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아비도 어미도 족보도 없는 묵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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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5 11:39:19,
창24:4 에서 아브라함 족속이라 하면 갈대아 우르에 있었던 그 족속을 말하는건가요 
왜 자기 족속에게 가서 이삭의 신부를 취하게 했는지 궁금합니다
2008-11-15 12:17:18,
아브라함이 헷족속에게서 막벨라 굴을 왜 샀는지 그 의미는 뭔가요

답변 :
(창 24:1, 개역)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창 24:2, 개역)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컨대 네 손을 내 환도뼈 밑에 넣으라』
(창 24:3, 개역) 『내가 너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창 24:4, 개역)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창 24:5, 개역) 『종이 가로되 여자가 나를 좇아 이 땅으로 오고자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의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창 24:6, 개역)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삼가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
(창 24:7, 개역)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창 24:8, 개역) 『만일 여자가 너를 좇아 오고자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

결혼 조차도 약속을 드러내기 위한 소품이지 족속 잇기가 아닙니다.
족속 곧 육과 육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기에
아브라함 족속이란 없는 겁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삭의 아내도 약속의 의미를 아는 여자를 취하라 하기에
약속 모르면 약속을 따라 오지 않거든 그냥 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특히 24장의 의미가 다 말도 안되는 소리 뿐입니다. 물론 성경 전체가 다 그렇죠.

아브라함의 종이 약속의 아내가 누구죠? 라고 찾아 다니고
(약속의 자녀 이삭의 아내로 창세전에 예정된 자 누구뇨 누구뇨 여기 여기 붙어라)
이삭의 아내인 처자가족들 또한 이상한 소리를 합니다. 이 처자는 약속에 예비된 자입니다.

(창 24:60, 개역)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앞으로 믿겠습니다 라고 말하는게 아니라. 앞으로 한 몸 되겠습니다 라고 하는게 아니라 성화 되어서 한 몸 (하나됨) 된 다움(신부다움)을 갖추겠습니다 라고 전혀 하지 않고
약속의 하나님이 저를 이삭의 아내로 이미 작정하셨습니다 라고 외칩니다. 완료

참 희한하지요

즉 창조란 과거를 쭈물떡 해서 창작해 내는 것이 아니라.
없던 것에서 갑자기 졸지에 생겨버리기에

믿음 자체가 어미도 없고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는 식으로 나타납니다.(묵시)(육이 아니다)
만약 믿음이 어미가 있고 아비가 있고 족보가 있으면 그거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죠(역사).(육이다)

(히 7:1, 개역)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히 7:2, 개역)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히 7:3, 개역)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히 7:4, 개역)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결국 약속이 벌리는 사건의 미래(완료)의 창조품 노략물 전리품이 누구냐?
리브가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도 아브라함 종 엘리에셀 도 이삭도 이삭의 아내도 또 막벨라 굴 사건도 모조리 미래가 덮쳐서 벌어진 즉 묵시죠. 묵시의 전리품(빼앗은) 이다는 겁니다. 묵시의 창작품 이니까 당연히 이삭의 아내 또한 묵시적이어야 하지 역사적인 방식은 거부하겠다는 겁니다. 불가능한 계시에 당한것만 남아 있지 역사의 가능성을 잇고 잇는 방식은 자신이 이삭의 아내 되도록 하자 성도 답게 살도록 하자 이게 성화니까 이게 사람의 일인 겁니다.
(십일조를 역사로 해석하니까 겨우 돈 외에는 해석할 길이 없죠. 십분의 일이란 바로 맏물 거룩함에 속한 장자 첫소산물 하늘에 속한 약속인 겁니다. 이 미래가 나머지 9를 책임지는 거죠 그러니 약속이죠 또는 묵시의 인물 곧 예수님입니다. 미래가 덮쳐진 해석이 아니면 십일조 마저도 자기들의 숙제 육체들의 숙제로 밖에 안 보이는 겁니다. 안식도 마찬가지)

