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다와 마리아

미래에서 소급해서 덮쳐진 완료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12-09 10:27:08,

마리아와 마르다에서 하는 말이 마리아가 되면 자연스레 마르다가 나오게 된다고 합니다

둘이 따로가 아니라 하나이다 이것이죠


답변 :

질문 자체가 충분한 설명이 없다보니 질문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을 못하겠습니다.

그 예로 질문을 다르게 해보면
마리아와 마르다에서 하는 말이 마리아가 되면? 이것을 마르다가 되면 자연스레 마리아가 나오게 된다고 해도 둘이 따로가 아니라 하나이다 라는 질문으로 해도 무방하게 된다는 질문자체의 의미에 모호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마리아가 되면 마르다가 나온다? 이게 무슨 말인지?
그럼 마르다가 되어도 마리아가 나온다는 의미도 되는지?

아무튼 제 임의로 질문의 의도를 파악해서 답변을 해 보면 (나중에라도 보충해도 상관없음)

일단 언니 마르다와 마리아가 동시에 언급된 사건은 성경에서 3군데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요 11:1)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요한복음 11장의 부활에 대한 사건을 오빠 나사로까지 동원해서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로 인해서 예수님이 우시는 사건과

(요 12: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요 12: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요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요한복음 12장의 향유를 부은 마리아를 언급하면서 마르다를 언급한 부분과

(눅 10:38)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눅 10: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눅 10: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눅 10:41)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눅 10: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장의 70인 파송과 그 다음의 강도만난자와 선한사마리아비유와 그 다음 사건이 바로 마르다와 마리아의 더 좋은편을 택해 빼앗기지 않는 마리아에 대한 사건

이 3가지 이야기 중에

최근에 또는 자주 누가복음 10장의 이야기를 나누었기에 아마 이 이야기 사건을 두고 말하는 듯 보입니다.

질문 속에 둘이 따로가 아니라 하나 라는 말에
언뜻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라즈니쉬의 신과 악마는 하나다 라는 책제목의 말이 떠오르더군요. 제목만 봤지 안읽어봄

즉 종교란 항상 이원론적이면서 그것이 신에게로부터 나와서 도로 다 귀결 되기에 하나다 라는 라는 취지로써의 하나다 라고 언급을 하는게 종교입니다.

결국 종교는 쉽습니다.

음이 강하면 양을 보충 시켜 주면 되고
양이 너무 강하면 음을 보충해 주면 조화가 된다는 겁니다.

너무 권태로우면 자극을 주면 되고
너무 힘이 들어 허덕거리면 잠시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쉼을 주면 되는 겁니다.

쥐었다 폈다 당겼다 풀었다 이런 트릭만 잘 쓰면 충분히 종교는 사람들에게 충족감을 줄수 있는데 성공할수 있는 겁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성화론이기도 합니다.
이 트릭인 성화론 하나 만으로 교회를 충분히 채울수 있기에 사기치는데 딱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아무리 형제자매이더라도 십자가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철저한 소모품이 되는 겁니다.

아니 두 자매 조차도 십자가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에누리 없이 철저하게 사용하시는 겁니다.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했다 라는 말씀은 창세기 처음 부터 계시록 끝까지 일관성 있기에 약속의 그릇으로 사용했듯이

두 자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요 11장에서 예수님이 부활 그 자체 이심을 말하기 위해서

3명으로 구성된 한 가정을 뽑아냅니다.

이 한 가정의 가장이 되는 나사로 오빠를 중심으로 한 가정이 그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특별히 한 사건을 말하기 위해서 뽑혀서(편애) 유대인 전체 사회 속의 각 가정의 신앙을 고발하는 겁니다.

결국 나사로 가정이 대표로 매를 맞는 셈입니다.

