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가나안 땅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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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1 10:59:59,

왜 가나안땅이어야만 했는지를 물어본것은 왜 가나안땅을 언약의 땅으로 지정하신것인지 왜 그곳을 약속의 땅으로 선취하신것인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한것입니다

가나안땅이 그리스도라고 하는데 어떻게 연결되는것이길래  그렇게 되는지도 궁금합니다

답변 :

아 그랬군요 역시나 묻는 의미가 있었는데 뭔가 생략된 느낌이라서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아브라함(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 언약은 믿음이란 뭔가를 말해주는 언약입니다.
그래서 할례언약인 육의 단절을 곧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신약에서는 세례입니다.

기존의 세례 개념은 구원받기 위한 하나의 절차로 종교의식으로 취급합니다만 그것이 엉터리임이 어제 수요 설교에서 세례라는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의인 없애 버리고, 메시아 없애 버리고, 구원자 없애버리고
너의 진짜 모습인 그 죄인에게 합류하겠다는 주님 쪽에서의 실행이지
인간이 구원 되기 위한 종교절차는 세례를 지킴으로써 예수님의 세례를 반드시 거부하겠다는 취지인 셈이지요.

자 이런 아브라함의 언약은 이런 믿음을 통해서 가나안 땅이라는 원수의 땅을 치는 겁니다.
육의 단절을 개인의 신체에서 한 족장가족으로 확대하고 그 족장부족에서 한 민족 국가에 확대 됩니다.

단순히 수치덩어리를 끊어버리는 의미가 아닌
인간의 사고방식 자체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는 겁니다.
육의 사고방식인 바로 선악의 법 사고방식입니다.

자 그런데 왜 하필이면? 가나안 땅인가?

그것은 노아언약 때문입니다. 노아가 예언을 했지요

그래서 믿음의 전쟁의 배경이 되는 땅이 바로 함 땅과 가나안 땅입니다.

함 땅은 애굽 땅이고 가나안 땅은 함의 열매인 가나안의 족속들이 있는 땅입니다.

문제는 왜 약속의 땅인가? 하는 겁니다.

약속이란 곧 사랑의 성취입니다.

그 사랑은 바로 원수에게서 가장 사랑의 가치가 부각이 됩니다.

많이 탕감받은자 일수록 많이 사랑한다는 겁니다.

그 죄인과 원수의 땅이 곧 약속의 실현 장소인 셈입니다.

마치 요나의 표적이 바로 음부의 권세가 가장 작렬하는 지옥의 어두움인 사망 속에서 피어나는 겁니다.

그래야 죽음 보다 강한 사랑이라는 의미가 성취 되는 겁니다.
죽음과 대비된 의미가 바로 죽음 속에서 죽음을 이기는 생명을 통해서 그것이 유일한 생명이지 유사 생명이나 죽음 근처도 못간 생명은 다 허망한 것이듯 말이죠.

원수의 성문을 여는 곳이 가나안 땅이자 동시에 약속이 실현될 땅입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이 달리시는 그 십자가가 꼿히는 땅이 바로 가나안 여부스 땅인 예루살렘입니다.

그곳의 골고다 언덕 해골의 언덕 죽음의 언덕이 졸지에 구원의 언덕이 되고
그들이 구원의 성이라고 여겨서 성문 밖에서 영문 밖에서 죽인 그 곳이 구원이고
정작 구원의 성이라고 여긴 하늘의 문이라는 곳이 도리어 지옥의 본부인 셈인 겁니다.

자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노아의 예언으로 인해 함과 가나안 땅은 믿음(약속)이 실현 되는 땅이기에 그런 겁니다.
그런 악마의 터전 마저도 주님은 능히 생명의 땅으로 만드시는 창조주 이듯이
악마 자식인 인간의 그 악마성도 능히 이기는 약속의 성취가
능히 모든 것을 뚫고도 남는 구원의 뿔을 곧 희년을 실현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인간은 방해자요 무능자임만 드러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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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1 11:02:26,

함의 자손 가나안과 관련된 것인지 그렇다면 가나안을 저주 했으면서도 왜 가나안을 지정한것인지도 궁금합니다.


답변 :

바로 그런 취지로 볼 때 성경 전체는 일관성 없는 모순 덩어리입니다.
맞습니다 모순입니다. 반드시 모순으로 보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선악의 법이 이미 자리 잡았기에
선악과 나무를 왜 심었느냐 라는 것 조차 따질 수밖에 없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따질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즉 성경 전체는 불공평입니다.
성경 전체는 모순입니다. 모순으로 풀어야지 모순 아닌 식으로 풀겠다는 취지가
자신의 선악을 주장하겠다는 원리가 되는 거죠.

인간은 선악을 왜 에덴동산에 두느냐 라고 따질 입장이 못됩니다.
이미 장악 당했기에
고쳐달라고 하는 환장의 입장이지
왜 나를 병들게 하느냐 라고 의사를 찾는 입장이 아닌 겁니다.

자 그렇다면 왜 가나안을 지정했는가?

첫 번째 질의에 답변에서도 언급했듯이
예수님의 관심사는 인간 구원이 아니라(인간 구원은 인간들만이 제일 아쉬워 할 뿐입니다. 그러나 구원해 줘 봤자 문둥병자 9명 처럼 자기유익으로만 챙길 뿐입니다.) 약속 성취에만 관심 둡니다.

