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이후

구원 이후의 인간의 활동에 대해서 목사들은 가만히 두질 못하고 반드시 간섭하고 그 아까운 에너지를 교회에 쏟아 붓기를 원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하나의 인간들의 그런 선한 에너지의 발전소? 충전소? 아니면 보험회사 등등으로써 어려움이 닥칠때에 도와줄 수 있는 은행역할(두레? 계모임?)이 되는 것이다.

심은 만큼 거두는 것이다.

이런 철두철미한 선악의 계산 법은 세상의 모든 조직 속에 다 있는 것이다.

조직 충성도에 따라서 인정받는 인간이 되는 것이고
조직에 도움이 안 되는 인간들은 저런 화상 귀신은 뭐하나 안 잡아가고 라는 왕따 될 인물이다.

바로 이 왕따 에 대한 두려움을 심는 것이다.
(이 고도의 수법을 대중은 늦게 눈치 챈다. 그것도 위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눈치 채개 되어 있지 위치가 낮은 자리에서는 감각이 둔하다. 위치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속물이 되었기에 목사가 안심 푹 놓고 너나 나나 속물이니 너가 넘어지면 나도 넘어질테니 너 목에 너 스스로 칼 대는 짓(자기부인)을 할 일이 없기에 영혼을 팔아 버리는 무언의 계약, 무행함의 계약이 성사 되기에 대중에게 떳떳히 공포 하는 것이다. 이 분이 나의 오른팔 나의 왼팔입니다. 여러분 ~~~~~~~~~ )

그래서 서서히 대중의 목을 조여 온다.

빼도 박도 못하도록 그들의 목에 개줄을 채우는 것이다. 더 이상 벗어날 길이 없도록 말이다. 용케도 벗어나면 목사는 안색이 변한다. 아깝다 잡아 먹을 수 있었는데 ...

나 목사 아니면 당신의 구원 이후의 삶을 잘 제시해 주고 인도할 자는 없다
하나님이 괜히 당신에게 목사를 붙여준게 아니다 라고

어느새 교회 체제가 대중에게 심겨 진다.

그래 나는 이 곳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가 되게 돼
목사님이 저렇게 나에게 신경을 써 주고 있으니
나도 거기에 대한 보답을 해야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거야
그래 상도덕의 예의를 지킬려면 그에따른 보답을 해야 구원이후의 삶 다운 거야 맞아 목사님의 말이 맞아

그러나 이런 생각도 그 조직에서 가장 할 짖이 없는 여유 있는 놈만 할 뿐이지
자기 발 등에 불 떨어진자는 그런 광명한 천사의 착하고 열심적인 선한 협박도 당장은 안 먹혀든다. 물론 기다린다. 정치꾼들은 항상 당기고 쪼이고를 잘해야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다. 당장 발등에 불 떨어져 그런 배부른 생각을 못해도, 조그마한 쉼이 와도 예의 지키겠다는 사람을 늘 부러워 할 수 밖에 없도록, 목사들은 늘 꾸준하게 투자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이다. 이것 보다 더 성화가 어디있으랴? 그러니 성화를 외쳐도 이미 보편화 된 인간의 속성을 깨우게 되니 안 먹히고는 못배긴다. 문제는 목사가 테크닉 즉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활용하는가 이다. 그렇기에 목사의 개인 종교놀이에 구성원들은 소모품이 될 수 밖에 없다. 그 재미를 옆에서 가까이 지켜보는 자는 같이 놀자 라고 나오게 되니 서서히 그 조직과 핵심맴버들은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탐스러운 선악나무의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구원 이 후의 삶을
목사들이 간섭하고 싶은 이유는 선악과 만들기 이다.
성화든 삶이든 새생명의 삶 또는 행함 또는 실천이든 뭐든
좀 남들이 보기에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탐스러운 나무가 되자
왜 가만히 에너지를 썩히고 있는가? 뛰어 움직여 그래서 선악의 달인이 되자
선악? 모르면 말을 말어
그거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야 달인만이 할 수 있는 거다 라고 말이다.


