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12-31 19:10:27,

눅23:43에 나오는 낙원은 무엇인가요

(눅 23:4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답변 :

(눅 23:39, 개역)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눅 23:40, 개역)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눅 23:41, 개역)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눅 23:42, 개역)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눅 23:4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주 중요한 질문인 것 같습니다. 오늘 수요 설교 내용과 연관이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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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나열해 보면

지금 한 쪽 강도에게 예수님이 그 동안 써 왔던 표현과 다르게 낙원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 왠지 낯설어 보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이 부분 밖에 없고
나머지 두 군데가

(눅 23:4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고후 12:4, 개역)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계 2:7, 개역)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이렇게 나오네요 물론 저는 원문 모릅니다. 그리고 번역본은 개역한글로만 파악해 봤습니다.

그동안 써 오던 의미와 달리 표현한다는 것에서 뭔가 다르다 라는 느낌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들 하나님 이라고 감히 그 거룩한 이름을 부를 때 인용할 때 적을 때 등등 목욕을 한다든지 또는 자기를 돌아보면서 죄를 먼저 씻는등의 회개라든지 아니면 정결의식을 한다는 의미들처럼 감히 가까이 할 수 없는 그 거룩 앞에

예수님은 아주 친근하게 아빠 라고 아바 아버지 라고 표현 했습니다.
그렇게 표현해 버리면 아주 어렵게 다가간 자들이 마치 할아버지 수염 잡고 노는 철없는 손자 보듯이 나무래고 야단칠 겁니다.

이런 부분들은 예수님이 항상 어린아이를 앞장세울때마다 늘 벌어진 사건 속에서도 드러납니다.

바로 그런 것처럼

예수님 자신의 나라가 이 강도는 뭔지도 모르고 신학을 했겠습니까? 신앙 생활을 했겠습니까? 종교행사를 했겠습니까?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에게는 그렇게도 천국 비유로 못 듣도록 못 믿도록 온갖 어려운 의미로 가득 채우면서도
정작 이 강도한테만은 낙원이라는 의미로 아주 친근하게 다가가서 낙원 즉 좋은거야 좋단다 라고 좋은 곳으로 소개하는 겁니다.

천국의 의미를 알겠습니까? 뭐를 알겠습니까? 그러나 좋다 라는 것은
평생을 나쁘다 속에서 살았던 그 강도에게 심지어 지금도 죽어가고 있는 나쁜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마지막 한 순간이 좋음으로 인해서 전부다 다 좋게 되고

상대적으로 그동안 아무리 좋았어도 끝이 나쁜 이 세상 사람들과 가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종말 자체를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쁘게 죄의 소원처럼 덮어 씌움으로써 그동안 아무리 좋았어도 오늘밤 니 영혼을 취해버리면 다 나쁘게 된다는 식으로써

상대적인 좋다 라는 의미로 예수님 자신의 나라를 소개 하는 겁니다.

결국 강도의 고백처럼 이 분은 좋은 분이란다 라는 다른 강도에게 했던 그 주장 그대로

예수님 자신도 한 쪽 강도에게 바로 너가 말한 그 좋은 곳 내가 함께 하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결국 좋은 곳 이라는 장소가 중요한게 아니라
누구와 함께 하느냐 라는 겁니다.

바로 너가 좋은 분이다 라고 한 그 자가 나다 그 나와 함께 하기에 좋은곳 곧 낙원이다
즐거운 동산이다는 겁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천국을 쟁취의 나라로 착각하기에
즐거운 동산이 아니라 누리는 곳도 아닌
그 속에서도 또 경쟁으로써 누가 더 성화 되었는가 하는 나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현재의 행동들이 역시나 똑같이 천국에서도 동일하게 할 행동이기에 그렇습니다.

결국 그런 자는 천국 갈 수가 없기에 미리 탈락 시키는 겁니다.

지키는 곳이 아니라 누리는 곳이기에 지금 천국 못 누리는 자는 죽어서도 못 누립니다.

