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는 광야교회

예수님의 죽음(피:십자가)만을 앞장세우는 교회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요 2:17, 개정)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11-22 00:32:34

뒤 바뀐 거꾸로 가는 모습인 거죠 에서 이 말은 주님을 말하는것이고 남을 쳐다 봤다는것은 자신의 상태를 본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 봤다는 말인가요

(출 17:10, 개역)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여호수아가 왜 싸워야 했는지 성화구원론자들은 여기에서 모세는 그리스도의 예표고 여호수아는 성령의 예표다고 하던데요

답변 :

어제 답변 중에 했는 글을 올려 보면

[일부러 그런 시선에서 떼낼수가 없는데
이상하게 그 쪽에 시선이 가도록 하는 역 발상의 모습? 즉 뒤 바뀐 거꾸로 가는 모습인 거죠

그것이 시선을 확 땡기더라 라는 거죠. 물론 3초 이지만
그러나 그 시선을 통해서 비로소 한 순간이라도 자기를 놓을 수 없는 순간에

남을 봤다는 것 자체로써

전쟁을 이기게 끔 하는 겁니다.

자기를 비로소 안 본 순간 인 거죠]


네 맞습니다. 유일한 타인은 예수님 뿐입니다. 자기를 쳐다보듯이 인간은 다른 인간을 보기 때문에 결국 자기의 자아상을, 같은 나를 보는 겁니다. 그렇기에 낯설지가 않고 익숙합니다.
조금의 욕망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공동분모는 같습니다. 그 공동분모의 욕망이 뭐냐 하면
사망의 권세, 음부의 권세, 지옥 곧 죽음입니다. 선악 나무입니다.

비로소 선악나무끼리만 쳐다보다가 비로소 유일한 생명의 나무를 쳐다 본다는 취지로
거꾸로의 주객이 전도된 죄악의 상태에서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거죠.
예수님 자체가 생명나무이고 만나가 정반대의 모습이고 모조리 정반대의 모습으로써
상대적인 것을 대조 시키는 겁니다.

메추라기 보다 더 나은 그러나 무엇인지 알수 없는 만나

자 그럼

(출 17:10, 개역)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여호수아가 왜 싸워야 했는지 성화구원론자들은 여기에서 모세는 그리스도의 예표고 여호수아는 성령의 예표다고 하던데요

질문에서 어제도 비슷한 아니 전체 지금까지의 질문이 다 이런식입니다.

특히

[2008-11-21 19:02:04,
교회는 왕국 안에서 통치하는 권위일 것이다. 18장에서 교회는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배척당하던 동안 얻은 모세의 아내 십보라로 대표된다(2:13-22). 많은 성경학자들이 십보라가,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배척당하시는 동안 그분이 얻으신 이방인의 교회를 예표함을 안다. 오늘도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하신다. 이 배척의 기간에, 마치 모세가 이방 아내를 얻은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이방 세계로부터 이끌어 낸 이방인의 교회를 얻으신다.]

의 질문에서도 자꾸 끼워맞추기 퍼즐문제 빈칸 채우기 놀이를 하는 겁니다.
세대주의 문자주의를 그렇게 욕하고서는 자기들도 결국은 본능에 충실하는 거죠.
괜히 욕먹는 이단들만 억울한 셈이지요. 결국 이단은 돈으로 성공했냐 실패했냐? 사람의 다수냐 다수가 아니냐 로 조직자체의 운영 자체가 다수에 결정나기 때문에 소수는 무조건 이리차이고 저리차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렇다고 소수가 진리는 아니죠 사실적인 실감을 당하는 거죠. 다수가 못 되었다는 서러움을 톡톡히 말이죠.

자꾸 십보라를 신약과 억지로 끼워맞출려다 보니 십보라는 이방인이고 모세는 그리스도를 말한다. 또 이제는 여호수아는 성령이고 모세는 그리스도다 라고 붙이는 이유는 마치 유대인들이 자기네들이 모세의 제자다 라는 우위권을 자랑하듯이
그 우위권을 확보하고파서 자기 탐욕에 끌려서 그런 겁니다.

그만큼 성경말씀 자체가 그들에게 선악의 나무로써 작렬하게 꼿히고 있다는 증거이니까
말씀이 제대로 운동력을 펼치는 생생한 현실이라는 거죠.

