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대업의 달인 요셉

빚진자 만들기 (은잔 시험 : 창 44장)

누가 불의한 재물을 심고 그 저당물을 누가 꺼내 놓는가?

요셉은 반드시 자기를 죽인 원수를 용서하기 위해서

누가 약속(불의함에게 자기목숨 내어주며 충성을 했는 사건을 당한 그 박스상자를 찾기)이 심겨진 자인지?를 찾아 나선다.

누가 과연 잃어버림을 아는 자 인지? 누가 불륜이 옳았음을 스캔들(수치, 걸림돌)이 옳았는지를 제대로 안 자? 즉 제대로 당한자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악의 자리에 둡니다.
간첩의 자리에 둡니다.
빚쟁이 자리에 둡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 자리에 둡니다.
죄인의 자리에 둡니다.
사망의 자리에 둡니다.
죽음의 자리에 둡니다.
저주의 자리에 둡니다.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집어 넣고 은 몇십냥에 팔아 먹은
그것이 죄가 아닙니다.

새로운 죄를 요셉은 그들에게 뒤집어 씌워야 하는 겁니다.
이제 미래에 벌써 주기로 이미 작정된 용서를 거부하는 그 죄를 작정하고 뒤짚어 씌우고자

절대로 빠져 나올수 없도록 철저하게 갇혀진 자리
포로된 자리 눌려 버린 자리
사망의 골짜기 흑암의 자리 철저하게 관계가 단절된 비거룩 자리인 이방인과 같은 자리

불뱀의 자리에서 이제 자신들이 버린 요셉을 자신들의 유일한 구원자임을 안 쳐다보는
새로운 죄를 뽑아 내고자

볼모 작전으로써 간첩 만들기 사건 죄인 만들기 사건을 벌리시는 겁니다.

그래야 그들이 죄인의 자리에서 구원자를 쳐다보는 위치에 서게 되고
환자의 자리에 서 있어야만 의사를 쳐다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불뱀에게 물린 자리에 서야만 인자만을 쳐다보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쳐다보는
구원에 무능한 자리에 서야만 여호와의 열심을 보게 될 겁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걷는 성화의 자리가 아닌
철저하게 빠뜨려서 물 속에 죽어야만 하는 자리에 있어야만
누가 손을 내미는 자인지를 보게 됨으로
반드시 빠뜨려야만 하는 겁니다.

그들이 아무리 성화 되고 믿음 좋고 사랑을 실천했고 아무리 거룩으로 자신을 빙빙쳐서 온몸을 거룩으로 가득 채워도

더 나은 제사는 이들을 죄인만들어서 간첩만들어서
그들의 미래 전부를 책임지고자 죽음까지 무덤까지 목숨까지 다 저당잡아 지워버리고자
자신의 목숨과 맞바꿔치기 식으로(스캔달 불륜)(하나님의 목숨을 거짓된 인간의 목숨과 맞바꿔치기 교체) 달려들어야만 살리는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도록
철저하게 가두는

빚쟁이 만들기를 요셉은 시도 합니다.

이 어리석은 지혜가 미래를 결정하고(심판:가뭄을 넘기우는 유일한 길)
다른 길은 미래를 대비 할 수가 가뭄을 이길 수가
음부의 권세 사망의 심판을 이겨낼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미래를 대비하지 않는 자는 미래를 거부하고 과거로 현재를 버틸 수밖에 없기에
베드로가 아무리 예수님을 꼬끼오 세 번 부인하고 아무리 죄책감으로 자기 스스로 심판을 내려도 그것이 죄가 아니라 그거 깡그리 다 덮어버리고 오로지 베드로의 미래를 준비하신 지금 찾아온 예수님을 쳐다보지 않는다면

그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예복을 입을 것에 관심이 없는 것은 자신의 길들여진 옷으로 족하기에 자기의 익숙해진 세계가 밉지 않기에 자기 목숨을 사랑하기에 미워하지 않기에
새로운 목숨이 교체시키러 온 이름이 귀하게 여겨지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큰 물고기 뱃속에 집어 넣고
절대로 빠져나올수 없느 포로된 갇혀있는 절망속으로 죄인 속으로 원수 속으로
죽음 속으로 지옥 속으로 집어 넣어야만

그랬을때에 비로소 약속은 그 죽음 속에서 사망 속에서 진가를 발휘 합니다.

표적(스캔달)이 들어납니다.

이제 요셉은 누가 이 스캔들(어리석은 지혜가 옳았습니다.)을 아느냐? 라고

마치 꿈이 뒤고 꿈 해석이 먼저 되어서
누가 미래가 임한 자인가

미래가 임하지 않은 자 이면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를 야곱의 아들들 깊숙이 푸욱 집어 넣습니다.

