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형 에서의 결혼과 그 결혼에 대한 근심

창세기 26장 34-35절 말씀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에서가 사십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의 근심이 되었더라


1. 왜 에서의 결혼을 보고 이삭과 리브가가 근심했는지?  

2. 아울러 이와 같은 에서의 결혼에 대한 내용이 창 26장에 갑자기 튀어나오는 듯한데, 창 26장을 두고 볼 때에 이 짧은 내용이 어떤 것을 뜻하는 건지요?


답변 : 081230 12:30

너무 중요한 질문인 것 같아서 답을 찾아보는 공부가 된다 싶어서 한번 답변을 달아 봅니다.

먼저 창 26장 전체의 이야기에서 26장의 마지막 부분을 에서 결혼으로 짤막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언약의 원리를 살펴보려면 곧 믿음의 원리죠 아브라함 곧 믿음의 조상을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원리 하면 아브라함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왜 예수님의 때를 바라보지 않고서는 왜 안 되는가를 말입니다.

(히 11:1, 개역)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2, 개역)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그래서 믿음의 조상과 그 후손들은 반드시 약속(언약=믿음)의 원리가 그들을 다루고 있고
반대로 이 믿음(약속)의 차이를 드러내는 비언약의 속성들(후손)도 함께 반드시 언급됨으로써 그 차이가 드러나야 하는 겁니다. 반드시 아벨 대신 셋족속이 언급되기 전에 먼저 가인의 족보가 형성이 되어야 하듯이, 예수님의 족보가 언급이 되기 전에 유대인의 족보가 깔려진 배경에서 그 차이를 드러내듯이 말이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믿음이 뭔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반드시 자기 내부 속에서 두 계열의 자녀를 생산케 됩니다. 한 쪽은 아브라함의 가능성에서 나온 자식인 이스마엘이고
또 한 쪽은 아브라함에게서 나올 수 없는 불가능성 속에서 하나님의 자식이 아브라함에게 선물로(믿음=엡 2:8) 주어진 이삭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스마엘은 거부당함으로써 아브라함 개인에게서 출발한 믿음은 거부당하고(지독한 미움,자기부정,육단절,행함차단,인간의 열심 제거, 무조건 틀렸음)
또 반드시 이삭은 왜 옳았는지를 반드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만 알도록 그 죽음에 함께 참여됨으로써만 알도록 하심으로써 왜 무조건 옳은지, 그 상대적으로 아브라함은 왜 무조건 틀렸는지를 알게 하심으로써 미래의 예수님을 비로소 보게 됩니다.
(엡 2:8, 개역)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자 그렇다면 반드시 언약이란 비언약을 동원해서 증거 됩니다.
즉 예수님이 옳았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육인 나의 부정을 동원해서 증거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십자가란 반드시 우리 모든 인간을 가해자로 만드는 원리가 있습니다.
가해자가 아니고서는 아브라함이 바라본 미래(약속의 완료)의 예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반드시 죽이는 입장이 됨으로써 이삭의 희생을 통해서 예수님을 바라봤습니다. 봤다면 이제 이삭의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이 덮쳐오고 자기부인이 덮쳐옵니다. (그래서 멈추게 한 겁니다.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인 거죠)

바로 이것을 감사 라고 하고(감사의 제사) 이것을 거룩 곧 분리라고 합니다.
분리 현상이 없는데 거룩을 입혀 본들 소용없습니다.

즉 가장 믿음 없는 조상인 우상 조각가를 (죄인 중의 죄인) 교체시키는 작업을
예수님의 믿음이 아니면 그 속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는 겁니다.
아브람 속에 갇혀 있는 자를 구출해서 아브라함으로 이전 것은 지나가버린 새피조물을
예수님은 창조 했습니다. (여기서 감히 인간들 해석 곧 성화론자들의 해석은 이 창조에 무능함을 인정하지 않고 창조에 개입하겠다고 심지어 새피조물 조차도 자기들의 성화로 거룩한 행위인 행함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정반대로 해석한 거죠. 이 증거가 불가능 즉 아무리 종교적인 행위를 퍼부어도 단절된 거룩은 예수님 혼자 독점적으로 쥐고 있다는 겁니다.)

자 이런 믿음의 싸움 거룩한 전쟁을 전제로 하고
그 싸움들이 하나하나 사건으로써 터져 나오는 것들이 중에 하나가 바로 창 26장의 사건들입니다.

