 허물을 저당잡혀 그 위에 뿌려진 피를 보았듯이 (이것을 행복이라고 다윗은 롬 4장에 언급- 나 드디어 예수님에게 낙였다)

이제는 자신들이 박스가 되어서 타인의 허물을 자신의 신체에 박스로 담는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의 모습이 되었다고 너무 너무 기쁘다고 합니다.

아무리 봐도 하나도 안 기뻐 보이는데 말이죠.

이게 영입니다.

얼마나 영을 우리가 육적으로 생각하는지를 저런 모습을 당해봐야 영이 아 이거구나 하고 알지

우리 연변에서 취급하지 않는 영은 영도 아니다 라고 영이 알려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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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4 09:26:21,
주체를 사람으로 돌리는걸 보니 이것도 성화구원론자들이군요

답변 :
종교란 결국 자기 숙제로써의 구원 따 내기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주체죠 성령이든 하나님이든 넘어서지 못하는 난제를 해결해준 해결사에 지나지 않고 그 난관을 넘었다면 다시 자기 숙제일 뿐인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 마저도 일종의 숙제열심히 하는 와중에 감기가 걸려서 못했던 숙제를 감기주사약 맞듯이 십자가를 믿어버렸기 때문에(십자가도 믿기 라는 하나의 행위 추가죠) 이제 감기 주사약 맞았으니 다시 건강해 졌습니다. 다시 숙제를 해야지 계속 감기주사를 맞을수가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믿음도 행함도 모조리 다 주체가 된다는 말을 그들은 이해를 못합니다. 심지어 자기가 숨쉬고 있다는 것 조차도 자기가 숨쉬고 있지 주님이 비상인공호흡케 해서 숨을 불어넣어서 살고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자기 숙제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창조 한적도 없는 선악을 아는 인간입니다.
지옥 반드시 보내시고야 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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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4 09:39:46,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공장이나 학교나 사원에 두시지 않고 동산에 두셨다. 동산은 사랑스럽고 즐거운 곳일 뿐만 아니라 생명이 자라는 곳이다. 동산은 사람들이 노는 운동장이나, 일하는 공장이나, 공부하는 학교나, 치료하는 병원이나, 경배하는 사원이 아니다. 동산이란 뭔가 자라는 곳이요 생명을 낳는 곳이다. 생명은 창세기 1장과 2장의 중심 사상이다. 하나님은 배우는 것이나 경배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분은 오직 자라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그러므로 그분은 사람을 동산에 두셨던 것이다.

답변 :
성장론에 집착을 그런식으로 표현했네요 교묘하네요
장성해야 한다 자라야 한다 어린아이에 머물면 안된다 라는 등등이
아버지가 없어서 그런 겁니다.

아버지가 없는 자들은 하루 하루를 자기가 챙겨야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있는 자들은 자기 성장에 대해서 자기가 체크 안합니다.

성장 자체가 예수님의 몫이기에 일임당합니다.

오늘은 무엇을 먹을꼬 무엇을 마실꼬 무엇을 입을꼬 라는 인간의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문제를 몽땅 빼앗기는 것을 자녀라고 라고 자녀됨이 중요한게 아니라 자녀라 라고 칭해주시는 아버지가 졸지에 생겨버린 겁니다.

그러나 고아들의 특징은 뭐든지 자기 숙제만이 난제로써 가득 쌓여 있습니다.

창 1장 2장은
자라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가득찬 곳이 에덴동산이 아님을 그 자는 모르고 있는 겁니다. 완료의 맛을 못 봐서 여전히 미완료만 자꾸 운운하는 겁니다.

못 자라면 에덴동산 탈락입니까?

자식이 미흡하고 성장이 멈춘 장애자 일수록 부모는 더더욱 자신의 사랑을 애정을 다른 자식보다 더 퍼붓도록 되어 있습니다.

결국 에덴 동산 자체가 사랑의 완료 뿐인 겁니다.

이 사랑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두 나무가 심겨졌고 그 사랑을 받는 위치에 있는 피조물이
자신이 사랑을 하겠다는 법을 쥐게 됨으로써 동산은 철수가 되는 겁니다.

그럼 동산에 대한 해석을 유대인처럼 그렇게 해석해 버리면
예수님은 뭐가 되나요? 예수님이 오지 않는 이상은 해석 못하도록 되어 있는 말씀인데

예수님은 그래서 생명나무로써 이 생명나무의 차이성으로 선악과 나무를 심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생명나무이니까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시니까

그 동안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따라다닌 선악과를 쥔자들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 자신들의 선악에 안 맞고 법적으로 거부할 수 밖에 없기에
또 그랬다간 내 자신을 챙길수 없는 살인자가 되어버리는 죄인이 되기에
도통 어려워서 가까이 할 수 없게 되는 다시는 따르지 않게 됩니다.

