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위한 양식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11-21 08:00:30,

메추라기를 먼저준 모습이 창세기에서 선악과를 먼저 먹게 한 모습과 같은 것이였군요

답변 :

네 여호와 자신의 영광만을 드러내기 위함에 동원되는 겁니다.

생명나무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등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만나가 중요하기 때문에 메추라기를 원하길래 준 겁니다.
그러나 만나는 아무리 해도 자기들의 소유가 될 수 없는
단절 분리 차단 막혀진 양식으로써 그 이전의 양식을 거짓취급하고 지워버리는 양식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2008-11-21 09:03:36,

(민 11:34, 개역) 『그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칭하였으니 탐욕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에서 광야로 나온 자들은 다 먹었을텐데 다 죽지 않고 다시 만나를 먹는자들이 나오잖습니까 여기서 주님이 생각한 탐욕이란 뭔가요 탐욕이 기준이 되어서 죽을자와 만나를 먹을자로 구분된건가요

답변 :

간단합니다 천천히 먹으면 됩니다.
그러나 결핍성이란 자기가 우선이기에 다급해 질 수밖에 없고
또 애굽때에 버릇 즉 불가마 곁에서 노예의 신분으로 자기까지 분량이 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먼저 줄서는 놈이 장땡이라는 것입니다. 여유가 있을수 없죠. 감사가 없죠.

양식 자체가 경쟁성을 유발케 하는 겁니다. 성화론 종교자들은 그런 점에서 여유가 있습니다. 미끼를 던져주면 그거 서로 먹을려고 달려드는 애달은 놈들은 교인들이기 때문이지요.

그런 버릇이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듯 자기를 챙길려는 버릇이 스스로 시험에 드는 꼴입니다.

마침 오늘 하갈이 이스마엘을 살려달라는 기도에 대해서 누구와 나눈적이 있는데
참 하나님도 멋져부려, 하갈이 기도하는 것 다 들어 줍니다. 그래 그래 이스마엘 살려주마
그런데 어리석은 어미의 특징이 그저 자식이 이 땅에서 굶어죽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지
반드시 약속의 세계에 들어가야 한다는 부모로써의 모습은 일체 없는 겁니다.

하갈 본인 자체가 약속에 관심이 없기에 이 땅의 썩을 양식만 끊어지지 않기를 바란 거죠
이것은 가인이 이마표를 구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러니 그거 들어줘야죠.
만약 하늘의 양식을 구했더라면 주냐 안주냐가 고민될 문제가 되겠지만
다행히 너무 너무 다행히도
보물은 원치 않고 흙만 잔뜩 달라고 하는데
까짓꺼 왕창 퍼부어 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을 확대 시켜서 (이마표 잔뜩 붙여줍니다. 이마표 주니까 좋아라고 엔돌핀 쏟아나니 적극적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좋은 유전자가 태어나 영웅호걸들의 원조들이 마구 마구 태어난 겁니다. 그게 좋아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지만
정작 자식들을 다 지옥 보내는 꼴인 셈인거죠. 그것과 같은 원리로 하갈이 썩은 동아줄 달라고 기도하니 줘야죠 당연히 줘야죠. 딱 하나 뿐인 약속의 줄을 달라고 했으면 큰일날뻔 한 거죠. 그 어미 하갈이나 그 자식 이스마엘이나 장자권을 소홀히 여기듯이
자기자신이 이미 법이 된 이상 자기자신만을 챙기기 위해서 하늘의 것은 하등 중요치 않도록 반드시 그들의 눈에는 가치가 없고 오로지 고기 고기 고기만 중요하기에 그 고기의 가치가 그 너무 너무 중요한 것의 가치가 어느정도인지를 예수님이 규정합니다. 안개라고, 썩음
씹어보도 못하고 숨막혀 퀙  (이거 오늘 제목에 굿이네요 퀙 ~~)
약속이 벌리는 전쟁에 의해 어두움의 역할로써 톡톡히 주인공된 빛을 드러내기 위해서
써먹을 대로 써먹는 겁니다. 어두움의 값을 지대로 지대로 해야만 하는 겁니다.

자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양식은 반대의 성향으로만 가야하기 때문에
굶어도 상관없고 배고픔을 반드시 격도록 하시는 겁니다.

성경구절을 못 찾겠네요 하여튼 바울이 부요케도 하시며 가난케도 하시며
높은데 처하기도 하시며 낮은데 처하기 하시며
율법아래 있는 자에게는 유대인으로 다가가고
구약으로 따지면 취하시기도 하시고 주시기도 하시고
여기에 인간은 철저한 소외된 입장 뿐이기에 당하는 입장 뿐인거죠

(고전 9:20, 개역)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고전 9:22, 개역)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일종의 자기 처세술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얻고자 물론 복음을 증거하면 그 사람이 선악나무의 열매인지 생명나무 열매인지를 자기가 따질 소관이 아니기에
모를 수밖에 없기에 다 수시고 찔러보고 돌아다니는 겁니다.)