여기에 정반대의 활동을 하는 분이 성령이다.
성령의 일은 오직 생명나무를 들이대시는데
이 생명나무가 전혀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지 않다는 것이다.

실지로 구원 이후에
출애굽한 광야 이스라엘을
말씀의 운동력은 선악나무의 화려함 따위는 전혀 상관 없는 정반대의 길로만 인도한다.

물 없는 곳
양식 없는 곳
모세를 안 죽이고 싶어도 늘 모세를 죽이고픈 살인의지가 불쑥 튀어나오는 길로만 인도하신다.

이것이 성령의 일이다.

복음이다.

구원 이후의 삶이다.

결국은 기존 교회에서 가르치는 그 모든 내용들이 다 사기다.
서로가 사기이다 라고 말하면서 여전히 구원 이후의 삶을 저마다의 선악나무(법)로 사기친다.

그러나 성령님이 인도하는 삶이란
너야 말로 죄인 중의 괴수임을 톡톡히 보여준다.

그런 죄인 중의 괴수만이 이 말씀의 운동력에 의해서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가 찔러 쪼개어져서 마음의 생각과 뜻이 다 들통났을때에만
그 마른 뼈에 생기(영)가 외부에서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새피조물 새이스라엘로써
예수님 혼자 하시는 거룩한 전쟁에 동원되는 소모품이 되는 것이다.

이전의 모습이 없었는데 어찌 새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오직 정죄 뿐인 곤고함이 없는데 어찌 예수안에는 정죄함이 없다 라는 말씀이 성사가 되겠는가?

율법의 전남편으로 부터의 철저한 갇혀버림이 없는데
어찌 전남편의 죽음으로 이혼하고 새남편의 섬김으로 인한 자유가 있겠는가?

(롬 7:2, 개역)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롬 7:3, 개역)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포로 되고 갇히고 눌리고 애굽 왕의 강퍅함이 없는데 어찌 희년의 은혜의 날이 있겠는가?

죽음이 없는데 생명의 가치의 부각이 있겠는가?

제대로 가르고 나누는 독보적인 구원을 행사할려면

철저하게 어두움 밤에
그리고 철두철미하게 싫어버린바 된 불의한 모습으로
그리고 도둑으로 와야 하고 빼앗는 자로 오는 것이다.

그래야 도둑과 결탁한 적이 없는 도둑의 일에 무능했음이 드러난다.

성령의 일은 결국 도둑으로써 철저하게 무능함을 더더욱 벌려 놓는 일만 하신다.

이 무능함

이로써 어린아이, 고아 과부 나그네, 첫사랑, 처음자리, 이것을 더더욱 구체화 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발생하는 것이다. 무능함의 확대 이다. 이것이 남은자, 잉여품, 원인 없는 결과, 전리품. 빼앗아서 찾은 롯 이다.

이런 구원 이후의 삶이 성령에 의해서 박살 나도록 예비 되어 있거늘
(실지로 광야 이스라엘 이후의 모든 이스라엘 역사도 광야이스라엘의 모습의 확대요 구체화 됨이다. 아무리 국가체제 되든 왕체제가 되어도 기독교 체제가 되든 뭐가 되든 상관없이 하는 짖은 여전히 유다와 그의 아들들 속성(야곱과 아들 아들들의 속성 어딜 가지 않는다 오히려 유언으로 인해 더더욱 구체화 되는 것이 이스라엘 역사다. 뒤로 가면 갈수록 기가 막히게 떨어진다. 아무리 미리 알고 있어도 벗어날수가 없다.) 남들 이방나라가 지적 받지도 않는 그 죄악들을 반드시 지적 받아야만 하는 짖만 골라서 하도록 되어 있다. 그 짖만 했음에도 불구하고도 누구는 긍휼의 그릇 누구는 진노의 그릇으로 만드시니 이런 불공평을 인간들이 수용 할 수 없기에 그것을 또 더욱더 확정하고 구체화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예수님 혼자 그 불공평에 순종해 버렸으니 모든 인간들은 구원이후든 뭐든, 교회 다니든 안 다니든 이스라엘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인간의 구원은 말도 안되는 소리 이다. 모조리 다 지옥 가도 백번 만번 백만번 마땅하다. 그리고 지옥 백만번 보내고 그 지옥 속에서 그 마른뼈 속에서 백만하나 번째의 생기를 부어서 빼앗아 오신다.)