막 소유하고파서 난리인거죠. 그래서 너거들은 모르지 나는 알지롱 이라고 육을 자랑하고픈 겁니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이 본문을 봐야 하는가?

간단합니다. 저들을 누가 깔아 놓았습니까?

십보라는 이방인의 교회다. 모세는 그리스도다. 여호수아는 성령이다 라고 해석할 수 밖에 없도록 하신 주님이 깔아놓은 옛언약적인 헌술 헌부대의 사람으로써 깔아 놓은 겁니다.

우리가 자주 언급한 다른 복음을 증거하는 대표자로써 성화론자들을 자주 언급했습니다.

그런 성화론자들을 누가 깔아 놓았습니까?

물론 주님입니다.

자 그런데 뭐가 간단하냐?

바로 주님이 깔아 놓은 이런 가짜 해석에 반대로만 하면 됩니다.

그럼 반대 라고 하니까 법의 반대 면 법 아닌 것?

정치 반대면 정치 안하는 것?
결혼의 반대면 결혼 장가 안 가는 것?

그런 식의 반대 또한 반대가 아니라 도리어 그 속에서 더 정치적인 야합을 하는 식입니다.

반대 자체라는 것은 새로운 것을 말합니다. 이 땅에 없는 것
그렇기에 선의 반대는 악이다 라고 봐버리면 그것이 선악나무에서 빠져나올수 없는 입장이지요.

자 그럼 반대가 뭔대 그렇게 말을 빙빙 돌리느냐?

반대란 주체를 바뀌어 지는 교체를 말합니다.

즉 지금 해석 할려는 그 해석자를 포기 하라는 겁니다.

성령이라는 의미를 건방지게 해석 할려고 달려든다는 거죠.
성령 자체가 해석자를 용납지 않고 해석의 모든 주도권을 성령 혼자 쥐고 있는데
그것을 못 포기 하니까?

모세를 그리스도로 여호수아를 성령으로 억지로 갖다 붙이고 있더라 말이죠.

그것만 그러느냐 성경 전체를 그렇게 해석하고 있으니?
그게 무슨 성화론자들 입니까? 이미 자기들의 성화론에 모순 되고 있는데

성령을 운운 한다는 자체가
난 이미 죽었습니다. 죽었으니 성령 마음대로 하세요 라는 것인데

성령 운운 하면서 도리어 거봐 거봐 나는 성령 운운 할 줄 아니까 나를 무시하지마

그래서 성령은 바로 그 놈을 더더욱 무시하는 일만 골라서 하시는 겁니다.

아들이면 징계하고 그런 독과 뱀을 먹는 놈을 작살내죠 매를 대십니다.
그러나 사생자라면 어제 말한 하갈의 기도와 가인의 요구대로 오냐 오냐 많이 쳐먹으라 라고 도리어 퍼부어줍니다. 독과 뱀을 전갈을 막 퍼붓는 거죠. 실컷 먹으라고 메추라기를 퍼붓죠

아무튼 무조건 정반대로 해석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정반대가 뭔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이기에
그래서 포기 하라는 겁니다. 성령에게 맞길 문제이지
성령이 힌트 주면 또 성령으로 인해 계속 해석을 정당화 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도리어 비로소 내가 해석 할 필요가 없으니
성령이 왔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그러니까 마리아는 좋은 것을 빼앗기지 않지만
마르다는 줘도 차버리는 예수님이 있어도 안식이 없는 절대포기 못하는 입장인
그저 자기만을 쳐다보는 거죠.
성령은 그 자기만을 쳐다보는 것을 포기케 하기 위해 오신 것인데
성령 마저도 선악으로 보니 도리어 불난 집에 부채질 하듯이 성령을 소유할려고 달려드는 꼴인 겁니다.

자 그럼 해석에 들어갑니다.

참 재미있게도 반대로 해석하면 되는데 반대의 세계가 덮치면 진짜 재미있게도 반대임을 실감하고 심지어 웃끼고 배꼽잡을 정도입니다.