즐거운 동산을 가장 마지막 순간에 이 강도는 누렸습니다.
이 좋은 분이 지금 너 앞에 있는데 이 옳으신 분을 너 같은 놈이 틀렸다고 말을해?

옳다 라는 의미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한 쪽 강도는 다른 강도를 거의 정죄 수준으로 몰아 붙입니다. 이유는 딱 하나 예수님 곧 옳으신 분을 좋으신 분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그래서 옳다 라는 상대적인 반드시 넌 틀렸어를 명확하게 한 겁니다.

마치 용서의 의미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심판의 의미를 명확하게 한 일만달란트 탕감한 임금 비유가 바로 살벌한 심판이 곧 용서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겁니다.

또 사랑의 의미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모든 인간들을 십자가의 처형의 재판관으로써 가해자로 만드는 원수 또는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라는 겁니다.

죽음 보다 강한 사랑이기에
죽음 속에 가두듯이, 죄 속에 가두는 겁니다.

바로 이런 의미로써
낙원이란

평생을 강도 짖만 한 자에게 누가 봐도 즐거움이란 의미가 그 강도에게 붙여서는 안된다는 그 불가능성을

예수님은 가감하게도 뻔뻔스럽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즐겁고 신나는 동산을 강도 너 에게 가장 잘 맞는 선물이야(원인 없는 결과, 잉여품) 라고 주시는 겁니다.

한번은 이 내용을 청년회 공부에서 다룬 적이 있는데
우리 청년 하나가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강도는 평생을 강도짖 했어도 천국 갑니까?

얼마나 솔직한 질문인지

거기에다가 저는 한 술 더 떳습니다.

바로 천국 보내기 위해서 평생을 강도짓만 하도록 하셨다 라고요.

자 이렇게 되면 수많은 목사들이 공격을 할 겁니다.
그럼 강도짓 해도 된다는 소리 아니냐? 그렇게 가르치면 되겠냐? 개판되게?

저는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낙원은 다른 강도 즉 한 쪽의 다른 강도에게는 해당 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창세전에 택한 강도는 그 사람 뿐입니다. 문제는 누가 함께 했느냐죠? 강도 짓 해도 주님이 함께 한 적이 없는데 강도 짓 해본들 소용 있을까요?

마치 이것은 베드로가 부자청년이 가난한 자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심하고 돌아서니까 베드로가 그럼 나는 재산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 이거 완전 정답이구나 야호 신난다. 그동안 예수님은 날 늘 티박만 주었는데 이제야 예수님이 분명 말한 저거 내가 한 적이 있고 실천한적이 있기에 드디어 인정 받겠구나 라고 얼마나 목말랐던 갈증을 해소할 기회를 잡고서 유감없이 발휘 했겠습니까?

그런데 웬걸? 역시나 티박입니다.

먼저 된자 나중 되고 나중 된자 먼저 된다고 또 불가능성으로 돌려버립니다.

강도짓이 중요한게 아니라.
누가 함께 했고 그 강도짓 보다 더 뛰어넘는 용서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자에게 주어졌을때에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주님의 사랑의 극대화 에는 관심이 없고

그 강도의 행위와 자기의 행위를 또 비교하고 의식하고 경쟁하고자 하는 선악의 사고방식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구원받은 강도처럼 강도짓 평생 흉내 내어보세요 구원되는가?
당연히 안되죠

그런데 사실은 인간들은 평생을 강도짓 했습니다. 공기를 강도짓 했고
햇빛을 강도짓했고요

또 그 결과로 강도짓 보다 더 심각한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강도 나무랄 입장이 못된다는 것은
죽는다는 입장 아래에서는 똑같은 범죄자 이다는 증거입니다.
안죽는자 만이 강도와의 차이성을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자입니다.

자 그런 입장에 강도를 나무랄 입장이 될까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변호하고 대변할 입장에 서야할 자들이 있는데
바로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만히 못 있고 나설 수밖에 없고
예수님은 바로 그런 강도의 굴혈의 소속된자들을 반드시 시비걸도록 유도하시는 겁니다.

