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 죽으나 주의 것

이기고 (살든지) 지는 것(죽든지) 조차 주님을 드러내기 위한 그릇

(롬 14:8, 개역)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9-01-02 09:06:58,

라헬도 결국은 주님의 활동을 위한 알리바이로 베들레헴에 묻힌거군요

엉터리 이스라엘 개념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이나 또는 이스라엘을 이겼다고 보는 악의 세력들을 마치 레아와 비교했을때에 상대적으로 졌다 라고 의식이 되는 분위기와 모든 역사를

뒤 엎어 버리는 식이 된다는 겁니다 에서  레아와 비교했을때에 상대적으로 졌다  이부분이 이해가 안 됩니다 풀어서 설명해 주시길 ㅡ.ㅡ

답변:

주님의 자녀 됨이란 주님에게 달려 있지 자녀에게는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아 과부 나그네의 입장을 계속 유지시키는 겁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란 이 땅에서 이미 진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다시 일어남과 승리 조차도 그들의 승리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의 승리를 드러내기 위함으로써 작용하겠지요

이미 졌다 라는 그 졌음에 완료과 명확해야
그것을 교체하는 팔을 어긋맞게 축복하는 주님의 역전 승리의 완료에도 명확해 지는 겁니다. 미완료 없는 거죠.

라헬의 편애는 라헬이 형성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야곱이 부여한 의미가 편애입니다.

그런데 편애 조차도 라헬 자기의 숙제로써 채울려고 했기에
라헬 자신은 언니 레아에게 졌다고 남편의 사랑을 빼앗겼다고 보는 겁니다.

이런 인간의 죄성인 불의함을 가지고 그대로 주님은 자신의 일로써 승화 시킵니다.
단순히 개인의 질투가 아니라.

예수님의 질투로 만들어 버립니다.

마치 노아의 옷 벗음이 개인의 실수가 아니라
예수님의 치욕 당함으로까지 확대 시키는 겁니다.

여기에 누가 걸려들까요?

승리를 자기 숙제로 자기 쪽에서 달성한 자들이 걸려듭니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는 빛의 아들들이 그러합니다.
그런데 빛의 아들들이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보다 훨씬 못하다 라고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를 보다 더 나은 제사로 취급해 버리는 겁니다.
(여기서 성령의 일이란 영이란 즉 은사란 자기 스스로 선한 쪽에 둘려는 그 인간의 죄성을 고발하고자 악의 자리에 놓이도록 하는 겁니다. 그래서 육의 소욕은 그런 자유가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눅 16:8, 개역)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바로 이런 식으로 예수님이 활동하겠다는 겁니다.

누가 걸려드는고 하니?
선악의 법을 쥔 자들이 다 걸려듭니다.(선한 놈이 걸려 들고 착한 놈이 걸려들고 의로운 자들이 걸려듭니다.)
그래서 함과 가나안이 걸려든 거죠.

함의 사고방식과 그 사고방식의 열매(부모의 자식이라는 이유로)를 끝까지 추적해서
걸려들도록 걸림돌을 제시함과 동시에 주님의 일을 드러내는데 끝까지 휘말리도록 하겠다는 취지입니다.

라헬은 그런 아기 놓기 싸움에서 실패함으로써 위로받기를 거절하는 모습이
단순히 개인의 사적인 슬픔이 아니라

상대적인 승리했다고 여기는 쪽을 양산하는 일로써 명확한 거룩전쟁의 알리바이가 형성되었다는 취지입니다.

이것은 마치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써 아기를 가지게 되니가
요셉이 은근히 끊고자 했습니다.

왜 은근히 끊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는고 하니
그 당시의 사고방식이 그러했고 또 특히 율법에 대한 해석이 더더욱 부추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그런 생각을 예수님쪽에서 차단하고 막지 않으면
그대로 실행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나타나서 막았습니다.

이제 그 사고방식을 여전히 고수하는 저들 유대인은 막지 않음으로 인해서
전쟁의 알리바이가 형성 됨으로써 전쟁이 실행이 되는 겁니다.

마리아의 찬양은 바로 비천함에 놓이게 됨으로써 비로소 전쟁의 구도를 영적인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 자신의 실패했다고 여겨지는 비천함 곧 고아 과부 나그네 버림받음 자체가
도리어 예수님이라는 구원자를 통해서 가난한자를 높이시고 높은자를 낮추시는 거룩한 전쟁의 취지를 알게 되는 비천함(무능자의 자리, 부르짖는 기도의 자리, 처음자리, 선물받을 자리, 잉여, 원인없는 결과, 남은자, 어린아이자리)의 자리에 놓여짐으로써 비로소 보게 됩니다.

