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이 태어나는 이유?

(요 9:7, 개역)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요 9:4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12-12 09:38:56,

장애인이 태어나는게 씨도 중요하지만 밭도 그에 못지 않은건가요

여자가 밭이 안 좋을때 장애인이 태어난다고 하는데 그러면 결혼할때 여자의 집안 내력과 흐름을 봐야 하는건지 고민 되네요

성경에서도 보면 4가지 밭과 또 뿌리 족보로 연결되어 주님이 태어났으니 물론 이것도 영적 의미지만 육에서도 이런 의미도 적용을 시키는것을 보면 이걸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네요

답변 :

동네에서 누구든지 다 아는 소경이 있었는데
많은 학자들이 이 소경이 왜 소경으로 태어났는가에 대해서 연구를 했습니다.

씨가 문제다? 아비가 문제다?
아니다 밭이 문제다? 어미가 문제다?

또 부모라는 씨에서는 문제 없지만 밭이 된 자기자신이 문제이다. 똑바로 못 받아서이다?

(요 9:2, 개역)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요 9: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인간의 연구는 항상 정답 뿐입니다. 마귀는 항상 옳은 말만 합니다. 법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비정답으로만 오시는 겁니다. 선악의 반대죠

정답이라고 규정한 그 답 속에 인간을 집어넣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부끄부끄 숯불을 머리 위에 둔 영의 일(악의 자리에 놓인 모습으로써 선하다 라고 우기는 저들의 그 선함이 가짜임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지혜입니다.)에

반드시 그 부모와 자기를 둘 다 죄 속에 집어넣고자 예수님은 오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반드시 인간들이 정의를 하는 장애인이라는 소경을 통해서
정작 정상인이라고 하는 자들을 소경 만들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저는 이 질문을 받고 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자들이 진짜 소경이요 진짜 장애인임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소위 질문의 취지는 이겁니다.

좋은 밭이 되자 라는 겁니다.

이것은 바리새인 뿐만 아니라 성화론자들의 가장 확실한 주장입니다.

좋은 신앙인이 되자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자
롯처럼 되지 말고 아브라함처럼 되자 롯은 도움받기만 했지 좋은 밭은 아니다.
아브라함을 봐라? 얼마나 남을 도와주면서 살지 않았는가? 바로 그런 좋은 밭은 아브라함과 같은 자 이다

제가 보기엔 바로 그들이 롯보다 더 못한 구걸하는
남의 도움을 아예 정당화하면서 받는 것을 넘어서 갈취를 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3장 전체의 씨뿌리는 비유는

(마 13:18, 개역)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마가복음 4장에
또 누가복음 8장에 언급이 되어 있는데

거짓 영들이 말씀이라는 씨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듣는 밭인 인간 중심으로 전개를 하는 이유는

거짓 영들이 사람이 중요하지 말씀은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고 주객을 뒤바꾸어서 그런 겁니다.

예로

씨앗을 질문 속에서 말씀과 또는 예수님과 연결 했습니다.
자 그러면 밭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엉터리로 보는 이유는
그만큼 이 밭을 자기들이 삼킬려고 하기에
또 교회를 그런 시스템으로 운영하여서 인간들의 손아귀로 장악할려고 하기에
은근슬쩍 밭을 중심으로 전개를 해야
사람들이 의욕이 생기고 보람을 느끼는 종교성을 부여하기 위함이겠지요

[성경에서도 보면 4가지 밭과 또 뿌리 족보로 연결되어 주님이 태어났으니]

그래서 이 질문이 틀린지 모르고
은근슬쩍 다 속습니다.
당연하게들 생각하니까요?

예수님은 밭과 상관없이 태어난 분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씨도 필요 없이 태어난 분입니다.
이삭 또한 인간의 씨가 필요 없이 태어난 자입니다.
인간의 태가 필요 없이 태어난 자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죽은 태에서 태어난 자입니다.

약속의 자녀는 다 이러합니다.
이미 죽음을 이기고 태어났지만
죽은자와 방불한 모습으로 살아도 될 정도로 넉넉한
죽음을 이긴채로 태어난 거죠.

