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이라는 조건이냐 VS 믿음이라는 예정이냐


값없이 다 내어주시는 믿음 그러나 그 믿음을 보기 싫어서 행함으로 구색을 갖춤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11-21 18:55:09,

많은 설교들이 개인적인 교회 육체성전도 얘기하지만 결국 그들이 모여 단체적인 교회를 이루는것이 된다고 하는데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십보라도 다 단체적인 교회도 그렇고...

개인적인 육체성전이 잘 건축되어야 단체적인 교회도 건강한것이다라는 식으로 말하구요 이건 국민이 건강해야 나라도 건강하다라는 식 하고 같은것 같군요

답변 :

건강하면 선이고 건강하지 않게 되면 악이다 라는 법을 심는 이들이 과연 누구일까요?

건강도 주님이 주시고 취하실 이도 주님 이십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이 뭔지 쳐다본적이 없기에 모조리 다 자기 숙제인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의 손에서 떠난 문제이기에 당하는 일들 뿐입니다.

건강에도 처하기도 하고 병듬에도 처하기도 하고 또 그것이 법이 아니라
누가 이렇게 하시는가를 보여주는 생명은 너에게 달린 문제가 아님을 보여주는 겁니다.

또 건강해 봤자 지금 그런 논리를 펼치고 있다는 자체가 교회 안에 건강치 못한자를 정죄하겠다는 취지와 같지요. 결국 관심사는 주님이 아니라 자기 교회를 소요하고파서
삼키고픈 마음에 그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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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1 18:58:51,
다 맞는 말이지요
결국 성경에서 말하는 여자는 다 교회다 그래서 주님과 교회의 관계성을 말하는것 같습니다
성화구원쪽은 성경을 교회쪽으로 많이 연결 시키는 같습니다 이것도 교회 챙기기 인가요

주님이 말하는 교회는 결국 뭔가요

답변 :
하갈처럼 또는 가인처럼

교회를 챙기라고 하세요 때려죽어도 못 포기하겠다는데 누가 말리겠습니까?
더 나은 교회가 바로 옆에 있는 참성전되신 예수님입니다.
결국 교회 쳐다 보는 자는 망하도록 하시는 결과이고
참성전만을 쳐다 보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런 가짜 교회에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자신들의 탐심을 심는 겁니다.

물론 그들의 예수 또한 선악과처럼 증거하겠지만요 그래야 사기가 먹혀 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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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1 19:02:04,
교회는 왕국 안에서 통치하는 권위일 것이다. 18장에서 교회는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배척당하던 동안 얻은 모세의 아내 십보라로 대표된다(2:13-22). 많은 성경학자들이 십보라가,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배척당하시는 동안 그분이 얻으신 이방인의 교회를 예표함을 안다. 오늘도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하신다. 이 배척의 기간에, 마치 모세가 이방 아내를 얻은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이방 세계로부터 이끌어 낸 이방인의 교회를 얻으신다.

답변 :

십보라 십보라 라고 또 단어하나 주서와서 그것으로 사기치는가 보네요

십보라의 역할은 왜 나의 남편 신랑은 피 남편인가를 말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교회 됨을 증거하거나 자신들이 교회 되자 또는 교회냐에 신경쓸게 아니라
남이 자기를 악마로 몰든 바알세불 걸린 대마왕으로 몰른 상관 없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저 나의 신랑은 왜 피 남편인가? 그것만을 외치는 것이 신부입니다.

그 외 딴데 정신 팔린 것은 신부 아닙니다. 피로써 맺은 결혼 한 몸이거든요!

신부가 결혼도 안했고 신랑도 없으면서 신부 연기를 할려고 하니
그런 상상임신 이라는 둥 주서들은 것 그저 연기만 할려고 하는 거죠.
신부 안 됨이 들킬까봐 남 눈치 때문에 신부노릇을 채우면
그게 무슨 신부입니까?