자기 유익에 도움이 될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철저하게 차단해 버린 겁니다.
이것이 생명나무입니다.

가능성으로 다가온 자들을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불가능성을 증거한 겁니다.

그런데 그 목사는 에덴동산 마저도 장난감 다루듯이 장난치고 있네요
어쩔수 없습니다. 자기가 신(선악)이 된 이상 성경을 난도질 할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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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4 09:40:28,
교회 생활이 학교나 사원 같아서는 안된다. 교회 생활은 동산과 같아야 한다. 고린도전서 3장 9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하나님의 농장』(원문 참조)이라고 했다. 농장은 자라는 곳이기 때문에 여기서의 바울의 생각은 창세기 2장에서의 하나님의 생각과 똑같은 것이다.

답변 :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똑같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과 같은 거죠
교회를 어떻게해서든 심고 머리 속에 박아버리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쉽게 말해서 목사인 나를 제발 버리지 말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늘 버림받았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찾아내시고야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목사도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다 라는 것을
이런 인간의 속성은 어쩔수 없다 라고 솔직하게 자기도 예외 일수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을

도리어 날 쫏아내면 나 밥벌이 못하고 처자식 굶어죽으면 에덴동산 날라가 버린다
제발 이 교회를 에덴동산 같게 만들자 라고 질질 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애굽나라 바벨탑입니다.

그 속에 빠진 롯을 구출 하고자

주님은 일부러 아브라함에게 자유의 마음 곧 인자의 모습을 심었습니다.

너가 우 하면 내가 좌 하고 너가 좌 하면 내가 우 하마

롯이 눈을 들어 보니 에덴동산 같은 쪽을 골라 갔습니다.

(창 13:10, 개역)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결국 아브라함의 자유는 그 반대의 길을 간 겁니다. 이것이 영의 생각입니다.
육의 소욕을 에덴동산 운운하면서 교회를 삼킬려는 그 목사 정신차리도록 줘 패야 하는데
그게 사랑입니다. 죽음에서 건지는 것 그런데 다들 내버려 두죠 그러니까 사랑없는 교회죠.

타인을 자꾸 죄인 환자로 만들지 않고 자꾸 의인을 만들면 그거 마귀집단입니다.
사랑은 타인을 자꾸 죄인 환자로 만들어서 의사를 소개시켜야 하는 겁니다.

너 병들었어 너 갇혔어 너 포로되었어 너 환자야 너 죄인이야 라고
솔직하게 알려 줘야 합니다. 이 땅은 악하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어 이 땅에 소망 두면 안돼? 그럼 교회도 소망 두면 안돼? 당연하지 교회에 왜 소망두니 다 갈취하는 놈들 뿐인데
교회는 서로의 허물을 담아서 예수님의 피만을 바라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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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4 09:40:50,
생명을 낳는 동산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많다. 반대로 공장에서는 아름다운 것을 발견할 수 없다. 가장 정답고 즐겁고 아름다운 곳은 각양 각색의 식물들이 자라나는 동산이다. 그분은 사람을 동산에 두셨다. 하나님을 찬양하자!

답변 :
에덴동산에 대한 잔상이 인간들에게 남아 있고 선악과 까지 따먹었기 때문에 호시탐탐 하나님 자리인 그 보좌와 그의 나라를 늘 탐내도록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탐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은 이상 탐낼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오늘날 교회를 인테리어 하는 것을 보면 성장 프로그램이라든지 또는 성화론 프로그램이라든지 또는 새생명의 삶이라든지 또는 하나님 나라 라든지
이 모든 것이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선악으로 보게 됩니다.

자신도 그렇게 선악으로 만들고 교회도 그렇게 선악으로 만들고
에덴의 잔상이 더더욱 부채질 하고

또 그 뒤의

(창 3:22,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 라고

여호와께서 일방적으로 선언해 버리고 알려주니

(물론 그 사이에 창 3:15의 약속과 또 저주와 그 저주를 극복하는 생명과 가죽옷의 사건을 통해서 인간들은 충분히 구원의 방정식을 다 파악할 수가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미리 일방적으로 다 들추어내어버리고 약올리듯이 생명나무를 철수 시킴으로써 생명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이 어떤 수로도 막혀버렸음을 선언)

앞으로 오실 메시야도 똑같이 에덴의 잔상으로 해석을 해버립니다.
그래서 메시야가 정반대로 오니까 적극적인 본심이 다 드러나죠.
이건 에덴동산의 주인의 모습이 아니야
아름답지 않고 풍채도 없고 질고의 병만 가득하고
새까맣게 타버린 검은 얼굴이고
전혀 에덴동산답지 않아 그런 메시야는 없어 라고
본심이 드러나는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에게 교회를 줘 보면
그 교회에 무엇으로 가득채우는지를 보면 알수 있습니다.
허물을 채우는지 아니면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을 채우는지

교회 마저도 선악으로 만들어 버리는

말려도 소용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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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4 10:39:06,
생명나무는 상징으로서 합당한 근원이신(시 36:9, 요 1:4, 10:10 下, 11:25, 14:6, 요일 5:12, 골 3:4) 하나님을 상징한다. 만일 우리가 창세기 2장만을 읽는다면 생명나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생명나무가 의미하는 생명을 구체적으로 계시한다.