아니 창조주 되신 예수님이 인간처럼 태어났다는 자체가 말도 안되는 거죠

그러나 육으로 오셨고 태어났다는 피조물에게만 붙일수 있는 표현을 쓴다는 자체가
우리와 같이 되었다 라는 하나됨이나? 또는 동질감이라는 의미보다
도리어 이질감과 하나됨이 아닌 두패로 본격적으로 나누어 버리겠다는 취지입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의 손에 죽었다 라는 것이 말이 안된다고 하지만
그렇게 말도 안된다고 하는 특히 유대인들의 그런 사고방식 속에서 죽습니다.
다름아닌 그들의 손에서 직접 죽습니다. 물론 다른 손을 빌리는 그 사고방식 조차도
유대인의 모든 속내를 드러내는 겁니다.

그것을 거룩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거룩한 씨앗 비유가 중요합니다.
씨앗 혼자 외로이 거룩한 전쟁을 펼치고 있으니까요? 과거 구약의 이스라엘이 해야할 전쟁을 이스라엘은 하기 싫어 했기에 그 사랑의 전쟁을 혼자 하는 겁니다.

한 쪽을 다른 한 쪽과 나누어 버림으로 인해서

가짜와 진짜를 가려내겠다는 취지로
직접 그 속에 뛰어들었다는 겁니다.

어디 속에?

인간들 속에, 그리고 육 속에

그렇다면 영이 와서 육의 (생리?)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육의 본질의 성적인 종족본능?을 활발하게 또는 도움이 되도록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단절 이제 더 이상 의미 없도록 하러 오신 것이니
인체는 적극적으로 이 이물질인 예수라는 영을 공격할 수밖에 없고
그 생존본능으로 인한 공격으로 인해 살아남기를 원하는 겁니다.

이런 생각은 인간만이 했다면 그냥 넘어가 줄수 있을지 몰라도

놀랍게도 마귀 또한 그러하다는 겁니다.

육이 아닌 영적인 존재인 마귀가 그러한 생각을 품었다면
인간의 그런 생각은 육이니까 한번 봐줍쇼 라는 정당이 성립이 되지 않게 되고
도리어 마귀와 하나 된 관계임이 밝혀지는 겁니다.

영이라는 씨앗이 육이라는 밭을 이용해서 탄생한게 아니라
예수님은 성령으로 인해서 태어났기에

밭 개념이나 씨 개념인 육에서만 사용되는 의미를 붙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피조물로써 태어났다면
일종의 생명체 인데

이 생명체로 인해서
다른 생명체와 공생관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생명체의 의미겠죠

그러나 반대로 이제 모든 생명체를 이 예수님이라는 생명으로 인해
가짜 생명이였다 라는 것을 밝히시는 겁니다.

생명도 아닌것들이 생명인체 하였고
더욱더 놀라운 것은 시체 덩어리 였다 라는 것을 죽음 그 자체 였다고 하는 겁니다.
 
그럼 생명이란 뭐 길래? 우리 눈에는 살아 있다고 보는데
예수님의 눈에는 살아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일까요?

생명이란 사랑 이라는 창조주의 마음과 결부 된 겁니다.

결국 창조주의 마음인 사랑이 없는데
꿈틀 꿈틀 살아 있다고 해서 생명이라고 붙일수 있냐 라는 거죠

없습니다.

(롬 1:28, 개역)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다는 것과 우상과 결부 시키는 의미를 성경말씀만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결국 생명성 없는 우상과 인간을 하나로 보고 있는 겁니다.


왜 제가 장애인 이야기를 이런 이야기로 운을 먼저 띄우냐 하면

놀랍게도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을 쳐다보는 관점이 바로 이런 이유 이기 때문입니다.

즉 반대로 보고 있는 거죠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을 보는 관점이 바로 죽은 자 취급한다는데 놀랍도록 한결같다는 겁니다.

이것이 확대 되면 고아 과부 나그네로 확대가 됩니다.

자 이렇게 신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랑받지 못하는 자들

사랑이라는 것 곧 복을 받지 못하고 반대로 저주를 받아서 죄를 뒤짚어 쓴채로 태어난

그야말로 시체덩어리들로 취급 받는 자들이 바로 장애인이요 또 고아 과부 나그네 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로 이것을 걸고 넘어지는 것이 바로 성경인데

이런 장애인을 일부러 깔아놓고서는 절대로 이들을 사랑을 못하는 자들이
바로 정상인이다 라고 우기는 비장애인을 정죄하기 위해서 가입이 된 것이
바로 계명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딱 하나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룬 자입니다.

(롬 13:8, 개역)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즉 진짜 생명이란 타인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모든 관심사는 이웃 환대법과 약자 보호법으로 고아 과부 나그네인 이스라엘의 첫모습 처음자리 첫사랑의 시작점이 되는 겁니다.

