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개가 되어버린 교인들

오늘날 참 신기하게도

성령(거룩)을 빙자해서 눈에 보이는 교회 중심으로 인해
목사 라는 자들이 개들을 양산해 내고 그 개들을 기르고 있다.

도리어 목사가 유일하게 모두다 반대의 길로 가더라도
유일하게나마 교회의 소모품이 되어야 할 텐데
목사가 소모품이 되어버리지 못하고
그 목사를 중심으로 해서 개들이 양성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음을 중심으로 해서
목사가 복음을 위해 소모품이 되지 못하는 시점인

더 이상 새것이 나오지 않는 시점이 될 때

교인들은 이제 더 이상 새 것을 내지 못하는 목사를 가차 없이 버리고
새것을 내 놓을 수 있는 목사를 대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다른 전체 교인들을 위해서 섬기는 자세임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에 목사의 트릭에 넘어가버리면
도리어 목사의 개들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고
그 목사를 중심으로 해서
정치적인 세력이 활성화 되고
더 이상 건드리지 못하는 난공요새가 되어버린다.

부려먹어야할 개를
개가 무서워 부려먹지를 못하고
반대로 부려먹어야 할 개에게 도리어 부림을 당하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정말 복음만을 위한다면 가차 없이 버려야 할 소모품인 목사를
(설사 버린다고 해서 그 목사가 나쁘다거나 잘못된 인간이라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반 교인의 자리에 앉으면 될 일이다. - 처음 자리, 은사 자체가 사건중심이지, 인간중심이 아니기에 -
일반 교인의 자리에 앉아서 복음에서 날마나 생산되는 새롭게 샘솟는 사랑을 보면 될 일을, 억지로 그 자리를 유지해 버리면
이거 교인들에게 엄청난 무거운 짐이 생겨버리는 것이다.
남도 죽고 자기도 죽고
자기도 지옥 가고 남도 지옥 같이 가는
자기도 천국 안 갈려고 하고 남도 천국 못가도록 막아서는)

(마 23:1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그놈의 정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 트릭(처세술)에 속아 넘어가서 인지?

뺨따귀를 때려도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다른 뺨을 때리라고 대어주는 꼴이다.

(고후 11:20, 개역)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그런 속물이 된 목사의 개가 되는 것이 그렇게 좋은가?

어느 정도로 속물인고 하니
설교 속에 녹녹히 녹아져 있다.
그래서 그것 들킬까봐 설교도 잘 내어놓지를 않는다.

항상 주님만을 보고 주님을 눈치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 눈치를 늘 본다. 사람을 의식한다.

자기의 말이 안 먹혀 들까봐 늘 전전긍긍하고
자기의 말에 반대되는 자를 늘 경계하는 의식을 은연중에 비추인다.
결국 교인 하나 삼켜먹을려고 자나 깨나 교회 교회 교회만을 신경 쓴다.

뭐가 그리 겁이 나서 그렇게 할까?
그렇다 교회가 자기를 버릴까봐 겁이 나는 것이다.
사랑(미래완료)이 없기에 늘 미완료로 다가오는 미래가 두려운 것이다.

그 놈의 교회가 뭐길래? 교회에서 쫓겨날까봐? 겁이 날까?

즉 교회가 자기의 직장인 셈이다. (눈에 보이는 교회만이 미래가 되어버린 우상교회)

교회가 자신을 해고 하면 자기의 생계가 위협을 받고
처자식의 미래는 암담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교회야 말로 자기의 유일한 우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교회 없이는 밥 못 먹고 사는 것이니까?

그래서 그런 일을 애초부터 방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넉넉하게 소모품이 되도록
교인들이 얼마든지 이용해 먹을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주는 것 자기부인이(소모품) 아니라.

그 반대로 철저하게 교인들을 자기의 개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자리는 슬슬 권력화 권위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오야봉
이런 뻔한 깡패 짓을 누가 봐도 다 아는 그 정치술에 넘어가는 것은
같은 생각을 그 목사와 똑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이 정작 미천한 것들을 통해서 알려줘도 눈에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몇 년 전에 공원에서 아는 형이 나 보다 1-2년 많은데
젊은 나이에 장로가 되었다고 은근히 자랑을 하면서

아직도 너거 교회는 장로도 안 세우냐 라고 비웃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목사 조차도 없고
교인들 전부가 목사요 주님의 종들이요 전부다 종(소모품) 이다 라고 하니

갑자기 그 형이 이야기 내용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버리는 것이다. 할 말이 없기에 …….

속으로 너도 목사 개가 되었구나? 쯧쯧쯧. 그 개 된 것을 자랑하다가 깨개갱 된 것이다.

목사 개가 된 것이 마치 훈장이라도 단 것처럼 자랑을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 목사의 정치 술에 완전히 코 끼여서 평생을 밥풀떼기로 삼은 줄도 모르고
그 감투 쓴 것을 좋아라하고 자랑을 했으니,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조차 모르기에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목사란 소모품 이다.
단물 빨아먹고 더 이상 새것이 나오지 않으면 뱉어버리면 된다.

모든 직분 또한 마찬가지이다.

성령께서 십자가 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사랑이라는 새것을 발생시키고자
잠깐 사용하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려 놓는

그야 말로 십자가의 피 중심의 사건 중심이다.

억지로 새것도 나오지 않고 질질질 끌고가는 그 억지성이야 말로
인간들의 정치조직이 되기 딱 십상이다.

그 회칠한 무덤을 인간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주님은 속지 않는다.

그 목사를 살리는 길은 소모품으로 봐야 그 목사도 살리는 길이다.
다른 직분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 않으면 역으로 교회에서 목사의 오른팔 왼팔이 되는
그 경쟁 속에서 살아남고자 이리 저리 눈치를 보아야 하는
그야말로 더럽기 짝이 없는 조직 속에서의 생존만을 추구할 뿐이고
조직 조차도 생존을 질질질 끌기 위해
교인들 가정을 피 뽑아 먹는 흡혈귀로 전락할 뿐인 것이다.

그 꼴 당하기 싫으면

목사에게서 새것(성령)이 나오는지 끝까지 추적해야 하고
아니면 몇 년 전 것 계속 우려먹거나
아니면 인간을 눈치 보고 사람을 의식하면서 설교 내용을 채운다면
당장 끌어내어서 내쳐야 한다.

예복(새 옷)을 입지 않는자는 내침이 마땅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예복(피) 아니면 다 가짜로 규정할 줄 알아야 한다.

(마 22:12, 개역)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마 22:13, 개역)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마 22:14, 개역)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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