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죽으리라]와 [지옥과 제사장]

어제 수요예배 전에 목사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죽으면 죽으리라를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해석을 했는가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이양반이 답을 시원하게 주지 않고 말이 좀 길어 진다.
내가 무슨 의도로 뻔히 질문을 하는 것을 알면서도 약간 돌리듯이 말을 하고서는 답을 말해준다.

물론 결론적으로 짧게 요약하면 답은 이렇다. 선민이라는 것을 변호하는식으로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은 부림절을 이용해 왔다는 것이다. 역사 곧 시간의 순차적 흐름으로 경험쌓기로써 그런 구원의 정보를 자기 구원에 유익이 되는 선택론으로 챙겨버리는, 자 그렇다면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성경의 내용이든 다 자기유익으로 땡겨버릴 수 밖에 없기에 사랑은 정작 모른다(어리석음)는 것이다.

그런데 설교 중에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의미가 명확하게 나타났다.

깜짝 놀랬다.

혹시 수요 설교 내용과 연관 시킬려고 답하다 보니 약간 빙빙 돌렸나?

뭐 아무려든 어떤가? 이미 답이 나왔으니 이미 지나간 것이니 문제만 찾으면 되니 말이다.
(그래서 거꾸로 사는 삶이다. 모든 상황을 선악나무와 생명나무 상황으로 상대를 대하는 태도가 바로 그런 의미이다. 답을 이미 받은자인지 아닌지 문제를 찾는 태도로 일관했던 것이다.)

그래서 [죽으면 죽으리라] 가 어떻게 [지옥과 제사장]과 연결이 되는지를 요점 정리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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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글 잉여 증폭기에 약간 수정을 해서 첨가한 아브라함의 아내 성상납 사건이나, 이삭도 마찬가지, 또 베드로 세 번 부인 등등 사실 성경 전체의 사건들 모두가 바로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내용으로 결집된다. 즉 요나의 표적 십자가이다.

이사야는 마치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인냥 말씀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지옥이 있다만 알려주고 지옥에 어떻게 안들어가냐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는다.

자 이렇게 되면 성경은 어떤 행동 방어책으로 방안이 없게 된다.

일방적인 선포라서 되어질 뿐이지 되어지니까 그것을 받아들일 자세를 취한다거나? 또는 반대로 적극적으로 거부하겠다는 것이 일체 허용이 안된다. 수용도 허용불가, 거부도 수용불가이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이란 기능적으로 다가오기에 관여할 수 없는 입장인 철저한 소외에 놓여질 뿐이다.

결국 천국과 지옥의 기능 앞에서 무능함만 드러날 뿐이다.

이것을 죽었다 라는 것이다.

병든자가 치료책을 내놓는다는 것이 문제시 되듯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이듯
아프면 아픈 기능만 발산할 뿐이고, 아픈 자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
죽었다 라는 뜻이다.

난 죽었을 뿐이고 ... , 난 무조건 틀렸을 뿐이고 ... , 난 무능할 뿐이고 ... ,
난 죄인일 뿐이고 ... , 난 죽은자 일 뿐이고 ... ,  난 부정한 자 일 뿐이고  ... ,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죽었다 라는 뜻이고(롬 4장)
또 로마서 8장의 환란 적신 칼 등등에 의해 끊어지지 않고 도리어 넉넉히 이긴다는 것은
환란 적신 칼 곧 죽음의 자리(무능의 자리)에서 구원(완료 승리)을 바라보는 것이다.

예수님의 혼자만의 기능, 천국과 지옥 만의 기능으로써

왜 혼자만의 기능인가?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삼겠다 라는 의미로써

오직 제사장과 레위인만이 지옥 맞은 편에서 지옥이라고 판명할 수 있는 유일자로써 세워진다는 사실이다.

