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버린바 된 박한 양식

때려죽어도 다시는 먹기 싫은 싫어버린바 된(죽이고 싶도록 미움을 유발하는 양식) : 만나

양식이란 그 양식을 먹는 자의 속성을 들추어내는 해체기 분쇄기

(갈 6:8, 개역)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11-20 16:50:45,

출애굽기 16장에서 왜 메추라기부터 보낸건가요

(출 16:1, 개정)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출 16:2, 개정)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출 16:3, 개정)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출 16:4, 개정)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출 16:5, 개정)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출 16:6, 개정) 『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출 16:7, 개정)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

(출 16:8, 개정) 『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출 16:9, 개정)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출 16:10, 개정)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출 16:11, 개정)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출 16:12, 개정)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출 16:13, 개정)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출 16:14, 개정)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출 16:15, 개정)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출 16:16, 개정)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출 16:17, 개정)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출 16:18, 개정)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출 16:19, 개정)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출 16:20, 개정)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출 16:21, 개정) 『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출 16:22, 개정)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매』
(출 16:23, 개정)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출 16:24, 개정) 『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출 16:25, 개정) 『모세가 이르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

(출 16:26, 개정) 『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출 16:27, 개정) 『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출 16:28, 개정)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출 16:29, 개정)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출 16:30, 개정) 『그러므로 백성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니라』
(출 16:31, 개정)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출 16:32, 개정) 『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

(출 16:33, 개정) 『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출 16:34, 개정)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출 16:35, 개정)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출 16:36, 개정) 『오멜은 십분의 일 에바이더라』


답변 :

보통 양식이란 그 영양분의 에너지를 습득하여 흡수시킴으로써 더 큰 공장을 움직이게 하는 원료? 기름이 되는 식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모든 인간의 활동은 에너지 확보, 끝없는 안식 없는 양식 싸움에 속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기에 양식이란 양식을 섭취하는 인간의 입 속에서 희생이 되어야 하고(롬 8:19-26)
인간이라는 커다란 공장을 돌리기 위한 재료가 되어야 하는 전리품 노예가 되는 식입니다.

자 그렇기에 인간 자체가 애굽나라 국가 애굽의 신이 되는 인간 자체가 피라미드 성이 되는 식이고 양식이란 일종의 노예처럼 그 에너지 원이 되는 전리품이 되는 식입니다.

이것은 이미 바벨탑에서 나타난 겁니다. 그래서 더 좋은 재료(더 나은 신제품 돌-벽돌, 그냥 본드 - 초강력 본드 역청 = 이 땅의 신기술 신과학 이 모든 것이 이런 방식임 선악을 드러내기 위한 나무로써의 인간들)인 영웅이라는 재료가 가인의 성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러나 성경의 양식이란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내는 양식입니다.
결국 영광이란 바로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방식 하나 하나를 아작 아작 밟아버리는
선악이라는 무조건 이유없기 지워버리기 위한 전쟁(심판)의 방식이 영광인 겁니다.

마치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애굽나라 파라오 왕이 10번 재앙으로 쓰러지면 안되는 겁니다. 끝까지 따라오도록 주님은 파라오 왕에게 죄의 소원을 더 퍼붓습니다. 그 적개심으로 끝까지 이스라엘을 쫏도록 하시는 겁니다. 어두움이 강렬할수록 파라오를 강팩케 하면 할수록 여호와의 영광과 긍휼을 더 빛이 납니다. 그래서 애굽 군사와 애굽 왕을 통해서 영광을 받고자 절대로 쓰러지지 않도록 포기하지 않도록 자기부인하지 않도록 끝까지 충성 봉사케 하도록 미끼를 물 듯 말 듯 바로 입 가까이서 얼른 얼른 거리도록 깝쭉거리는 것처럼 눈에 거슬리는 걸림돌이 되도록 반드시 비교케 만들고자 바짝 눈 코 입에 붙이듯이 딴 생각 못 품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래야 전쟁 곧 영광이라는 심판성을 드러내어야 여호와가 누구인줄 알게 되는 겁니다. 여호와가 무서움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상은 인간은 자기에게서 눈을 뗄수가 없습니다. 유일하게 자기 목숨 외에는 무서워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 목숨을 건드리고자 그 목숨을 부지시키는 양식도 건드리는 겁니다. 나라 국가 민족 자체도 수시는 판국에 그들의 양식을 건드리지 않는다며는 여호와가 아닙니다.