답변 :
요한 복음의 생명은 반드시 어두움을 동원해서 자신의 빛됨을 증거 합니다.
그런데 정작 요한복음에서 벌어지는 양상은 예수님은 빛이 아닌 철저하게 어두움 취급 받고
도리어 악마들인 어두움은 정작 어두움이 아닌 철저하게 빛의 모습으로써 예수님을 심판하는 법적 위치에 거룩한 위치에선 빛의 자녀의 모습으로 증거 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자작극으로써 그 내막들이 드러난 시나리오인데
십자가가 모든 사람의 걸림돌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십자가 믿었다가는 똑같은 양상이 벌어지도록 하니
아무도 믿을 수가 없도록 차단 하는
생명나무의 모습처럼 오신 겁니다.

반대로 선악과는 누구든지 가능성을 펼치는 법적인 보장을 든든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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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4 10:39:49,
요한복음 1장 4절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라고 말하고 요한복음 15장 5절은 주 예수님이 포도나무라고 말한다. 이 두 구절을 함께 놓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생명나무이심을 깨달을 것이다. 하나님의 체현이신 예수님이 생명나무이시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에 있는 생명나무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상징한다.

답변 :
예수님 자체가 생명나무입니다.
자 예수님이 생명나무 되심이 밝혀졌다면
인간은 곧 선악나무임이 밝혀진 겁니다.
그들 선악나무와 그의 열매들을 요한복음에서 밝혀내지 못한다면
그 차이로 예수님이 포도나무 되심과 그 나무의 가지들도 밝혀 낼수가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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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4 10:40:46,
1장과 2장에 있는 거의 모든 것이 신성한 계시의 씨임을 몇 번 지적한 바 있다. 두 나무도 그런 씨이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뿌려진 다른 씨와 함께 이 씨는 성경의 다음 책들에서 자라고 계시록에서 수확된다. 계시록 20장 10절과 14절에서 우리는 사망이 불못에 던져지는 것을 본다.

답변 :
성경 전체가 계시요 묵시입니다. 역사가 곧 육이 해석할 권리가 일체 없습니다. 문자와 문자를 아무리 연결해도 소용 없습니다.

처음부터 씨앗은 두 패로 나누어진 양상에서 즉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이 약속이요 이것을 펼친 것이 언약이듯이 이 내용이 계시록 끝까지 완료된채로 일관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미 완료 된 이상 더 이상 보탤 것이 없으니 제발 좀 인간의 행위를 가미 시키질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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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4 10:41:11,
생명은 생명나무에서 시작되어 새 예루살렘에서 끝난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사망의 노선 안에 있었다. 구원받은 후 우리는 생명의 노선 안에 있게 되었다.

답변 :
구원이란 사망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옮기는 작업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자의 일하심을 증거해야 할까요 구원된자를 증거해야 할까요?

생명은 생명나무에서 시작되어 새 예루살렘에서 끝난다. 이 뉘앙스가 새예루살렘이 예수님 자신인데 자꾸 교회라고 해석해 버리니까 구원받는 자에 최종적인 목적인냥 증거하면
그거 성경 반대로 본 겁니다.

구원에 집착하는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예수요 하나님일 뿐이니 그거 유대인의 하나님이였으니까 가짜요 우상입니다.

그 반대입니다.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는 저주를 받았다 그 나로부터 저주 받고 심판받고(왜? 내가 하나님이요 법이니까) 버림받은 그 예수를 여호와 하나님이 구원했다 라는

정작 예수님이 구원받았다를 증거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결국 인간들의 구원이 다 거짓임을 밝히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손으로 세워진 교회의 특징이 구원 장사입니다.
한놈이라도 더 천국 보내줄려고 환장해 있습니다. 또 그런 예수로 만들고요

그러나 복음은 천부께서 심지 않는 것은 다 뽑힌다 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심지 않았습니다.

다 뽑혀야 할 판국인줄도 모르고 있으니 자기 구원에 방해꾼인 예수님을 죽인거죠

정작 주여 저 뽑혀야 마땅한 개입니다 라고 하는 자를 예수님 자신 외에는 심겨지지 않았다 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정작 찾고자 했던 잃어버린자에게로 보냄을 받은 약속이 성취가 되는 겁니다.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이 약속성취 외에는 관심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기 위한 종교적인 장치 백날 세워도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냄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못 찾도록 하기 위해서 죽여버린 거죠.