마치 사도바울에게 사단의 가시를 푸욱 깊이 집어 넣듯이

바울은 비로소 빼 내달라고 하는 관점에서 빼면 선이고 안빠지고 여전히 박혀 있으면 악이 되는 그 관점에서 벗어나서

안 빠져도 상관없는 약할때에 강함이 되는 생뚱맞은 선악의 법 밖의 은혜의 세계를 또 당해야 하는 겁니다.

고로 육의 소욕은 또 패배를 해야하고 성령의 소욕(완료된 미래)은 또 승리가 될 수 밖에 없도록

자신도 그 육의 자리에서 당해야만 하는 입장 이끌림을 받아야만 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겁니다.

이제 요셉은 형제들 보다 먼저 당했던 그 약할때에 강함 된다는 의미만이 유일한 미래임을 약속임을 완료임을 형제들에게 적용시킵니다.

간첩으로 억울하게 누명을 씌워 보니
그 억울한 사단의 가시를 빼낼려고 하는 관점에서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유다의 악의 자리에 뛰어드는
심판의 자리 저주의 자리 죄인의 자리
약함의 자리에 뛰어드는 그 모습을

요셉은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이 먼저 앞서서
허물의 자리에 집어넣음으로써
저주의 심판의 자리에 (표적의 자리 십자가) 집어넣음으로써
그 속에 유일한 구원의 길이 있음을 요셉이 먼저 격었기에
형제들을 이 미래의 완료의 자리를 소개하고자
자신이 당한 그 길을 그대로 격어보라고 약함으로 집어넣어 보는 겁니다.

유다는 다말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그 생명의 자리는 지옥의 자리였고

오로지 다말이 말하는 저 저주의 불꽃 속에서 외치는 자리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그 불 속에서도 타죽지 않는 약속이
자신이 율법처럼 육의 행함으로 보고 있는 그 약속이 틀렸고(다윗=롬 4장=시51편=법 밖의 세계에 눈뜸 그것을 행복 이라고 함)

진짜 약속은 그 원수를 살리고자
죽을 곳만 골라서 미움받을 짖만 골라서
원망할 만한 곳만 골라서
그 시커먼 숨겨진 붉은 죄를 들통내어서 박스에 담고 그 위에 긍휼의 피를 바르고자
오로지 피 하나만을 향해서 달려가는

물 속에서도  모래 속에서도 광야 속에서도 사막 속에서도 죽음 속에서도 지옥 속에서도
이 피의 의미는 전혀 멈추지 않는 막힘이 될수 없는
모든 것을 뚫어버리는 약속 앞에 두고자 막혀버린 모든 담벼락을 허물고자

가시를 푹 푹 푹 수셔대면서 쿡쿡쿡 찔러 보는 겁니다.
찔러보면 나 아니요 약속이 옳았습니다 라고 나오는 그 고백을 찾는 겁니다.

나 성화 된 인간입니다 라는 자를 찾는게 아니라.

미래(완료) 심은 인간을 찾는 겁니다.

더 이상 완료될 필요가 없는 이미 완료가 덮쳐진 미래에 창조된 자를 찾는 겁니다.

철저하게 그 뚫어버리는 그 불륜 앞에
철저하게 무능하게 당해버린 자가 누구인지?
약하게 된 자가 누구인지?
어리석음 지혜 때문에 불 속에서 지옥 속에서 건짐 받은 자가 누구인지를?
자신이 격은 미래(완료)가 덮친 그 경험을
누가 또 격었는지를 찾아내는 겁니다.

놀랍게도 자신이 미래에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고이 고이 간직하고 소중하게 보존 보수 잘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무모하게 타인의 허물에 뛰어들어서 타인에게 미래를 소개하고자
현실 밖에 모르는 자들에게 돌삐 맞을 것 뻔히 알면서도
자기 성화됨 밖에 몰라서 그저 성전 밖에 모르는 종교꾼들에게
이 성전이 미래가 아니라 예수님이 참성전이요 이 눈에 보이는 성전은 허물어져야만 할 것임을 말하다가 (거룩한 종교의 신의 저주를 댐팽이 씌움을 거룩법에 의해 당하는 짓만 골라하는) 스데반 (행 7장)

(갈 3:13, 개역)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절대로 나무에 달리는 일만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그런 일만을 피할려고만 했던 그 법을 아는 자의 손에만 반드시 죽임 당할려고 골라 골라 잡아서

죽임 당해도 상관없는 넉넉한 사랑으로 넉넉한 미래로 넉넉한 약속 하나 딸랑 믿고

겁대가리를 상실한 채로

요셉은 무리수를 두는 겁니다.

