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 나무(비언약)와 생명나무(언약)의 구조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11-16 20:16:06,

이삭을 낳기전 생산능력과 경수가 끊어진 상태에서 주님이 준 은혜로 이삭을 낳게 된거 아닌가요

그런데도 아브라함의 육의 활동은 계속 되서 사라라 죽자 그두라라와 결혼해서 6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이것은 주님이 허락한 번성의 계속인가요 인간은 어쩔수 없다 란것을 보여주기 위한건가요

답변

(창 25:1, 현대어) 『[아브라함의 다른 후손들;대상1:32:33] 아브라함은 또 다른 여인과 혼인하였다. 그 여인의 이름은 그두라였다.』
(창 25:2, 현대어) 『그두라는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았다.』
(창 25:3, 현대어) 『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는데 앗수르 사람, 르두시 사람, 르움미 사람은 모두 드단의 후손이다.』
(창 25:4, 현대어) 『미디안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를 낳았다. 이 모두가 그두라에게서 태어난 후손들이다.』

(창 25:5, 현대어) 『아브라함은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아들 이삭에게 물려주었다.』
(창 25:6, 현대어) 『그렇지만 그가 살아 있을 동안 그두라에게서 난 자식들에게도 재산을 나누어 주어 이삭이 살고 있는 곳을 떠나 동쪽 땅으로 가서 살게 하였다.』

(창 25:7, 현대어) 『[아브라함이 세상을 뜨다] 아브라함의 나이가 175세나 되었다.』
(창 25:8, 현대어) 『그는 이렇게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하여 숨을 거두고 조상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창 25:9, 현대어) 『그의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은 전에 헷 사람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이었던 그 막벨라굴에 아브라함의 시신을 안장하였다.』
(창 25:10, 현대어) 『그 밭은 아브라함이 헷 사람한테서 산 밭으로, 거기에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묻혀 있었다.』

(창 25:11, 현대어) 『아브라함이 세상을 뜬 뒤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내려 주셨다.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서 살았다.』
(창 25:12, 현대어) 『[이스마엘의 후손] 사라의 몸종 애굽 여인 하갈이 낳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 후손의 족보는 이러하다.』

(창 25:13, 현대어) 『이스마엘의 아들을 태어난 순서대로 보면 다음과 같다. 이스마엘의 맏아들은 느바욧이고 그 다음은 게달, 앗브엘, 밉삼,』
(창 25:14, 현대어) 『미스마, 두마, 맛사,』
(창 25:15, 현대어) 『하닷, 데마, 여둘, 나비스, 게드마였다.』
(창 25:16, 현대어) 『이들은 모두 이스마엘의 아들이었다. 이들은 열두 부족의 조상들이었고, 이들이 살던 동네와 지역은 이들의 이름을 따라 불려졌다.』

(창 25:17, 현대어) 『이스마엘은 137세까지 살고 기력이 쇠하여 조상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창 25:18, 현대어) 『이스마엘의 후손은 애굽 동쪽의 앗수르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한 술과 하윌라 사이에 있는 지역에서 살았다. 이들은 이렇게 아브라함의 다른 후손들과는 떨어져서 살았다.』


어제 결혼도 인간들의 사랑을 나누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온 겁니다.

그렇다면 약속이란 곧 언약이란 항상 에덴동상의 양상을 재현하는 겁니다.

인간은 하등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이 두 나무의 구조로써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받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생명나무로써 생명나무의 가치를 즉 더 나은 분의 가치를
선악과 나무와의 차이를 통해서 접근불가로 만드셨습니다.

자 그렇다면 얼마전에 우리가 살펴본 야곱의 유언을 통해서
항상 언약 곧 약속은 한 쪽은 생명나무로 은폐시키듯이 유언하고
나머지 선악나무에 해당되는 자들은 쭈욱 생명나무와의 차이를 두기 위해서 쫘악 깔아 놓는 확장을 보여줍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자기의 능력에서 만들 수 없는 인간의 창조 밖의 존재는 이삭이고
하늘에 속한 자요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며 땅에 속하지 않는 자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이삭의 독보적인 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인공(빛=진리=길=생명)이라는 유일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엑스트라다(어두움=다른복음=넓은길=선악)를 깔아 놓아야 하는 겁니다.

결국 이삭만이 육이 아니다 를 보여 주기 위해서 육을 퍼트리시는 겁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이삭의 이전인 이스마엘이 형이거나 또는 먼저 된자다 라고 해서
본처의 자녀 즉 불임여성의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죽은태를 극복하고 무덤을 딛고 나타난 진짜 창조를 보여주는 하늘에서 열고 나타난 자유자의 자식은 이삭 뿐이며

그 이후에 약속의 어미 열국의 어미인 사래가 죽자 후처가 자기들의 생산능력을 통해서 아무리 많이 놓고 또 놓도록 175세까지 아브라함이 살도록 하신 것도

아무리 육이 다양성을 펼쳐도
영은 하나 다 약속은 오직 하나 다 라는 겁니다.