결국 선만이 유일하게 악이라고 규정할 수 있듯이
죄인이 무슨 수로 악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율법을 주니 자신이 악이라고 규정당할 입장으로 못 보고
도리어 남을 악이라고 규정하는 자리에 서 버리게 되니
예수님이 오게 되자 예수님을 악으로 몰아버리는 그 악을 규정하시러 오시는 것이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어리석은 지혜만이 정당하다

정당함이란 바로 저 지옥에 안들어가도록 하는 제사장의 일 레위인의 일이 유일한 정당한 일이다. 바로 십자가다.

그런데 이런 모순이 어디있으랴? 제사장이라고 레위인이라고 세워놓았더니 도리어 지옥으로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백 배 천 배 소경이 소경의 길로 인도하는 차라리 성경 지식 몰랐더면? 차라리 선민으로 안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차라리 어머니 뱃 속에서 낙태? 갑자기 용어가 생각이 안 나는데 아무튼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라는 죽었다 라는 자리에 놓였다면 비로소 제사장과 레위인이 하는 일 바로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려 부정한 짐승을 살리는 그 맞은 편에서 답을 드러낸다.

피 흘리심의 대상에 놓이게 될 것을
자꾸 살았다고 하니 죽은자 이고

그러나 죽은 자 이니 건지시는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의 기능을 말하기 위해서 유일한 정당한 일은 십자가 뿐이다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옥은 유일하게 나의 택한 제사장 레위인에게만 지옥이 보이고 다른자들에게는 보이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참선지자들은 심판을 증거한다. 이미 완료된 미래가 덮쳤기에 참선지자에게만 보인다. 그러나 거짓선지자들은 완료된 미래가 보이지 않기에 과거와 현재를 잇기를 주장한다. 그리고 심판은 없단다. 도리어 평화 평화 란다.

지옥의 맞은 편에 제사장과 레위인만 서 있고 제사장과 레위인만 보기 때문에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 피흘림의 제사에 뛰어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즉 더 나은 제사 이다. 십자가 이다. 순종이다.

이 유일한 답인 십자가의 피를 먼저 받고, 답에 맞는 문제를 뒤에 찾는 것이 바로 잉여다(완료).

문제 먼저 받고 답을 뒤에 찾는 것은 엉터리요 전혀 잉여적이지 않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두 번? 세 번? 씩이나 원치 않는 아내를 성상납의 아내 팔기를 실수 아닌 실수를 문제로서 맞게 된다.

이 문제가 아니면

자신이 생각한 복의 근원 의 의미가 박살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복의 근원은 문제를 풀려고 답을 찾는 식이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아내 사라를 통해서 아브라함을 톡 하고 쪼개버린다.

이미 답이 완료 되었기에 그 답의 문제가 뭔지 알려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내를 파렴치 하게 팔아먹을때는 언제고 정작 때부자가 되는 것이다.

이삭도 마찬가지이다.

모세는 더 심하다 파라오 왕을 두려워 하여 바로의 낯을 피하여 나 살려라 도망쳤다고 기록할 때는 언제고 (출 2:15, 개역)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히브리서에서는 뻔뻔스럽게도 반대로 증거한다.
(히 11:24, 개역)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히 11:25, 개역)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히 11:26, 개역)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 11:27, 개역)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이것은 마치 주님 자신의 제사로써
인간의 제사 보다 더 낫지 아니한가? 라는 식으로 놀려먹듯

주님 자신의 제사를 아벨로 삼아버리고 거기에 상대적인 가인의 제사는 마치 하나님이 직접 드리는 제사와 대립에 놓이게 되는 경쟁자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누가 누가 더 제사 잘 드리는가? 가인 쪽은 지금 자리에서 문제를 풀어서 답을 찾아가는 제사 방식이고, 주님의 제사는 답이 아벨에게 이미 편애로 주어지고 문제를 찾는 방식이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은 아내 팔아먹는 것을 통해서 복의 근원이라는 답을 이미 받은 상태에서 문제가 주어진다. 그래서 아내를 정작 팔아먹은 파렴치한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정작 아비멜렉과 애굽 족장이 박살이 난다. 왜? 왜 나의 복의 근원을 건드리냐 라고 박살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또 이삭은 또 모세는 또 세 번 부인한 베드로는 문제를 찾는다

왜 아비멜렉은 박살이 났을까요? 피를 무시해서

왜 애굽은 박살이 났을까요? 피를 무시해서

이미 자신들에게 답으로 주어진 피 발림의 의미를 더욱더 새록 새록 되새기게 된다.