자 그래서 땅의 양식과 여호와의 양식의 내막을 드러냄으로써 둘의 차이가 나타나는 겁니다.

메추라기는 만나와 같이 언급되어야만 하는 겁니다.

하나는 애굽의 양식의 대표 보양식입니다. 한국으로 치면 닭고기 삼계탕에 해당되는 원기 회복의 음식입니다. 마늘처럼 말이지요.

(출 16:2, 개정)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출 16:3, 개정)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즉 누구를 위한 양식이요 에너지인고 하니 이유없이 자기를 위한 에너지이어야 하는 겁니다. 아무리 애굽이나 마귀의 손에서 꺼내고 구원해 봤자 인간이란 이유없이 자기의 결핍만을 채우기 위한 그때 그때의 이용꺼리만 찾는다는 것을 광야의 이스라엘은 톡톡히 보여줘야만 하는 겁니다.

자 그럼 여호와가 말하는 양식이란 그럼 뭔가요? 타인을 위한 양식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부터 출발한 애굽에서 벌어진 전쟁 곧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이란
양식 싸움입니다.

자기를 위한 양식을 추구하는 세계와
남을 위한 양식을 추구하는 세계와의 전쟁입니다.

그래서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를 먹는데 있어서 괴롭게 먹는 모습이라는 것을 지난번 질문에 답변을 했고요

결국 먹는 문제의 전쟁인 겁니다. 이것은 마치 에덴동산의 두 나무의 상황을 여전히 밀어붙임으로써 어떤 누구도 이 에덴동산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하시는 겁니다.
어떤 나무를 먹느냐 라는 겁니다.
모든 인간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외에는 먹지 못하도록
선악과를 먹을 수 밖에 없도록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만들었고

그것을 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자 이제 영생할려고 생명나무를 먹을려고 하니 차단되어 버린 겁니다.

자 그럼 모든 나라 또한 선악의 나라냐? 생명의 나라냐? 로 볼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생명나무처럼 이 땅에 속한 민족이 아니고 처음부터 없었던 부재성을 앞장세우는 나라입니다. 이것이 교회라는 의미와도 연관이 도딥니다.

이스라엘 외의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은 선악의 나라요 선악의 민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손으로 세우는 교회 또한 선악의 나라로 하나님 나라와 성화론을 가르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손으로 충분히 건설될 수 있는 나라인 셈인 일종의 보양식과 같은 메추라기입니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선악을 평생 드러내는 인간과 생명나무를 드러내는 인간 두 패로 나누어지겠지요. (교회도 마찬가지, 이스라엘도, 인간 전체도,)

(갈 4:22, 개정)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자 그래서 보양식과 같은 메추라기는 일종의 애굽에서 땅의 양식에서 벗어남이 아니라
연결된 연장선으로 보는 양식이라고 보면 됩니다. 일치성

자 그렇다면 반대로 생명나무에 해당되는 양식인 만나는 그것을 단절 시키는 양식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차이성

그래서 출처를 모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라고 알수 없도록 되어있는 비밀의 양식이요 패스워드 걸린 아무도 풀수 없는 양식인 겁니다.

이 양식이 바로 애굽의 양식과 단절된 선악적인 인간이 아닌 생명나무에 해당되는 인간과 결합하는 양식인 겁니다.
자 그렇다면 만나를 먹은 생명나무에 해당되는 인간은 시간 공간 모든 것을 초월해서
묵시를 보게 되니
결국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게 되는 의미로 믿음이 미래에서 덮칩니다.
또 앞의 과거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써 그리고 고기를 괴롭게 밤새도록 고난의 쓴나물을 함께 먹음으로써 예수님의 살과 피가 덮치게 되는 겁니다.