참재미있게도 우리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누이로 인신매매 팔아넘긴 사건을 잘 압니다. 그 반복이 바로 이삭 또한 아내 리브가의 아리따움으로써 이삭 자기혼자 살고자 팔아넘기는 인신매매 짓을 아브라함과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의 창 24장에 리브가에서 아주 독특한 약속이 일방적으로 상의도 없이 의견도 묻지도 않고 쳐들어옵니다. 마치 동정녀 마리아에게 구원의 전쟁을 벌릴 아기의 탄생을 그것도 처녀에게 일방적으로 선언하듯이 말이죠. (물론 그 이전의 아브라함에게 여호와 사자가 나타나 대적의 문을 여는 씨를 준다고 이미 말했듯이 점점점 구체화 되는 겁니다. 창 22:17)

(창 24:60, 개역)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그것도 천사들이 계시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집보내는 친정 식구들이 그냥 딸 시집보내면서 잘 살아라 행복해야 돼 라고 말하지 않고
넌 원수의 성문을 여는 씨를 낳을 축복된 여자야 라고 아주 이상한 말을
그것도 하나님도 전혀 모르는 이방사람들이 리브가를 그 일 때문에 (원수의 성문 연다는)
억수로 너무 너무 부러워하면서 배 아픈 듯이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시간이 얼마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그 약속이 벌리는 사건이 구체화 되는 것이
원수를 일단 설정하는 작업입니다. 빛(약속성취)이 드러날려면 먼저 어두움(약속방해 우상의 세계, 비언약)이 배경으로 먼저 깔리듯이, 이삭의 아내가 그냥 아내가 아님을 약속을 담은 그릇으로써의 원수의 성문(신약으로 치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몸=예수님의 한몸임을 드러내는)을 여는 약속의 씨를 뿌리는 자입니다.

이 약속의 일을 이삭 쪽에서 의도적으로 사건을 벌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폭하고자 비언약의 세계에서도 의도적으로 벌릴 수도 없습니다.

약속 스스로가 약속을 실현합니다.

그것도 아무도 약속을 눈이 있는데도 못 보고(보긴 봤는데 뭘 봤는지 모르도록)
듣기는 들었는데 도통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하도록 듣기는 일들을 벌리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양쪽 다 부정케 만드는 불의함 속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반드시 불의함으로 여겨지는 평생 이런 실수는 또 없을 정도로
즉 가해자 만들기, 죄인 만들기, 원수 만들기,(반드시 원망할 만한 곳으로 몰고 가서 원망한 증거 3가지 증거물을 담는데 성공하고야 마는 약속)를 실행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인간의 열심은 그 반대로 행할 뿐입니다. 죄인 만들기가 아니라 반드시 자기도 의인 만들고 남도 의인 만들기 위한 쪽으로 행하죠 그래서 악마의 자손인 겁니다.

그 불의한 스캔들이 바로 아내 팔아넘기기입니다.

이것 뭐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못 봐줄 그야 말로 더럽고 더러운 부정타 부정타 할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이삭은 이 일을 평생 지우고파도 지울 수 없도록
사단의 가시처럼 푹 찔러서 빼도 박도 못하도록 하신 겁니다.

그러나 이 일을 개인적인 이삭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주적으로 확대해 전체적으로 보면
바로 선악체제의 인간세계인 뱀의 후손들에 대한
아주 적극적인 예수님의 도발적인 전쟁 시비입니다.

그들의 중심 속에 자기 백성을 푹 심어 넣고
자기 백성 건드렸다는 이유로 그들을 아작 내고 두 조각으로 분리 시켜버리는
그야말로 소멸하는 불을 던지는 겁니다.

주님 혼자 이 전쟁을 벌리고 있지 이삭이나 리브가나 아무것도 모릅니다.
주님 혼자 저들의 배후 세력에 대한 전쟁을 벌리시는 겁니다.

영문도 모르는 것은 그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그들의 아비가 마귀 라는 이유도 반드시 당해야 합니다.

이삭 리브가 또한 예수님이 고엘이라는 이유로 영문도 모른 채 이 사건에 휘말려야만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 때의 인신매매 사건도(창20장), 이삭 때의 인신매매 사건도 (더더욱 무능함을 구체화하죠)또 동일하게 아브라함 우물 사건도(창21장), 이삭도 똑같이 우물 사건도(전쟁을 붙이시고 전쟁의 근거를 알리바이 잡는 겁니다.)
이들은 후에 반드시 약속이 벌리는 일에 반드시 방해꾼으로 나설 전체 판때기 전쟁을 보여줄 자들입니다. 더더욱 오늘날 까지 확대 된 것이 바로 인간 이라는 우상 입니다.

또 여기에 에서 또한 약속의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서 반드시 결혼조차도 그 언약의 성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비언약적인 요소로써(마치 가인족보처럼 말이죠, 아벨 족보를 말하기 위해서 가인족보가 있어야 하듯이, 언약을 말하기 위해 비언약의 세계도 형성 되어야 하는 겁니다.) 에서의 결혼과 그 후손들 또한 언약을 드러내기 위한 비언약적 성향을 드러내어야만 하는 겁니다.

약속은 이겁니다. 미워했다는 겁니다. 창세전의 예정된 하나님의 뜻을 구체화 하는 겁니다.

(말 1:2,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말 1:3, 개역)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롬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결국 질문의 답의 결론은 이겁니다.