도리어 신랑 있어도 소용 없는 짖만 골라서 하니까요?
얼마나 신랑이 사랑해 준게 없었으면 자기가 자기를 최면걸어서 사랑해야지 얼굴에 미소 띄워야지 라고 쑈를 하고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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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1 20:10:15,

우리는 성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인도된다. 출애굽기 19장 10절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라고 말한다. 14절과 22절 또한 성화를 말한다

답변 :

인도 된다 인도 된다 라고 말만 하면서
정작 자기도 안 들어가고 남도 못들어가게 하는 거죠

(마 23:1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인도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왔고 도착 완료 했습니다.
도착 완료 된 자가 마음 푹 놓고 완료성을 외치는 것이 기쁘지

미완료 상태에서 억지로 기쁨을 띄고 안심 푹 놓고 외치겠습니까? 자신도 이미와 아직의 긴장상태인데 무슨 수로 기쁘고 감사함으로 외치겠나요?

기쁨과 감사란 선물이기에 완료성으로 주어지는 선물이지

미완료에서 조금만 힘내라 다 왔다 라고 던져주는 선물이 아닙니다.(당근채찍의 삐아제 상벌 이론이 아닙니다.)

이미 완료의 끝남으로써 완료의 내용물을 선물박스 풀 듯이 그 내용물을 맛보고 누리는 것이지

앞으로 잘하면 선물이고 못하면 선물 안줘? 이런 것은 인간의 교육이론입니다.

이런 교육 이론의 원리로 사람들을 가르쳐 들겠다고 하는 선생질 하는 거죠.

(마 23:8, 개역)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그래서 인간의 성화란 항상 행함과 결부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행동에 신경을 쓰다 보니 정작 예수님의 믿음을 비웃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삭의 이름이 웃음 이다. 행함과 결부시킨 아브라함이 박살이 나야 믿음이 비로소 덮쳐서 믿음의 조상이 공짜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믿음의 조상임을 누리게 된다. 이미 완료로써 온 것을 자기가 달성할려고 한 것이 헛 짖 한 것이다. 도리어 이 믿음의 일에 자신은 무능했음을 도리어 긍휼 불쌍히 여겨주심이 덮쳐서 믿음으로 모든 것을 바라 보게 되니 그 이전의 행함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 얼마나 법적이였는가를 알게 되고 법적인 자기를 안 쳐다보고 미래의 예수님만을 쳐다 본다. 즉 법을 안 쳐다보고 (의문의 증서이니까)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예정된 그 예정된 것만 쳐다 본다 남들은 다 미쳤다고 하겠지만 말이다. 그 예정된 완료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피흘리심 그 자체다)

그러면 성령의 성화란 반드시 인간의 성화에 비웃음당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또 행함의 방식이 아닌 오로지 믿음의 방식으로만 성화를 증거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성화와 정반대의 성화의 길로 갑니다.

즉 죽을 곳으로만 미움받을 곳으로만 갑니다.

만약 같이 따라가게 되면 누가 미워하겠습니까? 다 같이 가고 있는데?

결국 반대의 길로 가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혼자 가는 길입니다. 아무도 못 따라옵니다.

도리어 저주를 세 번씩이나 할 정도로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을 지독하게 미워하는 마음 뿐이였음을 들추임 당하는 길 그 미움의 길로 간 겁니다.

인간들의 성화론은 정반대의 길입니다. 이렇게 성화의 길을 갔으니까?
자기 말빨과 자기를 건드리지 말라고 일부러 가는 겁니다.

혹시 죽임 당할까봐? 싶어서

남 눈치 때문에 건강하지 못했군 실패 했군 망했군 이라는 소리 듣게 될까봐
일부러 반대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인간들의 성화의 길입니다.

아무리 봐도 성경의 길과 정반대의 길인데
왜 정당하다고 우기는지를 이해를 못하겠네요

또 너무 너무 감사한 것이
인간의 성화론 중에 단 한 개라도
성령의 성화의 길과 일치하는 것이 있다면 몰라도
단 하나라도 없다는 것이 너무 너무 신기하고 놀라워서
기쁘기 한량 없을 정도입니다.