아 참 나는 이미 무시험합격 했지
합격한 넉넉한 이겼음을 확인하고 누리는 작업이 바로
문제 찾기 이다.

환란 곤고 핍박 기근의 문제가 찾아 올때마다

넉넉하게 이미 넉넉히 답이 승리한 그 완료를 누리는 것이다.

끊어지지 않는 사랑을 말이다. 왜 끊어지지 않을까? 그래서 문제를 찾는 것이다.

왜 끊어지지 않는지 알려면 칼로 짤라 보면 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이지
행함으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긴대로 성깔대로 살아라는 말인데
더 나은 제사가 덮쳐지지 않는 자는 가인의 제사인 성화론의 방식으로 이 말귀를 들으니 알 턱이 있나?

왜 사랑인지 알려면 3번 씩이나 부정해 보면 안다.
그게 바로 베드로 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반대편에 서도록 하시는 것이다. 오직 원수에게만 사랑을 한다. 건강한 자에게는 피가 소용이 없다. 오직 죄인만 부르러 오신 것이다. 십자가는 아담 전부를 반대편에 서게 만듬으로써 이 어리석은 지혜로써 사랑을 완료 하셨다. 다 이루었다. 사랑을 알려면 원수의 자리에 서 보면 안다. 아버지의 용서를 알려면 탕자의 자리에 서 보면 안다. 정작 탕자의 자리에 서지 않았다고 주장하니 아버지의 용서를 알 길이 없다. 차라리 소경의 자리에 서 있으면 예수님이 유일한 빛인줄 알 터인데, 소경 아니라고 하니 빛을 알아 볼 턱이 없는 것이다.)

왜 복의 근원인지 알려면 마누라 팔아 보면 안다. 따따블 재물이 온다.
그리고 반드시 저쪽은 불임의 저주로 만들어 버린다.

복의 근원이 지나가는 자리에는 이미 결정된 천국과 지옥이 이미 결정된 채로 비로소 보이지 않던 내막이 드러난다.

복의 근원이 오지 않으면 그 내막 안 드러나고 숨겨진 채로 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바로 그 결정난 답을 무슨 나무의 열매인지 까 보는 역할을 한다.

마치 다말이 유다를 톡 하고 쪼개어 보니 약속이 유다 속에 담겨 있었던 것처럼

제사장과 레위인은 무슨 나무의 열매인지를 까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란 곧 잉여다. 이 잉여증폭기가 지나가는 자리는 까는 역할을 한다.

베일을 벗기는 역할 말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아내가 아니면 톡 하고 쪼개어진 껍질 속의 알맹이를 알 수 없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오해를 계속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정작 잉여증폭기 돕는 베필로써 저쪽 세계와 이쪽 세계의 건널수 없는 강의 두 패로 나누어짐의 실감성을 아브라함은 돕는 베필로 통해서 알게 된다.

엉터리 문제로 엉터리 답을 찾을려고 했다는 것을 말이다.

이미 당신은 답입니다 라고 마누라가 보여 준다. 왜 답인지를 문제를 찾는 방식으로서의 사건을 말이다.

마찬가지로 이삭도 동일하게 동원된다. 너가 왜 믿음의 조상인지를 이미 받은 답이 왜 정답인지를 이삭 바치라 라는 문제 통해서 보게 된다. 예비 된 제물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무것도 한 게 없이 무시험 합격인 것을 말이다.

이미 해답을 얻은 상태에서 왜 문제를 찾는가?
왜 나 같은 자가 피가 발려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문제를 찾는 것이다.

문제 찾기 위해서 평생 사는 것이다. 왜 피가 답일 수 밖에 없는 지를 누리는 것 뿐이다.

왜 제사장 레위인만 되는지? 왜 무능한 여자의 잉여성으로 ? 왜 어리석은 어린아이의 잉여로서만 피가 답인 지를 말이다.


