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종교 : 인간구원의 모든 아이디어

구원 또한 아무도 못 캐도록 차단하심

(창 3:22,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 3:23,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창 3:24, 개역)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11-14 22:08:21,
롯에게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없었다. 롯에 대한 성경 구절들을 계속해서 읽었지만 나는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신 적이 있다는 암시를 찾을 수 없었다. 하나님과 두 천사는 아브라함을 방문했지만 오직 두 천사만 롯에게 왔다 이것은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거나 사람을 차별하신다는 뜻인가? 물론 아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시며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 롯은 수동적이었고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았으며 악한 성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롯에게 나타나지 않으셨고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셨다
2008-11-14 22:09:25,
그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간접적으로 따랐으며 하나님의 길에서 행하지 않았다. 아브라함과 달리 롯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지만 우리가 그분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인 우리의 행동은 차별하신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추구한다면 그분은 당신에게 나타나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분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이 롯에게 나타나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것은 롯의 잘못이었
2008-11-14 22:17:12,
롯은 주님의 이기는 자에 의해 포로됨에서 구출되었지만 하나님의 길로 돌아오도록 도움받지 못했다(14:12-16). 오랫동안 나는 롯이 하나님의 길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상했다. 그는 고집이 셌을 것이다. 수동적인 사람이 순종을 잘 한다고 생각지 말라. 수동적인 사람은 거의 모두가 반역적이다. 롯은 공과를 배우지 못했고 하나님의 길로 돌아오지 않았다.

답변 :

롯에 대한 해석을 보면 그 사람의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를 알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 상에서 두 강도중 구원 받는 강도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이고

(창 14:11, 개역)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창 14:12, 개역)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창 14:13, 개역)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
(창 14:14, 개역)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십팔 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창 14:15, 개역)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창 14:16, 개역)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왔더라』

결국 인간들이 구원 마저도 일종의 자기의 숙제로써 흉내 가능한 것으로 보는 이유는
구원을 믿음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물론 그들의 믿음 조차도 행함이니까)
구원을 업적의 달성 성과를 성취하는 행함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관계를 한 쪽은 구원자 한 쪽은 구원을 당하는 자의 관계로 두었습니다.

즉 자력으로 빠져 나올수가 없는 갇혀 있는 상태를 롯이 해야만 하고
그렇기에 롯은 철저하게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은 자로써 나와야 하고

아브라함은 롯을 구출하는 구원자의 입장에서 왜 롯이 갇힐 수 밖에 없는 가 라는 이 땅을 전쟁의 구조로 만든 하나님의 열심을 드러내는데 있는 겁니다.

곧 성도의 모습은 롯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모습은 앞으로 오실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이 사건은 예수님이 벌리시는 전쟁이 어떤 전쟁인가를 보라는 겁니다. 영적인 전쟁이란 곧 행함의 전쟁인 혈과 육의 전쟁이 아니라 믿음의 전쟁으로써
혈과 육의 전쟁인(각자의 연합한 자들의 싸움) 그 속에서 엉뚱하게 다른차원의 전쟁을 벌리시겠다는 겁니다.

이런 것이 성경 전체를 다 덮고 있습니다.
또 한 예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사건 속에서
이삭은 버림받는 어린양 되신 예수님을 보여주고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제물로 삼아 원수들의 죄 값을 치르시는 하나님 자신의 믿음

곧 자기가 자기 자신을 치심을 통해서 우리가 나음을 입는 사랑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히 9:22, 개역)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롬 6:10, 개역)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히 7:27, 개역)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히 9:12, 개역)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9:26, 개역)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 9:28, 개역)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 10:2, 개역)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히 10:10, 개역)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런 의미에서 다 연관이 되어 있지만

인간들의 믿음은 의외로 독자적입니다.
그래서 겨우 흉내 밖에 안되는 겁니다.

또 예를 들어 볼까요?

구원자 입다가 당당하게 구원을 이루는데 있어서 큰소리 칩니다.
자신의 힘을 자신만만하게 여겼기에
그 힘으로 가능성 있게 본 겁니다.

그런데 웬걸 자기의 서원대로 달려오는 개나 염소나 닭을 감사제물로 바칠줄을 알았는데
정작 자신이 가장 귀한 외동딸 인 이름없는 소녀를 제물로 바쳐야 할 판국에 놓입니다.

자 그럼 누가 구원자 입니까? 힘입니까? 아니면 희생의 피 입니까?

입다의 그 뻔한 예상을 반드시 비켜가서 상상도 못했고 예상도 못했던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빼앗아버리는 것이 구원의 방식입니다.

인간은 절대로 가장 귀한 것을 내어 놓지 않고서 구원의 방정식을 풀려고 섣불리 달려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고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내어 놓았습니다.

인간은 이제 가장 귀한 것을 내어놓으면서 맞바꾸기 식으로 내어놓든지
빼앗기든지 해야 합니다.

이런 걸림돌을 다 빼버리고

오늘날 인간들의 고상한 아이디어와 온갖 처세술로써 등장한 구원 장사를 (모든 구원에 대한 아이디어 방법론 등등을)
이미 구약 속에서 다 들추어낸 바인 겁니다.

마치 독자적인 죄요 처음이고 생소한 자신만의 아이디어인 것처럼 까불어 대지만
이미 주님이 그것까지 다 들추어내면서 이룬 새언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옛언약의 속성을 새언약의 차이로써 알려주심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롯 마저도 인간 자신들의 구원론에 취사선택하여 보니 롯의 구원은 영 찝찝해서 싫어합니다. 그러나 바울도 모세도 다윗도 일급살인자입니다. 결국 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저런 구원은 싫타 라고 나올 수밖에 없도록 일부러 롯이라는 인물을 깔아 놓습니다. 그래서 예수 잘 믿도록? 천만의 말씀 예수님을 못 믿도록 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실족케 하는 복음과 구원해 줄려고 안달한 복음과의 차이입니다. 즉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자기 구원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하는데 동원되는 소모품일 뿐임)

(벧후 2:7, 개역)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도저히 인간의 믿음이나 머리로는 롯의 의로움(완료,롬8:1)을 이해못하도록 실족케 만듬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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