법을 안 지켰다면 절대 안 나섭니다. 반드시 지킨 것이 있기에
강도 보다 상대적으로 나은 점이 있기에 나설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근거는 법 지킴 이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강도야 말로 오늘날 기독교 2천년 까지
해석불가인 걸림돌입니다.

영원히 거리끼게 하는 마치 롯처럼
때려죽어도 롯 과 함께 천국에 지낼수 없도록 하시는 겁니다.
구원 받은 강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려 죽어도 저 더러운 강도 와 함께 낙원에 있을 수 없도록 걸림돌을 박은 겁니다.

얼마나 친근하게 다가가셨는지
평생을 종교꾼들이 천국입성을 시도를 해도 철저하게 막혀서 들어갈 수 없도록 되어 있는 천국을
아주 쉽게 아주 친근하게 아주 즐겁게 아주 넉넉하게 누리면서
그 동산의 모든 아름다움을 너 강도와 함께 하겠다고 손가락 걸고 엄지 찍고 지장 찍고 뭐라카더라 프린트까지 하고 복사 까지 한다는 아이들의 즐거운 손가락 약속처럼 친근하게 다가가는 겁니다.

아무도 상상 못했던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낯설은 낙원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가장 존경 받는 자는 천국 자체가 너는 악마라서 도저히 못 들어와 라고 선언하면서 적극적으로 막는 모습이고

반대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너는 백프로 지옥갈 놈이야 지옥 안 가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누구든지 장 지지겠다고 말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확신하는 그 자가

팔을 어긋맞듯이 낙원 자체가 친근하게 다가와서 아주 너끈하게 거리낌없이 이런 강도마저도 소화할수 있는 넉넉한 사랑이다 라는 겁니다.

누가 이 낙원을 기뻐하겠습니까?
낙원이라는 좋은 곳은 결국 누구에게는 반드시 나쁘게 다가간다는 의미입니다.
선악을 아는 인간 에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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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1 22:31:27,

막벨라굴에 들어간 사람이 아브라함 사라 이삭 리브가 야곱 레아인데 라헬이 못 들어간 이유가 무엇이고 의미가 뭔가요 그리고 레아가 들어간 의미는 무엇인가요

답변 :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회에 한번 생각을 나열해 보면

왠지 저는 이 막벨라 굴이 약속의 상자 같이 느껴집니다. 즉 십자가 라는 박스처럼
주님의 용서가 주님의 약속이 여기에 까지 펼쳐졌다 라는 증거인 셈이지요.

레아가 들어가고 라헬이 못 들어간 이유는 약속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 됩니다.

야곱의 본처는 라헬입니다. 레아는 본처가 아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아가 들어간 것은 전적으로 긍휼 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라헬이 안 들어간 이유는 (확인 못했습니다. 일단 질문자가 파악한 그대로 수용해서 답변해 보면)

라헬은 분명 레아 보다 더 사랑한 라헬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야곱의 사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없는 문제로 인해 투기 하였다 라고 나옵니다.

의외로 성경은 이런 부분을(마치 인간들의 사적인 개인문제들임에도 불구하고, 늘 드라마 속에 뻔하게 나오는 주제들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소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 투기와 질투를 마치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성향인냥 다루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막벨라 무덤이라는 특정 공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라는 나무와 또는 그 장소에 국한 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 자체를 우주화로 극대화 시키는 영역 공간 장소 파괴 라는 겁니다.

즉 사랑은 질투다 라는 점을 말이죠.