에서가 사십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였더니

헷 족속 또한 이 거룩한 분리 전쟁에 동원되는 겁니다. 즉 세상은 약속의 별개의 따로국밥처럼 독단적인 흐름을 개별적으로 형성 할 수 없습니다. 모조리 다 약속을 보여주기 위한 진노의 그릇의 역할을 반드시 다 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거기에 에서가 어떻게 진노의 그릇의 역할을 하는지를 톡톡히 보여주기에 그 증거로써 근심이 되는 거죠.
(또 첨가해보면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은 저번에 질문에 답변에도 언급했습니다만 아브라함 종 엘리에셀 창 24장에서 이사의 아내를 찾는데 있어서 철저한 무능함의 기도와 또 그 무능함의 구체화 됨의 사건이 천사의 개입, 이로써 한 몸 됨이 성사되는 약속이 벌리는 일을 경험하였지만, 정작 에서의 결혼 사건은 마치 라멕의 찬양과 같은 뉘앙스로써 전혀 천사의 개입이 없는 모습인 겁니다. 그래서 근심이 됨과 동시에 그것이 옳았음을 부모들 또한 수긍할 입장이 아닐까 싶네요. 분류 작업을 믿어야 할 판국이다는 거죠.
http://crosslamb.tistory.com/224, 240, 245)

창 39장 하나의 장 자체가 에서의 족보를 나열합니다.
반면에 요셉의 모습(창40장 이후 미움 받아 버림받음)은 또는 야곱의 모습(이스라엘 개명사건 35장=자아삭제 자기부인)은 그야말로 죽음의 족보처럼 그 반대의 양상을 나타냅니다.
마치 가인의 족보가 영웅족보요 번성의 족보요 가인성 확대 바벨탑 구체화 형성이고(창4장 중반이후) 반대로 아벨의 족보는 그야말로 죽었더라 족보 이듯이 말이죠(창5장, 여호와 이름만을 드러내기 위해 정작 다 죽었더라로 향함)

그렇기에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이란 바로 이 약속의 구체화됨에 대해서 정작 본인들이 수긍하고 믿어야 할 판국에 놓여진 주님의 뜻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약속의 운동력을 그들 또한 믿을 수밖에 없는 실현성을 본다는 증거입니다.

바로 본인들이 낳은 자식들이라 할지라도 언약에 의해서 분리 되는 그 여호와의 열심 앞에 그들은 그저 당하는 입장, 기뻐하심(약속)을 입은 입장뿐인 겁니다.

노아가 유언하듯이 술이 깬 이후에 예언으로써 미래를 확정짓는 계시를 바로 남이 아닌 자기 자식 속에서 펼치듯이, 하나님의 뜻이 실현됨을 보게 되는 겁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약속으로 인한 첫사랑 덩어리 이스라엘은 끊임없는 분리와 분리 분리 나누어짐 분류 당함 차이 당함을 통해서 왜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만이 이스라엘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지를 바로 이런 언약이 벌리는 사건과 그 사건에 휘말리는 믿음이 낳은 자녀들의 시각의 증거가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그대로 찔러 쪼개면서 더더욱 실감나게 증거 됩니다.

(히 4:12, 개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자 이렇게 답변을 해 본 뒤에 한번 이근호목사의 답변을 보고 또 댓글을 달든지 말든지 해보죠. 과연 어떻게 답변했는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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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6장 34-35절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2008-12-30 10:27:47 이름 : 제해수    
 
목사님, 창세기 26장 34-35절 말씀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에서가 사십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의 근심이 되었더라

1. 왜 에서의 결혼을 보고 이삭과 리브가가 근심했는지?  

2. 아울러 이와같은 에서의 결혼에 대한 내용이 창 26장에 갑자기 튀어나오는 듯한데, 창 26장을 두고 볼 때에 이 짧은 내용이 어떤 것을 뜻하는 건지요?

늘 복음의 일꾼으로서 주안에서 평안하시기를 바라며...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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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8-12-30 13:21  

성경은, 예수님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의미를 갖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순히 '어떤 이가 태어나서 움직이고 살았다' 정도가 아니라
그들이 하는 짓이 과연 올바른가 그른가 하는 것을 결정하는 중심 기준이 각 시대에도 여전히 있었다는 겁니다.

오늘날에는 예수님이 의미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사도행전 17:30-31)

하지만 구약 때는 구약 나름대로 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중심체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합니다.(창세기 12:1-3), 이삭 때는 이삭이 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기준이 됩니다.(창세기 22:17) 질문하는 본문은 이삭이 중심이 되는 시대입니다.

그 시대에 에서는 이삭의 뜻이 내포되지 않는 혼인을 했습니다. 이것은 곧 이삭 시대에 있어 복과 저주는 각기 따로 나타나는데 에서 계통은 영원히 저주가 비켜가지 않는 계열을 형성하고 야곱은 영원히 축복이 비켜 지나가지 않는 계열이 됨을 말하기 위해서 에서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는 겁니다. 야곱의 운명과 견주고 구별시키기 위함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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