육의 생각이 늘 수시로 튀어나오는 가운데 속에서
성령의 소욕이 육의 소욕을 아작 아작 씹어버리기 위해
만반의 준비로 예리한 칼로써 찌르고 가르고 삭제하고 지우고 분리시키는 거룩을 펼치시는 것이다.

즉 거룩은 성령만이 하는 일이다. 여기에 목사가 관여할 수 없다.

도리어 목사란 은사로써 그 성령에 의해서 나도 이렇게 당했습니다.
그 다음은 당신들 차례입니다 라는 말 외에는 할게 없다.

그러니 그 말을 한다고 모세는 늘 수시로 백성들에게 무릎 꿇힘을 당하는 것이다.
자 그렇게 되면 모세의 무릎을 꿇힌 자들을 삭제하고 지워버리고
모세의 무릎을 일으키고 세우는 것이다.

모세는 아무것도 할게 없다.

무릎 꿇힘을 당하고
무릎 세움을 당하는 것 뿐이다.

정작 목사들 본인들이 그런 성령의 일을 훼방하고 방해하고 무시하고
무조건 이유없이 성령의 일이 꼴보기도 싫고 그런 어리석은 일에 짜증을 내어 거리끼게 하고 부딧힘이 싫어서

이것을 싹 바뀌치기를 하는 것이다.

거치는 반석을 부드러운 돌로써
부딪히는 돌을 디딤돌로써

자신만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그것이 너희들의 목사 답다는 것이다.

그 방법론들이 행함에 대한 이러 이러한 행동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사실은 모든 종교에 다 있는
그들 종교(종교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활동과 그 활동의 결과의 조직과 사회에 모두 다 있는)로 인한 구원으로 인해 구원만 딸랑 챙겨먹지 말고 구원 이후의 삶을 살아라 라고
모든 종교에서 다 외친다. 안 그러는 종교 봤는가? 안 그러는 인간 조직 있는가?
예외 집단이 있다면 알고 싶을 정도다.

그런 세상적인 마귀 사상을 아주 성경적인냥
안알려주고는 못배길 정도로 목사 지가 가르쳐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서 몸부림 치고 있다.

모세가 그 짖 하다가 탈락 했다.

눈이 시퍼렇게 살아 있고 아직 죽을때가 되지도 않았지만
의도적으로 빨리 퇴출 시키는 것이다.

그 남은 모세의 일은 모세 자신의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이기에
모세는 뒤로 빼버리고 여호수아를 대신 앉혀버린다.

그리고 모세의 일은 계속 진행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세는 백성들의 삶을 관여 할 수 없다.

일부러 예수님의 영이 그들의 삶을 약속과 대비된 육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모습으로 일관되게 들추어내고 있는데 모세는 방해를 한 것이다.

아무나 지적 받고 들추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다말은 아무에게나 창녀짖을(반드시 불의함) 하는게 아니다.
자신의 몸뚱아리 자체를 약속의 박스상자로 삼아서
원수의 씨앗을 담아 그 위에 덮혀지는 긍휼의 피를 드러냄으로써 약속의 자녀(이스라엘 군사)가 태어나게 것이다.

유다가 다말을 겁탈 한게 아니라 다말이 유다를 겁탈한 것이다.
씨 뿌리는 비유로 따지면 첫째남편이 길가? 둘째남편이 돌짝밭? 막내가 가시밭? 이거는 의미 없다 어떤 누구든 다 해당되니 순서야 뭐 의미 없고
무조건 좋은 밭은 유다 다. 왜? 창세전에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예정되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유다 뿐이다. 그래서 전남편 죽이고 두 번째 남편 죽이고
진짜 남편 유다를 약속으로 살리는 것이다. 이미 죽인 진짜 남편을 다시 살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둘째 모조리 다 죽여야 하는 것이다.