모두다 예수님이라는 생명나무가 덮치도록 하시는 예수님의 믿음 곧 희생되심 허물담당하심 피흘리심이 덮쳐서 나타난 결과로써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을 (만나 라는 양식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무능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양식, 그러나 메추라기는 그 반대로 이미 인간의 손에 장악된 포착된 인간의 손으로 조리 되는 양식)
묵시가 덮침으로써 알게 되는 방식으로만 만나(완료)를 먹이시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고 먹는 자는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는 결과인 겁니다.

(고전 11:29, 개정)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예수님과 연관 되지 않는 양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른다는 이유로 이제 여호와의 영광이 드러나는데 그것이 곧
그 두 양식의 선이 분명하게 그어지는 분류 분리 구별 되는 것이 바로
한 쪽은 심판과 한 쪽은 주와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하이라이트가 되는 겁니다.

마치 아들의 혼인잔치처럼
전쟁의 종식 상태가 평화 페스티발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겁니다.
(어제 설교가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167강-사63장,1-6,(붉은의복)-isa081119.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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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메추라기 라는 양식은 우리가 별 의문없이 다 아는 익숙한 양식이기에
쉽게 이해가 되지만 (개고기죠 땅의 양식 )  (그런 의미에서 먼저 깔아놓는 밑그림인 거죠)

만나는 이 땅의 양식인 메추라기와 정반대의 양식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도저히 해석 불가능한 양식으로써 나타나야 하기에

포착 불가능한 방식으로만 증거 되는 겁니다.

즉 만나는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는 인간의 양식에 비해서
인간을 격분케 만들고 화나게 만들고 짜증나게 만들고 만나 자체를 미워하도록 만드는 유일한 양식인 겁니다.

반대로 만나는 비로소 땅의 양식이 아닌 채워도 채워도 끝도 없는 만족이 없는 갈증만 더더욱 커지는 양식이 아닌 진정으로 자유케 하는 양식으로써
육체의 소욕(갈증의 빈그릇)을 박살내는 식으로써 그릇 자체를 없애버리는 식으로 증거 되는 양식이기에, 자유케 하는 양식이기에

(갈 4:26, 개정)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7, 개정)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갈 4:28, 개정)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갈 4:29, 개정)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갈 4:30, 개정)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갈 4:31, 개정)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육체가 육체의 소욕이 도저히 감당을 할 수 없는 척박한 식물로써만
절대로 익숙하게 포착될 수 없는 양식으로만
낯설고 낯설고 싫고 밉고 싫어버린바 된
다시는 손 대고 싶지 않은
두 번 다시 먹고 싶지 않은 그야말로 광야의 양식은 죽음의 양식인 겁니다.

양식이라는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이어줌 잇고 잇고 잇고의 양식인데
만나는 먹을 때 마다 단절 단절 차단 차단 뚝뚝뚝 끊어지는 도저히 연결할 수가 없는 양식이니 어제까지 아무리 잘 먹었어도 오늘 먹지 못하면 그야말로 죽음과 결부된 양식이니
먹어도 죽고 안먹어도 죽는 죽음과 정면으로 맞딱뜨리게 하는 양식인 겁니다.

그야말로 철거머리 죠

자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가 살펴봤듯이 만나 조차도 누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까?
당근이죠.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예수님을 만난 자는 괴롭히는 예수님을 만난자가 만나를 제대로 만난자죠
주님이 영생케 하는 양식을 주겠다고 만나가 바로 자신임을 말하자
그동안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따라왔던 수 많은 사람들이 다시는 따라오지 못하도록
자신의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 라고 하시자

다 떠나고 다시는 따라오지 못하는 겁니다.

즉 주님의 살과 피는 만나처럼 광야의 양식이요 고난의 떡 고난의 잔 괴롭도록 쓴 나물처럼 그야말로 척박한 식물인 겁니다.

(민 21:5, 개역)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결국 말씀 곧 만나는
모든 인간들에게 싫어버린바 된 인간의 진짜 속내를 드러내는 겁니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는 그 말씀을 가장 싫어하는 속내를
말씀을 가장 잘 지키는 자들을 통해서도 적나라하게 다 드러내는 겁니다.