고리대업의 그 노하우를 (해석 때문에 꿈 꾼)

이제 진짜 원수를 이 약속의 세계로 인도하고자
철저하게 괴롭힙니다.

강도가 그 집 주인의 물건을 빼앗고자 주인을 철저하게 결박 시키듯이
빼앗으러 오고자

자신의 목숨 곧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산 목숨
이제 두 번 죽어도 상관 없는 식으로
맞짱뜨듯이

너가 가장 귀하게 귀하게 여기는 그 가짜 목숨 허상의 목숨과
맞바꿔치기 하자 라고
강도처럼 결박시켜서 빼앗듯이

신체포기각서를 요구하는 고리대업의 달인으로써
철저하게 불의한 돈 덩어리에 충실하고자
끝까지 가짜 목숨 빨리 내어서 빚갚으라고
독촉하고 독촉하고 독촉하고 안되면 협박 공갈 또 안되면
인질로도 삼아서라도

그 가짜 목숨의 허상을 밝혀버리고자
불의한 모습 괴롭히는 자의 모습으로써

자기 목숨 버리시면서 까지 너 목숨과 내 목숨과 맞바꾸자 라고
거짓생명인 죽음에 충실하였고 (유일한 이웃)

(막 12:33, 개역)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뭐뭐뭐 보다 뭐뭐가 낫다 라는 차이를 반드시 입으로 시인케 만드는 한쪽은 몸을 버리고 이웃이 되어주고 또 한 쪽은 그 버린 몸을 입음으로써 사랑을 당하는, 계명 완료의 대상 곧 원수의 자리, 용서 받아야할 자리

(눅 10:29, 개역)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눅 10:36, 개역)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아무도 자기들은 강도 만났다고 여기지 않는 판국에
혼자서 넌 강도 만난 자야 아무도 너를 도와주지 않잖아 일방적으로 선언하고서는

거봐 거봐 너가 이웃으로 착각했던 목사? 전도사? 장로? 집사? 교사? 권사?
거봐 거봐 그냥 지나쳤잖아

너가 아무리 교회 다니면서 이웃으로 삼았던 저들은 이웃은커녕
자기들이 강도 안 만났다고 뻐기는 자였음을 그게 좋아라 라고 우기는 놈들이였음을
너가 강도를 만나보니 비로소 보게 된 거야

너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그 가짜 목숨에
이 죽음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누가 미래가 있겠냐 라고

끝까지 불의한 재물로 친구 삼고자 이웃이 되고자
달려드는 겁니다.

(눅 16: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눅 16:10, 개역)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눅 16:11, 개역)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눅 16:12, 개역)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눅 16:13, 개역)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부정한 사마리아 개같은 이방인의 모습인

불뱀의 인자의 모습으로써
고리대업의 불의한 재물 밖에 몰라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는 모습으로만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써
끝까지 스토커처럼 딱 달라붙은 거머리로 반드시 나의 허물을 캐어서
자신의 신체상자박스 안에 담아서 아무도 못보도록 피로써 약속으로써 결코 정죄함이 없도록

마귀에게 소송 걸린 송사꺼리를 예수님이 불의함에 충성하심으로써 예수님에게 다 들통나서
예수님에게 법적으로 다 심판받아서 더 이상 심판 꺼리가 없도록
다 담아서 불 속으로 뛰어드시는 겁니다.

지옥처럼 애지중지 하는 그 가장 귀하다 라고 여기는 그 목숨을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게 하실려고

철저하게 저당잡고자 볼모작전을 철두철미하게 빈틈없이 계획한 미래의 약속이 덮침으로써
더 이상 저당 잡힐꺼리가 없도록 이미 주님이 다 심판했음을

예수님 자신의 끝까지 완료로써 더 이상 더 더할 필요 없는 충성으로써 다 이루셨습니다.

(롬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제 예수님이 요셉처럼 우리에게 은사를 주셔서
누가 과연 이 죽음을 해석하는지를
맞바꿔치기고자 달려오는 자기 목숨이랑 너의 가짜 목숨이랑
서로가 가장 귀하다고 여기는 그 귀한 보물을 교체하자 라고 달려오는 그 약속을
그 완료를 그 미래를 확정짓는
제사 보다 더 나은 순종을 이루었는지를 보게 할려고

요셉의 고리대업으로 빚쟁이 만들기 죄인 만들기 원수 만들기 허물 저당잡히기 작전인
볼모 작전인 이 어리석은 지혜가 옳았다는 성령의 소욕을 이루기 위해
은사를 주시는 겁니다.

이 스캔들의 완료만을 부각 시키는 것이 은사(죽음에 뛰어듬=자기부인)가 바로 선물로써
나의 허상인 가짜 목숨에 뛰어든 이 분이 진짜 사랑입니다 라고 외치도록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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