대신 매 맞음을 통해서 유대인에게 있어서의 비언약적 속성을 지적함과 동시에
다른이 들에게 말하지 않는 부활의 세계 영의 세계 약속의 세계를
전승으로 내려오는 또는 교육받아서 사람의 손을 타서 내려온 교육이 아닌
예수님이 직접 알려준 계시를 통해서
기존의 부활교리나 말씀지식을 새롭게 정립해 주시는 겁니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라 라는 취지가 아니라.
습득할 필요 조차 없을 정도로
그 지식 그 지혜가 왔다 라는 겁니다.
얼마나 제대로 왔으면 아무도 모르고 더더군다나 가장 정통지식으로 무장한 자들에게서 조차 외면받고 버림받는 지혜로 왔기에 아 정답이구나 라고 정답인울 알아라 라는 일방적 통보식으로 직접 눈 앞에서 펼쳐줍니다.
즉 직접 눈 앞에서 펼쳐주면 잘 믿고 잘 수용한다?
아니다 라는 거죠
그 아니다 라는 것이 진짜가 펼치는 부활이다는 겁니다.

이 사건에서 마르다 마리아는 둘 다 부활에 철저하게 소외된 무능자로 언급이 됩니다.

다른 사건에서는 유별나게 마리아 편향적인 모습이 강하지만

여기서는 좀 다릅니다. 둘 다 철저한 무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차이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예로 마르다가 일부러(소식은 미리 3일전에 전했으나 일부러 3일 뒤에 죽고난 다음에 오신다 그래서 마르다는 더 재촉할 수 밖에 없다) 늦게 오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멀찍이 오시는 예수님에게 달려가서 예수님께서 여기계셨다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일텐데 라고 지금이라도 주님이 말씀하신 무슨 일들이든 충분히 일어날 것이다 라도 오히려 마르다가 더 신앙이 있는 모습과 말씀에 순종할 자세로 보입니다.

(요 11:20)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요 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 11: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그러나 역시 마리아는 싸가지 없어 보이듯 집에 앉아있다고 행동의 차이를 둡니다.

자 마르다의 그런 적극적인 행동에 예수님은 간단하게 오빠는 다시 산다 라고 말하자
마르다가 자신의 신앙을 유감없이 드러냅니다.

그럼요 그럼요 다시 살구 말구요 저는 부활교리를 밑~~쑵니다. 아멘.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알고말고요

예수님은 내가 부활이요 내가 생명이요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마르다 너가 믿느냐?

그럼요 그럼요 아멘 아멘 제가 믿고 말고요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인줄 내가 믿고 말고요 내가 그거 디기 잘 압니다.

자 이제 마리아를 부릅니다.

선생님이 너를 부르신다 라고 마르다가 말하니
마리아가 듣고 버뜩 일어나
예수님을 마르다가 맞이한 그곳에 그대로 있기에
급히 달려갑니다. 무덤에 애곡하러 가는줄 알고 함께 있던 자들이 따라 갑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계신 곳에 와서 예수님을 보고 발에 엎드려 울어버립니다. 또 같이 따라나온 사람들도 울어버립니다.

바로 이 울어버린 모습을 보고 통분히 여겨서 민망히 여기시면서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마치 요셉이 일부러 형제들을 간첩으로 몰아버리고서는
자신이 격었던 그 과거의 죽음을 같이 격게해 봄으로써 죽음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구원을 말하고자 하는 그런 취지가 아니라
(형제들 또한 그 과거의 죄 때문에 이런 억울한 누명을 쓰게되게 되니 결국은 뿌린대로 거두는 죄 값을 치르게 되는구나 라고 형제들이 생각함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아니라 그 반대로 미래에 영광을 바라보게 해야하기에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찢어지는 심정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원수들의 손에 넘겨서 화목제물로 삼아서 모든 이름을 주의 이름에 무릎 꿇게 하는 약속을 이루는 믿음을 아브라함에게 꼿아서 뚫어버리듯이 그래서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때를 바라봤듯이)

반드시 요셉은 형제들을 죄인 만들어서 그 위에 뿌려지는 긍휼을
(허물 위에 뿌려지는 희생제물의 피로 모든 우주를 통일)

어께에 매고 약속을 어깨에 매고 모든 허물을 모든 죄와 모든 원수의 성문과 모든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믿음의 전쟁을 펼쳐야 하기 때문에
(모세때에 바로 이스라엘 군사로써 가나안 함 땅을 뚫어버리는 거룩한 전쟁의 군사)

단순히 과거의 죄 값 수준이 아닌 미래와 현재 이 모든 것을 뚫어버리는 미흡함이 없는 완료(영광)를 증거하는 자인 증인으로써 육의 생각을 할례처럼 껍데기 벗기듯이 쭈욱 벗겨버리는 그 십자가의 쓴잔에 같이 동참하는 같이 버림받고 같이 죽고 같이 다시 사는 개별자가 아닌 그 피흘림의 울부짖음에 동참하듯이 요셉이 같이 몰래 눈물을 흘리는 모습

그런 모습과 같아 보입니다.