(신 8:3, 개역)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래야 포착불가능한 절대로 인간의 손에 조리가 될 수 없는 익숙해질수가 없는
낯설은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곧 새롭게 계명을 말하고 주신다는 취지는 절대로 못 지키도록 철저하게 죄 아래 가두기 위해서 준 겁니다.)

(출 16:19, 개정)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출 16:23, 개정)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마치 유월절 희생양 고기를 먹는 한 쪽은 고기양잔치 다른 한쪽은 장자재앙의 하이라이트 두 대조적인 잔치(주님 혼자 신나부려 신나부려)처럼 유월절 상황의 재현 (계속 피의 의미를 뭔가를 드러내는 식으로 그러면 그럴수록 인간 쪽은 육체의 결핍성으로 육의 소욕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남, 물없는 곳 양식 없는 곳 원망할 만한 곳만 골라서 죽을 수밖에 없는 곳만 골라서 감) 결국 이스라엘을 뽑아낸 이유는 애굽 보다 더 구원받을 만한 어떤 조건도 없음과 편애에 어떤 보탬도 없는 더더욱 남들이 들키지 않는 깊은 죄를 캐면 캘수록 은혜가 더 크게 드러나도록 주님 혼자 영광을 드러내고 주님 혼자 영광 받는 식임 아무도 모르게 함 여기에 동참됨(광야 자체가 세례이기에) -  낯설은 양식에 대한 설명]

아무튼 이 만나라는 양식과 안식일 규정과 또 연관이 되는 이유는
이제 인간에게는 안식이란 없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양식을 먹음으로써 생명있다 라고 티내는 그 모든 방식을 이제 거짓으로 취급하겠다는 겁니다.
그럼 언제 안식이냐? 쉼이냐?

누가 자신의 살과 피를 뜯어서 우리 입 속에 먹여야만 비로소 우리에게 안식이 되니
안식은 몇째날이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절대로 결핍을 채울수 없는 우리 뱃솟의 그릇을
아예 밥그릇 자체를 없애버리는 그 분이 자신의 목숨을 맞바꾸기 하듯이
채울수 없는 밑구멍 빠진 밥그릇과 자신의 목숨과 맞바꿈 당함으로써 비로소 안식이 된다고
내 밥통 빼앗긴 날이 안식의 날이다는 겁니다. 교체 당한 날
아예 나를 교체시키고 예수님 자신을 우리에게 씹히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들어와 에어리언처럼 우리를 다 장악하고 분해시키는 것이 바로 안식이다는 겁니다.

선악을 베임 당해야 생명나무에게 죽임을 당해야 올무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메추라기를 베임 당해야 만나가 비로소 보입니다.

그러나 만나는 절대로 보이지 않도록 반대의 양상으로 죽음으로써(선악의 보암직 먹음직 탐스러움의 정반대) 나타나니 아주 적극적으로 너무 너무 싫어하도록 척박한 식물로써 등장하니

주님이 일을 제대로 하신 증거인 겁니다.

마치 안식인 쉼을 말하기 위해서 절대로 쉼이 없음을 앞장세워서 말하는듯한

길들여지지 않는 양식처럼 까탈스럽고 조심스럽게 다루어도 안되고
하여튼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쉼은커녕 허탈하고 탈진케 만들고 정신없고
똥 오줌 못가리도록 사람을 아예 가지고 노는 만나 좀 먹을려다가 실족케 될 정도로
도통 안내키는 양식이다는 겁니다.

조금만 더 담으면 썩고
그 다음날의 양식을 보장받을 수 없고

즉 썩어버린다를 앞장세우면서 증거되는 양식인 겁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포착된 모든 양식에 대한 도전인 겁니다.

썩은 양식으로 규정하는 양식은 오로지 만나 뿐이다 라는 것을 알고서 먹어야 할 판국이니
그런거 따지거나 물어보거나 한적 없이 먹어오던 메추라기 식으로 먹던 자들은
그만 이 만나 라는 양식 앞에서
죽을 맛인 겁니다.