멀쩡한 야곱을 일부러 환도뼈를 뿌러뜨려서 장애인을 만드는 이유는
뿌러뜨리지 않으면 자기자신만을 쳐다보는 시체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타인을 보라는 겁니다.

그 타인이 자기와 같은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외에는 안쳐다보는 그 타인 속에서

진짜 사랑을 발견하라는 겁니다.

알고보니 자아 밖에 없습니다. 아담 원 아담 투 아담 쓰리

나 라는 인간이 자아 복제 하여서 타인처럼 살고 있을 뿐이지
생명이 아닙니다. 왜냐? 그들 또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생명이 아닌 겁니다.

자 그럼 그 타인 속에서 유일하게 타인인 예수님 만이

남이 아닌 나를 겨냥해서
고아 과부 나그네
곧 장애인으로 취급해서 구원하겠다고 나서는 겁니다.

유일한 타인인 예수님을 인정해 버리면
나는 장애인이다 나는 소경이다 라고 시인하는 셈이고

나는 장애인이 아니다 이제는 예수 믿고 의인이 되었다 라고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 정상인이다 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나와 상관이 없는
그저 생명 없는 아담 투 아담 쓰리 아담 포 일 뿐인 겁니다.
우상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소경을 가지고 모든 눈 뜬 인간들을 소경 만드시는 작업을 하셔야만
우상의 실체가 밝혀 지는 겁니다.

씨뿌리는 비유는 바로 이런 이유로써 증거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씨뿌리는 비유 마저도 소경들이 해석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가관들인 거죠

바로 그런 가짜 해석들을 유도하는 이유도

씨앗이 정말로 제대로 뿌려 졌다는 증거인 겁니다.

농부가 땅에 씨앗을 마구 마구 허비하듯이 뿌려댑니다.
즉 밭이 어떤 밭인이 상관 없이 다 뿌려버립니다.

자 그렇다면 씨앗의 능력은 허비가 되면서 까지
땅이라는 그 생명없는 그 죽어있는 곳에 낭비가 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씨앗은 유일한 생명으로써 유일한 사랑으로써
땅의 내막을 다 들추어 냅니다.

4종류의 밭이 있다 라고 바로 전제를 하지 말고

씨앗이 땅의 속성들을 하나 하나 밝혀버립니다.

밝혀 보니 4 종류로 드러난 거죠

씨앗이 마구 마구 살포 되었을때에

1 더러는 (어떤 씨앗은) 길가에 뿌려 졌습니다.

자 그러면 땅과 결합이 되지 않았기에 잘못 뿌린 것일까요?

아닙니다.

길가에 씨앗이 뿌려지니까 새들 이라는 외부적인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그것을 씨앗은 놓치지 않습니다.

즉 생명이 없고 사랑이 없는 우상의 속성 또는 비언약의 속성
또는 눈 뜬 소경의 속성 또는 가짜 성도 가짜 이스라엘 마귀에 속한 자들의 속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결국 땅 자체의 어떤 속성을 밝혀지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새들이라는 전혀 땅과 상관없는 외부적인 상황으로써 씨앗을 먹어 버렸다면

그 길가 라는 땅 자체가 중요한게 아니라
외부적인 새 라는 상황을 통해 우상성을 밝혀버리는 겁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기존의 씨 뿌리는 비유를 해석하는 자들의 해석이 다 엉터리가 되는 겁니다.

즉 죄도 자신의 하기 나름인 인간 자신이 다루어질 문제로 여겼는데
초장부터 죄란 인간의 손에 달린 문제가 아닌 처음부터 외부적인 요인이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딱 하나? 말도 안된다고 불공평하다고 말하지만
너희 아비는 마귀 다 라는 취지와 같은 겁니다.

어떻게 아버지를 마귀라고 규정하고
어떻게 마귀에게서 태어난 적이 없는데 마귀를 아버지 라고 하느냐?

그것은 간단 합니다.

반대로 보면 됩니다.

너희들이 어떻게 아버지를 하나님 이라고 규정하고
어떻게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적이 없는데 하나님을 아버지 라고 하느냐 라는 것과 같은 겁니다.

이 원리를 그대로 장애인을 쳐다보는 시선을 비장애인들이 보는 시각과 같은 겁니다.

이거 이거 너무 중요합니다.