미진했던 답을 보충해 보면 십보라를 이방인의 교회로 해석한다는 자체가
또 [ 교회는 왕국 안에서 통치하는 권위일 것이다. 18장에서 교회는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배척당하던 동안 얻은 모세의 아내 십보라로 대표된다(2:13-22). ]

또 이렇게 본다는 자체가 교회를 남이 아닌 그렇게 해석 하는 당사자가 삼키고 배척하고 있는 증거로써 그렇게 해석할 수 밖에 없는데 문제는 그것을 먹혀든다는 자체가 그들이 못듣는 귀머거리 소경이라서가 아니라 반드시 누가 막았기에 그 뻔한 거짓말이 되도 않는 말이 먹혀 들도록 하시는 겁니다.

누가 봐도 교회 삼키기 인데 말이죠.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성화론자들이 말하는 교회관은 그야말로 교회 삼켜먹기의 작렬한 배알 다 내어 놓은 사기인데도 불구하고
정작 그 속에서는 눈치 챌수가 없다는 겁니다.
도리어 예수 안 믿는 자들이 사기 이다 라고 알려줘도
이미 예수 안 믿는 자들은 마귀새끼라고 규정이 된 이상
그 말이 들려 올 리가 만무하죠 오히려 그런 외부의 자극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더욱 뭉치게 되고 내성이 생겨버리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종교가 운영이 되는 원리입니다. 모든 종교의 경전은 바로 이런 처세술인 셈입니다. 비아냥 거리면 그 경전의 내용들이 영적인 처세술 이다는 거죠.


자 그럼 반대로 해석하면

십보라는 어제 말했습니다. 피 남편 이다 라고 여자의 입장에서 자기의 한 몸이 어떤 분인가를 말하는 입장입니다. 여자란 남자가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하며 남자 또한 여자가 없이는 그 남자로서 구분된 의미를 설명할 수가 없으니 만약 설명 못하면 남자가 아닌 거죠.

신부란 신랑을 말하기 위해 있고 신랑은 그 신부가 말하는 증거대로 신랑이 외쳐지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우상과 한 몸인 자는 우상만을 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요 8:44, 개역)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이것이 참 희한합니다. 법적으로 논리적으로 안 맞는 표현입니다.
살인이 성사 되어야 살인자 라고 할 수 있는데
살인도 하지 않았는데 살인자요 처음부터 살인자 라고 해석해 버립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예수님 자신과 한 몸이 아니다는 이유로
이유없이 무조건 마귀와 한 몸이다 라고 한 줄기 이니까 아비 자식의 관계로 말하시는 겁니다.

(고전 6:16, 개역)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자신의 한 몸인 남편이 피 남편이다는 증거를 십보라가 외치는 입장입니다.

피 만 외치는 남편

피 만 주장하는 남편

만약 성화론자들이 모세가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는 것을 이런 의미로써 안다면
감히 교회를 삼켜먹겠다는 그 따위 발상을 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교회를 삼켜먹을 수 밖에 없는 해석 외에는 다른 해석을 할 줄 모르기에
이미 이단들도 다 할 줄 아는(이단도 죽도록 공부하거든요) 해석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 그거 누가 못하나요?

그런데 피남편을 외치는 십보라의 위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같이 피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그거 해석할 줄 아니까 교회 무시하지 말라 라고 자꾸 교회를 탐내면서 교회 앞장세우는 겁니다.
교회 앞장세우면 마치 옳게보이는 것 같지만 그게 바로 시나리오 각본대로 나오는 악마의 역할인 겁니다.

(요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피를 막는 거죠.

(요 2:15, 개역)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요 2:16, 개역)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그런데 장사꾼이란 자본주의의 장사꾼들을 자세히 보시면 알게 됩니다. 경제도 공부해야죠
장사꾼이란 바로 이런 예수님의 멘트 도 자기들의 물건 팔기 광고의 피알이 되는 겁니다.

광고 cf를 제가 즉석에서 한 번 만들어 볼께요
어떻게 장사를 하는지

먼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라고 문자가 클로즈업 됩니다.

여러분 힘드십니까? 주님 앞에 오시면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 주님은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상을 엎고 채찍으로 매매되는 양 소 비둘기를 다 내어쫏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있는 자본주의의 돈 사랑하는 마음 내어 쫏지 않고 싶습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요 모든 근심이 돈 때문입니다.

어서 교회로 오세요 당신의 마음에 평안을 찾아 줄 것입니다. 라고

광고를 띄운 뒤에 작게 선교후원 자동 ARS 전화 번도 댕땡땡 - 땡땡때앵

이라고 적는 겁니다.

