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의 가시

2008-12-30 18:26:17 이름 : 김성환        

바울에게 주어진 '사단의 가시'를 일반 성도가 너무 편의대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예를들어 하나님의 큰 종이 되기위해서는 '사단의 가시(대머리인 목사, 성욕을 참지 못하는 목사, 여성도 종아리에 큰 붉은 반점이 있는 것, 간을 절반 절단한 성도, 개 눈을 한 성도,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성도 등등)'가 필수적이라는 둥 혹은 성도의 해결할 수 없는 비참한 문제를 '사단의 가시'에 적용하여 오히려 자유를 주는 척 하지만 속박을 주는 위험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사단의 가시'를 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바울서신서에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이 '사단의 가시'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어떻게 성도에게 적용해야 할까요? (애시당초 타락 후 인간이 벌여 놓는 모든 일이 사단의 가시적 속성이 아닌가요?)

답변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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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8-12-30 20:55
  
바울의 관심사는 온통 복음 전파에 가 있습니다.
따라서 '비복음'의 움직임에 예의 주시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자신은 영적 싸움'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공중 권세 잡은 자와의 싸우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권세는 바울 및 복음 전파자들을 그냥 방치하지 않을 것이 뻔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악마의 권세마저 하나님 손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늘 자기를 쳐서 본인부터 항상 복음 정신에 굴복하는 것이 요긴함을 잊지 않았습니다. 즉 바울 자신이 교만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깨서 악마를 통해서 바울을 낮추게 하시는 장치를 가동시키셨다는 사실을 바울이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사단의 가시'란 다름아닌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고전 3:7)는 사실을 늘 인정하고 확인하게 하는 요소가 바울 육체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마다. 환경에 따라 다 다르게 나타납니다. 하지만 공통점은 있습니다.

하나님이 심어주신 '사단의 가시'란 항상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함을 확인시키므로 말미암아 늘 '심령이 가난한 자리'로 되돌아오는 현상이 있다는 겁니다.

즉 '타인에 대한 공격'에서 돌아서서 '자신에 대한 가혹한 공격'을 멈추지 않게 만드는 내부의 세력, 그것이 '사단의 가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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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 이것 또한 너무 너무 중요하고 지금까지 연결된 입장에서의 [구원 이후란 없다]와 연관이 되어서 답변을 달아봅니다. 즉 구원 이후란 없다 3 라는 부제에 제목을 감사란 뭔가 2를 제목으로 감사를 중심으로 해서 살펴 볼까 합니다.

먼저 사단의 가시를 먼저 살펴 보고 감사에 대해서 살펴 보면

항상 구약의 그림을 생각해 보면 쉽습니다.
구약의 그림에 자막이 없기에 우리는 이 신약의 자막을 구약의 그림에 붙이면 알수 없었던 비밀의 세계에 모든 완성된 약속이 훤하게 보이게 되겠지요. 즉 십자가 피 중심의 주제의 사건들 뿐이다는 겁니다.

사단의 가시를 내부의 공격으로 본다는 것이 너무 너무 중요한 이유는
외부의 세력인 애굽나라를 박살내고 출애굽을 감행합니다만
정작 출애굽기와 그 이후의 성경은 모조리 다 내부의 공격에 집중합니다.

또 성경 말씀은 청함을 받은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자는 적다 라는 그 관점으로
구원 자체를 다루고 있습니다.

결국 구원을 애굽의 바로왕 으로부터의 탈출에 집중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역설적으로 그렇게 애굽나라로부터 구원 받은 그 이스라엘로 부터의 구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구원 받았는데 그 이스라엘로부터 또 다시 구원이라?

누가 수용하겠습니까? 누가 납득이 가겠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한 예로

저에게 목회와 신학이라는 잡지가 있었는데 그 속의 내용 중에 송제근 목사의 글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제목이 세상으로부터의 탈출 이라는 의미를 다룬 (정확한 기억이 안나는데) 제2의 출애굽인 세상으로 부터의 엑소더스를 말하는 내용입니다.

자 이 예로 인해서 바로 그렇게 주장하는 그 세상으로 부터의 탈출이라고 주장하는 그런 송제근 목사의 주장자 또는 해당자 들로부터의 탈출이라고 선언하는 식이 바로

출애굽 이후의 전체 성경 내용이다는 겁니다.

자 이런 의미로 예를 들면 억수로 많은 예를 나열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출애굽에 대한 자부심과 그런 시도를 주도한 모세에 대한 자부심이 아주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제 2의 출애굽을 시도하는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출로마를 늘 꿈꾸었던 겁니다. 그래서 메시아도 바로 로마탈출을 주도할 것이며 로마는 곧 마귀세계에 해당된다고 본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은 정반대 였습니다.