그 죽음 속에서 단절 속에서 유다만을 끄집어 내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광야 이스라엘의 구원 이후의 삶이 성화론자들처럼 행함론자들처럼 고상한 것으로 채우겠는가? 아니면 십자가의 언약 박스에 무엇만을 담을려고 약속이 부지런히 움직이겠는가? 용서 받을 원망꺼리를 담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 악령의 일은 또 어떤식일까?
비언약적이고 피(언약) 만큼은 가치없게 무의미 하게 만드는
별개의 행동과 사고들을 채우는데 있어서 인간들이 가치있게 여기는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탐스러운 선악으로 된 법으로 채우기를 바라는 것이 마귀의 일이다.

오늘날 목사들이 악령을 받아서 이 일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어차피 누군가는 할 일인데 대신 해주니 얼마나 고맙고 다행인가? 아무나 그 역할을 담당 못한다. 그 일의 댓가로 돈만 바라고 있으니 돈 그까이거 몇푼 주고 (은 30냥) 반드시 그 일을 감당토록 하신다. 어차피 돈 쓰지도 못하고 죽을테고, 씹어보도 못하고 숨막혀 죽도록 하는 일이 과연 그 일로만 그칠까? 주님은 무섭게도 오늘날까지 그대로 적용하신다. 에누리 없으니 피할 길도 없다.

어서 너가 맡을 바 임무를 다 행해야지 바로 예수님이 부추긴다.

(요 13:27, 개역)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눈에 보이는 실적을 구원 이후에 이루지 못하면 무기력하게 빠진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몸을 건강하게 유지할려면 무엇을 하든지 자꾸 굴려야지 몸이 튼튼해지지 아무 운동도 하지 않으면 무기력하게 되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소리는 무당들의 특징이 아닌가?

모세가 화가 나서 바위를 두 번 친다.
아직도 더 실적을 보여줘야 믿겠느냐? 날 봐라 날 봐
이렇게 보여주고 있지 않느냐? 뭐를? 실적을? 근육을? 기적을?
이래 보여줘도 안 믿을래? 실적이 안 보이느냐? 기적을 봐라?

그러나 모세는 실적을 보여서 믿는 믿음을 일부러 탈락 시키는 과정을 모세는 반대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니 지도자가 졸지에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이 아니라. 그만 눈에 보이는 자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누락 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십자가가 없다면 우찌 감당하겠는가?
언제까지 기적 행사해서 백성을 인도 할려고?
모세 보다 백번 만번 백만번 훨씬 더 나은 분에게 차라리 이양해 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구원 이후란 없다.

또 오해 하기를 그럼 구원이란 없다는 말인가? 너 이단이지?

구원 자체가 완료이다. 완성된 완료에 이후를 붙일 이유가 또 뭐가 있는가?
이미 완료인데 이것을 미완료 로 바꿔치기 하는 짖만 골라서 해 온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구원이 얼마나 구원 다운지를
반드시 광야 이스라엘과 그 뒤의 이스라엘 전체 역사를 다 날려버리고
완전 별개의 연결점이 없이 새이스라엘이 생성 되듯이
구원은 일체 그 완성 됨에 변화가 없다.
(마치 광야 60만명 다 싹쓸이 하여 다수를 원치 않아 멸망시켜도 그 확정된 구원의 수 그대로 새로 60만명 채워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니 괜히 탈락된 당사자들만 손해이다. 이것이 더욱더 구체화 되는 것이 구약 이스라엘 전체가 다 날라가 버린다. 지만 손해다. 그 빈자리 변함없이 이방인으로 채워서 주님 손해 본 것 없이 구원 받기로 작정 된 자는 한 사람도 빠진바 없이 다 구원받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가? 구원은 그대로인데 그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그 구성원들이 자꾸 교체되는 것이 구원의 진수 이다. 즉 탈락으로써 그 구원의 진가를 드러내는 것이다. 부재성. 이것이 일만달란트 탕감한 임금의 용서 비유의 핵심이다. 용서란 심판의 버림 속에서 그 용서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마치 사랑이란 솔로몬의 법의 칼로 죽음을 통해서 참생명이 드러나듯이, 선택이란 버림을 통해서. 지독한 편애란 지독한 미움을 통해 증거 된다. 생명은 오로지 죽음으로만 확정된다.)