그 당시의 가장 거룩하고 깨끗하고 존경받는 흠 없는 율법에 완전한 자들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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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4 10:42:53,
제가 이 글을 읽게 된 계기가 우리 목사님 하고 비슷하게 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서 보게 되었는데 이 사람도 같은 노선을 가고 있는 사람일까요

답변 :
어쨋던 간에 가능성 제시입니다. 이게 종교입니다. 너도 할수 있다 천국 갈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천국에 못 오도록 못 믿도록
안 믿겨지는 일만 골라서 도저히 이해 안되는 말만 고라서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믿음과 인간의 믿음의 차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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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4 11:14:11,
창세기 1장과 2장은 매우 간략하지만 기본적인 많은 항목들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이 두 장에 있는 거의 모든 항목이 신성한 진리의 씨이며 이 씨들을 설명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했다. 성경에 있는 신성한 계시는 영적인 것들을 보여주며, 이 영적인 것들은 비밀하고 난해하며 인간적으로 말하면 실질적이지 않다. 이
2008-11-14 11:14:50,
이것들을 이해하는 우리의 제한된 능력 때문에 하나님은 그림과 비유의 방법으로 그분의 신성한 계시를 우리에게 보여주셔야 했다. 창세기 2장은 상징적인 방법으로 기록되었으며 여기에 기록된 모든 항목들은 상징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외적인 문자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며 이들의 내적인 의미를 깊이 탐구해야 한다. 생명나무와 선악 지식의 나무는 다 상징이다. 생명나무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다. 어쨌든 그것은 생명나무이다. 창세기 2장에는 또한 강이 있는데 이 강이 흐르는 곳에 금과 진주와 보석이 있다. .
2008-11-14 11:15:21,
이 모든 것들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이것들은 무슨 뜻인가? 우리가 지난 메시지에서 보았듯이 이 모든 것들은 상징이며 비유이다.
2008-11-14 11:54:06,
오직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온 것만이 그리스도로 인정될 수 있다. 오직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온 것만이 그리스도께로 되돌려질 수 있고 그분과 맞을 수 있다.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서 나온 것만이 그리스도의 몸, 즉 그분의 배필과 배우자가 될 수 있다. 오직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온 것과 그리스도 자신만이 그리스도와 하나 될 수 있다

답변 :

상징과 비유다 라고 대부분 결론을 맺는 이유는
모르겠다 라는 뜻입니다.

모르겠는데 자꾸 캐고 싶고 비밀을 풀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막은 것이 맞잖아요.

못 믿도록 했는데 그들은 그것을 캐면 될 것이다 라고 보는 겁니다.

상징이요 비유라고요? 웃끼고 있네 ! 실상이요 현실입니다.

인간 자체가 선악과 인 이상 예수님이 생명나무라고 아무리 여기고 싶어도
그들에게 선악과 로써 다가오니
다른 경쟁자를 이겨내지 못하면 안되는 겁니다.

그러니 자꾸 풀려고 달려들죠

막으면 막을수록 금지하면 금지할수록 그 선을 넘고싶은 겁니다.

나는 금지된 것을 소망한다 라는 제목처럼

애달아 만들어 버린 겁니다.

실컷 장난 쳐 놓고 나중에는 모르겠다 라고 하는 거죠.
처음부터 안다고 아는척 하지를 말던가

이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참 다행인 거죠. 철저하게 막혔다는 것이 생생하게 실감이 나니까 얼마나 신나고 기쁜지 말이죠.

(하나 되자 라는 미완료의 상태는 없습니다. 그 증거가 하나 됨을 위선적으로 연기해야 하기 때문에 고달픕니다. 처음에는 좀 연기하는 재미에 빠지다가 나중에 지칩니다. 가면만 점점 무거울 질 뿐입니다. 차라리 난 불뱀의 모습입니다. 나도 몰랐는데 주님이 알려줬습니다 라고 솔직하게 나오면 그 원수와 사랑이 결합을 하는 겁니다. 그게 완료요 누림이 되는 겁니다. 내가 사랑이 될 필요 없습니다. 오로지 사랑의 대상인 원수의 자리에만 두십니다. 그런데 자기가 사랑받는 척의 연기를 해야 하니 하나 되자 라는 원수짖만 골라서 하게 되죠. 그게 선악이고요

결국 인간 쪽에서의 완료를 이루겠다고 다가서는 것 자체가 이미 미완료 뿐입니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완료만이 나의 행함과 선악과 법칙과 상관없는 완료만이 완료 뿐인 그 자체로써 다가오게 되니 더 이상 아무것도 더할 것이 없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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