로마 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꿈을 꾸고 있고 그로 인한 모든 신앙의 구색을 갖춘 유대인으로부터의 탈출을
예수님은 실행하십니다.

자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어긋납니다.

로마로 부터의 탈출을 시도하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전혀 도움도 안되는 사마리아인이나
문둥병자 창녀 특히 세리 이 세리는 그야말로 로마 앞잡이 인 셈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세리를 두둔하고 나선다면 그야말로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용서 못할 입장인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를 두둔해 버립니다. 그것도 아주 예매하게 두둔 합니다.
예수님이 로마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아주 역설적으로 세리(로마 앞잡이)를 통해서 그야말로 역설적이고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는 바로 로마와 유대인을 하나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 비유도 이런 원리입니다. 항상 불의함을 동원해서 빛의 아들들이라고 우기면 우길수록 하나님 나라의 비유의 진위는 더더욱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로마와 유대인을 한 편으로 본다는 시각은 그 당시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상극의 적군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정치적으로도 하나가 될 수도 없습니다.

물론 성전과 율법을 사수하기 위해서 어쩔수 없이 최후의 선택으로써 잠시 손을 잡을 손을 잡을 수 있어도(마치 이중스파이처럼, 기생라합처럼) 유대인 전체의 생각은 적은 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점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해할수 있는 점은 잠시 손 잡는 그 정치술을 말하는게 아니라
(그런 점에서 세리나 그 당시 제사장이나 결국은 똑같은 매국노 이긴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 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판단은 세상사람들이 성경을 보고 다 알수 있는 하나의 정치권력으로인한 인간의 모든 본성일 뿐이다.)

아무리 손을 잡아도 분명히 민족은 다릅니다. 출신도 다릅니다. 미래도 그들은 다릅니다.
손잡는 당사자들이 아무리 손을 잡아도 그 다르다 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압니다. 로마 또한 유대를 잠시 이용할 뿐이고, 제사장도 잠시 로마를 이용할 뿐입니다. 트릭이다고만 말할 뿐이지 본래는 다르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르다 라는 것은 안 변합니다. (경상도와 전라도는 죽어도 하나 될 수 없듯이)

문제는 항상 예수님입니다. 그 다르다 라는 것을 예수님 만큼은 같다 라고 보시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리새인들의 활동들이 모두다 다르다 라는 것에 중점이 있습니다.
그런 반면에 예수님의 최종적인 약속 성취는 바로 십자가 상에서 드러납니다.

로마나 유대인이나 십자가에서는 똑같은 원수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 마저 원수입니다.
십자가 에서만 밝혀지는 의미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도저히 밝혀질 수 없습니다.

또 한 예로 오늘날 교회와 특히 성화론자 개혁주의와 북한의 김정일 사이비 집단이나 또는 누가 봐도(세상 사람들도 다 아는 이단인 통일교나 또는 JMS 정명석 등등) 다 아는 이단들을 누가 가장 그런 집단과 다르다 라고 주장하겠습니까? 당연히 가장 거룩한 행동을 했다고 자부하는 자들일 겁니다. 가장 복음적이고 가장 성경적인 집단이다 라고 주장하는 자들인 거죠. 바로 그런 자들이 저들과 하등 다를바 없는 똑같다 라는 것을 성령은 혼자 확정짖습니다. 결국 모든 인간들은 거부할 수밖에 없는 육의 소욕을 주장하게 되는 셈입니다. 육의 소욕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가장 거룩하다는 집단이 주장하는 것이지 누가 봐도 뻔한 자들의 소욕만은 육의 소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생각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자아를 중심으로 해서 그 영역을 자기 멋대로 설정하는 겁니다.

자 이것을 먼저 전제로 하고 다시 구약으로 가보면

출애굽 이후 곧 구원 이후의 이스라엘을 여호와 하나님은 이 애굽과 나 이스라엘은 다르구나 라는 것을 반드시 다르긴 뭐 달라? 똑같지 라는 의미의 중심으로 여호와의 열심은 진행 됩니다.

맞습니다. 옳았습니다. 애굽의 파라오 왕의 그 강퍅함 보다 더 심하고 심각할 정도로 그 죄성과 악마성이 광야 교회로부터 그 이후의 모든 모습에 다 드러납니다.

마치 오늘날 세상사람들이 교회 사람 보다 더 악한 자들이 없다 라고 말하는데 있어서
항상 교인들은 자신을 항상 빼버린 상태로써 보듯이 말이죠.

