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주신 월급(긍휼 자비)이 당하는 수모

(시 51:17, 개역)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호 6:6, 개역)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마 9:13, 개역)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 12:7, 개역)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막 12:33, 개역)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히 10:5, 개역)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히 10:6, 개역)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히 10:8, 개역)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12-19 07:56:31,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창세기 2장 1 : 4 )에서 대략은 족보거든요 그러면 여기에서 족보가 먼저인가 창조가 먼저인가를 굳이 나눈다면 어떤게 먼저일까요 마치 계란이 먼저이냐 닭이 먼저이냐  같네요

답변 :

족보도 먼저 아니요 창조도 먼저 아닙니다.
예수님이 먼저입니다.

대략이 족보다?
물론 족보라는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넓게 보면 그러하기도 합니다.
족보가 중요한게 아니라 족보의 내용물이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왠지 또 히브리 원어로 또 문자해석해서 족보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내용을 말하기 위함이지 내용의 진위를 모른다면 족보의 껍데기 그 자체만을 가지고 왈가왈가 하겠지요

항상 성경은 미래에서 소급해서 해석이 되어집니다.
즉 미래의 완료는 다 이루었다 라는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의 사건을 기준으로 삼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족보도 아니 사건 내용물도 새로 편성이 됨으로써 해석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창 2:4,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창 2:4, 개정)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창 2:4, 새번역)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 때의 일은 이러하였다. 주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실 때에,』
(창 2:4, 우리말) 『하늘과 땅이 창조됐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의 기록이 이렇습니다.』
(창 2:4, 공동) 『하늘과 땅을 지어내신 순서는 위와 같았다. 야훼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때였다.』
(창 2:4, 가톨릭) 『하늘과 땅이 창조될 때 그 생성은 이러하였다. 주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
(창 2:4, 쉬운) 『<처음 창조된 남자> 하늘과 땅이 만들어지던 때, 곧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셨을 때의 이야기는 이러합니다.』
(창 2:4, 킹흠정) 『주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들을 창조하신 때 곧 이것들을 만드신 날에 하늘들과 땅의 생성(生成)이 이러하니라.』
(창 2:4, 한글킹) 『하늘들과 땅이 창조되었을 때 그것들의 내력이 이러하니라. 그 날에 주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들을 지으셨으니』
(창 2:4, 현대인)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일은 대충 이렇다.』
(창 2:4, 현대어) 『이상이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내용이다. [남자와 여자, 에덴 동산]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을 창조하시던 날,』

여러 번역을 보면 내용물 대략 이런 내용들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해석해 주지 않으면 모르는 의미입니다.

이런 단절성을 모르고 유대인들이 해석해 보면 어떻게 나올까요? 반드시 자기들을 그 속에 포함 시킬려고 할 겁니다.

그래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라는 답에 어떤 답이든 반드시 인간은 그 답을 말한 자기자신을 집어 넣습니다.

닭이 먼저 라고 답을 한 나
달걀이 먼저 라고 답을 한 라

그래서 모조리 미완료죠

그럼 완료를 집어 넣으면 그 자아가 날라가 버립니다.

자아를 도저히 집어 넣을 수 없는 그 완료를 말하면 정답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수용 못합니다. 수용 했다가는 법적인 인간의 세상에서 살 수 없게 되기 때문이지요.
(실지로 제가 이거 실험해 봤습니다. 학생회에서, 결국 또라이 취급 받았지요 뭐 ㅋㅋㅋ
이 사건이 저도 모르게 확대 되어서 동정녀 마리아 탄생까지 문제시 되어버린 겁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마리아가 아니라, 예수님의 딸이 마리아 다 라고 말이죠.
즉 딸 몸에서 태어나서 그 딸을 다시 해산하는 고통인 십자가를 통해서 마리아를 잉태라고 생산해 내지 않으면 마리아는 복된 여자가 아닌 겁니다. 마리아 조차도 예수님의 쓴잔인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안되어 있기에, 카톨릭의 되도 않는 헛소리에 빠져버리고, 즉 종교화 되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예수님이 먼저입니다.
그럼 닭이 나중이냐? 달걀이 나중이냐? 예수님이 나중입니다.

