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 개들을(할례당) 삼가라 

(육체를 신뢰하는 자들 vs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는 자들)


과연 그러한가 성경을 상고하는 누구 보다 더 신사적인 베뢰아 사람

(행 17:11, 개역)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9-02-27 23:14:09,
빌 3:12 에서 그리스도의 빛이 왔으면 우리는 이미 붙잡힌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붙잡으면 우리는 깨닫고 힘써 붙잡고 자기의 소유로 만드는것이다 신앙생활자체가 힘쓰는 삶이다 주님은 된것이다 우리가 볼때에는 우리는 아직도 깨닫고 이해하고 우리 삶에 하나님의 말씀을 하루하루 동화시키는 과정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것을 사도바울이 보여주고 있는것이다 우리가 지금 하는것이 이것이다

답변 : 종말의 상황
(빌 3:1, 개역)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빌 3:2, 개역)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빌 3:3, 개역)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빌 3:4, 개역)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빌 3:5, 개역)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 3:6, 개역)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빌 3:7, 개역)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빌 3:8, 개역)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9, 개역)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빌 3:10, 개역)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개역)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2, 개역)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빌 3:13, 개역)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빌 3:14, 개역)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15, 개역)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빌 3:16, 개역)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빌 3:17, 개역)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빌 3:18, 개역)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맞습니다. 이미 붙잡힌바 된 겁니다. 게임오바입니다. 더 이상 미완료가 없습니다.

문제는 말을 이렇게 해 놓고 바로 바꿔치기를 하는 겁니다. 즉 성경을 인용해 놓고서는 그 성경을 또 따로 국밥처럼 챙길려고 하니까 바로 뒤엎어버리는 겁니다.

분명히 성경을 제대로 인용을 했습니다. 그러나 인용만 했을 뿐이지 성경을 배격하고 있습니다. 앞뒤 문맥을 살펴 보면 육체는 신뢰할 꺼리가 못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종말의 상황 곧 성령에게 모두 일임된 바 라는 뜻에서 사도바울은 육의 소욕을 겨냥한 성령의 일들을 증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목사라는 개는 성령의 일을 또 미흡한 인간의 숙제로 돌려 놓습니다. 아예 예수님을 믿기 싫은 작정을 노골적으로 하고 있으면 혼자 안 믿는 것이 아니라, 남도 예수 못 믿도록 하는 악령이 씌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너무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만약 그 목사가 본인이 악령이 씌인 것을 깨닫고 돌이켜 고침받는 길로 가면 큰일이 날테니까요 오히려 그렇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즉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육체의 열심을 신뢰하도록 다구치는 겁니다. 본인이 믿음이 없기에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과와 결과와 실적을 요구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본을 그런식으로 요구하는 강압성을 띄는 겁니다. 이것이 악령에 씌인 자들의 잉여성입니다. 이유도 없고 조건도 무조건적인 가인과 함과 이스마엘과 에서와 사울과 바리새인들의 공통점입니다. 육체의 열심 외에는 기대 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붙잡으면 우리는 깨닫고 힘써 붙잡고 자기의 소유로 만드는 것이다]
아닙니다. 주님이 붙잡았기에 깨닫는 것도 우리 소관이 아니요,
힘써 붙잡는 것도 분명 앞에서는 주님이 붙잡았다고 했는데 또 따로 내가 붙잡는 것을 해야만 된다고 가르치고 있네요. 자기의 소유를 박탈 당하는 것이 붙잡힌바 된 것인데
예수님이 나를 붙잡는 것과 내가 예수님을 붙잡는 것과 누가 더 잘 붙잡느냐에 대한 남이 아닌 예수님과의 경쟁으로 예수님을 꺽을 대상으로 보는 겁니다.