소경을 바라보는 눈 뜬 자들의 시선은
어떤 이유도 없이 자신들은 빛에 속한 눈 뜬자 곧 빛을 보는 자로 여기는
태생 자체가 그렇다 라고 태생이 그러니 예정이 그러니 운명이 그러니
미국인으로 태어났으니까 그 태생을 바꿀수 없다 라고 하는 원리와 같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인간 생각을 하지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니 짐승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말이죠
마귀 자식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니 마귀 생각을 안한다고 하는 겁니다.

바로 이것을 예수님을 그냥 넘어가지 않는 겁니다.

과연 그러할까? 마귀 자식이 아니라고? 소경이 아니라고?

그래서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일 이기에
사람의 방식과 달리 일하시는 방식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소경의 모습으로
저주 받은 모습
고아 과부 나그네
불뱀의 모습인 인자의 모습
버림받는 모습
십자가에 달려 저주 받아 죽는
나무에 달린자 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자 이다 라는 모습으로 오시는 겁니다.

(갈 3:13, 개역)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우리는 이 4 종류의 밭 비유라고 사기치는 해석을 통해서
길가에 해당 되는 사람이 되지 않아야지 라는 생각을
도리어 이 비유가 유발케 만들기 때문에

길가에 해당 안 되는 사람 되면 된다고 여기지만

그게 딱 걸려든 거죠 그 반대인 겁니다. 그러니 씨앗에 벗어날 생각을 할수 없는 겁니다.

즉 모든 인간들은 길 가에 뿌려진 씨앗으로 인해 인간의 소속의 정체가 밝혀진 겁니다.

마귀입니다.

결국 가장 하나님의 자녀요 선민이요 예정된 자 라고 우기던 그들에게
무수한 선지자들이 뿌려졌지만 투입시켰지만
길가에서 다 먹힘을 당하듯
그 새와 한통속인 난공불락의 요새를 우상으로써 가인성으로써 고수했던 자들이
바로 모든 인간이였음을 밝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또한 선지자들처럼 길가에 뿌려지는 모습으로 왔다는 겁니다.

비유란 그래서 해석 못하도록 한 겁니다.
무슨 수로 비밀번호로 그 암호를 풀겠습니까?

풀겠다고 다가간다는 자체가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겁니다.
못 풀도록 하신 겁니다.

(마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13:13, 개역)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결과적으로

악한 영이 또는 죄의 소원이 덮친 자에게는
아무리 선지자를 퍼붓고 심지어 예수님이 와서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해도
상관이 없는 악마와 한통속인 우상 그 자체임을 드러낸 겁니다.
들을 귀를 주님이 아예 창조해주시지 않기에
말씀을 못 듣도록 귀머거리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귀가 있어도 소용 없습니다.
깨달을 수 없도록 막혀버린 것이니까요

(마 13:17,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마 13:18, 개역)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마 13:19, 개역)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자 그 다음 두번째로

2 더러는 (어떤 씨앗은) 흙이 앏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다 라도 되어 있습니다.

(마 13:5, 쉬운) 『어떤 씨는 흙이 별로 없고, 돌이 많은 곳에 떨어졌다. 곧 싹이 났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마 13:6, 쉬운) 『해가 뜨자 시들어 버렸고, 뿌리가 없어서 곧 말라 버렸다.』

여기도 밭 자체의 요인 보다 외부적인 요인도 함께 적고 있습니다.

흙이 별로 없고 돌이 많은 곳 이라는 땅의 속성이 드러났습니다.

자 그렇다면 그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 싹이 났다면
그 싹이 힘겹게 자라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 비를 살짝 뿌려주어서
흙이 깊지 않은 그 돌짝밭에 조금이라도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물만 잘 줘도
돌짝밭 속에서도 충분히 자랄수가 있는 긍정적인 시각은 아예 없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가장 큰 외부적인 요인은 해가 뜨게 되니까? (물론 햇빛 왜 강렬한가? 왜 뜨럽게 비추냐? 이렇게 따질 입장도 못되죠 원래 뜨던 것이니까?) 그냥 보통때처럼 달리 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해가 나타났을 뿐인데

겨우 명맥을 유지할정도로 극소수의 소량의 수분까지
있던 수분까지 다 증발시켜 버리니
모든 희망은 다 날라가 버린 겁니다.