인간은 어디에도 설 자리 없도록 만드는 것만이 완료입니다.
만약 서게 되면 미완료 뿐입니다.

바로 이런 취지가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 1장에서 새로 해석해 버립니다. 창세기 처음 부분을 말이죠.

예수님이 자신을 빛으로 소개하면서 (뻔뻔스럽게 자기 입으로 스스로 빛이라고)

(요 1:1, 개역)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개역)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개역)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4, 개역)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5, 개역)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빛만을 부각 시키기 위해서 모든 것을 어두움으로 취급해 버립니다.
어두운 데서 차라리 빛을 보라고 소경을 통해 영광 받겠다는 겁니다.
빛 되신 예수님 외에는 다 피조물 이니까요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속에 인간은 반드시 예수님을 소외 시키겠다는 그 마귀성을 들추어내겠다는 겁니다.

그가 없이는 하나도 된 것이 없다 라는 것을 마귀는 막는 역할을 제대로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수님이 없이는 하나도 된 것이 없다 라는 창조성를

인간이 창세기를 붙잡든 창조론을 붙잡든 모조리 다 불태워버림으로써 창조성을 드러냅니다. 인간이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도록 해야 (소경 만들기)

진짜 창조주를 대면하게 되지
(실로암 소경=너거들은 모세의 제자냐? 모세는 날 위해 십자가 진 적 없다. 내 어두운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십자가 진 분은 예수님 뿐이다.)

안그러면 자꾸 왜곡 시키기 때문입니다.(소경이면서 본다고 하는 바리새인=가장 성경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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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9 09:14:56,

만일 월급을 안 받은 상태에서 그전에 저금 했던 돈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해도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것일까요 그것도 주님이 주시는 믿음의 분량만큼 해야 하는것 아닌가요

주님이 마음을 동하게 하시면 자기 월급 받은것과 상관없이 내게 되는것이고 미완료를 믿지 않는다면 자기 챙기기 하는것이고 이렇게 봐야 하는것인가요

답변 :

예수님의 자기 목숨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사랑을 얼마나 무시했으면
여전히 미완료로 취급할까요?
결국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으로 훼방의 목적이기에 악령이 씌인 겁니다.

심지어 아무것도 안 내어도 됩니다.
(교회에서 목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집단들이 청년들입니다. 가장 투자를 많이 하고서도 당장은 돈이 안되는 대학생들, 이제는 점점 그 기간이 길어지기 때문에 장기적인 안목으로 참고 참아서 기다려도 투자한 만큼 본전도 못 건지는 판국에 놓이게 되니 돈 안내는 대학생들을 눈치를 막 퍼붓는 겁니다.)

주님이 사랑했다면 그 사람 자체가 십일조 곧 맏물
장자의 영을 받은 자입니다. 즉 거룩한 자 곧 분리 된자 라는 뜻입니다. 분별 된자.
왜? 따로 분리 시킬까요? 아벨처럼 분리 시킴으로써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섬김? 이 땅을 고발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벨의 족보는 죽었더라 라는 목적으로써 이 땅과 분리 된 거룩을 증거하기 위해 동원되는 그릇입니다.

장자 곧 분리 된 자 거룩한 자를 쳐다 보기 싫기 때문에 법으로 구색을 갖추겠다고 하는 겁니다. 따로 자기들의 거룩한 일 꺼리를 찾아서 행하고 지켜서 법으로 갖출려는 거죠

십일조 안식일 모든 절기와 제도와 율법은 다 폐기가 되었고 완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망하는 자들에게는 생생하게 율법이 작용해야 하는 이유는
(그 분리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단절성을 부각 시키기 위해서 두 패로 나누는 겁니다. 빛과 어두움으로, 이 자체가 사랑이다는 겁니다.)

바로 그런 계산적인 법에 갇혀 있도록 만들기 위함입니다.

