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의 할 일

첫 사랑 : 처음 자리인 무능의 자리에 되돌리기 (잃어버린 자리) 위해 은사를 선물





설교노트북에 올릴려다가 누가복음의 영의 활동사항과 연관이 되기에 누가복음에 올립니다.
 
선지자의 할 일

2008년 11월 16일                          본문 말씀: 사무엘상 8:1-3

(삼상 8:1) 『사무엘이 늙으매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으니』
(삼상 8:2)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삼상 8:3)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사무엘상 7:15-17에 보면, 그 당시 선지가의 업무가 나와있습니다.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 자기 집이 있음이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순회’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순회하는 것이요 말씀이 지배하는 체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순회한다는 것은 스핀, 곧 회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복이지요. 말씀의 반복입니다. 우리가 처음 말씀을 접했을 때와 동일한 말씀이지만 그 다음 상황에서 접했을 때와 깨달은 점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반복 될 때마다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죄를 유발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를 모르는 상태에서 말씀을 접하는 것과 자기 죄를 아는 상태에서 접하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죽음을 느끼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이 주는 죽음의 반대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말씀이 주는 죽음’과 평소에 사람들이 기피하는 죽음과는 다릅니다.

그 점은 오늘 본문에서 사무엘의 아들들이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이들의 행동은 죽어있는 자의 행동입니다. 그 증거가 그들이 선지자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전에 사무엘을 통해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승리가 지속되려면 이 승리 안에서 이스라엘이 계속 ‘하나님 말씀의 승리’로 간주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승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말씀이 주는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사무엘 선지자는 순회하면서 언급하는 것은 우리는 여전히 독단적으로 자립할 입장이 아니라는 겁니다. 좋든 싫든 하나님의 말씀만이 승리를 위한 진리로서 잡고 있는 그런 상황 속에 놓여있다는 것을 일깨어주게 됩니다. 반복적으로 말입니다.

승리케 했던 그 말씀의 통치 아래서 자신의 사는 방식을 따로 챙기는 것은 곧 죽음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교회 실정에서는 각자 고유의 생활과 삶을 따로 있다고 전제된 가운데 ‘교회’라는 연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교회 방침입니다. 하지만 천국에는 천국의 내부 방침이 따로 있습니다. 그 내부 방침이란 철저하게 금식하는 마음 자세가 유지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말씀의 순회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과거를 달리 해석하십니다. 지난 날 블레셋 전쟁에서 삶과 죽음의 막다른 지경에서 생명 쪽으로 선회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말씀이 오늘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를 새롭게 바라보자고 순회하는 겁니다. 이 말은 곧 말씀의 적이 우리 자신으로 바뀔수도 있다는 말도 됩니다.

말씀은 말씀이 요구하는 수준이 따로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26에 보면,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로잡힌 바’란 바로 성도를 홀로 두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부 방침으로 톡톡 터지게 하는 식으로 이끌겠다는 뜻입니다.

사사는 말씀에 의거해서 순회하면서 백성들로 하여금 말씀의 현존을 인식시키는 일을 해야 하는 임무를 띤 자들입니다. 여기서 참고적으로 고린도전서 6:3과 6절에서 7절까지를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이 대목으로 어느 대목이 말씀이 작용하는 대목입니까? 소송에서 승리하는 대목이 말씀의 성취입니까? 그래서 정의가 강처럼 흐르게 된 것이 말씀의 승리입니까? 아닙니다.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한가”가 말씀의 승리요 적용입니다. 3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성도는 세상을 판단한다고 되어있지요.

여기서 우리는 세상이 세상을 판단하는 것과 성도가 세상을 판단하는 것과 어떤 격차가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세상을 판단하는 것은 마치 자력으로 자신이 생존을 성공한 것처럼 여기는 태도를 말합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블레셋 나라의 공격을 받을 때의 마음가짐과 같습니다.

그러다가 사무엘이 나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했더니만 갑자기 우뢰가 일어나고 결국 이스라엘의 대승리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와주셨기에’ 이루어낸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그렇다면 그 승리의 말씀이 구약 때나 신약 때에 늘 적용되기 마련입니다. 성령께서 순회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한가’입니다.

바로 이런 점을 보여주어야 하는 자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사사의 일인데 사무엘의 두 아들인 그 두 사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판결을 엉터리로 하는 겁니다. 그것도 뇌물을 받고서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말씀 자체가 굽어져서 왜곡된 해석으로 반복적으로 이스라엘을 덮치게 됩니다.

이것은 곧 자신 위에 승리의 말씀과 위배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블레셋 나라가 이스라엘에게 패배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차이는 단지 이것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말씀이 없었고 이스라엘에게는 말씀이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바로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엉터리 사사가 출현하여 말씀을 왜곡해버리면 이것은 곧 반복적으로 이스라엘에 블레셋 망령이 배회하는 것과 같은 꼴이 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과거의 승리 속에서 단순히 자신의 생존을 챙기면 안됩니다. 진정 자신이 기적으로 생존한 것은 말씀의 배려 때문인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것을 잊고서 성경을 보게 되면 그 때부터 그 성경 앞에서 하나님의 위대함보다 자신이 위대해지려는 본성만 발휘될 뿐입니다. 마땅히 이런 우리의 모습은 제거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후속조치가 따르겠지요.

진정한 기적이란 천국의 방침만이 남아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적인 기적들을 많이 갖고 있어도 자기 방침만 쥐고 있다면 천국에 못가니 이게 무슨 기적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평생을 걸쳐 우리 내부에서 순회하십니다. 전에 몰랐던 죄가 새로운 세월들을 맞이하면서 알려집니다. 따라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자비와 십자가 피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천국의 내부 방침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직 말씀이 살아 계심만으로 저들을 조치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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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예로써 삼손의 이야기가 주일학교설교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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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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