그러나 보물인 영광이 이미 덮쳤기에
현재의 고난은 미래에서 덮친 영광과 족히 비교가 될수 없기에
(롬 8:18, 개역)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실질적으로 비교케 할려고
일부러 물없는 곳 양식없는 곳 원망할만한 곳 일부러 죽을 곳만 골라 다닙니다.
미래의 영광이 이미 덮쳤기에
그것의 가치가 드러날려면
당연히 불 속에 집어 넣어도 상관 없는 거죠.
불속에서도 사는 주님의 살과 피가 이미 덮쳐졌기 때문이지요.
내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나에게 또 이스라엘에게 발려진 그 피의 진가를 발려놓고도 늘 무시하기 때문에
피의 의미를 부각케 할려고
가짜 양식의 내막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 배고프면 안돼 라는 법 보다
배고픔에도 처하면서 누려보고
왜?
지나가는 것이니까? 배고픔을 가난을 체험케 함으로써 누가 마음이 가난한자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는 거죠. 예수님 뿐임을
얼마나 마음이 낮아지셨으면 참 양식을 줄려고 자기를 찢었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심각한 것 없습니다.
지나가는 것이기에 그저 구경만할 뿐입니다.
때론 태풍을 만나더라도 지나가고
때론 우박이 쏟아져도 그것 또한 지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누리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 나그네 순례자의 생활이 바로 교회 곧 광야교회인 우리입니다. 지나간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자 그럼 주님이 알려줘야만 비로소 알게 되는 탐욕이란 뭘까요?
자기가 규정하는 탐욕 또는 죄는 죄도 아닙니다. 그거 장난치는 거죠. 성화론자들이 평생 그 장난 치다가 지옥생활만 하다가 또 지옥 가듯이 (이유 없이 채워야 하는것 자체가 지옥)

주님이 알려준 탐욕 곧 죄란

자아입니다. 법을 아는 자아, 선악 자체가 되고만 자아입니다.

그래서 그 자아를 못 밖고자 오신 겁니다.
그리고 먼저 본으로 시범조교가 된 겁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치 않는 자는 저주를 이미 받았기에

주를 자기 쪽에서 사랑한다고 아무리 교회 다녀도 (그것 자체가 이미 또 법이기에 결국은 최종적으로 쳐다보는 것은 자아 곧 자기에게로 회귀 되는 겁니다.)
그것에 안 속아 넘어간다는 것을 애굽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예수 잘 믿는 내가 타인에게 믿음 좋다고 인정받아도 모자랄 판국에 도리어 공격받으면
안색이 변하니 그게 결국 자기를 사랑해서 나온 것이지
주님이 심은 사랑은 아닌 겁니다.
자기가 자기욕망을 심어서 선악을 심어서 예수님을 백날 사랑해 본들
그 예수님 마저도 선악으로만 해석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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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1 09:05:23,
만일 주님의 일방적은 긍휼로 먹게 된것이라면 그것도 일종의 편애인가요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으로

답변 :
당연하지요
지독한 편애(생명나무)와 지독한 미움(선악의 나무)의 이 두 상황 외에는 없는 겁니다.

빛이든지? 아니면 어두움인지? 이 둘 뿐이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황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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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1 13:25:02,

출17:12~13 의 뜻은 뭔가요

(출 17:10, 개역)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출 17:11, 개역)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출 17:12, 개역)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답변 :

이스라엘의 최초의 싸움대상인데 (애굽에서는 일방적으로 빠져나오는 식이지만) 이스라엘 본인들이 맞이하게 될 가나안 전쟁의 미리 맞보기 샘플인데

절대로 인간의 방식의 전쟁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학문적인 충돌이 있었다면 논리적인 팽팽한 공방이 있어야 그 속의 관객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학문적인 논쟁임에도 불구하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무식하게 앞뒤 안 맞는 논리도 없고 합리성도 없고 한마디로 법적인 구색을 하나도 갖추지 않는다면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로 취급받고 다들 안색이 찡그러지는 똥밟은 기분이 되는 찝찝함을 떨쳐버릴수가 없는 겁니다.