왜 계산을 하는고 하니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목숨 바친 십자가의 사랑이 무조건으로 다가 오는 것이 아니라, 법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 법에 해당되는 자신도 법으로 응대를 해야 자기자신을 챙길수가 있는 겁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완료) 자기들의 행함으로 조건화 시킴으로써(미완료)
다시 의문(미완료)로 다시 되돌아 갈 수가 있느냐 말이죠

(골 2:20, 개역)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결국 십자가의 내용인 사랑을 본게 아니라, 사랑을 발로 차 버리고 법으로 챙겨버리기에
자아도 챙길 수밖에 없는 악순환(율법을 폐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문의 증서를 도리어 찢어버린 것을 본드로 붙이고 있는 셈이다. 귀신 하나를 쫓아내니까 도리어 일곱 귀신이 들어오게 되는 셈이다.)이 반복이 되는 겁니다. 그 예가 산상수훈을 해석하는 성화론자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일곱 귀신 들린 자들의 모습처럼 바리새인 보다 더 악랄하게 법으로 해석해 버리는 겁니다. 즉 법이 아닌 사랑,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못 보고, 더욱 더 행함을 강조하고 법화 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롬 7:6, 개역)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고후 3:6, 개역)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엡 2:15, 개역)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골 2:14, 개역)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십일조가 예수님이라고 말해 줘도 못 믿는 이유는 (믿음 상의 문제인데 행함 상의 문제로 취급해 버리기 단절 되었죠 그래서 행함 외에는 달리 나올게 없기에 못 믿기에 행함으로 때울려고 하는 겁니다. 안식일도 마찬가지, 심지어 교회도 마찬가지)

십일조를 통해서 자기 챙기기 수단으로 삼는 자들이 양산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누구든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이미 받았기에

(고전 16:22, 개역)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사랑해서 주님을 섬기고자 그 돈으로 다른 사람들이 복음을 위해 사용하는
독립군 자금으로 활용토록 하는 것이지

(마 6:33, 개역)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눅 12:31, 개역)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주님은 돈에 관심도 없고 받지도 않으시며 받을 이유도 없고
더욱더 놀라운 것은 받는 분이 아니라 주시는 분이다는 겁니다.

(행 17:24, 개역)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25, 개역)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행 17:26, 개역)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여기서 참 재미 있는 것은 거주의 경계를 정해버렸다고 합니다. 즉 인간들의 행동방경의 영역까지도 이미 다 완료(간섭,차단)로써 정해버렸다는 거죠. 연대-시대 결국 개인, 사적인 인간들의 관심사가 일체 단절 되었고 판대기 전체를 규정해 버린 겁니다. 무엇으로? 친히 주시고 또 친히 섬기시는 그 일의 전체 판대기 일을(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부각시키기 위해서, 왜 그 시대에 태어나야만 하고 왜 그 국가에 태어나야만 하는 가를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미 규정시켜버렸다는 겁니다. 이 일에 동원되었다는 자체가 감사한 것이요 기적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자체가 ... 아무 조건 없는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말이죠)

해외 파병 나가 있는 장병들이 물을 마시는데 있어서 자국에서 매일 공급하는 수입품 물을 마실게 아니라, (전쟁은 그런 배부른 상황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 파병된 국가 속에서 그 나라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마시는 물을 같이 마시도록
자급자족 형태로 하도록 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옵니다. 기도해도 소용 없습니다. 거기 있는데 말라꼬 줍니까? 널려 있는데, 줍기만 하면 되는데)

뭐 그렇다고 자급자족하는 것이 뭐 대단한 일인냥 떠벌리고 자랑할 문제도 아닙니다.( 심지어 이것으로 목회 성공 삼고자 하는 미친 집단도 있지요. 높은 뭐뭐뭐 교회 라고...)