그런데 실지로 케이블 기독교 방송 또는 종교 방송에서 이미 이런 것 다 나오는 거죠.
그거 봐도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로 익숙해 진 겁니다.

심지어 교회 마당 앞에서 삼성카드 발행까지 했을 정도 이니까요 합동측 제일 성공했다고 자평하는 교회가 그 정도면 그 나머지는 물어 볼 것도 없죠.

맨날 다 그런게 아니다 아닌 교회도 많다 라고 하지만
이것을 역사적으로 볼게 아니라
묵시적으로 보세요.

성령이 그렇게 하신 것으로 보면 이미 끝난 겁니다.

끝났기에 교회는 그 끝남 속에서 그 가치가 있는데

아니다 교회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보니까?

새것을 못 보는 겁니다. 익숙한 교회만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거죠.

뻔한 거짓 속에 있으면서 그 거짓을 이상하게 사랑하더라 말이죠.

또 여호수아는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는 그 부분에서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은 지팡이입니다.

지팡이가 내려가면 지는 것이고
지팡이가 올라가면 이기는 겁니다.

여기서 주인공이 지팡이 인줄을 또 그렇게 해석하는 자는 아마 거의 없습니다.
이제 지식적으로 알게 되면 스폰지처럼 빨아 들여서 또 써먹게 되는 거죠.

그럼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중에서 가장 칼 싸움의 일인자 인 광개토왕 ㅋㅋㅋ 과 같은 주몽에 해당되는 칼 쟁이 칼의 영웅인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여호수아가 칼로 날고 기고 백날 맹위를 떨쳐도
그 칼의 반대가 되는 지팡이가 내려가면 칼도 소용없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자신의 칼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볼품 없고 무능해 보이고 힘없는 약해 보이기 짝이 없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 과 같은 싫어버린바 된 불뱀의 모습과 같은

저 지팡이가 모든 것을 좌우해 버리니까
칼도 버려야 할 판국 인 겁니다.

여호와의 전쟁은 칼과 병거의 전쟁이 아닙니다.

(삼상 17:47, 개정)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수에 달린 것도 아닙니다.

(삼상 14:6, 개정)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고전 10:5, 개정)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앞으로의 가나안 전쟁 뿐만 아니라 모든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은 지금 현재의 신약의 성도들의 전쟁은

칼과 창의 전쟁 힘의 전쟁 지식의 양의 전쟁 누가 옳고 누가 틀렸냐 라는 선악의 전쟁
혈과 육의 씨름의 전쟁 숫자 많냐 적냐의 전쟁이 아닌

뭐뭐뭐 아니요 알수 없는 전쟁에 들어간 겁니다.

그 맛배기가 아말렉 전쟁이니까

모두다 의미를 두는 것들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에 해석을 붙입니다.

모세는 그리스도 여호수아는 성령 이런식으로 가치를 붙이죠
또 그렇게 붙이는 이유는 특히 인간 쪽에 가깝게 붙이는 이유는

이런 해석을 알려주고 있는 나도 알아달라 의미를 붙여라
괜히 반대로 건드리면 삼대가 망한다 라는 말도 안되는 것을 실제로 실행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것에 겁먹고 그 목사를 대접하더라 라는 것죠

이런 미신이 행해지도록 주님은 그렇게 해석하는 놈이나
그런 해석을 수용하는 놈들이나
다 이마표를 붙여서

다시는 장자권에 마음이 안 가도록 영원히 무시하도록 만드시는 겁니다.

팥죽에 지금 당장의 배고픔 때문에 하필이면 배고파서 딴생각이 못들도록
장자권을 배고플때에 사건이 벌어져서 무시할 수 밖에 없도록 하시는 거죠.

메추라기도 갈증이 심하고 심할 때에 줘야 씹어 보도 못하고 숨막혀 디지는 거죠

우리는 그럼 더 낫나요? 메추라기도 먹었음에도 살아 남은 자들은 그럼 그 뒤의 안정도 보장받을 수 있나요? 가면 갈수록 차라리 먼저 죽었더라면 라고 후회 합니다.
살아 남으면 남을수록 더 격한 시험이 오는 겁니다.