얼마나 이스라엘이 악마의 왕인 파라오 왕 즉 바로 자기를 그렇게 압제하고 핍박하고 괴롭혔던 그 파라오 왕 보다 더 잔인하고 악마적인 것이

남이 아닌 파라오 왕의 손에서 구원당한 그 이스라엘 속에 있었다 라는 것을
성경 전체가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의 구원이 헛되다 라는 성경말씀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는 겁니다.

이것을 더욱더 구체화 시키기 위해서 가입된 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악마성 곧 오늘날로 치면 교회의 악마성이죠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서 더더욱 그 악마성이 구체화 됩니다.
오늘날은 교회가 성경말씀 (특히 율법 강화인 산상수훈 지키기)을 통해서 그 악마성을 더더욱 구체화 하는 것과 같은 원리인 겁니다.

율법을 통해서 긍휼을 바라는 상한심령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켰기에 그렇게 지키지 못하는 자를 정죄하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겁니다.
누구처럼? 다윗처럼, 바리새인처럼, 또한 베드로와 제자들처럼

그들은 한결같이 이런 율법의 취지(사랑)를 듣고 하는 말이
그럼 누가 믿겠습니까? 아무도 못 믿지? 그럼 누가 구원 받겠습니까? 아무도 구원 못 받지?

진작 나왔어야 할 말입니이다. 즉 불가능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는 못한다 라는 것을 확정짖고 또 너희는 못하나! 사람은 할 수 없으나! 육은 무조건 틀렸으나! 하나님은 하신다. 주님은 옳다 라는 겁니다.

만약 너희는 못하나 사람은 할 수 없으나를 규정짖지 않고 그냥 은근슬쩍 넘어가서 하나님이 하신다로 넘어가면 율법을 준 취지가 무색해 지는 겁니다.

사랑(믿음)은 인간이 못합니다. 아니 도리어 사랑 할수 있다고 나오는 것들이 왜 거짓인지 조목 조목 따져야하고 철저하게 해부를 해야 잠잠케 되는 겁니다.

이런 원리는 율법이 마치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과 같은 원리로 적용 되는 겁니다. 나중에는 결국 예수님도 또한 똑같은 원리로써 적용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두 패가 나누어지듯이 아브라함을 대접하는 자는 복이고 아브라함을 거부하는 자는 저주가 발생되는 그야말로 복의 기준이 되어서 두 패가 쭈욱 갈라지는 현상처럼 예수님으로 인해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바로 그런 원리로 율법도 그러합니다. 율법의 취지인 긍휼을 아는 자는 율법의 취지를 제대로 알기에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상한심령을 구하지만(다윗이 비로소 구함, 그 이전에는 율법을 쥐게 되니까 도리어 가해자로 전락)

반대로 율법을 통해서 자기를 구축하는 자나 율법을 지키게 되니 도리어 자기자신이 선악과 나무처럼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자기를 꾸미고 하나님과 일치할려는 법을 추구하게 되는 겁니다. 긍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긍휼의 주체가 될려는 겁니다. 용서의 대상이 아니라. 도리어 용서의 주체가 되어서 몇 번 더 용서하면 신처럼 되는가? 몇 번 더 용서를 하면 더 거룩해 지는가? 라는 법에 빠지게 되니까? 바리새인처럼 자신이 소경이기에 긍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소경을 판단하는 위치에서 남을 구원하고자 죄를 연구하는 입장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이런 율법이 그 일의 역할을 톡톡히 함으로써 인해
올무에 걸려들자는 반드시 실족함이 마땅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 또한 실족하는 존재로써 법을 쥔자들에게는 선악나무처럼 보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나 긍휼의 대상인 긍휼을 입음 당하기로 작정 된 자들에게서는 예수님이 불뱀의 모습으로써 나무에 달릴 구세주로 보이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법을 쥔자들에게는 전혀 선악과 스러운 모습이 아니기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기 거북스러워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고 따로 예수의 이미지를 따로 구축하는 겁니다. 산상수훈의 예수로 말이죠.

자 이런 의미로서 광야교회의 모습은 곧 구원 이후의 모습은
구원의 정당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구원의 비정당성으로만 채워지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구원 받을 자격 조차도 없는 상황들만 나열이 되는 겁니다.

저들 멸망당한 지옥으로 간 자들 보다 더 나은 것들이 일체 없는 것들로만 채우는 겁니다.