거기 마실 물이 있는데 구지 자국에서 보낼 이유가 없잖아요

만약 도저히 마실 물이 안되고 그 파병된 나라 국민들도 오염된 물을 마시면
단절이 되었기에 그 단절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공급해 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미로
자국에서 깨끗한 물을 공급하겠지요. 단절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말이죠. (즉 그 나라 물은 이제 가망이 없다 가능성이 없다 미래가 없다 기대할 수 없다를 부각 시키기 위해 = 이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웃끼는지 모르는 이유가 법이라는 것을 쥐고 있으면 법이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법을 쥐게 되면 더욱더 철저한 모순에 빠져 버리게 되고 위선자가 됩니다. 그 위선자가 된다고 아무리 경고 해도 이미 법 속에 들어간 자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게 됩니다. 자신만은 일관성이 있다고 도리어 법을 쥠으로써 그런 생각을 강하게 하게 됩니다.
(즉 자기가 하나님이다 라는 것을 절대로 놓치지 않을려고 마약중독된 자처럼 빠지게 됨)

왜 웃끼느냐? 질문 속에 월급에서 십일조 떼어낼 생각만 했지
그 월급 자체가 누가 준 것인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처음 출발이 벌써 엉터리이기에 평상시 아무리 주님이 주신 것이다 라고 말로 세뇌 한다고 해도 정작 나오는 행동들은 주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라고만 드러내는 모습 뿐인 겁니다.

그래서 강조하기 위해서 제목에 달아야 겠군요
월급을 주님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자아라는 노동(행함)이 들어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 노동의 댓가로써 당연하다고 그 당연성이 법이 되고 기념비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곧 바로 주님이 주신 월급이라는 것을 까먹고 그 속에서 월급에서 십일조 땔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의문 이라고 합니다. 뭔가 모르게 위선적이고 모순인데
그것이 법으로 포장되니까 위선과 모순으로 안 보이는 겁니다.

이 내막을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아 이거구나 라고 율법의 취지를 비로소 알게 됩니다. 의문 속에 가둘려고 위선과 모순 속에 빠지도록 하기 위해 법이 동원된 것을
그래서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이 철저한 모순에서 빠져나올수 없구나
갇혔구나

갇혔다는 소경임을 비로소 안 자는 빛을 아무 댓가 없이 주시고
갇혀있다는 것을 전혀 감을 못 잡는 자는 철저한 의문과 모순 속에 빠지도록 하는 겁니다.

유대인에게는 율법이 그러하지만
이방인에게는 이 세상의 사고방식이 선악에 빠져있기에
선악이라는 모순 속에 철저하게 갇혀서 아무리 의인이 될려고 해도 죄인들 뿐인데
놀랍게도 죄인들은 하나도 없고 의인이 될려는 마음이 있다는 이유로 의인들 뿐입니다.

소경이 아무리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말해도 소경은 소경이고 그 갇혀 있는 어두움 속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는 겁니다.

바로 이 소경을 통해서 눈 떳다고 하는 자를 고발하는 겁니다.

쳇 아무리 보기를 원해도 넌 소경이야 라고 고맙게도 눈 뜬 바리새인이 거들어(도와) 줍니다. 법적인 확정입니다. 땅땅땅 넌 소경.

자 이런 법을 쥔 자들이 걸려들어야만 이제야 거룩이 뭔가를 드러내는 겁니다.

팔을 어긋맞게 하는 겁니다.

왜 제가 이런 소리를 하는 고 하니

십일조를 강조하는 목사들이 가장
십일조를 무시하는 마귀 짖만 골라서 한다는 겁니다.

십일조 용어 때문에 제가 이런 말 하는게 아닙니다.
심지어 십일조 반대 주장해서 노회에서 제명당한 목사들 또한
용어만 바뀌었지 연보 라는 용어를 써서 여전히 똑같은 사기짖은 동일하다는 겁니다.
또 그런 교회에서 행정을 담당하는 자들이 헌금을 안 내면 싫어하고 미워하고 눈치를 준다는 겁니다. 그만큼 받은 사랑의 넉넉함이 없기에
자기자신들이 교회 운영을 자기들이 직접 한다고 보기 때문에
그런 어려운 일을 하는 나를 알아달라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회 행정 담당한 직분자들이나 그것을 지켜보는 목사나
결국 다 한 통속인 깡패들 조폭인 거죠

솔직하게
십일조 조차도 탐내는 저입니다 라고 고백하면 됩니다.
월급도 탐내고 그 월급에서 십일조 떼어 낼려고 하는 그 아까워 미치겠다는 마음을 솔직히 고백하시면 됩니다. 물론 인간에게 하지 마시고 주님에게 직접. 인간들은 그 꼬투기 잡아서 정치술로 이용하기에 괜히 또 간증하라고 지랄을 합니다.