마치 아벨 자체가 가인 보다 더 사랑받았다 편애 받았다 라는 문제를
죽음으로써 그 특정공간의 장소에서 벌어진 사건을 우주화 해 버려서
모든 인간 개개인의 가정 구석 구석에 이 가인과 아벨에게서 벌어진 사건을
구체화 시키겠다는 의미처럼 말이죠,

실제로 예수님이 아벨의 피부터 사가랴의 피 까지 갚겠다 라고
그 과거의 캐캐묵은 사건을 그것도 아벨 시대에 태어나지도 않은 후대의 사람에 묻겠다는 자체가 법으로도 형성 붌가이고 말도 안되는 소리이듯이

그 말도 안되는 것을 말 되도록 더더룩 구체화 시키겠다는 것인데
실지로 이런 사건들이 늘 수시로 터져나오는 겁니다.

참 이상하지 않나요?

빈말이 아니더라 라는 거죠.

오늘도 강구만 장로님과 차타고서 대화한 내용 중에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자본주의 경제구조가 저 구석 아프리카 짜기 다 하나로 묵여졌기에
미국의 한 사람의 탐욕이 저 주석에 있는 아프리카 사람에게 까지도 영향을 미치도록 한 시스템의 흐름 속으로 역여져 있다고 말이죠.

과거에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지하자원의 광물을 캐 가지고 간 것에 평생 한풀이로 하는 것이 지금은 한국이 저 나이지리아 석유를 다국적 기업과 함께 갈취함으로써 물론 돈주고 정당화 시키지만요 정작 그 나라의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비리의 썩은 집단의 부요를 더욱더 풍요케 함으로써 가난한자를 더욱더 상대적으로 더 결핍케 만드는데 공조를 한다는 겁니다. 마치 검은 석유의 저주처럼, 검은 다이아몬드의 저주 처럼  영화로도 나왔지요 블러드 다이아몬드? 제목 맞남? 피의 다이아몬드

결국 모든 인간은 공범입니다. 그래서 아담 한 사람의 죄가 전 지구 구석 구석 까지 펼쳐지듯이 과거에는 성경 구라다 라고 우겼지만 지금은 세상이 오히려 실감나게 격고 도리어 교회가 눈과 귀가 막혀 있을 정도로 까막눈이 된 들을려고도 안하고 볼려고도 안합니다. 그 정도로 꽉 꽉 막혀버린 속물들입니다.

한 사람의 탐심이 저 지구 반대편 사람의 가난의 병에 더욱더 가속화 시키는 겁니다.

친환경 물건 이라는 것도 아무리 좋아도 그것은 생산하는 사람들은 지옥같은 개취급 속에서 친환경물건을 생산하고 있다는 것을 얼마전 w 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봤습니다.

아무리 선하다 라고 해도 그것보다 악한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예수님의 선하심 마저도 악하다 라고 취급한 인간들인데
그 인간들이 아무리 선한 일을 골라서 골라서 해 본들
그 아담의 속성은 어디를 가지 않습니다.

아무튼 막벨라 무덤은 약속이 여기까지 성취 되었다 라는 것을 어떤 특정 장소 공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 조차도 그림자이고
우주적으로 확대하는데 목적이 있겠지요
그렇다면 라헬은 들어간다는 것 자체의 목적 보다
약속의 확대로 보시면 되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라헬의 그 질투는 곧 사랑을 죽음과 결부시키면서 까지 확대시키는 두 권세의 문제로 말이죠.

일단 여기까지 제가 방금 생각해 본 것들이구요

이거 공부할려면 무지 시간이 걸릴 듯 하네요

처음부터 다시 공부해야 할 테니까요 그냥 간단하게 요행으로 답을 구해 보겠습니다.


2008-12-31 23:07:42,

아 그리고 요셉은 막벨라 굴에 왜 들어가지 않은건가요  그리고 왜 가나안땅이어야만 했는지도 궁금합니다

답변 :
이것 또한 라헬의 의미처럼 처음부터 다시 공부해야 답변 드릴 문제인 것 같네요

요셉은 심지어 12 지파 속에도 안 들어가고 공중분해 되어 버리죠.

자신의 아들 둘이가 야곱의 아들 속에 편입이 되어서 13 지파가 되지요.
그래서 레위 지파 빼고 12 지파가 되는 겁니다.