자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이 칼을 갖추었으면
적으도 칼에 맞설수 있는 대등한 무기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정 안돼면 돌이라도 들어야 전쟁이라고 서로가 취급하면서 승패가 어찌 되었던 전쟁 했다가 성립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전쟁은 일부러 그런 규칙을 깨뜨리는 전쟁만 골라 합니다.
마치 이스라엘을 살리고자 철저하게 모순되고 역설적인 죽일 곳으로만 인도하듯이
전쟁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저들이 총을 들었다면 일부러 비슷한 무기를 들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무기를 들도록 해서
반드시 저 쪽 적군으로부터 무시받는 반드시 무시받는 또는 그들이 좋은 무기를 갖추었다면 상대적인 나쁜 무기 악한 무기를 갖추게 하는 겁니다. 저들이 보기에 말이죠

(엘리야와 850명의 바알 아세라 제사장과의 갈멜산을 무대마당으로 한 양쪽 신의 전쟁에서
엘리야는 소리 작다 그렇게 해서 들리겠냐 라고 놀려먹습니다. 그들은 선악법이기에 뻔한 것만 가지고 신을 감동시켜 자기 편을 만들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불이 붙어야 신께 응답되었다고 게임의 법칙을 규정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불이 잘 붙도록 마른장작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불이 절대로 못 붙는 방식으로써 물을 뿌려 버리는 겁니다. 마치 반대의 모습으로 오시는 십자가의 양상으로써 등장하듯이 뭐든지 반대로 하는 겁니다. 그럼 누가 더더욱 이길수 있는 승산이 커집니까? 당연히 바알쪽인데도 불구하고 다 이긴 게임 조차도 거져 줘도 못먹느냐 라고 자기들끼리 티박을 할정도의 웃사꺼리 부끄러움의 수치를 유발케 하는 겁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 수치를 미리 앞당겨 받는 식으로 행동한 겁니다. 먼저 수치(심판) 받는 자가 나중에는 웃고
지금 비웃으면서 무시하지만 정작 자기들이 침 뱉은 것이 자기에게도 돌아가도록 하는 겁니다. 바로 이런 전쟁의 방식을 펼치는 겁니다. 그러니 적군인 아말렉이 자기들의 작전인줄 알았는데 사실은 이미 주님이 짜놓은 작전대로만 그들은 행동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아무리 자기들이 작전을 짜도 이미 감독이 시키는대로만 하도록 되어 있는 악당 배우인 겁니다. 즉 두 계열의 선지자 곧 은사 중에 더 나은 은사는? 인간의 소유가 된 은사는 기술과 종교테크닉으로 신을 달래기 신을 설득시키기 이고 반대로 엘리야의 은사는 이미 결정된 완료된 것을 그냥 통보해버림 그렇기에 저들의 행동에 무조건 반대가 되어버림. 예정만 밀어붙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특징 예정된 완료만 밀어붙이지 앞으로 달성하겠다 라는 것이 일체 없음)

마치 예수님이 바알 세불 걸렸다고 취급하니까 그래 그렇다 치자 라고
저들이 규정한 악의 자리에 예수님 자신을 두는 겁니다.

그들이 그렇게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선한 자리에
누가 뺏을까 싶어서 불안해 하는 그 선한 자리에 고수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이 규정한 악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선한 일을 하고
반대로 그들은 예수님을 악으로 규정했고 자신들이 선한 자리를 고수하고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선은 하나도 안나오고 악만 나올때에

그 자리가 중요한게 아니라
이미 그들이 규정한 지옥의 자리가 천국이고
그들이 규정한 천국의 자리인 성전이 바로 악마의 아지트가 되는 꼴로써

저들의 논리대로 규정케 만들어서 부끄럽게 하시는 거죠
선으로 악을 이기시는 겁니다.

그래 그래 너희들 똑똑하고 나는 미련하고 어리석다
그런데 너의 똑똑함과 지혜가 남을 살리기는커녕 자기 하나 챙기는데 발악하니
누가 봐도 악한자의 모습이고

너희들이 보는 악마라고 한 사마리아 사람은
정작 너희들이 비켜가고 피해버린 강도만난자를 도와줬다
누가 더 나은 자인가?

결국 그들 스스로가 취사선택해서 꽉 쥔 빼앗길까 싶어서 절대로 남 주기 싫었던 그 법이
도리어 자신들이 악마임을 규정하는 식으로써

예수님의 자유와 사랑이 넉넉하게 작용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포기하면 될것인데 절대로 끝까지 포기못하는 거죠. 성화론자들이 다 이에 해당되는 겁니다. 법을 절대로 손에서 안 버릴려고 하는 겁니다.

결국 하갈처럼 주님의 긍휼마저도 흙 취급해서 흙만 잔뜩 끌어모아서
흙 속에 갇혀서 파 묻히는 꼴이

바로 기브롯 핫다아와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황금(신=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남도 죽고 자기도 못 먹는 마이다스의 손처럼 말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남을 살리고자 자기가 죽는 방식으로만 전쟁으로써 안식을 이루는 겁니다.

