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이후 란 없다 2 (감사란 뭔가?)

081226 05:24 김대식

새순교회 홈페이지에 아래의 글을 읽고 그 동안 그렇게도 궁금했던 것이 조금이나마 감을 정도로 “아 이거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동안 많은 사건을 접할 때 마다 이근호 목사는 나에게 자꾸 감사 하라 라는 이 감사에 대해서 몇 년간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계속 줄기차게 이야기 했다.

도대체 감사가 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잉여품이다. 속건제처럼 100% 보증품이다.

여기서 그동안 내가 착각한 것은 감사를 어떻게 생산할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런데 아뿔사 그게 아니였다. 감사란 성령의 단독적인 생산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즉 나는 그동안 복음을 제대로 말했으면 나는 옳았지 않았느냐 라는 것에서
사건들은 반대의 성향으로 진행되었다. 거 참 이상하다.
이렇게 되다 보니 감사가 나오지 않고 또 참고 기다려야 하는가?
그 참는 것고 한계적이고 기다리는 것도 한계적이기에 언제 한계가 폭발할지 모르는 시간폭탄과 같은 더 알수 없는 수렁에 빠지는듯한 모름 도저히 알수 없음으로만 몰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 동안 늘 발설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착각했다.

나 아니요 주님이 옳았습니다 라는 제목으로 블로그에 달았음에도 바보천치 같이 이 말이 무슨 말인줄 몰랐다.

즉 주님이 옳았습니다 라는 비중에 올인하면 된다는 것이
나 아니요를 빼버렸던 것이다. 주님이 옳았습니다 에 비중을 둔 나는 옳았다 라는 것을
늘 그 속에서 내가 내 스스로 확인받고 합격을 주고 싶어 했다는 것에
늘 불합격이였으니 늘 이상할 뿐이였다.

주님이 옳았습니다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나는 틀렸습니다를 구체화 시키는 사건을
직접 격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감사라는 것이다.

내가 틀렸는데 왜 감사냐?
바로 이것을 몰랐던 것이다.

늘 은연중에 나 또한 옳지 않았느냐 라를 내세우고팠던 것을
반드시 눌러 버려야 하기에 직접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주님이

결국 감사란 내가 생산해 낼수 없다는 것에 명백해 졌고
여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나는 반드시 틀렸다 라는 의미를 명확하게 받아내고자
사건이 실감나는 현실로 덮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외부의 개입이 없이
내 혼자 백날 연기하고 따라하고 흉내 모방을 내어본들

감사란 있을 수 없다. 감사에 대해 독점권은 감사의 영 뿐이다.

왜 감사가 나오느냐를 봐야 하는가?
주체를 반드시 인간이 틀렸다 라는 확실한 증거와
동시에 그 틀려버린 그 위에서 허물을 덮어버리는 긍휼의 사건
즉 십자가 사건의 실제성이 구체화 되기 때문이다.

결국은 감사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감사의 사건이 미래에서 덮쳐서 일을 터트렸던 것이다.

여기에 항복하기 위해서는 나의 감사의 조건과 감사를 생산할려는 그 모습들이
왜 틀렸는가를 미래가 지적해 주면서 그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감사가 덮친다면 지옥에 가도 상관 없는
죽어도 상관 없는 그야말로 주님이 옳았습니다 라는 것 하나만으로 온 세상을 다 덮는 것이다.

감사 하하하 결국 옳았습니다 라는 의미로 감사의 의미를 비로소 감을 잡았다.

너무 너무 감사하다. 앞으로도 내가 늘 틀릴 수 밖에 없도록 하시겠다는 취지다.

넌 옳치 않다 ! 라는 개그맨의 표현처럼

그 속에 놓여짐으로써 나의 옳음을 비로소 손 놓는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게 하심으로써
편히 쉬게 하겠다는 주님의 온유하고 겸손함이 물밀 듯이 들이닥친다.
아무도 감당할 자가 없다.

결국 감사란 주님께서 퍼붓고자 만반의 준비로써 퍼도 퍼도 줄지 않는 생명수처럼 엄청나게 온우주를 다 덮고도 남는 반드시 압사시킬려고 달려드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였다.


참 그리고 구원 이후란
감사의 의미를 통해서 처음 자리인 구원의 그 자리로 돌려놓는 감사의 영의 일하심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의미를 모르기에 반대로 자기 쪽에서 채워넣는 감사로 포장해 버린다.