즉 원수의 성문을 여는 자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자는 하나다 라는 겁니다.

(엡 4:5, 개역)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도 하나이요』

즉 하나 다 또는 한 몸이다 라는 것을 말할려면 그 차이로써 증거 됩니다.
다시 말해서 부재성으로써 증거 됩니다. (하나 아닌 것 또는 여러개의 혼합이나 다양의 복수성 다수성)

한 몸 아닌 것들을 깔아 놓음으로써 아 이게 아니라 저게 하나 이구나 라는 식이지요.

사사 입다가 구원자가 아니라 이름없는 처녀의 희생이 구원자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니까

뭐뭐 아니요 라는 부재성을 적나라 하게 밝히고
뭐뭐 이다 라고 차이를 드러내죠

그렇다면 주의 이름이 이거다 라는 것을 말할려면
주의 이름이 아닌 것의 모든 내막을 까발리는 겁니다.

영이 이거다 라는 것을 밝힐려면
영이 아닌 것들의 내막을 모조리 들추어 냅니다.

이삭이 약속이다 라는 것을 밝힐려면
이삭 아닌 다른 자식들의 내막을 다 드러내는 겁니다.

그 다른 자식들의 대표자가 이스마엘이지요.

자 주의 이름과 영이 이거다 라는 것을 밝힐려면
인간의 이름과 인간의 육의 모습을 다 적나라 하게 담는

인자가 바로 이런 이중성을 우리에게 졸지에 깔아버리는 겁니다.

인자는 (구약에서는 믿음의 모든 사람들, 특히 에스겔서 다니엘서 에서의 인자야 라고 표현하는 것은 예수님 곧 영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의 신체(육)에 영의 차이를 드러냄에 의해
영으로부터 작살나는 심판성을 담아버리듯이, 신약에서는 바로 예수님이 인자로써 그리고 그 이후에는 은사로써 자기아들을 아끼지 않았듯이 우리도 아끼지 않고 미끼로 삼고 소모품으로 삼고자 은사를 주시듯이) 인자가 가는 곳마다

두패로 생명나무를 드러내는 쪽과 선악나무를 드러내는 쪽으로 쫘악 갈려지는 일들이 벌어지는 양상이 됨으로써

예로써 성전에 두 사람이 있다면 한 쪽은 생명나무 적인 인간과 또 한 쪽은 선악적인 인간으로써

두 사람 자체가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인자의 양상을 적용시키는 성령에 의해 나누어진다는 겁니다.

또 예로 노아가 은혜를 받았다면 구지 가나안과 함을 저주 하여서 함 땅과 가나안 땅을
후대의 약속의 전쟁의 마당터로 삼지 않겠지요.

그러나 은혜를 우리가 선악의 방식으로 해석해서 그렇지
정작 진짜 은혜는 생명나무를 겨냥하기에 선악을 아는 인간을 모조리 박살 내는
음부의 권세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는 죄를 향한 공격자 선방을 날리는 투기자
질투의 모습이 진짜 은혜요 사랑이다는 겁니다.

반면에 선악쪽은 건드리지 않는 이상은 무화과 나무로 포장하는데 정신 팔려 있기에
자극 하지 않는 이상은 자기 꾸미기에 정신 없는 겁니다.(하나님과 같이 되었기에)

그래서 전쟁이란 오로지 사랑만이 벌리는 양상이지 선악은 전쟁을 도리어 회피하는 식이고
아주 적극적으로 깨끗한 맑은 냇물에 흙탕물을 일으키는 미꾸라지 역할로써 가는 곳 마다 소동(예수님)을 일으키는 쪽은 약속 곧 생명나무(예수님) 쪽이다는 겁니다.

자 그래서 그들이 반드시 언급이 되고 또 그들의 족보(이스마엘)도 반드시 언급하는 이유는
육의 확장 육의 확대가 바로 영의 소욕의 대상으로써 박살날 허상으로 취급받고
없다 라고 취급받는 영은 진짜 있음으로 차이를 드러내는 거죠.

믿음(영)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이니까요 (히 11:1)

아무리 육과 육을 쫘악 천지로 깔아버리고 (나중에 이것이 숫자가 인간에게 어떻게 허상으로 자리잡았는지 국가체제가 형성된 전쟁 속에서 군사 숫자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왜냐? 구원은 수에 달린 것이 아님을 말하기 위해서 일부러 숫자를 더더욱 확대 확장 시킵니다. 그래서 숫자를 의식하는 쪽은 선악과(법=힘=자기를 챙기는, 하나님 됨, 우상을 추구하는, 허상, 믿음없음, 보이는 것에 눈치 보는=사울 왕) 쪽이고 반대로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단 한 분을 무서워하고 두려워 떠는 이름 앞에 모든 이름은 허상임을 밝혀버리는 다윗 쪽이 골리앗이라는 허상을 여호와의 이름으로(육의 소욕이 허상 취급하는=여호와가 누구관대?) 음부의 권세를 깨뜨리는 자가 바로 생명나무 쪽인 겁니다.