앞서 죽은 자들이 부럽기 짝이 없다고 외칠 정도이니
진퇴 양난인거죠

빼도 박도 못하는 겁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나는 죽은 자였군요 하루 하루 살려주시는 은혜로 사는 하루살이 이군요 라고 선악의 법을 버리면 마음이 편합니다.

그런데 하루 하루가 살아남아도 더 불안합니다. 하루 하루가 뼈와 살을 말려버리는 선악으로만 덮쳐 오니까 사람 죽을 맛이지요.

그래서 처음부터 안 겁니다. 이스라엘은 말이죠.

아 우리를 구원함이 아니라
처음부터 버리기로 작정했다는 것을 안 거죠. 그러니 가면 갈수록 더 싫어지고
무사히 통과 해 본들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적개심이 더 깊어지는 겁니다.
어차피 다 탈락 이니까요

원래 우리는 어차피 지옥 갈 자들인데 하루를 또 허락해주심이 감사가 아니라.
그야말로 광야교회 자체가 지옥인 겁니다.

그러니 목사들은 이런 광야교회를 이미 회피하는 목회만을 골라서 하는 겁니다.

그럼 회피한다고 도망 갈수 있을까요? 이제는 더 가관입니다. 가나안 땅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그 짖을 하는 겁니다.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 여전히 광야를 주님은 포기 하지 않고 광야(죽음)를 수셔 댑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라를 세우면 되겠지 회피 되겠지
그래도 소용 없죠 다른 나라들을 선악의 나라로 만들어 버리니까 부러워 죽습니다.

자 그러면 왕을 세우면 괜찮아지겠지 회피 되겠지
그래도 소용 없습니다. 끝까지 지팡이만 고집 합니다. 도리어 왕을 세우는 족족
그 왕에게 다 강간 당하는 실정입니다. 모조리 다 빼앗기는 겁니다.

하나님이 왕 됨이 싫어서 왜? 폭군 이라고
다른 왕을 세웠더니만 처음에는 잘해주는 척 하더니
하나님 보다 더 악날한 놈들 뿐이다는 겁니다.

결국 제대로 안 당해 보니까
무서운 호랑이 피할려다가 도리어 되도 않는 강아지 새끼에게 제대로 씹히는 겁니다.
이건 뭐 어디 가서도 하소연도 못하는 거죠. 자기 보다 더 약한 강아지에게 폭행당해 개죽음 당했으니까 말이죠. 메추라기 메추라기 그렇게 원해서 줬더니만
씹어 보도 못하도 죽었으니 지옥에 가서도 얼마나 부끄 부끄 쪽팔리겠나요 

그래서
아무리 봐도 힘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부재성을 앞장세워서
도리어 그것을 자랑했다가는 남들에게 쪽팔림을 당할까 싶어서
쉽게 말을 못 꺼내고 혹 누가 말하면 따라 할정도이고
그것도 대세가 되지 못하면 쑥 들어가고 말아 버리는
그런 무능함
약함
어리석음
미련함
무식함을

앞장세우는 것이

지팡이가 날 구원했다 라고

이거 뭐 도저히 자랑이 될 수도 없는데
뻔뻔스럽게 동네방네 떠나도록 고성으로 높이 높이 찬양하고 자랑하는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면

(막 8:38, 개정)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눅 9:26, 개정)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이런 무모한 도박을 우리는 예수님의 믿음이라고 하고
인간들은 멋들어진 무기(성령을 그렇게 해석하는 선악적 사고)를 가지고
성령을 소유했다고 우기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니

자기가 자기에게 사기를 치는 겁니다.
자기도 못들어가고 남에게 까지 사기를 쳐서 남도 못 들어가도록 하는 거죠.

괜히 십자가의 도가 아닙니다. 괜히 십자가의 지혜가 아닙니다.

피의 지혜란
인간의 지혜에 일부러 반대의 자리에 서도 넉넉하게 이기는 지혜입니다,

(고전 1:18, 개정)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9, 개정)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0, 개정)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고전 1:21, 개정)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2, 개정)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정)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정)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개정)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6, 개정)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7, 개정)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개정)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개정)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바울은 옛언약과 대비해서 십자가를 증거하는 겁니다.
결국 구약의 모든 상황 마저도 십자가의 피 예정을 말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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