왜 나의 기능으로는 구원을 못 받는지를 해답인 피를 통해서 문제를 찾는 것이다.
즉 예수님만의 숙제요 예수님만의 문제 완료이다.

영적예배란 몸 전체를 드리는 예배로써 몸의 예배가 아니라, 영적 예배 이다. 즉 몸에 새기는 예수님의 숙제요 예수님의 해답을 몸에 새기는 영적예배 이다.

즉 아브라함에게 아내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답을 이미 답을 새겨넣었듯이
예수님이 아브라함에게 새겨 넣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답을 이미 답을 새겨넣었듯이
에수님이 아브라함에게 새겨 넣는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하는 할례는 쓸모없다.
마음 판에 새기는 그 불가능한 할례만이 유일한 영적 예배 이다. 곧 십자가 이다.
이것이 세례요 이것이 성령 혼자만의 단독 독점권으로써 일 하신다. 그래서 성령은 단절 차단 삭제 분리 구별 지우개 나누기 쪼개는 일의 속성으로 하신다(불륜, 스캔들, 부정함, 불의함 = 무조건 반대, 자유 너가 좌 하면 나는 우하겠다는 자유. 무조건 죄 아닌 게 없도록 죄 뿐이게, 무조건 틀리게, 무조건 나 아니요 로 만들어 버린다).

뭐가 영적 예배인가? 주여 내가 한 것 무조건 죄입니다. 라는 문제 찾기 이다.
왜 내가 하는 것은 뭐든지 죄 뿐인가 라는 문제 말이다.

해답이 피 이니까 피 때문에 문제가 나오는 것이다.

답) 피
문제) 나는 왜 죄인일까요?

죄인을 부르러 오신 이유는? 피 때문이다.

피라는 답에 맞도록 문제를 출제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죽으면 죽으리라를 문제가 던져진 줄로 알고 풀려고 답을 찾는 방식이
자신들이 선민 다움을 갖출려고 하니 아무리 해도 답이 죽으면 죽이리라 라는 답과 맞지를 않는 것이다. 그냥 결과만 구원이니까 구원만 챙기는 방식이다. 자기유익을 괜히 챙길 수 밖에 없도록 하신 그 올무에 다 빠지는 것이다.

자석의 원리처럼 N 극 이면 S 극으로만 만날 수가 있는데
이미 자석이라서 자석이라는 답이 원래 그런데
아무리 자신의 자기장의 열심을 내어서 자기장을 만들어 내어도 주님이 십자가의 모습으로 온다면 싫어버린바 된 모습으로 온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원수의 자리 십자가 반대편의 자리에서 구원받는 죄인의 자리인줄도 모르고 자꾸 의인의 자리에 서서 N 극으로 오신 예수님을 N 극으로 만날려고 하니 튕기는 것이다. 가장 튕기는 놈들이 누구인가? 가장 자기장의 열심을 극도로 발휘하는 자들이 아닌가? 그런자들의 산상수훈의 해석이 어쩌면 N극으로 답을 찾을려고 하는지?

정작 답은 이미 마 4장의 흑암의 백성,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 자, 개같은 이방인으로 이미 답이 주어졌는데 거기에 맞게 문제가 그들을 대상으로 삼은 산상수훈이 문제로써 답을 이미 규정 시키듯이 답을 말해주듯이 주어지는 팔 복이요 그 용서의 사랑을 강화 확정으로써 나오는 것이 산 위에서의 선포인데 완벽하게 거꾸로 해석을 오늘날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답을 찾을려고 하니 말이다.

이미 답이 있기에 문제를 찾는 방식인데 말이다.

답은 이미 피 이니까
문제가 왜 의인과 건강한 자에게는 산상 수훈이 맞지 않는가 인데?

문제가 먼저이고 답이 뒤이니까?
산상수훈만큼은 다들 자신만만해 하고 있다. 그들의 답 쓴 꼬락서니를 보니
건강한 자 되자, 의인 되자 라는 답변 뿐이다.