즉 비천한 자는 예수님 뿐임을 구원자로서 구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자들로부터 버림받는 예수님 뿐이라는 것을

이 사실이 바로 거룩인데
이 거룩의 전쟁을 미리 보고 취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깊은 죄악 속에서도 은혜를 더하게 하시는 그 사랑을 명확하게 구분선을 긋는 하늘의 일이 펼쳐지게 해 달라고, 사람의 일의 거짓됨을 상대적으로 격으면서 기도하게 되는 겁니다.

그 사람의 일이 바로 처녀로써 아이를 가지게 됨으로써 끊쳐짐을 당하는 죽음의 자리에 몰리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란 항상 사람(악마)의 일도 명확하게 드러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약 라헬이 개인적으로 생각한 그 실패가 진짜 실패로 끝나버리면
야곱의 편애와 본처에 대한 사랑은 거짓이 되게 됩니다.

그렇기에 라헬의 그 개인적인 오해를 계속 가지고 가면서
남들의 오해까지도 다 결부시키는 겁니다.

나무에 달린 자 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자 이다.

(신 21:23, 개역)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갈 3:13, 개역)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벧전 2:24, 개역)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네 맞습니다.
저주 맞고 그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맞습니다.

그래서 라헬의 실패에 해당되는 예수 마저도 마음껏 저주를 퍼부었고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를 저주 했습니다. 못 박으라 못 박으라

그런데 왠걸 알고보니 그 라헬의 실패에 뛰어드신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는 저주로 해석 했던 겁니다.

라헬의 실패는 사실상 열매를 자기 쪽에서 생산할 수 없는 모든 인간에게 해당 됩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그 처음자리가 무능자의 자리입니다.
라헬과 같았습니다.

그 무능자의 자리에 계속 놓이게 함으로써
그 무능자를 비웃는 세력들이 이스라엘 속에서 피어납니다.
그 가짜 이스라엘을 뽑아내기 위해서
미끼로 놓여진 무능자 곧 이스라엘을

가짜 이스라엘 속에서 뽑아내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뽑힌 남은자인 무능자에게 예수님이 뛰어드십니다. (세례)

그렇다면 지옥에 이미 갔고 이미 저주를 받았고 이미 자식놓기 싸움에 졌던
불임여성이자 죽은태인 여자로써는 완벽한 여자구실 일체 못한 여자에게
예수님이라는 생명이 그 죽은 태에게 뛰어드심으로써
더 이상 나의 승리가 필요 없고 예수님 승리 만으로도 족하는
예수님이 생명 되심을 도리어 역설적으로 죽음으로써 나타내심으로써
자동적으로 주님의 승리로 더 이상의 승리가 필요치 않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 라헬의 단절된 위로받기의 거절에
예수님은 뛰어들었습니다.

이제 레아와 같은 사고방식의 사람들이 도리어 자기자신의 생산물로써 죽음을 버텨야 하고 죄의 소원을 이겨야할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아무도 죄의 소원을 이겨낼자가 없는 겁니다. 다 실패입니다. 다 심판입니다.

미리 심판의 세계를 맞본자들이 그 무능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봤고
도리어 성공했다고 자부했던 자들이 심판 속에서 무능함에 처하게 됨으로써
주님 쪽에서의 미움이 구체화 되게 된 겁니다.

야곱은 라헬을 이유도 없이 조건도 없이 그저 사랑 했습니다. 그 자체로 완료입니다.
라헬은 자기 쪽에서 이유를 갖추어야만 사랑이 유지된다고 본 것을
이제 야곱의 바톤을 이어받아서 예수님 쪽에서 그 무조건 적인 사랑을 확정 짖습니다.

십자가로써만 말입니다. 그 실패(죽음) 속에 뛰어드시는 긍휼로써 말이죠.

그래서 먼저 된자 나중 되고 나중 된자 먼저 된다 라는 것에

(마 19:30, 개역)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 20:16, 개역)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막 10:31, 개역)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눅 13:30, 개역)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누가 먼저이고 누가 나중이냐 라는 누구에 해당되는 인간에게 의미를 두는게 아니라.

(고전 10:12, 개역)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무조건 예수님만 옳았고 라헬이든 레아든 무조건 틀렸다는 겁니다.
섬기는 자는 둘다 아니였고 또 이 세상에서도 없었고 또 앞으로도 없습니다.
그런 섬기는 자는 나타날수가 없습니다. 율법을 지킬자가 없기에
남을 사랑하는 자가 율법을 다 이룬자 이기에
예수님 외에는 섬길 자가 이 땅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라헬은 결국 예수님만이 섬기는 분이다 라는 것을 증거해야하는 겁니다.
심지어 죽어서도 그 죽은 상태 조차도 말이죠. 사적인 죽음이란 없습니다.