참 아말렉전쟁은 앞으로의 여호와 전쟁의 모든 전쟁의 방식입니다. 그렇기에 아 그러면 저런식으로 하면 이기겠지 라고 자기 쪽으로 가지고와서 흉내내고 따라하고 흡수 통합 해 본들

또 다른 방식이 준비가 되어 있는 겁니다.

왜 모세의 팔을 올리면 이기고 모세의 팔이 내려가면 지느냐?

이것은 간단합니다.

올리면 선이고 내리면 악이 아니라,

지금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또는 남을 이겨야만 내가 살기에 남보다 강해야 한다 더 큰 무기 더 좋은 무기를 소유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절대로 빠져나올수 없는 전쟁의 극한 세계 속에서
(오늘날로 치면 돈 없으면 절대 살수 없어 라고 돈을 조금이라도 더 가질려고 벌려는 모습처럼)

일부러 그런 시선에서 떼낼수가 없는데
이상하게 그 쪽에 시선이 가도록 하는 역 발상의 모습? 즉 뒤 바뀐 거꾸로 가는 모습인 거죠

그것이 시선을 확 땡기더라 라는 거죠. 물론 3초 이지만
그러나 그 시선을 통해서 비로소 한 순간이라도 자기를 놓을 수 없는 순간에

남을 봤다는 것 자체로써

전쟁을 이기게 끔 하는 겁니다.

자기를 비로소 안 본 순간 인 거죠

희한하죠

내 목숨 지킬려고 내 목숨에서 눈 땔수가 없는데 마치 아기엄마가 갓난아기를 한시도 눈 못 때 듯이

내 목숨 안 쳐다보고 딴 목숨 쳐다 봤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이기게 하니까


웃끼고 웃끼는 소리처럼

도리어 진지하게 심각하게 자기를 지킬려는 그 모든 수고가

허탈하고 기운이 쭈욱 빠지듯이 그 지혜 앞에서

이거 뭐야 라고 이것이 무엇이뇨 라는 식이 되도록 한다는 겁니다.

앞으로 있을 여리고성의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총 칼 들고 뛰고 달리고 던지고 막고 찌르고 힘주어서 비틀고 얼마나 수고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죽으니까 초긴장입니다. 마르다처럼 분주하죠

그런데 지금 전쟁에서 서로 죽이기도 바쁜 판국에
나는 죄인입니다. 그 증거가 법궤 속에 담겨 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죄인을 용서받지 못할 죄인을 용서 했습니다 라고 뺑뺑이 되는 겁니다.

피를 자꾸 들이대는 겁니다. 적군들에게

그럼 피를 들이대는 본인들은 깨끗하냐? 그것도 아닙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이 피를 발생시킨 죄인일 뿐이다 라고

나도 죄인이니 너도 죄인이야 어서 이 피 앞에 무릎 꿇어 라고 나오니까

같은 죄인인 주제에 기분나쁘게 말하니까

회개에 동참하기는커녕

그래? 죄인이셔? 얼마나 못났으면 죄인일까?
차라리 내가 용서하마 라고 온갖 무시를 유발케 하는 비웃음을 유발케 하는 겁니다.(이삭의 원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회개 곧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라는 자기 부정을 두고

차라리 내가 심판 하마 내가 널 죽여주마 라고 십자가에 못 밖는 법의 위치에 서도록 함으로써

도리어 역전의 법을 쥔 놈들이 와르르 다 무너지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법 쥐면 다 죽고 법 외에 사랑을 긍휼을 쳐다보면 무조건 살도록 되어 있는 이상한 전쟁을 맛배기로써 보여주는 겁니다.

즉 누구를 쳐다보냐로 결정하는 전쟁은

이스라엘 만이 하는 전쟁인 겁니다.

나를 쳐다볼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손에 악마 취급 받아서 죽는 예수님을 쳐다 볼것인가?
(안 쳐다 보면 죽고 쳐다 보면 사는 장대 높이 달린 불뱀 구리를 쳐다보면 살고 안 쳐다보면 죽는 역시 두 나무의 상황인 겁니다.)

이 불가능한 거룩한 전쟁에 동참케 하실려고 성령을 주시고
은사를 주시는 겁니다. 아무도 못 쳐다본다는 것을 아시기에
아예 기대도 안하기에 영을 줘야만 영을 받아야만 쳐다보고 그 외의 방식은 차단되는 방식

은사란 죽어도 상관 없는 자리에 가도록 낮추시는 영의 활동인 겁니다.
즉어도 상관 없는 자리가 뭘까요? 나를 안 보고 주님을 쳐다보는 자리입니다.
은사가 주체가 되어서 말이죠

(롬 12:21, 개역)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물론 성화론자들은 이 선 마저도 또 악 마저도 정반대로 해석하니까 엉터리죠
자기들의 기준의 선과 악이 뭔지를 보며는 알 수 있습니다.

(롬 14:8, 개역)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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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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