그래서 더더욱 구체화 시키기 위해서 율법도 가입이 된 겁니다.
율법 조차도 처음 자리를 겨냥한 겁니다. 곧 첫사랑입니다. 무능함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의 잉여인 편애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이스라엘 이라는 전리품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스라엘이 그런 타이틀을 벗어버릴려고 하다 보니 전리품이 아니라
그럴만 해서 그렇게 되었다 라는 조건의 구색을 갖출려고 하는 악마성을 더욱 더 드러냅니다. 무조건을 조건화 시키겠다는 겁니다. 창조(없음에서 있음)를 모방(있음에서 있음)으로 바꿔치기 할려는 모습이 애굽이 아닌 이스라엘 속에서 더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바로 그런 작태들로만 교회에 채워버립니다.

즉 산 자의 하나님을 죽은 자의 하나님으로 바꿔치지 하는 것들이
바로 애굽도 아닌 이스라엘 오늘날 기독교가 그런 작태를 벌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자신들만이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산 자가 바로 자기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산 자란 예수님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앞에서 상대적으로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어떤 인간도 자신을 죽은자로 인정 못합니다. 세리로 인정 자체가 안됩니다.
그래서 긍휼이 필요한 게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 필요하기에 자기자신이 산자가 되어야만 된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의해서 또 모든 인간을 가해자로 규정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인간은 죽은 자로 판명이 낫고 그런 죽은자의 하나님이 가짜 임이 판명이 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대인의 하나님입니다. 오늘날은 기독교의 하나님은 가짜 임이 십자가로 인해 판명이 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예수님이 규정시켜 판명난 것을 바꿔치기 함으로써 졸지에 십자가가 인간들의 종교재판에 서게 되어 칼날에 두 동강 나야할 입장에 놓이게 된 겁니다. 이 십자가에 뛰어드는 자가 바로 상한 심령입니다.

누가? 어떤 누가? 뛰어 들겠습니까? 평상시 사랑이라고 목터지도록 외치는 자도 다 등돌리고 도망칩니다.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바로 이런 육의 모든 내막을 밝혀내는 것이 십자가의 사랑이요 구약의 광야 교회입니다.

왜 그럴까요? 일체 행함을 보겠다는 취지가 아니라
십자가가 심은 그 첫사랑만 계속 구체화 시키겠다는 겁니다.

여기에 구원이후의 삶 따위라는 그 잡것과 인간의 행함과 의와 삶을 그 똥덩어리를
일체 가미 못시키기 위해서 더더욱 깊게 깊게 그 의미를 확대 시키는 겁니다.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가 어떠한가를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막으면 막을수록 인간의 행함은 더더욱 자극을 받고 더욱더 거세게 그 결핍을 채울려고 달려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롬 5:20, 개역)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은혜의 진가가 더욱 더 빛을 더해 갑니다. 아무리 어두움이 더더욱 어두움으로써 깊이 그 악마성을 드러내어도, 죽음의 권세가, 음부의 권세가 아무리 공격해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 아무도 없습니다.

더 강하게 공격하면 할수록 그 사랑은 더더욱 더 커지는 겁니다.

(롬 8:31, 개역)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3, 개역)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개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결국 은사란 기존 교회에서 말하는 성령의 은사에 반대 개념입니다. 그 반대의 자리에 놓여지는 겁니다. 미움 받으면 받을수록 주의 사랑이 더욱 더 커지는 자리입니다.

자 이것이 바로 구약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구원 이후에 채우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사랑을 회피하고 구원 이후의 삶을 자기들의 거룩과 의로움으로 채워버립니다. 그리고 법만 붙잡고 자기를 방어하고 구원의 정당성과 구원에 대한 집착만으로 하나님의 성전에 가득 채워 버렸습니다.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이제는 더더욱 그 성향들이 두 세배 더 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미친 놈들이 한 둘이가 아닐 정도로 범람할 정도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에 미친자는 없습니다.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이것이 너무 너무 감사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찾아 봐야 하는 겁니다. 유일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미친자가 있는데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보통 가끔식 예수님에 미쳤다고 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그렇게 우기거든
항상 성경에 나오는 사도바울과 비교해 보시길 바랍니다.

딱 하나만 보면 됩니다.

사단의 가시입니다.

자기들의 교회가 진짜이다 라고 우기는 교회가 나타나거든 딱 하나만 보면 됩니다.

사단의 가시가 있는지를 말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속에 남은자를 보시면 딱 하나만 보시면 됩니다. 사단의 가시입니다.

아벨의 제사가 가인의 제사 보다 더 나은 제사인 이유는
바로 사단의 가시 때문입니다.

