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홀로 일을 다 이루심에 대한 고마움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12-10 15:54:15,

마리아처럼 말씀을 듣고 순종하게 되면 마르다 같이 자연스레이 말씀이 존재화 된 사람이 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죠

답변:
왜 갑자기 마르다 같이? 그리고 말씀이 존재화 된? 이것은 무슨 의미죠 하여튼 좋은 단어는 다 사용했네 그려

마리아도 마르다도 결국 순종한게 아니라 주체를 인간의 순종여부가 아니라.
순종 자체가 마리아와 마르다를 가지고 놀아야 하는 겁니다.

순종은 영의 세계에 속한 일이지
인간의 육의 세계에 해당되는 행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언제 순종했나요? 없습니다.
하나를 주인으로 모시면 반드시 하나를 어기게 되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게 되니
언니 마르다와 충돌이 생기는 겁니다.

또 예수님의 죽음을 구원으로 모시게 되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곧 미래 곧 미래에 관심이 없기에
마리아는 제자들과도 트러블 나는 겁니다.

왜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음을 보여주죠

결국 순종의 영에 마리아는 소품으로써 저들의 육의 생각을 끄집어 내는데 동원된 겁니다.

그런데 님에게 만약 저런 질문의 내용을 알려주는 목사들이 그렇게 말했다면
바리새인처럼 두 주인을 섬기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모습인 거죠

인간의 눈치를 쓸쓸 보면서 자기들의 손아귀에 넣을려고 하고
또 성경을 이용해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정복할까 라는 취지로 사용하는 겁니다.

 

2008-12-10 19:22:34,

세상에서도 엄청난 경쟁을 뚫고 명문대학 들어가기가 힘들듯이 하나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디든 공짜가 없다 그래서 좁은 문이다 하나님 나라도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쉬운곳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주님의 은혜는 주님의 은혜이고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건 아니다

이것도 진노의 그릇 긍휼의 그릇으로 나누어지는게 아닌가요

답변 :

공짜가 없다 라는 취지는 무슨 의미인줄을 알겠지만

인간이 공짜를 단 한번도 맛본적이 없기에
공짜를 모른채 공짜를 곧 은혜를 정의할려고 하니까
자신만의 은혜 개념을 역시나 행함 개념으로 또는 법 개념으로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은 은혜 곧 공짜입니다.
아무런 댓가 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흘린 피입니다.

자 이제 이 피의 의미를 모르는 자는
공짜의 의미를 몰랐다는 취지로써 박살이 나는 겁니다.

박살 자체가 공짜 이거든요

자신의 가진 것을 다 날려버림을 당해야 비로소 공짜가 공짜 답다는 겁니다.

즉 인간에게 공짜를 줘도 소용없는 이유는
공짜를 자랑하는 인간이 없고 공짜를 내세우면 비난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공짜를 값어치가 있는 가치꺼리로 전환 시켜야
인간은 그 공짜라도 나에게는 큰 가치가 있는냥
공짜 자체를 자신들이 재조립하는 겁니다.
(공짜의 원 의미를 자아를 자랑하는데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십자가의 지혜는 육의 자랑과 대비해서 증거되는 겁니다.)

바로 이런 인간의 속성을 박살 내는 것은 진짜 공짜 외에는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의 비유입니다. (일만달란트 탕감한 임금 비유입니다.)

결국 이 양반은

주님의 은혜는 주님의 은혜이고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건 아니다

은혜 자체가 뭔지 모르기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될까봐 미리 겁먹고 자신들이 미리 방지 시키고자 하는 겁니다.

은혜란 바로 그런 인간의 육의 생각을 도리어 유발케 합니다.

그리고 작살 냅니다.

바로 악의 영은 그 작살 내는 것을 원치 않아서 미리 방지하고자 교육 시키는 거죠.


주님이 작살 내는 것 조차도 은혜입니다. 매를 맞기 전에 우리 잘 행동하자 라고 기특한 모습처럼 보이겠지만

일부러 매 맞도록만 계명인 율법을 준 겁니다.

매 안 맞고는 못배길 정도로 맞을 짓만 골라서 하도록 율법 자체가 주어진 겁니다.

그래서 그 매 속에서 은혜를 바라보도록 하시는 겁니다.

이 언약의 원리를 그들이 거부하고픈 이유는

언약의 약속 보다
교회를 삼키는데 정신 팔려 있기때문입니다.

2008-12-10 19:29:38,

주님의 약속이 덮친 사람이라면 주님이 주님의 방법으로 일방적으로 몰고 가는것 아닌가요

주님이 그 행위를 보는게 아니라 그 행위 속에 있는 마음을 보신다고 하는데 그것도 주님이 몰고 가시는것 아닌가요

내가 아무것도 할게 없는데 무엇을 말한다는 자체가 무의미 한것 아닌가요

답변 :

(렘 17:9, 개역)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인간의 욕망은 딱 두가지 라고 어떤 학자가 말했다 하더군요
살겠다는 욕망과 죽겠다는 욕망입니다.

즉 딱 계산해 보고 살만하다 싶으면 살겠다는 의지만을 펼칩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를 잃어버리게 되자
자기의 영역이 갑자기 극도로 제한을 받게 되고
모든 영역이 좁아지고 불편하고 힘들어지고
특히 자존심이 상해져 버리니까
이제는 죽고자 하는 욕망으로만 매일 매일 죽음을 시도한다는 겁니다.

즉 인간이 자신의 행동이 꺽여서
그것에 어떤 가치를 찾거나 보람과 의미를 상실했을 경우에는
이제는 행동을 일부러 안하는 쪽으로 급선회 합니다.