그렇기에 토기장이는 예수님으로써 토기장이 마음대로 긍휼의 그릇 진노의 그릇을
마음대로 늘 수시로 바꿧다가 다시 교체했다가 마음대로 하시는 겁니다.
그 원칙은 십자가의 피를 기준으로써 말입니다.

(참고로 질문의 내용은 저의 생각 속에서 나열된 내용들을 다시 질문했기에 저의 내용들이 정답일 리가 없습니다. 그저 나는 이런 생각입니다 라고 말한 것이고 참고만 하면 됩니다.그리고 또 하나는 뭔고 하니

인간은 자기 죽으면 끝난다고 봅니다. 더 이상 관여 못하는 세계이다고 본 거죠.
그런데 예수님은 요셉의 뼈를 여전히 살아있을때와 같이 다룹니다.

그래서 구원 이후란 없다 라고 말하는 이유가
인간은 구원 조차도 다루고 싶은 때가 그저 살아있을때나 깨작 깨작 다루고 있을 뿐이지
죽은 뒤에는 못 관여한다고 보는 겁니다. 살아있을 때 뿐이다고 본거죠.

그래서 그것이 틀렸다는 겁니다. 살아 있어도 무관여요 죽었어도 무관여입니다.

다른 의미로 말하자면
인간은 예수님 믿고 난 뒤에는 자꾸 내 멋대로 살수 없다고 우깁니다.
그래서 자기 성깔대로 살아라 말이 의미심장한 이유가
원래 자기 멋대로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옆에서 자기 성깔대로 살아라 라고 말해주기를 바랬고
그것을 알리바이로 역어서 그 동안 자기 성깔대로 안 산 것처럼
푹 기죽어 살았고 말씀을 무지 무지 순종한냥 위선을 떠는 모습이 그때서야 다 들통하는 겁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앞으로도 나는 내 성깔 못 이기는 무능자입니다 라고
그저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것이 차라리 낫지

억지로 참아서 위선떨다가 힘빠지면 그때서야 안 도와주냐고 화풀이 할게 아니라

그냥 생긴대로 사는 모습이 차라리 솔직하다는 겁니다.

라헬은 언니에게 졌다 라는 의식을 평생 지울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못 지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직접 나서는 겁니다.
누가 내 아내 라헬을 건드렸냐 라고 다 박살 냅니다.(라헬 속에 뛰어들고 죽음으로서 이깁니다.)
자 그렇게 되면 라헬은 주님의 그런 모습을 보고 부끄러워하고 미안스러워야 합니다.
괜히 쓸데없이 졌다 라는 강박관념에서 위로받기를 거절하다가 갑자기 채널을 확 돌려버리니 기쁨이요 노래요 춤 뿐이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라헬이 그런 행동 하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쪽에서 다 알아서 한다는 것을 더욱더 유발케 한 것입니다.

둘 다 (라헬과 예수님) 악마들이 보기에는 선악 그 자체로만 보일 뿐입니다.

마치 구원받은 강도와 예수님 둘 만 낙원이요 함께 함입니다.

그러나 바깥의 세계는 이 둘에 대한 저주와 죽음과 살인의지만을 불태우고 있는 지옥 그 자체를 고수하고 있을 뿐입니다.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죽이기에 혈안 되어있고 죽일려고 하고 있고
끝까지 죽었는지 확인하는 입장에 놓여져 있는데 (교회와 목사와 세상 권력과 다 손잡고)

그런 와중에도 예수님은 저 강도를 끝까지 구원하고자 그 사명을 붙태우는데 있어서
어떤 누구도 방해를 못하는 입장이 되고 만 겁니다.

죽어가시면서 까지 한 쪽 강도를 구원하시고자 열심을 다 하고 전부를 다 올인하여서
매진하고 푯대를 향해 달리시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라헬은 남들이 보기에 강도와 같이 실패한 인생이요 전 인생을 강도짖만 한 강도 외에는 다른거 할 줄 모른 자입니다. 아기 놓기 싸움 또 해 봤자 또 질 것 뻔한 자입니다.
그런 라헬과 같은 강도 그런 라헬과 같은 롯을
불속에 들어가서 까지
죽음 속에 들어가서 까지
심판 속에 들어가서 까지
지옥 속에 들어가서 까지
모든 인간이 미움을 퍼 붓는 그 자리에 들어가서 까지

강도를 건지시는 그 사랑을 쉬지도 않았습니다.

(눅 23:4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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