얼마나 까탈스러운 양식인지
그런데 이 양식 안 먹으면 천국 꿈도 꾸지 마라 라고 하니

에이 더러버라 안 묵으면 되지 라고 나오니까
옳치 잘 걸렸다 야호 성공 이라고

만나 자체가 너 창세전에 택한 자인가? 아닌가를 가려내는 양식으로써
다가오니 실족하지 않는다것은 거짓말이 되고 실족하는 것이 정상이다 라는 겁니다.

아예 넘어뜨릴려고 작정하고 달려드는 양식이니
이 양식이 넘어지지 않는 자는 있을 수 없도록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메추라기 보양식 개고기 먹고
시험 들었다 다시는 못 먹겠다 라고 하는 자 없습니다.
단지 비린내 때문에 역겨워서 안맞을 뿐이지 그것도 요리 방법으로 다 제거하고 하면 다 먹게 되어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정 아니면 다른 보양식 삼계탕 이거는 다 먹을 줄 아니까 물론 또 못 먹는자 있지만

아무튼 그런 양식들이 나를 넘어뜨리지 않습니다. 이미 나의 전리품이니까

그러나 양식의 모습으로 전리품의 모습으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의 모습으로 왔지만
정작 양식이 나를 아예 가지고 놀아버리면

한국영화 “귀신이 산다”처럼 내가 쟁취해낸 내 열심과 노력으로 돈 주고 산 나의 소유물 나의 재산이 도리어 나를 가지고 놀아버리니 귀신 곡할 노릇인 겁니다.

안식이 나를 가지고 논다니 그야 말로 [안식이 산다] [만나가 산다] 가 되는 겁니다.

은사가 내 속에 나를 주물딱 거리면서 주체로 살게 되니 나는 객체가 되는 똘마니 장난감이 되는 식이다 라고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주객을 뒤바꿔치기 당하기 위해서 교체당하기 위해서

우리는 남들이 당해보지 못한 양식 때문에 시껍에 시껍을 하도록 하는 겁니다.
남들이 당하지 않는 돈의 철저한 노예가 되어봐야 돈에게 온갖 서러움을 당해봐야
돈에게 철저하게 짖밟혀 봐야  불의한 재물에 충성한 청지기를 남들은 다 욕해도
희한하게 우리만큼은 구원자로 유일한 이웃으로 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이러니 하게 선하긴 선한데 유대인의 지금까지도 마귀자식 지옥백성이라고 하는 사마리아 인 인 겁니다. 사마리아인에게 절대로 선하다 라고 붙일수 없는 만약 그것을 인정하고 수용한다는 것은 자기들이 도리어 불의하다 라는 결론이 되니까 그래서 인간이란 조직 속에서 법제화 해야 개인적인 사심이 일체 접근못하도록, 변심이 혹 되더라도 수정불가 방침으로써 법을 생명나무처럼 화염검 잡은 조폭들을 깔아놓는 흉내를 내는 겁니다. 그것이 오늘날 인간들의 손에서 세워진 교회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만나처럼 이 땅의 모든 양식을 엎어버리고 그것을 습취하는 인간 자체도 마귀였다 라고 밝혀내는 그 만나가 아니였다면
인간은 구출 받을 길이 없도록 하고자

일부러 작고 일부러 알수 없고
일부러 포착되지 않는
철저하게 다시는 손대고 싶지 않는 척박한 모습으로
일부러 싫어버린바 된 모습으로 와야만

그동안 마음 푹 놓고 먹은 양식들이
왜 썩을 양식이였는지를

만나가 썩는 것을 보게 됨으로써
지적당하는 겁니다.

(히 4:12, 개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나를 제대로 쑤시고 쪼개는 양식인 나를 철저하게 분쇄기로 갈아버리는 해부하고
해체시키는 양식만이 진정으로 쉼의 세계에 평화의 세계에 인도하는 겁니다.