그렇기에 철저하게 불공평 곧 예수님 마음대로입니다. 자유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님 마음대로 하심에 인간은 수용할 수 있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가장 적극적인 반발입니다.
아니 그 반발을 유발하는 것이 바로 자유 인 예수님 마음대로입니다.
결국 인간은 인간 자기 마음대로 예수님을 조종하고파 합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이 약속이 땅이 된다는 모순을 제거하고파 하고
차라리 깨끗한 땅을 따로 설정하던가? 아니면 번거롭게 두 번 칠 필요 없이 한번에 쳐 버리는 애굽 땅을 약속의 땅으로 삼고
구지 광야생활을 격지 않도록 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느냐 라는
인간 자기 멋대로의 성경 조작을 예수님을 리모콘 조종으로 하고픈 마음을 유발케 하는 겁니다.

사실상 인간의 신앙생활 자체가 온갖 거룩한 것으로 가리우고 숨겨놓아도 결국은 예수님을 조종하고픈 마음만 나열한 것 뿐입니다.

가나안 땅은 바로 그런 모든 인간상의 욕망이 결집되어 있는 곳입니다.

애굽 만이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그 가나안 땅에 살게 되는 이스라엘의 욕망을 드러내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이 몰아내어야 할 가나안 민족을 다 몰아내고서도
여전히 이스라엘 본인들 조차도 가나안 인간들과 다를바 없는
오히려 따라하고파 안달이 난 그 모습인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모든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땅이기 때문에
적나라 하게 들추어지게 될 땅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본인들은 그런 취지임을 꿈에도 모릅니다.
그저 성화 하면 되겠지 말씀 지키면 되겠지 라고 본 거죠.

가나안 땅은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쳐다본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원수의 땅 죽음의 땅 마저도 자신의 살과 피로써 능히 모든 허물을 덮고도 남는

가장 바벨탑 성향을 드러내는
가장 풍요로운 곳이고
가장 인간의 방어책으로서의 난공불락의 요새 곧 어떤 누구도 허물수 없는 성을 짖는 인간의 그 마음이 철벽처럼 견고한 땅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그럴수록 주님의 희년의 뿔은 더욱더 그 진가를 드러내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의 약속을 더더욱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땅을 주님 마음대로 설정한 겁니다.

주님이 자신이 죽으실 곳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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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1 11:07:59,

이런것들도 인간의 입장에선 해석불가인지 그렇다면 모르는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맹신하면서 아 그렇구나 하고 무작정 따라가야 하는지 어떤 부분은 열리고 어떤 부분은 닫혀 있다면 그 부분은 아직 시기상조이므로 주님이 열어 주실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것인지 ...

답변 :

주님이 열어 주실 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해석 불가 라고 해서 인간이 해석 안하는게 아닙니다.

늘 자신이 아는 만큼 자신의 해석을 늘 적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해석이 내려온다면
자기의 해석과 충돌이 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 자임을 아는 고백이 나오게 되겠지요.

엉터리 해석 할 것 뻔한데 말라고 하느냐? 라고
그냥 안한다고 해서 과연 안할까요? 그 말 자체도 해석을 쉬지 않고 하는 차원에서 나오는 말인데?

그러나 감사할 것은
항상 그것 조차도 사건 중심으로써 해석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같은 내용을 같이 해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건을 접할 때 마다 그 해석이 자꾸 달라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믿음(약속)이 벌리는 사건입니다.

즉 할례 끊어짐이지요 단절 동시에 세례, 주님이 이 단절된 내 속에 뛰어드심이지요.

그렇다면 기존의 해석에서 새로운 해석이 사건을 통해서 주어졌다면 언제든지 버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더 새롭거든요.

어제 믿음 예수 버려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나에게 또 어떠한 사건을 통해서 또 다르게 다가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움직이는 겁니다. 성령은 흐름을 탑니다.

언약은 항상 운동력이 있습니다.

정체 되어 있는것 버려야지, 멈추어 버리면 인간은 항상 그것을 기념비화 하고 육의 자랑으로 삼아 버립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뛰어드시는 그 분의 사랑이 아니면 인간은 그저 괴물로서만 자신의 욕망만을 발설할 뿐입니다.
라멕의 찬양처럼 날 건드리지 말라는 영웅놀이만 할 뿐입니다. 벌이 77배이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엡 2:8, 개역)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추신
여기서 놀라운 것 하나 발견 했는데

반대말로 한번 써 보면

2 너희가 그 은혜(값없이 공짜)를 인하여
1 너희가 그 행함(값의 댓가 치르기)로 인하여

2 믿음(단절, 선물, 무능함)으로 말미암아
1 노력(가치있는 능력과 승부사의 성공함)으로 말미암아

2 구원(선물)을 얻었나니
1 댓가의 상(원인 있는 결과)을 얻었나니

2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1 이것은 너가 참으로 잘한 결과로 난 것이요
(또는 이것은 너가 게을러서 난 것이 아니요, 또는 이것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2 하나님의 선물이라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자에게 사랑을 꼿아버림 롬 4 장)
1 너의 성화된 결과 이니라 (성화한 적이 없는데 성화 될 리가 없다)
(또는 이것은 너가 부지런함으로 인함이라, 또는 이것은 너로 인한 너가 맺은 값진 열매다)

자 이렇게 표현해 보니 성화론이야 말로 또 기존의 모든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왜 악마의 탐욕을 심는지를 알게 되겠지요.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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