얼마나 고마운지?
문제 먼저 주어지고 답을 뒤에 풀려는 자에게서
피 라는 답이 나올수가 없는 원리이다.
(요즘들어 부쩍 성화론자들이 고맙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자랑거리인 산상설교와 일치된 삶과 그 해석들 등등이 너무 너무 고맙다. 나는 그 동안 저들의 엉터리 해석을 깨뜨림으로써 저 환각에 빠진 자들이 저들에게 속지 않고 건져지길 바랬는데 그게 아니였다. 주님이 그들을 부지런히 배치 시켰는데 건방지게 내가 뚫을려고 하다니? 주님은 지금도 부지런히 막고자 팔방사방으로 성화론자들을 깔아놓고 계신다. 얼마나 고마운지)
그래서 예수님은 듣고 깨달아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떤다 라고 하셨다.

답이 먼저 주어졌고 그 피라는 답에 맞추어
문제가 주어지기에 그 문제는 건강한 자 되자 의인 되자 라는 답만을 낼 수 밖에 없는 엉터리 문제가 주어질 수 밖에 없다. (이런 원리로 천국 비유가 펼쳐진다. 자 그렇다면 간단하다. 문제를 찾아보자. 어떤 문제 성화론자들의 하나님 나라 비유 해석만 보면 열심히 보면 그들의 해석이 어쩌면 엉터리 답만 도출하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들의 천국 비유 해석에서는 지옥에 대한 당당한 증거가 없는 이유도?)

(사 6:9,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마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막 4:12, 개역)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주님이 막아 버렸는데 그 막을 것을 뚫는 자들이 생긴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이다.

산상수훈을 뚫겠다고 나선 놈들이 성화론자들 이였듯이
예수님은 지금 바리새인에게 어느 정도로 잘 차단 했고 잘 막았는지를 아주 아주 당당하게 자랑 하듯이 말씀하신다 만약 뚫린다면 두려워 하고 떠는 눈과 귀를 막고 고개를 돌리면서 내 앞에 보이러 오는 내 마당만 밟는다는 아주 어른스럽지 못한 넉넉한 하나님의 품위가 아니라 엄살 떨고 질투를 여자처럼 성질 부리듯이 내는 아주 천박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처럼

고침을 받을까봐 두려워 하고 죄사함을 얻지 못하도록 귀 구멍 막아버렸고 눈 뜨지 못하도록 한 것에 아주 철 없는 장난꾸러기처럼 그것이 마치 자랑인냥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들은 더러버서 다른 길로써 그 통과세를 받아먹으면서 자급자족식으로 길을 열었다. 그게 종교다. 기독교다. 바벨탑 하늘의 문.

그러나 예수님은 그 당시 돈 받고 삥땅치는 종교를 깨 부시는
부도덕한 도둑처럼 아예 조폭처럼 행사를 하신다.

엽기적인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한 잔치를 베푼 그 천국 비유처럼

죽으면 죽으리라 이 답에 맞는 문제 찾아오지 않으면 다 지옥 보내겠다는 화난 임금과 같다.
(예복을 줘야 입지? 주지도 않고 왜 안 입었느냐고 다구치니 유구무언이다. 임금의 말도 틀린 말이 아니다. 맞기 때문에 할 말이 없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좋은 옷으로 주지 않겠냐? 저 있는데 다 준비가 되어 있는데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고 달라하지도 않고 남들 다 입은 예복은 왜 독불장군인 마냥 안 입고 있으니 할 말 없는 것이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기에 말씀의 옷을 줘도 안 입은 광야의 장정만 599998명은 예복이 없어 탈락 당했다. 아무리 줘도 안 입었기 때문이다. 청함을 받은자 억수로 많은데 택함을 받은자 억수로 적다. 딸랑 한 명 갈렙만이 예복을 입었다. 억수로 다행으로 예복 바지자락이 여호수아를 붙잡는 바람에 패쓰 된다. 그 그리스도의 옷이 피 옷이다. 피 옷의 희소가치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많은 다수를 탈락 시킨다. 피가 더 중요하다.)