구원 이후란 없다. 없기에 채울 필요도 없이 완료다 미완료는 없다.
그런데 이후가 생겨 버리면 그것을 채우겠다고 사기치는 놈들이 날파리처럼 달려든다.

구원 따로 있고 구원 이루 따로 있는 따로 국밥은 없다.

구원 즉 사랑 했으면 사랑 했는데 또 사랑 이후란 없이
이미 관계성으로써 계속 사랑 상태 이다.
계속 용서 상태이다.
계속 허물 덮어줌 상태이다.
계속 지독한 편애이지
식거나 다시 뜨거워지거나 그랬다가 근육 키워서 다시 더 뜨거워 지거나 하는 따위란 없다.

그런 짖은 이미 멸망하기로 작정 된 자에게만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 용서와 긍휼
자비와 사랑이 얼마나 깊고 크고 높고 넓은지를 더더욱 구체화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성령은 우리를 어린양의 피의 의미를 더욱더 크게 확대 시키고자
늘 처음자리로 되돌려 놓기를 하고자
선지자를 보내고
세례요한도 보내어서
늘 무능한 자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이제 성령이 직접 그 일은 전담하시고
늘 처음 자리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그 사랑의 깊이 높이 넓이 크기가 얼마나 더한지를
족히 비교도 못할 정도임을 톡톡히 보여주기 위해서

사도들을 미말에 두고
제자들을 도살장에 끌려 가도록 함으로써

남들이 보기에 불 속에 들어간다고 불쌍하다고 저주 받았다고 외면하지만

정작 불 속에 들어간 당사자들은

비로소 불 속에서 여기가 주님이 함께 있는 넉넉한 사랑이 끊어지지 않는 곳임을 고백한다.

그렇다 처소 이다.

예수님께서 완성한 처소인 성령의 자리이다.

아무도 못들어오도록 다니엘의 세친구를 불 속에 집어넣고자 한 간수들이 다 타죽는 자리이다.

그런데 세친구는 그 불속에서 페스티발을 연다. 춤을 춘다.
기뻐 뛰어 논다. 희년을 외치고 완료 완성을 외친다. 그 속에서는 미완료가 없다.

그 불속에서 바깥을 보게 되니 그곳이 오히려 지옥이요 불 속이 천국이다.
불속에서 바깥을 보니 비로소 불 바깥에 세워진 교회가 강도의 굴혈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말해 본들 사람들은 불 밖의 자리가 살수 있는 자리요 불 속이 죽는 자리인 지옥이다.

그래서 십자가 라는 어리석은 지혜는 걸림돌이다. 거리낌이요 실족케 하는 부딫히는 돌이다.

아무도 못 들어오는 막고 차단하고 갈수 없는 막혀버린 천국이 십자가다. 실족한다.

그 불 속에서만이 누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수 있느냐?
칼? 환란? 핍박? 궁핍? 가난? 돈? 교회? 사단? 목사? 장로? 어떤 누구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 없다.

이 사랑 그 모습 그대로 변함 없이 꾸밈없이 처음 그대로인 십자가의 사랑을
더더욱 구체화 시키고자 구원으로 확정 되었다.

구원 이 전 도 없고
구원 이 후 도 없다.

구원 이 전의 자아도 삭제 당했고,
구원 이 후의 자아도 없기에 챙길 필요가 없다. 관리할 이유도 없다. 없는데 뭘

(갈 2:20, 개역)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저 구원 곧 긍휼만 자비만 용서만 더욱더 구체화 된다. 흘러 흘러 넘치게 충만하다. 퍼도 퍼도 사라지지 않는 생명수다.