가인의 손에서 죽는 것을 하나님은 반드시 빼독박도 못하도록 푹 개입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더 나은 제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증거하지 않겠다고 한 이유가 성경 말씀은 바로
모든 인간을 사단의 가시로써 예수님 속에 푹 깊게 빼도박도 못하도록 푹 수셔 놓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대중들은 자기 장애자 자식이 자기의 십자가 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런 대중의 어리석음에 어린아이 취급하듯이 한 수 가르치겠다고 나서는 종교지도자들은 자기의 십자가를 그렇게 해석하면 안된다 라고 가르치는 것으로 그런 무지를 깨뜨려주는 것이 지도자 다움이라고 착각하는 자들 또한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기는 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야 그런 자들이 화를 내는 본색이 드러나는 겁니다. 십자가는 단절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했는데 안다고 하는 자들이 나타나 가르쳐 주겠다고 나선다는 자체가 말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주님의 종이라는 근거가 어디있냐 말이죠? 근거도 대지도 못하는 겁니다.
그래놓고 주님의 종이라고 우기는 짓은 여전하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바로 주님의 종 다움을 갖추었고 그 갖춤에 대중 몇몇이 객관화 다수화 되었기에 그 다수 속에서는 먹혀들었기에 정당성을 주장하는 겁니다.

기가막히는 주장이기에 또 그 자체가 그들이 그렇게도 주장하는 객관성에 안 맞기에 그냥 입 다물고 밀어붙이는 겁니다. 알고보면 가장 객관성이 가장 주관적인 억지부리기 이기 때문인 거죠.

바로 이런 모습들이 구약 이스라엘의 모습 속에서 다 드러났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여전했고

예수님을 죽이면서 까지도 여전했고

예수님이 죽은 뒤의 모든 인간 역사도 여전합니다.

그래서 사단의 가시는 아무에게나 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낮추어졌기에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낮아질수 없기에 사단의 가시가 있는 겁니다.

사도바울 조차도 낮아질수 없기에 주님이 직접 푹 수시는 겁니다.
자고치 않는 일에 사도바울에게 맡겨버리지 않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넘어지지 않도록 베드로에게 기도를 맡겨버리지 않습니다.

아예 기도에서 조차도 무능함을 선언해 버립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아니면 안된다는 겁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다른가요? 똑같습니다.

바울도 무능함을 선언해 버립니다. 사단의 가시 조차도 못 빼는 주제에 남을 구원시키겠다고 복음을 전하겠다고 나서는 것 조차도 그야말로 교만이다는 선언인 셈입니다.

그래서 겸손을 바울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직접 나서면 안될 정도로
바울은 무능하고 그정도로 가망없는 자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구원 이후의 삶의 논리들을 들어보면 가관입니다.
무능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채우고
가망 없는 자임을 아는 겸손이 아니라
늘 결핍을 채울려는 종교라는 악마에 늘 사로잡힌채로 자기 의로움에 집착하는 교만 뿐인 것을

자꾸 가면으로 위선으로 가리우고 본심을 감춘채로 구원 이후의 삶을 추구하더라 라는 겁니다.

자꾸 긍휼의 대상인 긍휼의 옷을 벗어버리고
자꾸 긍휼을 베풀고 싶어하는 높은자리를 추구하고파 하는 겁니다. 남들이 인정하는 자리

결국 사단의 가시란 상대적인 의미로써 바울 조차도 높은자리 앉을 수밖에 없는 육적인 자 로써 일체 영의 사람 됨에 바울에게 양보 못하겠다는 전체 전부를 주님이 일일이 직접 다 창조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바울은 자신은 창조에 무능함만 드러나는 그야말로 사랑 그 자체요 창조 그 자체를 누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지키는 것이 단 하나도 일체 필요함이 없는 사랑을 용서를 누리는 거죠.

바로 이런 복음과 정반대로 가르치는 것이 오늘날 교회들입니다. 교만한 자들만 가득한 양의 탈을 쓴 늑대들만 양산되는 강도의 소굴입니다.

(막 11:17, 쉬운) 『그리고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강도의 소굴' 로 바꾸었다."』

기도와 강도를 대조 시키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자는 강도의 손에 죽도록 되어 있고 (아벨)
강도는 기도하는 자를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가인)

아벨은 이 사단의 가시를 감사로 받아들이고
가인은 이 죄의 소원을 넘어설려고 뺄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을 사단의 가시로 십자가에서 규정 했습니다.
또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을 사단의 가시로 십자가에 못밖았습니다.

서로 서로가 영원한 전쟁으로 약속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도록 했습니다.

(창 3:15, 개역)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약속 자체가 감사 그 자체인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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