이게 이게 말이 안되는 겁니다.

그래 놓고 우연히 티비 보다가 개그야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코너에서
웅이 아빠는 죽었고 라고 나오면
배꼽잡고 좋다고 동네이웃 피해가도록 웃어대놓고서는
티비 끝나버리니까 한숨 쉬고
도대체 왜 내가 웃었는지를 모른채
우을증 환자처럼 또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생기지나 않을까 희망하면서
동시에 그런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칠까봐 겁을 먹고 사는 겁니다.

결국 인간이란 허깨비의 노리개로 평생을 사는 겁니다.

살고자 했던 욕망도 죽음에서 나온 것이고
죽고자 했던 욕망도 죽음에서 나온 겁니다.

(롬 5:17, 개역)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롬 5:21, 개역)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히 2:15, 개역)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에수님이 오신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죽음이 왕 노릇 하는데서 인간은 철저한 죽음의 노예요 종노릇을 평생 하던 것에

그 사망의 쇠사슬에서 끊고자 오신 겁니다.

생명이 왕노릇하고 생명으로부터의 종이 되도록 말이죠

그래서 질문처럼

주님이 그 행위를 보는게 아니라 그 행위 속에 있는 마음을 보신다고 하는데

그 마음이 만물보다 더 부패하고 썩은내가 진동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마음에 속고 속아서
그 마음을 본다고 까지 가르치고 배우고 하니

예수님이 그 마음 자체를 없애버리러 온 겁니다.
그 썩고 부패한 마음의 종노릇할것이 아니라.

아예 갈아엎어서 마음 자체를 예수님이 직접 심어버리는데
예수님 자신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할례를 마음의 할례를 하라고 하니까?
마음의 할례를 하면 된다고 우기는데?

어떤 인간의 마음도 할례 받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의 마음을 새로 심기 위해서
그 이전의 것은 작살이 나야 하는 겁니다.

이전 것이 왜 패기처분되고 박살이 나야 하는 그 현장에
자신을 동참치 않는 자는

아무리 새것을 줘 본들 그 차이가 없는 겁니다.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라는 것을 누릴 수 있는자는
예수 밖에서는 오로지 정죄만을 받았기에 그 차이를 아는 겁니다.

놀랍게도 인간은 예수 밖에서 정죄 받는 그 세계의 내막을 모른채
예수 안을 운운하다 보니
결국은 예수 안이 아닌 예수 밖을 그들이 도리어 주장하고
정죄를 그들이 펼치고 있었던 겁니다.
그것이 바로 가인의 역할이요 그 가문 속에서
라멕이 도리어 자신이 법을 쥐었고 정죄를 한다고 노래를 부른 거죠

결국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자유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마치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라는 것을 흉내나 또는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데
그거 큰 착각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보람있게 여겨서 어떤 일을 했다고 우기는데 그것 또한 착각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든
또는 보람 있는 의미있는 일을 했든

둘 다 그렇게 몰아가는 배경이 다 동원되는 겁니다.

그 수많은 배경들이 깔려진 상태에서 나오는 행동들이지
그 딸랑 행동 하나 해 놓고서는
그 행동이 나오도록 주변의 환경을 깔아 놓거나 도움을 준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사울 왕이 자신의 행동을 예상하고 그것을 억제하여서 행동을 멈춘다고 해도
약속에 이미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으면 할 수 밖에 없도록
이미 배경을 깔아버린 겁니다.

누가 악령이 들어가고 싶겠습니가?

그런데 악령을 피하면 피할수록
악령 받을 수 밖에 없는 짖만 골라 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자 그렇다고 에라이 포기 하자 (아무것도 하지 말자)
라고 해서 멈춰질 일이 아닙니다. 그것조차도 악령이 심겨진 결과이기에 그런 생각인 겁니다.


자 그럼 반대로 다윗은 어떨까요?
아무리 나쁜 짖을 해도 반드시 돌려 놓겠다는 취지로써 무조건 편애 인 겁니다.

의미있고 가치 있는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그것을 주님이 주신 공짜 은혜와 연결하기 싫어도 연결 될 수 밖에 없도록 하시고

또 그반대로 다윗은 이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라고 마음 먹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퍼붓는 공기와 빛과 비와 화창한 햇살과 살랑살랑 부는 바람으로
모든 곡식과 주변의 모든 것을 살찌우는 것을 봤을 때?
도리어 부끄럽죠

주님은 뻘뻘뻘 땀을 흘리시면서 열심히 일하시는데
가만히 얻어 먹고만 있으니가?
그렇다고 일을 해야 한다? 라는 법을 끄집어 낼게 아니라.
(해봤자 엄마 설거지 방해만 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날 보고 울지 말고 너희 자식들을 위해 울기 놀이나 하라 라고 합니다. 인간은 믿음 조차도 장난이고, 율법 조차도 장난이고, 법 조차도 완료도 못하면서 설거지 하겠다고 나서는 아예 말리는 것이 차라리 나은 겁니다. 그저 울기 놀이 하시도록 배려 해주신다는 자체도 고마워 해야죠)
이렇게 땀을 흘리시면서 일하시는 주님에게 미안함 마음을 가지고
고마워 하고 웃고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잘 노는 것 자체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다 라는 겁니다.

또 이것을 법으로 해석하는 인간들은 무슨 말을 해도 소용 없습니다.

기여이 공짜는 공짜가 아니라 법적인 알리바이를 형성해야 한다고 우길테니

물과 기름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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