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께끼란 깨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9-03-05 18:38:04,
사사기 14:8-9에서 죽은 사자의 몸에 벌떼와 꿀이 있다는 뜻과 왜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취하였다고 말하지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2009-03-06 17:34:15,
둘로스님 어제 제가 쪽지를 보냈는데 못 받았나요?

사사기 14:8-9절에 대해 물어 봤었거든요  사자의 주검을 본즉 사자의 몸에 벌떼와 꿀이 있었다는 뜻과 왜 부모에게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취하였다고는 고하지 않았는지가 궁금해서 쪽지를 보냈었습니다

답변 : 간단히 답하면 부모가 알면 더 이상 수수께끼가 될 수 없으니까요

(삿 14:4, 개역) 『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한고로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삿 14:5, 개역) 『삼손이 그 부모와 함께 딤나에 내려가서 딤나의 포도원에 이른즉 어린 사자가 그를 맞아 소리 지르는지라』
(삿 14:6, 개역)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 같이 찢었으나 그는 그 행한 일을 부모에게도 고하지 아니하였고

(삿 14:7, 개역) 『그가 내려가서 그 여자와 말하며 그를 기뻐하였더라』
(삿 14:8, 개역) 『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취하려고 다시 가더니 돌이켜 그 사자의 주검을 본즉 사자의 몸에 벌떼와 꿀이 있는지라』
(삿 14:9, 개역) 『손으로 그 꿀을 취하여 행하며 먹고 그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취하였다고는 고하지 아니하였더라

(삿 14:10, 개역) 『삼손의 아비가 여자에게로 내려가매 삼손이 거기서 잔치를 배설하였으니 소년은 이렇게 행하는 풍속이 있음이더라』
(삿 14:11, 개역) 『무리가 삼손을 보고 삼십 명을 데려다가 동무를 삼아 그와 함께 하게 한지라』
(삿 14:12, 개역)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하리니 잔치하는 칠 일 동안에 너희가 능히 그것을 풀어서 내게 고하면 내가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너희에게 주리라』
(삿 14:13, 개역) 『그러나 그것을 능히 내게 고하지 못하면 너희가 내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줄지니라 그들이 이르되 너는 수수께끼를 하여 우리로 듣게 하라』
(삿 14:14, 개역)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그들이 삼 일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더라』

먼저 사건의 중심이 삼손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수수께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답은 삼손 혼자만 알고 있습니다.

혼자만 알고 있는 수수께기의 답에
삼손의 부모는 그 꿀이라는 정답이 어디서 난지도 모른채로 정답의 혜택을 누립니다.
그 삼손의 부모는 블레셋을 삼손에게 붙이시는 그 여호와의 일에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사적인 자기 아들의 영웅담에만 취할 뿐이겠지요 모든 부모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이 그 달콤한 꿀을 내기 위해서 죽어야 하는 산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은

삼손의 반대편에 서 있을때에 비로소 아는 겁니다.

아무튼 이 정답인 삼손 혼자 알고 있는 정답인 꿀을 드러내기 위해서
삼손 자체가 사자가 되어서 삼손이 죽지 아니하면 그 사자 속의 꿀을 곧 수수께끼 정답인 사랑을 제공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다행이도 이미 답이 제공 되어지기로 약속 되어 있고
저 쪽 블레셋에게는 수수께끼를 여전히 알 수 없도록 되어 있는 약속 밖이라는 분명한 경계선을 수수께끼를 통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삼손 자체가 사자가 되어 부모와 그의 민족을 구원하는 겁니다.
찢어진 사자 속에서 꿀을 무상으로 무시험 합격으로 답을 이미 주었다고 확인되는 문제를 찾도록 하는 겁니다. 십자가의 반대편에서 서서 누가 너희들 때문에 희생 했는가? 답을 주었는가? 피를 흘렸는가를 보라는 겁니다.

결국 이 삼손이라는 구원자만이 해야할 일에
수수께끼는 삼손에게만 정답이 달려 있다는 문제에
모든 인간들은 철저하게 소외된 입장이라는 겁니다. 부모도 그래서 소외 된 겁니다.
문제를 풀어서 정답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소외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삼손이 우연히 길 가던 중에 주어서 먹었던 그 꿀이 정답이였던 겁니다.
이미 받았던 것이였죠. 그 꿀이 어떤 꿀이냐 라는 것을 이미 정답을 받아놓고
문제를 맞이함으로 그 답의 의미를 알게 되는 식입니다.