저도 월급 80만원 타서 십일조 떼어 8만원 정도 떼어내면
솔직하게 우아 심하다 벼룩에 간 빼먹는 도둑 같아 보여서
배 아파 죽을 정도 였습니다.

300만원 벌어서 30 떼어내면 생활비에 크게 부담이 덜 되지만
80 버는 자가 아니 더 적게 버는 사람일수록 그 상대적인 의미는 더욱더 커집니다.

결국 십일조는 바로 그런 점을 노리고 있는 겁니다.

목사들도 알면서
약대(낙타=BMW)는 삼키고 하루살이는 걸러내는 겁니다.

즉 십일조의 목적은 딴데 있었던 겁니다.
우리의 본성은 300만원에서 30 떼면 지장 없고
60에서 6 떼어내면 지장된다고 본다는 그 자체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60에서 6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300에서 30 떼어내는 하루살이를 걸러내고 약대를 삼킬 수밖에 없는
인간 속의 그 마귀의 계산법을 뽑아낼려는 목적이다는 겁니다.

목사만 약대를 삼킬까요? 천만의 말씀 평생을 가난하게 산 자도 늘 약대만을 삼켰고
하루살이는 걸러내었습니다.

바로 이런 취지로 건축자들이 집을 지을때에 (뭔가의 목적을 이룰려고 할때에)
가치 있는 것으로만 사용하여 집을 지어야 자기가 만족이 되는데

아니 누가 가치 없는 것들만 모아서 집을 짖나요?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 가치 없는 것들만 모아서 집을 짖는데 도사입니다.
그 집이 바로 저런 계산 밖에 못하는 귀신들린 자인 우리들을 그 귀신의 손에서 건져내어서
못난이들 만을 끌어모아서 (고아 과부 나그네 = 어린아이 = 무능자 = 소경 = 남은자)
교회 라는 성령의 전을 만들겠다는 진짜 건축가 앞에서 우리가 세우겠다는 건축물들은 다 허물어지고 고발당해야 하며 대비되는 수모를 격어야 하는 겁니다. 주님이 주신 월급이 당하는 수모를 통해서, 도리어 우리가 그 수모를 격어보면 비로서 월급의 취지와 또 내 자체가 죽어도 십일조 되기 싫어서 십일조 훼방할려고 돈으로만 십분의 일을 떼어낼려는 그 발상이 지근지근 짖 밟히는 수모를 격어봐야 주님이 예비하신 십일조를 통한 피의 의미 희생의 의미 섬김의 의미 죽기까지 복종한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십일조 되신 예수님의 피 앞에서 부끄 부끄러움을 알 때, 그 수치를 주님이 떼어내고 분리 시켜서 수치를 굴러가게 하는 겁니다. 이것이 마음의 할례죠. 긍휼을 바라는 겁니다. 우리가 못하기에 십일조 낸 성전 안의 바리새인이 십일조 낸 적 조차도 없고 도리어 성전 구석에 앉아 머리도 못 드는 세리 즉 매국노, 동포의 피를 뽑아내어서 마귀나라 로마에게 세금을 바쳐서 십일조 실행하는 그야말로 불의한 청지기와 같은 이런 세리가 십일조를 통해서 자신의 철저한 단절을 봤기에 자기 행동 속에서는 십일조가 나올수 없다 라는 것을 알기에 왜냐 도리어 십일조 떼어내어서 마귀에게 바치는 세금쟁이 노릇만 해 왔기에
이런 세리를 예수님은 십일조 되신 예수님 자신과 그 세리를 자신과 하나인 한 몸으로 역어버리는 겁니다. 마치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를 에수님 자신과 한 몸으로 다시는 정죄함이 없는 법 없는 세계로 인도하듯이 말이죠. 법에 의해 가장 더러운 인간이 범법자가 의의 나라에서는 가장 많이 탕감받았기에 가장 많이 사랑 받는 자로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세계가 덮쳐버리는 겁니다.