가난에 가난이 덮친 격에 몸까지 아파서 쓰러져 버린다면?
또 교통사고 까지 나버려서 있던 빚에 장애인 되기까지 빚 갚을 능력 조차도 아예 상실되어버리는 그런 상황이 되어버리면

이런 사람을 돌짝 밭에 해당 되는 사람이라고 규정할수 있을까요?

생각하는 시선은 분명히 그러한데 안 그러는척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교회가 더 심각하죠

(마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비유란 이 부분을 구체화 시키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비유 지켜서 바로 12절의 내용을 실현화 시킬 재주가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이룰자가 없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적개심만 더해 가겠지요

그래서 돌짝밭에 뿌리워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아들였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기에 환난 핍박 등등의 풍랑이 닥쳤을때에
넘어질 수밖에 없는 일어서지 못하는 넘어지는 자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즉 여기서 또 오해하지 말 것은?
뿌리가 없기에 씨앗 자체의 역할이지
그 밭에 해당되는 사람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다는 거죠
결국 씨앗이 그 사람과는 안 맞다는 겁니다.
환난 핍박이 닥치면 그 땅의 속성 그 밭의 속성 그 사람의 속성이 그때서야 밝혀진다는 겁니다.

숨겨진 속성을 씨앗으로 인해서 드디어 밝혀지는 겁니다.

자 그다음 세 번째 가시밭에 뿌려진 씨앗

3 더러는 (어떤 씨앗은)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다

(마 13:7, 쉬운) 『어떤 씨는 가시덤불에 떨어졌다. 가시덤불이 자라서 그 씨를 자라지 못하게 하였다.』

자 여기서는 더 웃깁니다.

자라는 데 있어서 앞의 돌짝밭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여견이 한층 좋습니다.

문제는 나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가시떨기도 함께 자라는데 더 잘 자란다는 것이 이 밭의 속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가시에 해당되는 세상의 것이 나보다 더 잘 자란다는 겁니다.

쉬운 예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정보에서 뒤 떨어지면 밀려버립니다. 도태되는 거지요. 악착같이 살아남을려면 과거의 유물은 빨리 버려야 하고 새로운 것에 발맞추어서 적응해야 살아남습니다. 좋은 것 나쁜 것 가릴 입장이 못됩니다. 세상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면 낙오자 취급받고 그 자체가 생명력을 상실한 죽은자 취급받게 되는 겁니다.

불과 몇 십년 전의 장애인이란 신체의 장애를 말하지만
현대의 장애인이란 정보에서의 차단 단절 부적응입니다. 즉 무지입니다. 무 지혜 입니다.

가시떨기 밭에 뿌리워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었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를 말합니다.

(마 13:22, 쉬운)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와 같은 사람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가로막아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한다.』

돌짝 밭과 비교를 해 보면

풍랑과 환란 즉 태풍 회오리 쓰나미가 덮치니까 나무 자체가 넘어져 뿌러지게 되니 다시는 일어날 수 없고 뿌리 자체가 날라가 버렸으니 다시 심을 수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가시밭은 외부의 기운인 세상 염려와 재물에 대한 유혹 등으로 인해서
나무 자체가 넘어지는 사태는 없었거나 이겼지만
정작 나무 자체의 기능인 열매를 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마치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는 것과 비슷하죠 (때도 아닌데? 열매 내라고 하듯, 불임여성에게 자식 낳으라 라고 재촉하는 못된 시어머니 같아 보입니다.)

온갖 스트레스로 인한 염려와 유혹 때문이다 라고 한다면

오늘날 현대 여성의 불임을 생각해 보면 이해 될 수도 있겠지요
물론 요즘의 불임은 남성이 받는 스트레스가 더 심각하니까
옛날 시어머니의 무정보 시대처럼
무조건 여자 탓으로 몰아붙이는 그런 시대는 불과 몇 년까지만 해도 그랬지만
이제는 사라지는 추세이지요

아무튼 위의 3가지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국 인간의 취사선택할 입장이 못되는 문제이고
또 그렇다고 피할수 있는 문제도 못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여기 3가지 다 해당되니까요

저는 이것을 바로 인간 자체로 봅니다.
사실은 위의 세가지는 구약에서는 우상을 두고 말합니다.

우상이란 약속을 못 지킵니다.

반대로 우상의 반대인 참 신은 약속을 지킨다는 약속 자체에 얽매이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상은 약속에 매일 필요가 없지요 생명도 없는 그저 돌덩어리요 나무조각일 뿐인데

위의 3가지가 바로 비언약을 두고 말하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언약이요 약속이요 말씀(운동력)이요 사랑이요 빛인데

빛은 이유 없이 무조건 열매 맺는다.