그렇다면 유다는 다말에게서 계속 스캔들 불륜 껄끄러운 걸림돌이 계속 유지 된다.
그 정도로 무능하고 무능할 뿐이다.
유다는 이 약속만 쳐다 본다. 그러나 삯꾼들은 이 걸림돌을 제거 한다.
그리고 이 양상을 구약 이스라엘 전체 역사 속에서 구체화 시킨다. 걸림돌 제거한 가짜 하나님 나라 국가체제를 형성하는 거짓선지자 패거리와
다말처럼 계속 걸림돌의 불륜의 모습으로만 제시하는 참선지자로

1 대 다수, 1 대 850의 상황으로 일부러 만들어 버린다.
일부러 차단이요 단절이요 못 믿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다.

여자에게 겁탈이나 당하는 못난 남자 유다
그것도 남들이 다 손가락질 하는 며느리에게 겁탈 당하는 시아버지로써의 유다
못난이 중에 못난이로 만들었다. 빼도박도 못한다. 죄인 중의 괴수다.

그 죄인 중의 괴수로써 약속을 외치는 것이다. (죄인만이 약속을 쳐다본다)
약속의 자녀를 나의 며느리가 내 아들을 육을 끊어버리고 내 진짜 아들인 약속을 낳았다
라고 평생 외치는 증인이 되도록 만들었다.
내 며느리가 내 진짜 아내요, 첫째 부인은 진짜 아내가 아니다는 것이다. 이 대비를 유다는 부인 못한다. 자기의 한 몸은 자기선택권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내 며느리의 진짜 남편은 나의 첫째아들도 아니요 둘째도 막대도 아닌
바로 내가(시아버지 유다) 다말의 한 몸이요 하나이다. 라고
다른 몸과 다른 하나 와의 명확한 분리와 건널수 없는 차이를 명확하게 두고서
확정된 사실을 실토 당한다. 이 멋들어진 전능자의 일에 당한 것을 외칠 뿐이다.

바로 이런 내용을 외치는 목사가 되어야 할 텐데 (실지로 그렇게 당하는 것이 없기에)(선 줄로 안 자는, 의인인줄 착각만 하는 자) 걸림이 되는 거리끼는 것들은 다 제거하고
건널수 없는 차이를 이제는 흐지부지 지나개나 다 건널수 있도록 가능토록 만들려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지랄들을 떨고 있다.

이것을 희석 시키고자 나서는 놈들이 광명한 천사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저 구원 이후 라는 용어로 그 처세술로 이런 과정 다 빼버리고 요행으로 새치기 할려고
우르르 모이는 그런 교회로 또 그런 목사로 결속력을 아무리 다져도
바로 이런 비언약적인 믿음과 행함이 반드시 나타남으로써

그와 대비되는 언약 곧 약속의 완료(십자가에서 다 이루심)가 저런 미완료와 극적인 차이를 드러내주심에 정말 뿅 갈 수밖에 없도록만 사건을 터트리신다.

주님 만은 안 속으니까 너무 너무 감사할 뿐이다.

주님만 구원 받으셨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인간의 손에서 죽은 하나님,
다시 살아난 예수님이 주가 되었다면 이제 그 다음 차례는 우리다.

모든 인간이 다 속아 넘어가도

주님의 약속이 완료 되었다면 더 이상 욕심낼 필요 조차도 없다.

사랑만 있으면 족하다.

다시 강조를 해 보면

구원 이후란 없다. 미흡한 미완료는 없다. 아직도 [이미와 아직]의 신학놀이에 농간 당할 필요 없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실로암 소경을 가지고 소경갖고 장난치는 모습이다.
구원(사랑.긍휼.상한심령,불쌍히여기심,용서) 자체만으로 충분하며 완료이고 넉넉한 끊어짐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소경으로써 예수님을 증거한다. 남들이 놀리든 말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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