삼손 자체도 이 수수께끼 비밀을 자기유익을 이용해 버리게 됨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경험을 자신의 욕심으로 사용하다 보니 수수께끼가 풀려버립니다. 비밀을 상실한 수수께기는 곧 무능한 수수께끼요 무능한 이스라엘을 말하며 무능한 삼손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실패하시거나 약속을 멈춘적 없습니다. 삼손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어떤 방해도 받지 않습니다. 약속 자체의 의미를 너끈히 드러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법이 없는 수수께끼는 삼손 자체를 찢어버리는 사랑으로 증거가 됩니다. 수수께끼 자체가 삼손의 소욕으로 진행되지 않고 삼손에게 미래의 십자가의 사건이라는 진짜 수수께끼가 덮침으로써 이스라엘의 구원을 삼손의 죽음으로 이룹니다.

사랑 외에는 답이 없는데 삼손도 그리고 인간의 속성은 아무리 성화론이든 성숙이든 뭐든 반드시 사랑 외의 것을 자꾸 섞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불순물을 다 극복하고 블레셋도 이기도 이스라엘도 이기고 삼손도 이기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써 약속을 이룹니다. 양발차기로써 이미 답의 의미를 답 스스로가 증거하고 문제를 찾습니다.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182강-사66장,21-24,(지옥과제사장)-isa090304.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182강-사66장,21-24,(지옥과제사장)-isa090304.wmv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182강-사66장,21-24,(지옥과제사장)-isa090304.hwp

그 문제에 삼손도 무능할 뿐이고 블레셋도 무능할 뿐이고 모두다 소외된 입장입니다.
그 무능의 자리에서 수수께끼를 보라는 겁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피를 보라는 겁니다. 십자가 반대편에서 말이죠.

미래 완료가 덮쳐서 미래에서 현재를 뒤에서 소급하는 방식으로
계시(말씀)의 의미가 증거 되는 겁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수수께끼는 수수께끼를 내는 자와 그 문제를 받는 자의 입장에서 이미 수수께끼 제공자는 우월한 입장에 서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일에 직접 관여치 않는 자는 풀 수 없다는 겁니다. 수수께끼란 풀라는 입장이 아니라. 못 푼다는 입장입니다.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그 경험이 사자에게서 꿀이 나온 겁니다. 부모에게 말 했다면 이미 수수께끼 자체가 형성 되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이 수수께끼로 엉뚱한데 사용하게 되죠. 마치 율법을 주니까 이스라엘이 엉뚱한데 사용하는 원리를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은사를 주면 그 은사를 반드시 육체의 소욕으로 사용하도록 나타납니다. 그 부재성을 앞장세우면서 은사 주신 성령 곧 은사 주체자가 그 은사의 의미를 보여줌으로써 은사를 엉터리로 사용한 그 은사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입니다. 은사란 무능의 자리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는데 인간들은 곧 육체의 소욕은 그 은사를 능력의 자리로 극상 시키는데 이용하듯이 말이죠. 이 차이가 다윗언약의 참선지자와 거짓선지자의 차이점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단순한 육체의 소욕이 아니라. 이스라엘 국가 체제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세우고 확장하고 유지 보수하는 차원이 바로 거짓선지자의 열심 입니다. 그것은 바리새인에게도 일맥상통하고 오늘날 하나님 나라 운동 벌리는자들과 같습니다. 그러나 참 선지자는 바로 그것을 육체의 소욕으로 규정하고 그 상대적인 것을 차이로 드러냅니다. 무조건 부정해 버리면서 무조건 아니다 라고 말이죠, 그럼 넌 뭔데? 보여줘도 못 믿고 들어도 못 믿으니 안 알려주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무조건 공격해 버립니다. 이것이 은사의 취지 입니다. 부정해 버리는 것. 처음자리로 되돌려 놓는것)

그럼 누가 이 수수께끼의 원리를 제대로 보여줍니까? 예수님입니다.

엉터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제대로 증거합니다.
여기에 인간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블레셋과 같은 입장만 고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자녀를 저희 죄에서 건지시는 지옥의 맞은편에 서서 거룩의 일을 끝까지 감당하시고 다 이루셨습니다.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삼손은 눈 뽑힌채로 머리 짤린 채로
아무것도 없어도 넉넉하게 승리하는 끊을 수 없는 사랑을 보여줍니다.

힘 없어도 됩니다. 능력 무능해도 됩니다. 수수께끼 풀려도 됩니다.

처음부터 사랑하기로 작정하신 그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미 다 이룬겁니다.
(처음자리 되돌려 놓는 십자가가 사랑만 있으면 됩니다. 선악이전의 자리)

인간의 사랑은 무조건 깨어지도록 되어 있고
주님의 성전은 그 깨어진 그 자리에서 너끈히 머릿돌이 되어 세워지는 겁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