성령은 인간들의 허물을 예수님의 신체 박스에 담는 일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영의 일인 은사입니다. 은사 받은 자는 바로 이런 일을 자기도 원치 않게 등떠밀려서 하게 됩니다.

타인의 허물을 캘려면 자신의 허물은 두말 할 것 없이 제대로 깊이 들통나야 하니 이거 이거 보통 죽을 맛이 아니지요?

그래서 다윗이 왕으로 카바 한 그 깊숙한 죄를 도리어 일반 백성 아니 백성 중에 가장 천한 백성 보다 더 못한 쓰레기 더미를 들통남으로써

그야말로 왕이야 말로 주님 빼고는 다 엉터리 그 자체임을
자신의 왕됨을 부정당함으로써 타인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그래서 여리고도 어깨에 자기의 죄를 지고 뺑뺑이 돌아서 이 죄 용서 받았다 라고
오 해피 데이 나는 구원 되었다 라고 뿌부뿌 나팔을 불면서 희년 곧 해방을 외치는 겁니다.
그정도로 외칠려면
상대적으로 진짜 죽을맛을 당할정도로 제대로 포로 되고 갇히고 눌려 봤기 때문에
지옥 맛을 본자가 천국의 고마움을 알게 됩니다.

지옥 맛을 못 본 자는 천국이 하나도 안 고마운 겁니다.

심판의 맛을 맛 본 자는 구원이 너무 너무 감사해서
자신은 그저 구원에 보탬이 되기는커녕 방해자 였다고만 외칠 뿐입니다.

그런데 구원에 보탬이 될려고 자꾸 성화를 하겠다는 취지는
율법의 전남편에게 제대로 당해보지 않았고
지옥 맛을 못 봤기에

구원자도 대충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억수로 매운 고추를 먹은 자 만이
물의 고마움을 알겠죠

억수로 목말랐던 자가 물이 고맙습니다.

(다윗을 일부러 죄인의 자리에 두어야 구원할 수 있지
왕의 자리 그대로 두면 그는 지옥에서 빠져 나올수 없습니다. 그 왕 자리 자체가 지옥인데요 뭘

마찬가지로 유대인들 모두 죄인의 자리에 둘려고 왔는데

다들 소경이 아니다 라고 하니
고치는 자가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보기에 소경인 자들을
따로 모아서 그들만 고쳐 주십니다.

성화론자들이 불쌍한 이유가
자기가 자기를 이미 다 수술해 버리니까
더 이상 고침 받을 이유 없다고 말하니 그게 더 큰 병인 겁니다.

죄인의 자리에 둘려고 하니
자신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하나님 자녀의 값을 해야 한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자녀는커녕
남도 자녀 못 되도록 막고 자기들도 안 들어가고 있는 거죠

그 이유는 처음 자리를 그들은 무시했기에
도리어 그들이 말하는 장성한자의 반대의 자리인 처음 자리를
자기들 스스로가 저주 하고 있기에

처음 자리로 되돌리려는 참선지자를 다 죽이고
그 참선지자 계통으로 오시는 예수님 마저 죽이는 겁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의 처음 자리로 다시 출발하자 라는 외침을
무참히 밟아 죽이는 겁니다.

(출 19:10, 개역)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


(출 19:14, 개역) 『모세가 산에서 내려 백성에게 이르러 백성으로 성결케 하니 그들이 자기 옷을 빨더라』

(출 19:22, 개역) 『또 여호와께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로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

이것은 성화와 전혀 상관없는 구절이고요 성결이란 거룩이라는 뜻이고
바로 이 거룩이라는 영의 활동이 바로 차단 분리 구분 지우개 구별의 의미로써
제거하겠다는 취지로써 이스라엘 자체가 할례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스스로가 할 줄 아는 할례 곧 그 목사가 말하는 성화와
인간이 도저히 할 수 없는 마음판의 할례 곧 성령님의 독점적으로 맡은 일인 마음판의 할레를 누가 독점적으로 하신다? 성령님이 하시는 것으로서의 차이성으로써
이스라엘은 엉터리 거룩을 구약 속에 채워 넣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또 그 성경케 하는 물은 그럼 어떻게 준비 했고 또 거룩케 함으로써 더러워진 물은 그럼 인간들은 어떻게 하나요?