(삼상 14:6, 개역)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시 60:11, 개역)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행 17:25, 개역)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행 19:26, 개역)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사람의 손으로 인한 것은 이유없이 무조건 죄요 가짜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허락한 번성이니 선이니 또는 악이니 하는 판단은 무용지물이고
오로지 약속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차이로 우리는 반대의 자리에 놓여지는
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약속의 철저한 소품으로써 배치되는 겁니다.
(사람의 손으로 되는 것들을 엄청난 수로 다양한 다수로 깔아 놓는 겁니다.)

(고전 10:5, 개역)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흙은 흙일 뿐이기에 토기장이가 무엇으로 만들든 우리를 따질 권리가 없는
철저하게 소외 단절 차단 된 입장입니다.

성령의 소욕(약속,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사울 역할 도 했다가 또는 다윗의 역할도 할 수 밖에 없는 고정될 수 없는
언약의 흐름에 놓여져 있을 뿐입니다. (육의 소욕의 내막을 철두철미하게 해부하고 다 공개해버리는 겁니다. 지옥의 내막 어제 말한 무덤의 내막 죽음의 내막 선악의 내막 죄악의 내막을 다 떠벌리듯이 다 펼쳐놓는 것이 전쟁이 아니면 은폐된 숨어있는 것을 감추인 것을 드러낼수가 없는 겁니다. 눅 12장 악을 규정함으로써 빛도 공개 되는 겁니다.)

다윗 자신도 아무리 어릴적에 골리앗을 물리쳐도
자신 속에 골리앗이 허상이 있음을 들켜야 하기에
3가지 물증이 인자 곧 사람 자체가 되어서 저당 잡히게 됩니다.
우리야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그리고 이름없는 아기

사울 보다 더 악날한 방법으로 그들을 거룩을 자기 혼자만 자기 혼자 살겠다고
자기 혼자 천국 가겠다고 자기 혼자 깨끗해 지겠다고 도리어 3명을 죽이는
가장 어두움인 것을 들통나야만 했던 겁니다.

사울이나 다윗이나 다를바 없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생명나무를 드러내는데 실패 하시느냐?

주님 자신이 이유없이 다윗에게 뛰어들어서
법적 선악에 갇혀 있는 다윗을 깨뜨리고
자신의 목숨과 다윗이 자아 라는 허상에 빠져 헛깨비 목숨과
맞바꿔치기를 함으로써
다윗은 맞바꿔치기 당함으로써

아무것도 한 것 없이 긍휼의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음을 주님이 이루기 위해서
다윗을 철저하게 지옥으로 가두어 버립니다.

자 이 모습이 다윗이 격은 이 묵시의 경험이
나중에 예수님이 인자의 모습으로 오실때에
다 담고서 드러나는 모습인 겁니다.

오로지 생명나무 자신의 살과 피 만을 의미 남기기 위해서
모든 인간의 거룩 행위 육적인 사고방식 자기들 따나의 최고의 믿음
거룩한 장치들 성전들 직분들 성직이지요 또 율법사처럼 계명 지켰다는
모든 것들을 이 인자와 (더 나은) 대조 시키는 겁니다. 약속과 대조 시키는 겁니다.

순종이 왜 제가 보다 나은지?
상한 심령이 왜 번제 보다 나은지?

인간 쪽을 항상 제사 번제 라는 법적 위치에 놓고
약속 쪽을 항상 그 법에 의해서 정죄 받는 위치에 놓음으로써

누가 더 옳았는지에 대해서 자신 만만하게 당당하게 주장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악의 자리에 놓았고
인간들은 불안해서 반드시 자신들은 선의 자리 법의 자리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청지기처럼 악의 자리에 놓인 예수님이 옳았음을
아무리 자신들이 법을 쥐고 선을 쥐고 거룩을 쥐고
성전을 쥐고 율법을 쥐고 성화를 쥐어도

예수님 보다 더 나을 수 없음을

예수님 자신이 질투로써 경쟁자로써 공격자로써 전쟁시비 거는 자로써

우리의 속에 있는 선악을(우상) 유발케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죽을때까지

약속의 구조 곧 생명나무와 선악나무의 상황을 아이 낳기를 통해서 양쪽 패를 퍼트리는 겁니다.

그래야 뒤에 언약 곧 묵시가 벌리는 전쟁의 마당터로써 영의 소욕에 의해
육의 소욕이 어떻게 박살이 나는지

주인공만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두움(육)을 더더욱 퍼트리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