이 답은 답이 이미 그 사람에게 주어진 자에게만 쉽게 문제가 찾아온다.

그러나 답이 이미 주어지지 않는 자에게는 자신의 숙제로 문제를 풀어서 답을 찾아야 하기에
무조건 엉터리 답만 챙길 뿐이다. 왜냐? 다들 엉터리 답을 적을려고 하지 않고 정답을 적을려고 하니까 다 엉터리이다.

답에 맞는 문제는 아주 아주 간단하다.
마치 여자를 잉여로 보면 아주 간단하듯이


결국 이목사가 약간 빙빙 돌렸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꿈보다 해몽?

이미 답은 죽으면 죽으리라 이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어떻게 죽으면 죽으리라를 해석했고 부림절을 어떻게 해석한 겁니까? 라는 문제에

결론적으로 이런식의 답을 한 것이다.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답이 왜 답인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
그들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은 이 답인 죽으면 죽으리라를 자기 구원으로 땡기는데 이용한 엉터리 문제를 풀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답이 죽으면 죽으리라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은 무조건 틀린 문제를 찾았고 그 문제의 답도 틀린 답을 할 수 밖에 없는

구원 못 받도록 막아버린 엉터리 문제만을 받도록

답인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답의 진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들은 그렇게 본 것이다.

그것을 설교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말해주었다.

속으로 이 양반 진작 그 카지 


[ 참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뜻은 이미 답이 있기에 죽어도 상관 없는 세계로 이전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너가 왕비가 된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가? 라는 문제를 찾음으로써 비로소 이미 주어진 답을 던진다. 죽으면 죽으리라 즉 단번에 게임 오바 다 라는 것을 왜 단번에 게임오바로 넉넉한 승리인지를 껍질 까서 쪼개면 나무의 열매를 통해서 나무를 보여주는 의미이다.

그런데 다들 죽으면 죽으리라를 반대로 해석한다. 죽으면 살리라 라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답인 피가 답이 아니라. 자신의 죽고자 하는 선악의 법적인 선이 나오는 것이다. 남을 살리기 위해서 대신 희생당하는 그래서 보상과 댓가로서의 구원을 노리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반대 편에서 피를 바라보는 자세가 아니라.
도리어 피를 쳐다보는게 아니라. 자신의 희생을 열심을 쳐다보라 라는 바리새인과 다를바 없다.

오히려 불뱀을 확장 시켜서 모두 뱀에게 물리도록 하고 죽도록 하여서
나무에 달린 구릿놋뱀을 쳐다보도록 답은 이거다 라고 문제를 발생시키는 유일한 원천인 에스더의 미모 아름다움 아리따움 즉 편애에 의한 것이다. 그러니 미움유발자인 것이다.

엉터리 미모로 죽으면 죽으리라 라고 나오면 곤란하다.
원래 미움 받는 놈이 미움받는 길을 의도적으로 고난이 아닌 고생의 길을 자처한다고 간다면 매 맞은 자리 또 매 맞아야 할 것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 다 라는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난 음성으로써 택한 자 만이 지옥의 맞은 편에서 지옥 안들어가게 하는 정당한 십자가의 지혜를 펼치는 것이다.

제사장도 아니요 레위인도 아닌(거룩한 일을 하는=성령의 일을 하는 성령임한자, 분리 작업)자가 죽으면 죽으리라 라고 나오게 되면

마치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을 아내 사라가 필요 없이
자기 혼자서 아내를 팔아 먹지도 않고 그것도 두 번 씩이나 실수 할 필요 없이
문제를 풀어서 답을 찾는 방식이라면
그 답은 엉터리 일것이 뻔하다.

그렇게 되어 버리면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 라는 의미도 필요없다.

에서 하기 나름이고 야곱 하기 나름이다. 그들의 행위 여부로 천국이 달려 있게 된다.

그러나 에스더는 드디어 문제를 찾았다. 모르드개가 문제를 던져 주었다

이 때를 위함이 아니냐?