12 아들 빼기 요셉 =11지파 더하기 요셉 두 아들 = 13지파 빼기 원래 레위지파는 빼고=12지파

즉 12을 구지 맞추는 이유는 군사 군대 행렬입니다. 3 3 3 3 이것은 계시록의 14만 4천 또한 12지파 이스라엘의 전쟁행렬인 사각박스 모습입니다.

동서남북의 사각진열 형태이지요. 이 모습이 마치 법궤 혼자서 행군하면서 우상을 모조리 다 타파하는 모습처럼 천사의 행군 모습과도 같습니다. 어떨때는 독수리 모습 어떨때는 사자모습 어떨때는 인간 모습 여러 모습으로 행군하는 법궤 자기 혼자 발이 달려서 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 돌아다니면서 깨 부수는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이 12 지파는 사랑의 대상들이지 사랑의 주체자들은 아닙니다.
그래서 12 지파는 나처럼 이 박스에 담기는 자만이 산다 라고 전리품 무능자의 모습이고
실질적으로 그들의 허물을 담당하는 자는 그들을 끝까지 책임지는 자 곧 섬기는 자입니다.
바로 요셉과 같은 자입니다. 그렇기에 요셉은 12 지파에 해당 되지 않습니다.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감당자 인 셈인 구원자 인 셈이지요.

어떻게 보면 막벨라 무덤에 담겨질 긍휼의 대상이 아니라
정작 막벨라 무덤이라는 박스에 담긴자들의 허물을 감당할 자이기에
들어가지 않지 않나 생각 됩니다.

또 가나안 땅이어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은 무슨 말인지 아직 이해를 제가 못하고 있습니다. 왜 하필 가나안 땅에 막벨라 굴을 사야만 하는가? 그것은 바로 약속 성취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이루었다 라는 증거에 대한 확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가나안 땅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이유는 약속의 땅으로써 선취인 셈입니다.
요셉은 이미 완료한 겁니다.
사랑으로서 저들의 허물을 감당한 겁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기에 이미 완료입니다.

자 이런 의미로 볼때에 하나님의 약속은 멈춘적이 없고
인간은 죽으면 그만이지만 그 인간에게 약속한 약속은 인간이 살았던 즉었던 상관없이 여전히 유효하며 인간은 죽으면 그만이지만 약속은 취소불가 라는 반드시 성취됨을 미리 완료로써 더더욱 구체화 되는 선취를 보여주는 겁니다.

결국 약속의 상대적인 인간 자체는 항상 비약속적이다는 것이겠죠.
비언약적이다는 겁니다. 우상적이고 자아만을 의식하는 타인과 비교하는 믿을게 못 되는 존재라는 겁니다.

답변이 워낙 시원찮기에 저도 모르는 거라서 같이 배우는 기회로 목사님에게 물어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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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벨라 굴?

2008-12-31 23:59:30

어려운 질문이 왔는데 답변 부탁드립니다.

1. 눅23:43에 나오는 낙원은 무엇인가요

(눅 23:4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2. 막벨라굴에 들어간 사람이 아브라함 사라 이삭 리브가 야곱 레아인데 라헬이 못 들어간 이유가 무엇이고 의미가 뭔가요 그리고 레아가 들어간 의미는 무엇인가요

3. 아 그리고 요셉은 막벨라 굴에 왜 들어가지 않은건가요  그리고 왜 가나안땅이어야만 했는지도 궁금합니다

저도 겻들여 질문해 보면

4. 이 야곱의 아내 라헬이

왜 갑자기 예레미야 31장의 예언에 언급이 되어야 하는지? 질투와 연관 된 것인지?

(렘 31:15, 개역)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이것이 또 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에 대해서 알고 싶네요. 

(마 2:13, 개역)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마 2:14, 개역)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마 2:15, 개역)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 2:16, 개역)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마 2:17, 개역)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마 2:18, 개역)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마 2:19, 개역)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마 2:20, 개역)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이 기회에 막벨라 굴과 라헬의 의미를 제대로 정립해 주세요.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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