바로 이런 집 만, 이런 나라 만, 이런 그의 나라와 그의 의 만이, 이런 참 성전 만,
이런 교회, 이런 새이스라엘 만을 예수님이 직접 짖는 겁니다. (긍휼의 집)

그래야 허물어지지 않는 환란 날에도 끄덕 없는 지옥 불에서도 타지 않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참건축가의 집에서 안정감을 누릴수 있는 겁니다.

돼지 삼형제와 늑대 라는 동화를 통해서
반드시 늑대 라는 놈이 등장해야
진짜 건축 물이 뭔가 라는 차이성이 드러나는 겁니다.

늑대가 없으면, 지옥이 없으면
천국이 뭔지를 모르기에 자기가 만든 법과 집에 갇혀 살 뿐입니다.

그래서 허물어 보면 압니다. 그 속 내용물이 무엇으로 차 있는지를
주님의 창조는 그 창조를 허물기를 통해서 그 속 내용물을 증거하십니다.
창조를 무엇으로 창조 했는가? 십자가 라는 불륜을 통해서 창조했음을 드러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짜 창조를 주장하는 마귀들의 주장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마귀의 주장은 법으로 창조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창조건축의 내용물도 다 법으로 채웁니다.
예수님은 그 법으로 채워진 이 세상을. 자신이 창조 해 놓고도 가차 없이 버리심으로써
예수님 나라를 증거하시는데 법 아닌 십자가의 사랑으로 세워진 나라를 통해서
법으로 채워진 나라를 공격하고 파괴하고 허물어 버림으로써
다시는 선악의 법이 틈타지 못하도록 은혜의 진가를 발휘하시는 겁니다.
(마치 일만달란트 탕감한 임금의 용서가 얼마나 그 용서가 용서 답냐를 아주 철저한 심판을 통해서 용서 없는 심판을 통해서 용서의 본 취지를 더욱더 부각 시키는 겁니다. 마 18:24-)

동화 이야기 계속 해 보면
첫째 형 돼지는 지푸라기로 만들었기에
늑대가 와서 후 불자 다 날려버리지요

그래서 둘째 돼지 집으로 도망칩니다.
이제는 늑대가 둘째의 나무 집으로 만든 집에 후 라고 불어버리자 또 날라가 버립니다.

이제 두 형제가 막내 집으로 도망칩니다.
막내 돼지가 지은 집은 벽돌로 만든 집인데
이번에도 늑대가 후 라고 불자 아무반응이 없길래
또 불고 또 불고 아무리 불어도 끄덕없지요
그 끄떡 없는 벽돌 집의 안정감을 앞의 지푸라기 그리고 나무로 만든 집과 대비를 통해서 극대화 시키는데 늑대가 반드시 동원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또한 며칠 전에 말한 씨뿌리는 비유와도 일맥상통 합니다.

그러나 역시나 이 벽돌 집을 과거나 오늘날이나 카톨릭은 자기들이 베드로의 반석 개념을
자기들 쪽으로 끌어당겨서 이용하듯이 이제는 개신교까지 그 짖을 하는 거죠

그거 그 놈들이 도리어 걸려든 겁니다.

(마 7:24, 개역)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7:25, 개역)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마 16:18, 개역)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롬 9:33,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병신들 그 반석으로 교회로 해석을 한 겁니다.
얼마나 멍청한지

지혜란 교회가 아닙니다.
지혜란 십자가입니다.
반석을 교회로 해석 했기에 도리어 바벨탑 벽돌이 되었고, 놀랍게도 이거 인간이 가능하고
바벨탑 세우는데 인간의 가능성(행함)으로 다 채워버립니다.

그러나 반석을 십자가의 사건만이 터져나오는 교회로써 그 교회 자체가 십자가의 사건만을 유발케 함으로써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그 일을 직접 성령이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교회된 인간들은 직접 십일조가 되지요? 누구처럼 예수님처럼 그리고 세리처럼 법에 의해 고발 당하는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되지요
그래야 법의 세계에서는 버림받는 사랑임이 드러나는 겁니다.
사랑은 법의 세계에서는 살 수 없어요.