즉 사랑은 이유 없이 무조건 앨매를 맺고 30배 60배 100배를 이유 없이 낸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구지 비교를 한다면 외부적인 요인이 일체 없습니다. 해를 더 잘 주었다던가? 남보다 이 좋은 밭에 물을 더 잘 주면서 특별관리 대상이 되었다던가? 그런거 일체 없습니다. 그야말로 위의 3가지와 비교했을 때 불공평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유 없다는 겁니다. 왜냐? 씨앗과 딱 맞는 그 자체로써의 하나 한 몸이기 때문인 거죠.

즉 언약은 사랑은 죽음 마저도 이긴다 라는 겁니다.

교회란 바로 이 언약의 대상이 교회입니다.
무조건 사랑의 결실을 맺었음으로써 나타난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로암 소경이 빛을 봄으로써 창조주를 만난 그 자체입니다.

즉 창조주되신 빛은 누구랑 잘 맞나요?
소경일까요? 아니면 소경 아닌자 일까요?

(마 13:12, 쉬운) 『가진 사람은 더 많은 것이 주어져 풍부해질 것이다. 그러나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무릇 있는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고 30배 60배 100배

그러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있는자는 무엇이며? 없는 자는 무엇일까요? 뭐가 있다는 것이고 뭐가 없다는 것일까요?

놀랍게도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요소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처음자리 또는 첫사랑 또는 근본자리
또는 고아 과부 나그네 자리
또는 죄인의 자리
또는 무능의 자리
또는 남은자 (어린아이와 같은 자리)
곧 이스라엘 곧 교회입니다.

한 몸인 신부입니다.

열처녀 비유에서 있던 신부는 있는 것이 더더욱 풍부해 졌는 5 처녀 신부가 있고
없었던 5처녀는 그 있던 것 마저 없어지는 모습임을 드러냅니다.

마 25장의 3가지 비유가 다 동일합니다.

또 정작 위 3가지에 해당되는 나는 눈 뜬 자 이다 라고 하는 자는
열매가 없습니다. 즉 사랑을 볼 줄 모르는 겁니다.
있던 눈도 빼앗겨 어두어 진 겁니다.

최근에 이런 광고가 있습니다.
100살의 쇼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가 할머니 100살까지 사세요 라고
100살의 의미도 모르면서
100살의 의미를 아는 자들에게 외쳐버렸습니다.

그러자 분위기 따운 되면서 얼어버린 상황을
당사자 100살 할머니가 200살까지 살아야제? 라고 분위기를 되살려 놓는 광고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화가 났습니다.

100살 잔치를 복이라고 보는 겁니다. 물론 인간끼리의 비교는 복이고 우겨도 할 말 없습니다.

그러나 저주 받은 몸이라도 쫏겨난 몸이라도 900살 정도의 일부러 천년(묵시)을 못 채우는 인생을 사는 삶을 주님께서 더더욱 구체화 시켜버렸습니다. 120으로 단축 시켰으니 이거 뭐 10분의 일도 못살면서 그 도토리 키 재기 하듯이 오래 살았다고 자랑하는 겁니다.

우상에 갇혔고 저주에 갇혔고 죽음에 갇혀 있다는 것을 구체화 시킨 것을
그 반대로 해석을 하니
조금이라도 더 버텼으니 그것으로 족하지
사랑 따위는 몰라도 돼
언약 따위는 몰라도 돼
생명 따위는 몰라도 돼
하나님의 마음 따위는 몰라도 돼 라고
정작 진짜 부모를 싫어하는 짖만 골라서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비정상의 인간인
거인족 네피림과 그 자손인 아낙 자손이요 그들의 후예가 바로 가나안 족속인 겁니다.

그 가나안 족속의 사고방식을 일부러 퍼트린 상태가 지금 현대인의 삶의 구조입니다.

자 여기서 예수님이 씨앗을 뿌립니다.

그리고 한 소경을 통해서 자기 신부를 찾습니다.

건강한 신부가 되자고 다들 아우성 치면서 지키고 행하고 노력하고 열심히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찾는 자는 바로 남은자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장애우로 태어나게 했냐구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첫사랑의 자리에 있는 고아 과부 나그네 만이
남은자요 한 몸인 주님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 추신

이 내용이 바로 희년과 연관되기에 누가복음공부란에 올립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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