이미 안식으로 완료되었기에 완료된 자체로써 분쇄시키는 것이지
분쇄 라는 조건을 갖추면 된다고 보는 자는 억지로 참아서 여전히 참는 자신을 주체로 여겨서
절대로 메추라기를 포기 할 수 없다는  아 참아야 돼 참아야 돼 그래야 메추라기 먹을 수 있어 라고 억지로 코막고 눈막고 만나를 오만상 얼굴 찡그려가면서 참아라 라는 성화의 덕목을 지켜서 아 이제 잘 참았으니 메추라기 먹어야지 라는 식으로 반드시 넘어뜨리는 식으로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도록) 일체 용납 불가의 양식으로만 증거 된다는 겁니다.

메추라기와 궁합이 딱 떨어지는 선악의 몸 자체를 없애버리는데 참아본들 소용 없는 거죠.

육체의 소욕을 없애버리는 양식이 만나이기에
메추라기 라는 양식을 반드시 주도록 함으로써
한 번 씹어 보도 못하고 그동안 참아왔던 고기 고파에 다 넘어뜨리도록
메추라기를 미끼로 삼아서 저들이 악마 였음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민 11:31, 개역) 『바람이 여호와에게로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곁 이편 저편 곧 진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민 11:32, 개역) 『백성이 일어나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십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진 사면에 펴 두었더라』

(민 11:33, 개역) 『고기가 아직 잇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민 11:34, 개역) 『그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칭하였으니 탐욕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끝까지 가려내시는 양식인 겁니다. 내가 취사선택해 온 양식 섭취가 아닌
양식 자체가 나를 가려내고 해부하는 양식입니다.

척박한 식물이요 너무 너무 싫은 박한 식물인 겁니다.

청함을 받았다고 아무리 좋아라 했어도 택함을 받지 못했기에

(마 22:14, 개역)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자신의 취사선택의 양식을 포기하는 말석
나는 먹을 자격 없다는 낮추심에 의해 마땅히 죽어야 하는 죄인의 자리에서
비로소 주님의 피의 가치가 톡톡히 실감나게 드러나는 겁니다.

(눅 14:7, 개역)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눅 14:8, 개역)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눅 14:9, 개역)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눅 14:10, 개역)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새 이스라엘 곧 신랑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란
처음부터 자리가 없던 자들이였습니다.

지금 오늘 그 자리를 만들고자 처소를 예비하고자 (요14장-박스 예비 - 육을, 죄를 담는 박스)
자신의 목숨마저도 버리고 피 값을 목숨값을 치른 예수님이 마련한 그 자리
생명의 자리 영의 자리는 아무리 육의 눈으로 보고 해석을 해 봐도
아름다움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모양이 일체 없는
그야말로 죽음의 자리를 마련해 두신 겁니다.

아무도 원치 않는 싫어버린 바 된 자리

그 자리 마련하실려고 창세전부터 계획 하시고
자기 목숨을 버리시면서까지 마련한 유일한 영생의 자리인

하나님과 같이 된 선악을 아는 쉼 없는 곤고한 자아의 죽음을 볼수 있는 유일한 자리 

십자가입니다. (그 곤고한 자리를 깨뜨리는 안식의 자리 입니다.)

쉼이 있는 마침의 자리

(롬 10:4, 개역)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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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쭈욱 다시 살펴보다가 pm10:07
 
실컷 답을 했는데 질문을 잘못 봤네요 왜 메추라기냐가 아니라
왜 메추라기를 먼저 주느냐 이군요.

물론 답은 같습니다.

어두움을 먼저 깔아야
가짜 양식을 먼저 깔아야
선악을 먼저 공개해야
전남편인 율법에게 다 가두어 두어야

더 나은 것이 뒤에서 이미 완료로써 다가옴에 모든 가치를 두기 위함 입니다. 그러므로 앞의 가치를 모조리 손 때게 무릎 꿇게 만드시는 겁니다. 홀로 다 이루심 (철저하게 무능했음을 확정짖는 거죠)

(메추라기에 대해서 잘 아는 자가 똑똑하다고 강하다고 지혜롭다고 하던 자가
이 만나 앞에서는 도통 알 수 없도록 부끄럽게 하기 위함 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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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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