그렇게 되니까 삶 이라는 것에 집착하는 종교꾼의 탐욕만을 부렸던 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퍼붓는다. 우리 손에 죽어야만 하는 선지자를 계속 계속 퍼부어서 첫사랑의 그 자리에서만 태어난 자를 뽑아내신다.

이미 사랑으로 완료된 잉여품 남은자(구원에 무능한 자)를 뽑아내고 구원하고
반대로 구원 이후의 인테리어에 빠진자는 반드시 첫사랑의 자리를 버린채로
그 탐욕에 빠지도록 하게 하신다.

마치 원가지의 짤려짐이 나무의 공급이 없이 독자적인 감사를 추구하다 말라비틀어진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처럼 종말을 구체화 함으로써 말이다.
(결국 기존의 교회에서 가르치는 열매론은 정반대의 열매를 펼친거다.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육체의 열매로 온유 화평을 생산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누가 크냐 로 자아 확대가 된 것처럼)

놀랍다 주님은 감사 라는 것 마저도 십자가의 의미를 부여해서만 알수있도록 패쓰워드를 걸었던 것을 모조리 자기 쪽에서 생산해 내어야만 하는 감사인줄 착각했던 것이다.

원인 없는 결과 로서의 감사가 덮쳐진다면
그 사람은 범사에 감사 아니고는 못배길 정도로 감사가 그 자를 가만히 두질 않는다.

마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은 정작 벌벌벌 떨 수밖에 없는 기쁨이 덮치듯이
전혀 기쁘지 않는데 기쁨 자체가 그를 가지고 놀 듯이 기쁨 세계에 집어넣어 삭제 당하듯이
자아의 주머니에 이해가 되는 기쁨의 영역을 초과하는 주머니 저장 창고 자체를 지워버린다.

기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세계에서 감사해서 죽을 수 없도록 조치하는 피의 희생만을 외부에서 때려부음으로써 안 죽도록 조치하는 세계가 바로 기쁨과 감사의 세계인 피의 나라이다.

그래서 늘 내 피와 내 감사와 내 기쁨 곧 나는 옳고 싶다를 부정당함으로 오는
더 이룰 필요 없는 이미 완료된 잉여의 세계가 감사의 세계이다.
(은행사장과 은행사장의 아들의 이야기가 이제 이해 된다. 반드시 탕자만이 아버지의 사랑을 알도록 공개하고 맏이는 모르도록 막아버리는 그 막음에 대해 신비롭기 짝이 없는 상황까지 잉여로써 창조하시는 주의 일이 무엇인지 알려주시는 감사! 감사의 영!, 너무 너무 신기하며, 또한 비유의 성향들이 다 이렇다는 그야말로 놀라 자빠질 신기한 이야기가 실감나게 덮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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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9  구원 이후의 삶  이능우  2008.12.21  42
 238  ☞ 구원 이후의 삶  이근호   2008.12.22  26
 237  ☞ 구원 이후의 삶  강구만  2008.12.23  26