그렇다고 요셉이 간첩 만들기에 소홀히 하느냐? 눈물을 훔치고 매몰차게 몰아버립니다.
철저하게 긍휼(완료) 앞에서 무능한 자로 만들어야 은혜가 은혜 다우니까요

그것처럼 예수님 또한 마리아가 털썩 주저 앉아 눈물 흘리는 모습과 사람들도 덩달아 따라 우는 것에

무조건 호통치는 것이 아니라

너무 너무 마음이 아파서 같이 우십니다.

왜 우느냐? 나사로의 죽음 때문에 우는 마리아의 흘리는 눈물과 동일해서?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마리아 또한 요셉의 형제들처럼
또는 마르다처럼
여기 계셨더면 안 죽었을 텐데 라는
원인과 그 원인의 결과로써의 죽음을 본 겁니다.

예수님은 그런 생각이 잘못 되었다고 쪽팔려서 우시는 겁니다.

요셉 또한 저들 형제들의 알지못하는 세계에 대해서 전혀 무능함에 안타까워서 우는 겁니다.

비록 저들이 하는 일을 자기들이 모르지만(십자가 상에서 외친 말씀처럼)
그 무능과 무지를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비웃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비웃음 그래도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웃음으로 옮기듯이
사망의 그늘에서 흑망의 지옥에서 개같은 음부의 세계에서 넉넉하게 이기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끊어지지 않는 확정된 완료의 사랑의 세계에 옮기는 수고를 끝까지 놓치지 않고 또 양보도 않으시고 직접 그 수고를 책임지시기 까지 다 이루셨던 겁니다.

마리아 또한 마르다처럼 원인으로 인한 결과의 세계에 빠져나올수 없기에
미리 미래의 영광이 소급해서 결과로 원인을 낳는 식의 부활의 세계를 모르는 것에
같이 우시는 겁니다.

즉 울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울겠다는 취지가 아무리 완료가 와도 자기들은 미완료 밖에 안 보인다 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소경 됨을 예수님 자신의 숙제로써 뚫어버려야 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이 안됐다고 졸졸졸 따라다니면서 우는 쯧쯧쯧 혀를 차면서 청년 아깝다고 우는 아줌마들을 뒤돌아 보시면서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가족을 위해서 울라고 도리어 걱정해 주는 모습과 같은 겁니다.

(눅 23: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그래서 예수님이 민망히 우시면서 (우는 분위기를 확 깨버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더 큰 소리로 혼자 펑펑 우셔서 인간들의 우는 그 울음이 얼마나 죄요 쇼요 그저 윤리처럼 진짜 우는 이유도 모른채, 운다 라는 그 자체로써 자신들의 죄를 가리우는 그 모습으로 그 모습이 더 죄 스럽다고 모든 우는 분위기를 깨버리는 울음을 우는 식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우는 분위기를 잔치 분위기로 만들기 위해서
그들 우는 자들의 원인과 결과가 된 나사로의 죽음을 박살내 버립니다.

즉 실컷 우는 영화를 보면서 울다가
갑자기 채널을 돌려버리니까 우는 심각성은 사라지고 (원인이 사라졌기에)
갑자기 잔치집 분위기가 되는 겁니다.
누가 혼인잔치에서 상가집의 애곡을 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취지로 마리아의 눈물에 주님이 동참하시면서 동시에 그 눈물을 깨버립니다.

마리아는 결국 예수님이 부활이심을 말하기 위해서 반대의 위치에 서 있는
물에 빠진자 그 모습 그대로 보여줍니다. 마리아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러나 마르다는 부활교리를 잔뜩 쥐고서는 물에 빠진 상태가 아니라.
그렇게 되면 누가 물 위에서 물에 빠진 자를 건지는 구원자인지가 모호해지는 겁니다.