결국 처음부터 거룩에 또는 창조에 또는 사랑과 은혜에 즉 새언약의 피 흘림에 인간은 소외된 입장인 겁니다. 그 소외된 불가능한 일에
어떻게 참예되는가? 피와 상대적인 자리에서 참예 되는 겁니다.

사랑의 반대의 자리인 원수의 자리로써 참예되고
의사의 반대의 자리인 환자로써
빛의 밝힘의 대상인 비추임을 당하는 어두운 백성으로써 뽑혀 나오는 겁니다.

제물 되신 양에 상대적인 제사장이 죄를 안수로써 전가 시키는 허물 있는 자로써 참예시키는 겁니다.

그래야 나중에 제물이 되어도 딴소리 못하는 거죠. 육의 자랑이 안되죠.

그런데 성화론은 처음부터 육의 자랑을 아예 작정하고 할려고 하네요.

제가 참 놀라운 점이 한국의 최고의 성화론자와 같이 있으면서 느낀점이(물론 그런자였는지도 몰랐죠 그냥 주변에 있길래 그들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인줄을 몰랐던 겁니다. 나오고 보니 안겁니다. 물론 그 동안 대단한 자 이다고 하도 귀딱지 앉도록 들었지만 그 속에 있다 보니 몰랐죠 나와 보니 알게 된거죠 유명하다고)

뭘 느낀고 하니

처음부터 자기 자랑에다가 자기 자랑으로 끝나더라 라는 겁니다.

물론 누구든지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더 심하다 라고 제 혼자의 편협되기 짝이 없는 생각을 더 해 보는 겁니다.

그럼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자기를 부인 할 줄을 하더냐?

이건 그야말로 기적이죠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런데 저와 같은 일반 죄인이라서 자기부인 한번도 하는 것 못 봤습니다.

물론 이것 또한 저의 편협하기 짝이 없는 일방적인 생각입니다.

그럼 뭐가 성화 인데요?

실천? 그것은 오히려 저는 정반대 라고 봅니다.

너희들은 이것 못 했지 나는 이거 할 줄 알아 라는 그 수준의 자리에서 말하고 싶어서
즉 육의 자랑이겠지요.

그래서 실천한다고 봅니다.

그것도 좋다 칩시다. 그럼 그 행동으로 남을 살리느냐?

그건 또 그렇게 행동에 자신만만해도 거기서는 입이 쑥 들어가는 겁니다.
자기 자신도 보장 못한다는 뜻인 거죠.

그렇다면 왜 그동안 성화 라고 그 선의 자리를 갖출려고 그렇게 애를 썻는가?

대충 짐작이 가겠지요?

바로 그겁니다.

남의 손가락질을 의식해서

실천한 겁니다.

제가 만나본 정신병자와 편집증에 해당되는 정신질환자들이
어떤 특정 행동을 할 때 항상 자기를 의식해서 하지
사랑 때문에 하는 행동은 없었습니다.

남을 너무 너무 사랑해서 성화 되었다 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자는 없고
그저 남들에게 공격받을까봐 싶어서 미리 방어용 무기를 갖추고
만약 어쩔수 없이 더 적극적인 방어를 할려고 할때에
곧 공격형 무기죠

그 공격의 명분이 방어용 무기인 성화를 기초로 해서 하겠다는 취지 이니

언제 예수님이 그런 성화를 했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성화를 한 적 조차도 없어요

바로 그런 선악에 집착하는 정신병자와 같은 우리를 그 선악 속에서 빼어내어주실려고
혼자 다 악을 뒤짚어 씌움을 당했잖아요?

그래서 성화론은 위선만 더더욱 무거운 연자맷돌을 서로의 목에 씌우게 되는 겁니다.
자기도 못하는 것 남에게 까지 뒤짚어 씌우는 결과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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