239  구원 이후의 삶  이능우  2008.12.21 - 10:02

구원 이후의 삶은 과연 없나?
구원이 무엇일까?
성도에겐 구원 받기전의 상황이 이미 있고 거기에서 빠져나온 상황이 있을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어린양의 피로서 빼내어 오실 때 구원(구출)만 달랑 시켜놓은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사명이 있을 것이다.
그 사명은 여호와 하나님의 다스림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온 만방에 알리는 것이다.
이 시대 신약 시대에 있어서 새로운 이스라엘이 된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자신의 공로로 하나님의 의로움을 입혀 준 것은 구원 받고 가만히 있으라고 구원 시켜 주신 것이 아니다.
성도에게도 사명이 있다.
썩어빠진 이 시대 부패 되어 버린 이 시대 인간만이 유일 하게 이 세상을 다스려 나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 시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라고 선지자적 역할을 하라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살이 찢어지고 피를 쏟은 것이다.
이 세상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라고 그 아들의 뜻대로 이 세상이 움직여 나간다고 우리 인간들은 모두다 하나님 앞에서 진멸 당한 죄인임을 고발 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어디 성도 자신의 능력으로 되던가?
이 땅에서 선지자의 삶을 살다가 인간의 손에 처절하게 짚발힌 예수님의 영이 그렇게 사용하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던 일이 아니던가?
구약의 숱한 선지와 신약의 믿음의 선배들이 오직 인간의 악한 죄성으로 죽은 그분 예수님이 주되심과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 하다가 목 베임 당한 것이 아닌가?
목사나 섬기고 교회에나 봉사하고 생존에 어려움을 겼고 있는 자에게 구제나 하고 사회봉사나 하고 유니 도덕 적으로 모양새나 내고 이런 일을 하라고 주님이 피를 흘리셨는가?
주를 위해서 죽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 시대 복음을 전하는 것이 곳 세상으로 왕따 당하는 것이다.
이것이 죽음이다.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죽을 맛이다.
성도는 그 속에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기쁨이 있다.
나 예수 믿었으니 천국 가겠지 이젠 주님이 모던 것을 다 하셨는데 내가 할 것이 없네.
구원은 주님만 바라보고 그냥 살면 되겠네.
이것은 죽은 믿음밖에 안 된다.
성도에겐 주님께서 날이면 날마다 자신의 죄성을 폭로 시키시며 구원 받기 전의 그 상황을 되돌아보게 하신다.
현제의 자신의 위치를 확인케 하신다.
너무나 고맙고 감사함을 유발 시키면서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또 다시 생각게 하시면서
주님의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신다.
이 세상은 어두움이요 죽음인 것을 성도를 통해서 나팔을 불게 하시며 천지를 지으신 주인이 이 땅에 방문 하셨건만 인간이 그 자리를 빼앗아 그 분을 죽여 버린 악한 세상임을 죽은 그분이 부활하셔서 세상의  심판주로서 곧 불로서 말살 시킬 것임을 이젠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그 분을 주와 그리스도로 받아 드리고 믿지 않으면 그 분의 십자가 죽으심이 나의 죄로 죽으신 것을 고백되어지지 않으면 심판을 통해 지옥 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음을 주저 없이 알려야만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을 통해서 내 형제가 구원만 될 수 있다면 자신은 생명책에 삭제 되어도 좋다고까지 했다.
이러한 애타함과 사명을 갖고 살아가는 성도가 이 땅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삶이 구원 이후의 삶이 아니던가?
십자가 마을 수련회를 통해 말씀을 듣고 한 몸의 한지체임을 확인하는 것도 이러한 사명을 담고 살아가는 것인지 서로 확인하는 장이 아닌가?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지 않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천사와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 하리라.” 
오늘도 주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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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 구원 이후의 삶  이근호 2008.12.22 - 19:24

일단 제목을 바꿨으면 합니다. '구원 이후의 삶'이 아니라 '구원된 삶'이 적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이 되고 난 뒤에는 인간이 관리할 수 있는 미래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집사님의 글에서 '감사'라는 용어가 나오는가를 살폈습니다. 역시 들어있었습니다.

구원된 삶의 특징은 한마디로 말해서 '감사'입니다.

왜냐하면 '감사'의 특징은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을 용서하신 예수님의 눈만 의식하기에 어느 순간에서도 감사될 만한 순간임을 수용하게 됩니다.

감사의 마음에서 좀더 나가보면 그 감사를 성립시키는 것이 '구원된 삶'에서 나오는데 그것은 성경에서 '은사'라고 합니다. 이 은사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은사는 모두 하나의 은사에서 나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구원된 삶'의 특징은 감사다. 그 감사는 사랑에서 나오고 그 사랑 안에는 용서가 있고, 그 용서가 주어진 이유는 십자가 피이다.

따라서 이점을 다시 축약하면 "피 때문에 감사"입니다. 즉 '피 복음  증인'이 되어  살아가는 겁니다.

이제 하나 주의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타인에게 확인받고 점검받는 식으로 감사나 사명을 감당하지 않아야 하는 겁니다. 다시금 언급합니다만 오로지 예수님의 눈만 마주치면서 감사하면 됩니다.

잘 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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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  ☞ 구원 이후의 삶  강구만  2008.12.23 - 02:09

주님의 것으로 명의가 이전된 성도의 삶이 평탄할수 있겠습니까 이땅에서.(창47;9) 그러나 날마다 말씀의 찔림과 주님 손길로 만들어 지는 다른 현실을 보면서 나그네 인생을 감사하는 복은 성도에게만 주어지는 아픔이기도 하네요.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여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개같은 이방인의 자리를 잊지 않고, 하늘에 걸어두신 해와 달 마저도 죄인에겐 과분한 ,조건 없는 용서앞에 늘 눈물이 나는 주님의 사랑으로만 덮힌 자리, 피뿌린 언약궤 그자리에서 예수님과 눈 마주친  아기 같은 순전함이 텅 빔과 약함이 늘 우리에게 나타나기를 빌어 봅니다.  집사님 가야산에서 뵙겠습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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