마르다는 아멘요 아멘요 그럼요 그럼요 다시 살아나구 말구요 라고 예수님과 똑같이 물위에 걸으면서 부활을 바라보게 되니 실감이 나지 않는 그저 지식이요 교리요 신학일 뿐인 겁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반대의 위치인 물에 빠진 자의 모습 그대로, 구원자가 물에 빠진 그 속으로 뛰어드는 그 생생한 현장을 보여주는 그런 죄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 죄인이란 과거의 개념으로 왈가 왈가 할게 아니라.
미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있어서의 죄인이라는 개념을
오늘날 성화론자들은 모르는 겁니다.

자 이 요 11장 이야기에서 결론적으로 정리를 해 보면
마르다는 그럼 틀렸고 마리아는 옳았다 라는 그런 취지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원인 결과이니까 여전히 말귀를 못 알아먹은 것이니 주님은 언제든지 원인 없이 결과로써 미래에서 덮쳐오면 여전히 오해하게 되는 겁니다.

마르다 든 마리아 든 예수님이 차이를 두시는 이유느 그들의 차이가 중요한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써먹을대로 써먹는다는 취지입니다.

언제든지 마르다를 마리아로 활용할 수도 있고 마리아를 마르다 로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이 이야기를 통해서 누구처럼 따라 해본들 소용 없는 겁니다.
언제든지 팔을 어긋맞게 하실테니 인간의 그런 욕망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차이 없다 라고 해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차이 없다 라는 결론이라고 해서
또 하나 군요 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한 몸 이라는 하나 라는 개념은
오직 예수님을 드러내는데만 사용될 뿐입니다.

(엡 4:5, 개역)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이 하나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모든 것들을 다 동원하는 겁니다. (우주적 통일 = 주의 이름)


자 그럼 이왕 한 것 나머지 두 사건도 다루어 봅시다.

요 12장의 마르다 마리아의 언급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마르다를 빼버리니까 그 마리아도 정작 누구인지 모호한데

요한복음 12장에서는 나사로의 동생임을 분명히 언급합니다. 그렇다고 다른 복음서에서 그 모호한 마리아 향유를 깨뜨린 여인을 모두다 마리아 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구요 그 모호한 그 자체로 내버려 두어도 상관 없습니다. 저자의 목적이 있으니까요

자 그럼 요 12장의 마르다는 죽은 나사로로 인한 잔치 분위기에서 일함으로 인해 더 이상 언급이 없고

마리아의 예수님 발 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는 그 유명한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자 여기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차이성을 생각 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 마리아는 그 행동 때문에 온갖 욕을 얻어먹게 되지만
이 마리아의 행동 하나로 모든 인간들의 죄의 속성을 지적해 버리는 겁니다.

지금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앞당겨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 행동을 무슨 수로 주변인들이 해석을 하겠습니까?

해석불가일 수밖에 없기에

그녀의 행동을 보는 시각이 모든 육체의 한계 육의 생각을 드러내는데 기가막힌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차라리 가난한 자에게 주면 더 좋지 않으냐 라는 제자들과 특히 가룍유다의 호통개그처럼 아주 적극적인 발언을 유독 강조합니다.

어쩌면 성경말씀은 가룟유다의 미래의 결과를 통해서 지금 결과로써 이 강력한 주장을 결정해 버리는 겁니다.

성경저자가 과거의 경험을 소급해서 기억해 내어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기록하기에 성령이 저자이고 사도요한은 볼펜일 뿐이며
성령이 주체가 되어서 이 부분을 기록할때에
미래의 결과로써 이 부분에서 가룟유다의 행동이 나타나는 겁니다.
즉 원인이 없는 행동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원인이 없는 행동이기에 구약의 예언 조차도 결과로써의 통보이지
구약의 예언이 원인이 되어서 과거의 이런 원인으로 지금 나오는 결과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이 가룟유다의 행동은
죄의 소원이 덮친격인 겁니다.

마찬가지로 원인 없이 미래 자체가 덮쳐서 행동하는 자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의 향유 부은 발씻는 행동입니다.

이 두 미래의 결과가 지금 현재 나타나는 겁니다.