너무 너무 중요해서 다시 설명하면
이미 아브라함의 종은 시나리오 곧 창세전에 예정된 계획서를 가지고서 이 계획서 대로의 여자를 찾는 겁니다. 요셉의 꿈에 대한 의미로 설명해 보면 꿈이 먼저이고 나중에 해석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이미 해석이 완료 되었고 해석이 완료되어서 꿈을 꾸게 하는 겁니다. 꿈이 해석을 낳는게 아니라 해석이 꿈을 낳듯이

약속(미래의 완료)이 이미 약속의 자녀인 아내를 결정했고
결정했기에 누구냐 라는 식으로 시간(역사)의 반대 진행식으로 벌어지는 겁니다.

또 이 여인이 원수의 성문을 열게 될 자 라고 엉뚱하게 처자 쪽의 가족들이 부럽다 부럽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즉 미래의 해석을 미리 외치니까 그래서 리브가는 반드시 쌍태 쌍둥이를 낳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원수 개념을 뽑아내어야 하기에 찬양(곧 죄와 드디어 전쟁하는 분이 있구나)을 함으로써 원수 쪽이 이제 이미 승리는 완료되었다 이미 게임 끝났다 라고 선언하고
그 찬양대로 되는 겁니다. (미래가 역사를 역으로 거꾸로 쳐들어 와서 결정해 버립니다.)

그래서 제가 아브라함의 친척 쪽이라는 의미 보다
미래으로 해석했기에
아브라함의 족속이 없습니다. 표면상으로 친적에 해당되겠지만
정작 그런 의미보다 더 나은 해석은
바로 가나안 족속의 여자는 때려죽어도 아니다 라는 겁니다.
이것은 약속이 바로 가나안 족속을 향한 전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곧 원수 사망 죽음 육 죄에 대한 전쟁이고

리브가의 가족들이 외치는 찬양은 바로 이에 대한 전쟁의 승리의 찬양이니
이건 뭐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뚱딴지 같은 소리죠.

원수의 성문을 열다뇨 죄의 문을 열고 음부의 권세를 열겠다뇨?

결국 신부란 원수의 성문을 여느냐 음부의 권세를 이기느냐로 결정 된다는
약속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지

육과 육의 결혼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행함과 행함의 만남과 결혼 도 의미 없고
역사와 역사의 만남과 결혼도 다 허깨비입니다.

오로지 약속과 예언대로의 만남 뿐인 묵시 뿐입니다.

(고후 11:2, 개역)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므로 신약에서는 그 아브라함의 종이 믿음의 종이 바로 사도바울이 그 역할을 함으로써
누가 그리스도의 몸인가요? 그리스도의 신부인가요? 라고 찾아 다니면서 중매쟁이 역할을 하는데 중매쟁이란 결혼 못한 자를 이어주는 노총각 노처녀 연결해 주는 자가 아니라
원래 한 몸인 자가 누구죠? 라고 중매쟁이 본인이 목격자가 되는 겁니다.

저 사람이 사실은 한 몸이였어 원래 한 몸이였구만 라고 중매쟁이가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짜 한 몸들은 자꾸 한 몸 되자 라고 하니까 육과 육을 이어 나아가고(가능성+가능성)
반대로 육과 육이 이어지지 않는구나를 확증시키면서 반대의 상황인 영과 영이 연결이 되는 겁니다.(불가능성+불가능성)(죽었지만 산 자요 히 11:12)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롬4:17)

(롬 4:17, 개역)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 4:18, 개역)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쉽게 말해서 약속을 아는 자는 이 땅에 속하지 않는 자이기에 투명인간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 투명인간 찾기
어제 라이언 일병 구하기 롯 구하기처럼
이제 약속의 여자 투명인간 땅에 속하지 않은 하늘의 여자
원수의 성문을 열 여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여자를
아브라함의 종은 숨박꼭질 하듯이 찾아야 하는 겁니다.