자 이렇게 제가 생각나는데도 마구잡이로 길게 설명했습니다만
결국 십일조를 얼마나 무시하는 가를 법으로 지키기를 행함으로 때우기를 통해
후딱 헤치워버리는 모습을 통해서
두 성전 안의 바리새인이 바로 우리 모습임을 제대로 보자 라는 취지로 말한 겁니다.


2008-12-19 09:17:35,

이것도 주님의 몫이기에 제가 판단할게 없지만 누군가 이렇게 물어 온다면 마음가는데로 하라 이렇게 밖에 할말이 없는것 같습니다.

답변 :

아닙니다. 반드시 인간이란 자기 탐욕대로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탐욕성이 드러나야
예수님이 너가 우 하면 좌하고 너가 좌 하면 우 하겠다는 예수님의 자유가
인간의 선택과 대비 되면서 등장하는 겁니다.

이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영의 일을 님이 방금 언급했습니다.(주님의 몫? 또는 주님이 하실 일)

그렇다면 그와 대비된 인간의 육적인 생각이 반드시 개입이 됩니다.
그것은 항상 법적입니다.
반드시 자기 유익을 쫏도록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하실 일이다 라는 것도 법적으로 받아들이기에
아 그러면 나는 아무것도 안해도 되는 구나를 법적으로 구성합니다.
왜냐 하면 선이 규정 되었으니 선과 합일 하고 싶어하지
선 그 반대의 악의 행동을 일부러 할 인간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일을 성령님이 하십니다. 이것을 은사 라고 합니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자리 욕먹는 자리 불의한 자리에 놓이도록 하는 겁니다.

마치 소경이 예수님을 드러내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평생을 소경으로 살면서 바리새인들의 연구 대상만 되다가
드디어 예수님에 의해서 소경이 된 비밀이 벗겨지는 겁니다.
공개가 됨으로써 소경 자신만이 유일하게 예수님을 본 자가 되고
나머지 그 동안 자신을 소경이라고 연구 대상화 했고
눈 떳다고 심지어 예수님 앞에서 까지 당당했던 성경 박사들이
진짜 철저하게 어두움에 갇혀버린 소경이였음이
반드시 소경을 들어서 증거하는 겁니다.

마치 불의한 청지기를 예수님이 본인이 불의한 청지기가 되어서
도리어 빛의 아들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악마들이였다고
악마의 자리인 불의한 자리에 놓여서 역으로 규정하고
확정짖고 완료시켜 버리는
영원히 빼도 박도 못하도록 자기들 입이 스스로 자기를 지옥 속으로 넣는 알리바이를 마련해 버리는 겁니다.

바로 이 일이 영의 일인데
성령은 그래서 우리는 악의 자리 불의한 자리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자리
다들 좋은 자리 높은 자리 거룩한 자리로 가고 싶어하는데
일부러 반대의 자리에 놓는 겁니다.

이것을 자유 라고 하고 영 만이 자유 롭습니다.
얽매임이 없기 때문에
생존이든 크냐 작냐든 선악이든 사냐 죽냐든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일부러 반대의 길에 놓이도록 악의 자리에 놓아 둡니다.

님이 아무리 어떤 말을 해도 그 사람은 자기 따나 선한 쪽을 택해 버립니다.

그러면 성령은 반대로 악의 자리에서 고발합니다.
(물론 주의 자녀에게만 해당 됩니다.)

십일조를 내었다고 자부 할 때에
십일조 낸 것으로 주님의 일 했다고 안주하는 모습을 공격할 것이고

그러면 님의 말을 듣고 자유롭게 한다고 했을 때에
그 자유가 자기 편할려고 하는 자유가 자유냐고 주님이 공격 하십니다.

자 그러면 우짜라는 거냐?

어떤 행동을 나타냄으로써 지켰다 라는 발상 자체를 없애버리기 위해서
계속 공격 해야 하는 겁니다.

십일조 내도록 월급 준 것은 그럼 자기가 일한 결과 로서의 월급입니까?
그 발상 자체가 선악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월급 조차도 은혜요 공짜입니다 라는 사고방식이 나올 때 까지
영뚱하게 십일조를 붙잡고 고민하는 자를 계속 십일조로 흔들어 버립니다.