자 그럼 마르다와 마리아가 하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마리아와 가룟유다가 하나가 될까요?
물론 아니잖아요

그럼 하나는 뭘까요?
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미래란 예수님의 죽음이요 이 죽음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들이 죽으심의 결과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아직 죽지도 않은 예수님을
기념하고 있는 마리아나 그것을 칭찬하는 예수님이나 희한한 말만 하고 있고

또 동시에 그 죽음을 모르고 소외된 입장에서
예수님의 죽음의 결과로써 나타난 것이 가룟유다의 저런 행동이다는 겁니다.
미래에서는 가장 검은 인간이 가장 희고 흰 광명한 천사와 같은 발언을 한다는 겁니다.

자 이 이야기는 요기까지만 하고

그다음 마지막 이야기
그동안 우리가 자주 다루었던 이야기는

누가복음 10장의 분주하게 일 실컷하고 욕먹는 마르다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싸가지 없이 예수님 무릎팍에 앉아 좋은편을 택해서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라고 칭찬듣는 그야말로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둘의 차이 또한 둘을 나누는 것이 목적 보다
예수님의 일이 뭔가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둘을 사용한 겁니다.

인간들이란 자기의 일 곧 사람의 일에 예수님을 동원하고 예수님을 이용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의 일이 뭔가를 말하기 위해서 두 자매를 통해 그 차이를 드러낸 겁니다.

그 좋은 편을 택했다고 마리아를 칭찬했는데 그 좋은 것이 뭘까요?

누가복음 11장에 나옵니다.

(눅 11:13, 개역)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성령입니다.

성령 곧 좋은 것을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라고 합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성령의 반대인 육의 일에 바쁩니다. 그리고 근심하고 염려 합니다.
육의 일은 채워도 채워도 아무리 채워도 여전히 많고 많아서 근심과 염려만 되는 겁니다.

그 일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이제는 마리아 까지 책망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훈계를 요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육의 일을 하러 온 분이 아닙니다.

좋은 것을 주시러 온 분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것을 누리는 자가 누구인가를 보여줘야 하는 겁니다.

종교꾼은 쉼도 없는 육의 일로써 지킴을 강조하고
예수님의 복음은 쉼(안식) 뿐인 좋은 것인 성령을 누리도록 하시는 겁니다.

종교꾼들은 예수님을 졸졸졸 따라다니면서 울기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모든 슬픔을 종식 시킬려고 십자가로 향하십니다.


바로 이 성령의 일 곧 좋은 것을 택하셨기에
예수님은 사람들이 원하는 기적을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도리어 쉼도 없는 끝도 없는 결핍 뿐인 악한세대가 구하는 지옥이기에 그런 기적을 주러 오신 분이 아니라

바로 그런 가짜천국 가짜기적에 사로잡힌 인간의 그 주인을 결박하고자
도둑으로 오신 겁니다.

그 도둑이 가구(인간=마르다)의 주인을 결박하는 그 일이 바로 좋은 것

성령의 일을 행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성령의 일을 드러내심으로써
마귀라는 주인의 실체를 들추어 내고자

성령의 일로만 일관 합니다.

그 성령의 일이 뭡니까?

요나의 표적입니다.

(눅 11:20, 개역)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눅 11:21, 개역)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눅 11:22, 개역)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눅 11:23, 개역)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눅 11:29, 개역)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눅 11:30, 개역)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눅 11:31, 개역)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눅 11:32, 개역)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눅 11:33, 개역)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이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는 반드시
인간의 주인을 겨냥한 마귀만을 대상으로한 홀로의 전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의 일 때문에 일부러 악의 자리에 놓이는 겁니다.
마치 마리아가
성령 때문에 영의 일 때문에 좋은 것 때문에

싸가지 없는 자리

또 비싼 향유를 허비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욕먹는 자리

마치 예수님이 바알세불 걸린자의 자리에 놓이게 되는 것처럼

억수로 미움받는 자리

결국 법을 쥔 선을 쥔 인간들로부터 버림받는 저주의 자리에 놓인 자리가

좋은 자리인 겁니다. 성령


바로 이것을 예수님은 뻔뻔스럽게도 절대로 네버 네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라고

영의 일 (미래의 완료가 덮쳐)로 증거 하시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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