결국 천사와 기도(묵시적인 행동 나 무능함입니다. 불가능합이니다. 라는 고백)의 개입이 곧 묵시의 개입이 아니면 불가능 하기에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지 믿음 더하기 행함 이라는 짬뽕은 없습니다.

(롬 1:17, 개역)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래서 아브라함의 종과 이삭의 아내 인 처자 와의 대화가
결혼이 목적이 아니라 약속이 관심사가 되어버리는 대화이니 이상한 대화입니다.
우주인의 대화처럼 느껴지는 딴 세계에 속한 대화입니다.

자 그럼 자기 족속이 중요한게 아니라.

(창 24:4, 개역)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창 24:4, 쉬운) 『내 고향, 내 친척의 땅으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의 아내 될 사람을 데려오겠다고 말이다."』

상대적인 의미이기에 3절이 중요하죠
지금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전쟁에 놓여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약속의 전쟁을 어떻게 벌리는가를 설계도 그리듯이 짜고 있다는 겁니다.

배경을 다 깔아 놓고 모의 실험을 모세언약 다윗언약때 다 해보고서
본 전쟁은 이제 새언약에서 완성하는 거죠.

그렇기에 24:3절이 중요하죠

(창 24:3, 쉬운) 『그리고 하늘과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앞에서 나에게 약속을 하여라. 내 아들의 아내가 될 여자를 여기에 사는 가나안 여자들 가운데서 얻지 않고,』

가나안 여자들 가운데 얻지 않고 라고 의도적으로 가나안 여자의 상대적인 의미로 두는 이유는 전쟁의 대상을 결정하는 의미인 겁니다.

반드시 가나안은 다 점령하겠다는 싹슬이 하겠다는 취지입니다.

그 다음 질문의 답변은 그 앞장은 창 23장의 내용인데

막벨라 굴을 사게 됨으로써 약속이 여기까지 달성 되었다는 겁니다. 고로 약속의 진행을 막을자 없고 미완료란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거봐 거봐 약속이 이행 되었잖아 라고 땅에 곱표를 하는 식입니다.

이것을 죽음으로써 증거 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어깨에 매고서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뒤에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죽음과도 다 연관이 됩니다.

쉽게 말해서 땅이 하나의 결제서류이고 그 위에 회장님이 싸인을 하는 식이지요. 결국 너희들 다 죽었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은 약속이 중요하지 사람이 중요한게 아닙니다.
약속의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약속이 멈추지 않는다는 겁니다.

결국 구원도 구원될 인간이 없으면 구원자 예수가 무슨 소용있느냐 라고 마치 예수님이 손해 볼 것 같이 사람들이 걱정스러워 소리를 내 뱉겠지만 정작 본심은 자기가 걱정 되어서 하는 소리지 예수님 걱정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듯이

구원될 인간이 중요한게 아니라 돌삐라도 아브라함 자손 충분히 만들고도 남기에
주님 손해 안 본다는 겁니다. 그것은 구약을 무시해서 그런 겁니다.

구원자를 드러내기 위함이지 구원받은 인간은 하등 중요치 않습니다.

그래서 약속은 멈추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또 우리의 죽음 문제 곧 죄 문제 사망의 권세 문제 음부의 권세 문제를
예수님이 곧 약속이 책임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이지

사람들이 교회를 세워 놓고 앞으로 우리가 잘 믿어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로 성화 됩시다. 한 몸 되도록 합시다. 앞으로 신부처럼 신부 값어치를 합시다
이런 주장들이 다 마귀 사상입니다. 유대인이 이미 다 보여 줬습니다.

책임 져 줄 자가 없기에 자기자신들이 동아리 만들어서 책임질 은행보험조합을 만들자는 꼼수죠.
언젠가는 그 계 모임의 돈 반드시 날라가 도록 되어 있죠 그것을 또 방지하고자 여러 장치를 만들게 되니 법이지 사랑은 없는 겁니다. 사랑(죽음-자기 목숨을 내어줌)도 부담 스러워서 그냥 연기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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