내면 낸 다고 박살 내고
안 내면 안 낸다고 박살 내고

그럼 월급이 공짜 임을 어떻게 알까요?

십일조 내나 안 내나 모든 것이 공짜 였구나

그렇기에

나 조차도 주님의 공짜 인 것을

나 자체를 자꾸 법으로 만들려고 하니
내가 마귀에게 속았구나

이것을 목적으로 예수님은 계속 공격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 공격 당해도
그것이 모두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매를 맞으나 안 맞으나 사랑이거든요

십일조 내나 안 내나 사랑입니다.
안식일 지키든 안 지키든 사랑입니다.

사랑을 안 보고

십일조 지켰다 안 지켰다 라는 것에 얽매이면

그거 주님이 자기 자녀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천국 자녀이기에 지옥 자녀의 생각을 반드시 뽑아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롯처럼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생각을 해 보세요

위대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율법으로써는 완전한 자 였다고 자부한 그 사도바울을

구원할려며는

예수님처럼 산상수훈 다 지키도록 만들어서 구원할까요?
아니면 그 반대인 롯처럼 만들어서 구원 할까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해 보면
롯을 사도바울처럼 만들어야 구원 할 수 있나요?
아니면 롯을 예수님처럼 만들어야 구원 할 수 있나요?

왜 거룩한 종교꾼들이 롯과는 천국에 절대로 같이 살 수 없다고 하는 줄 이제 아시겠나요?

멋들어진 예수님이 직접 만든 예수님 나라는 롯처럼 되지 않으면 안되는 나라로 만들어야

인간들의 가짜 천국과 가짜 거룩들이 다 들통 나는 겁니다.

롯을 판단하는 그 사고방식 따위로 천국 들어가겠다는 발상이

자기도 못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도록 막는 겁니다.


차라리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 하세요

세상에 십일조 낼 생각을 니가 다 했냐?
기적이네

정말 기적이구나 펄쩍 펄쩍 뛰면서 실감나게 눈 앞에 보이도록 펄쩍 뛰 보세요

지가 도리어 당황 합니다.

크게 고함 치세요 기적이다.

너가 예수님을 니 목숨 보다 더 사랑하구나?
세상에 세상에

나는 그런적 조차도 없이 나는 나만 사랑하는데
너는 예수님을 다 사랑하다니

그런 사람 교회 다녀도 없고
목사 중에는 더더욱 없는데 너가 예수님을 사랑하다니
예수님께 십일조 낼 생각을 다 할 정도니

이야 기적이 여기 있었네 라고 펄 쩍 뛰면서 기쁘게 말해 보세요.

오바 하면 할수록 더욱더 실감 나겠지요.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다 거짓입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님은 그 사람에게 가르칠 생각 말고
님 자신이나 걱정 하시면 됩니다.

저 자신도 사랑이 아니기에
님을 가르칠 입장도 못 됩니다. 도리어 무시 받아도 마땅 합니다.

그래서 건방지게 남이 아닌 나에게 철저하게 무시 받은 분이 바로 예수님 이였고
그런 나에게 무시 받은 예수님이 도리어 나에게 이런 사랑을 주셨다 라고

소경된 입장에서 그냥 눈 꼭 깜은채로 듣든지 말든지 때를 언든지 말든지

광야 다 라고 아무도 듣는 이 없다고 아예 기대도 하지 말고 외치면 됩니다.

예수님이 내 어두운 눈을 뜨게 했다고 사막 한 가운데
그 지옥 속에서
그 절망 속에서

외칠 뿐이라고


이 철저한 무능(광야=없음) 속에서

아예 기대나 희망이 없는 거룩의 단절 속에서

유일하게 외부에서 온 의가 부각 이 되는 만남이 바로

나다나엘과 예수님의 만남입니다.

님은 빠지시고 누락 되면 저절로 예수님이 알아서 개입하십니다. 미쁘시거든요

(요 1:45, 개역)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요 1:46, 개역)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요 1:47, 개역)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 1:48, 개역)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요 1:49, 개역)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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