에스더는 이미 답을 간직한 채로 이 답의 문제를 찾았다고 드디어 개시 한다.

죽으면 죽으리라 : 십자가 이다.

이것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 답이 없다.

만약 다른 답을 제시 한다면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답일 뿐이다.

에스더는 비로소 문제를 찾았고
답에 맞는 문제를 찾았다고 자신을 깨뜨리는 죽음을 당당히 펼쳐보인다. 요나의 표적 말이다.
(에스더는 이 약속이 담겨진 그릇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위해서
시아버지 유다를 쪼개듯이 (약속이 있나 없나) 드디어 그 순간이 왔다 라고 문제를 찾았다고 답을 제시한다. 자신은 다말로써 유다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그들 속에 담겨진 이미 담겨진 답이 튀어나온다. 곧 약속이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죽으면 죽으리라 이다.
롬 8장에 사도들이 도살장에 끌려가면서도 기쁜 이유가? 이미 주어진 답이 점점더 드러나기 때문에 기뻐했다. 그래서 문제를 찾았다고 기뻐하는 것이다. 그 문제가 뭔가? 환란? 기근? 칼? 적신? 맞다 문제를 제대로 만났다. 문제가 오면 올수록 닥치면 닥칠수록 합격의 진가가 드러난다. 답의 진가가 드러난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라는 답이 말이다. 그래서 넉넉히 죽이시느니라. 이것이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끊고자 하는 문제를 찾으면 찾을수록 끊어지지 않는 사랑 넉넉히 이긴 사랑이 드러난다. 그래서 판대기 전체로 유대인은 시아버지 유다처럼 또는 아내 팔아먹는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이 되는데 아무것도 한 것 없는 죄인의 자리, 십자가의 반대편의 자리에 놓이게 되고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답의 자리, 피의 자리는, 제사장의 자리, 레위인의 자리는 비로소 지옥을 볼 수 있는 맞은 편의 자리로써 왜 복의 근원인지를 답을 보여주는 모습으로 또는 유다 속에 약속이 들어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쪼개는 자리로써, 요한의 아들 시몬아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 자리로써 베드로를 세 번 부인하는 자리 물에 빠진자리에서 건짐을 받도록 앉혀 놓은 것이다.)
마치 아브라함이 드디어 문제를 만났을때에 비로소 품안에 든 답을 끄집어 내어 놓는다. 다른 답을 내어 놓으면 안되도록 되어 있다.

즉 아내 팔아 먹기 이다. 즉 불뱀에게 물려 놓고 불뱀쳐다 보기 이다.

얼마나 정답 다운지를 그 뒤의 문제까지
피 라는 답에 맞게 딱딱 아구가 딱 떨어지도록 피라는 답의 문제만 나온다.

그 뒤의 문제가 졸지에 애굽족속 여자들 태가 다 닫혀버린다.
아비멜렉 족속 여자들 태가 다 닫혀 버린다.
꿈까지 나타나서 괴롭힌다.

아예 전 재산을 다 주고도 상관없을 정도로 그래 그래 너 복의 근원 맞다 우리가 알았다 제발 다시는 근처에 오지 마라 우리 저주 받은 인간들은 복의 근원이 오면 망하도록 되어 있다 라고 저절로 구별 차별 분리 나누어짐이 저 쪽에서 두손 두발 걷고 나선다는 것이다.

당신은 천국에 제발 있어 주시고 제발 우리가 있는 지옥에 오지 마세요. 우리는 지옥이 좋사오니 지옥 괜히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라고 마귀가 아직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왔냐라고 제발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는 취지와 같다.

그것을 동네사람들이 보고도 모르는 척 하듯이 제발 우리 만난적 없는 것으로 쳐 달라는 식으로 예수님을 쫏아낸다.

안 쫏아 내면 안 된다. 반드시 쫏아내어야 한다. 왜? 예수님은 답이고 인간들은 답이 없으니까 엉터리 문제를 푼 것이다. 얼마나 다행인지 답인줄 들통날뻔 했다. 귀 눈을 막았으니 알면 안된다.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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