이게 바로 종교입니다. 종교에서 명령어가 나오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동기부여, 동화작용)
외부에서의 자극이 없으면 인간은 고정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자극 중에 가장 큰 자극이 뭔고 하니, 신과의 경쟁 붙이기입니다.(신과 일치 하나 되기 운동)
기독교라는 종교가 바로 예수와 경쟁 붙임으로 인해서
그 열심의 효과로 떨어지는 커미션(꽁꼬물)로써 수천년을 이어온 겁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잉여)은 왕서방이 챙기는 겁니다.
그래서 교인들을 부릴줄 모르는 목사는 돈을 챙길수가 없습니다. 소유가 없는데 무슨 수로 장사를 계속 하겠습니까? 장사가 계속 이어져 온 것은 결국 소유가 생겼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괜히 저런 자들을 역사 속에서 이어져 내려오도록 하신게 아닙니다.
그들은 맡은바대로 악령이 심겨진 일을 해야만 합니다.
자 제가 지금 악령이 씌여진 것도 붙잡힌바로 일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이 원해서 악령의 일을 하는 겁니까? 죽었다 깨어나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래의 천국과 지옥에서 땡기는 결과로써 나타난 겁니다. 완료로써 말이죠. 성도는 그것을 아하 그렇구나 라고 확인할 뿐입니다.
괜히 원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리스도의 원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십자가에 인간의 실적을 반드시 개입시키고 썩어넣어서 무효과 시키겠다는 발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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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7 23:16:55,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으려면 지식이 넘쳐야 깨닫지 무식하면 깨닫지 못한다 지식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보니까 그 사랑의 넓이와 폭과 깊이를 알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다고 하면 신앙의 철이 드는 것이다.

답변 :

(엡 3:17, 개역)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엡 3:18, 개역)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엡 3:19, 개역)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예수님의 사랑은 무식해도 용서하시는 사랑입니다. 무식이 유식이라는 조건을 갖추면 구원해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바로 이런 죄(선악=무식하면 안되고 유식해야 한다는 선악이라는 법)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아무나 아는게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이 외부에서 넓게 덮칠때에 저절로 죄의 넓이도 알게 되고
(주님의 몸에 넓게 퍼진 그 상처들은 내 죄 때문인 것을 알게 하심. 죄인 중의 괴수임을 ...)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의 사랑이 외부에서 창세전부터 미래 끝까지 전부의 길이를 아예 피로써 도배를 완료 하심을 통해서 저절로 죄악의 길이를 알게 하시는 겁니다.
(이런 죄도 용서 하셨는가? 라는 낯설음과 나의 행함이 그런 주님의 일하심과 일체비교도 안될 정도로 더 나은 믿음이였다는 사실에 놀라고 기뻐하고 누리는 미래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됨)(사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주님의 사랑이 외부에서 높이 높이 세워질때에 저절로 나의 죄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그것을 허물어 버리기 위해서 낮추시고 꺽으시고자 주님이 낮아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주님의 낮아지심은 나를 높이시고자 대신 원수들의 죄값을 자신의 목숨으로 피 값을 치르심으로 모든 죄를 사하시는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죄를 간과하시는 십자가의 사랑을 높이 높이 세우셨다는 것을 ... )
(사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7, 개역)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8, 개역)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사 53:9, 개역)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주님의 사랑이 외부에서 깊이 찌를때에 저절로 죄의 깊이도 깊이 찔림을 받는 겁니다. 왜? 이미 완료 되었기에 잉여이기에 찔려도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사단의 가시를 빼낼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것 조차도 은혜이고 감사이기 때문입니다.(십자가에서 내가 예수님을 찌른 살인자임을 그런 살인자를 용서한다는 이 모순이 옳았다는 것을 ... )
(사 53:10, 개역)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사 53:11, 개역)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사 53:12, 개역)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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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7 23:22:06,
우리가 얻어야 할것은 예수그리스도라는 이름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이름은 어린양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빛을 봤을때 가능한것이다 혈과 육에서 지배 봤던 사람이 이제 하나님의 영적인 생명을 받아 영적인 사람이 되는것이다 낙태된 사람에게 기업이 없는것 처럼 미련하고 허망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자기이름을 얻지 못하고 신앙생활만 열나게 하다가 태속에서 죽어버리는것과 똑같다 그들은 사단의 권세에서 놓이지 못하는것이다 사단이 주장하는 육체이다

답변 :
얻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우게 되면 누가 더 얻었느냐 라는 소요의 경쟁이 됩니다.
차라리 그 얻은 예수님을 다 남에게 그것도 자기가 정한 이웃이 아닌
전혀 알지도 못하고 이름도 없고 연고도 없는 자
더 심지어 자기 자식을 살인한 자나? 자기 아내를 성폭행해서 정신병자 만들어 자살케 만든 그 살인마 강호순과 같은 자나? 자기 아내 자식 모두를 다 빼앗은 강도에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빼앗김으로써 이것 하나 만큼만 사수했던 그 예수 마저도
겨우 겨우 얻은 그 예수 마저도 다 남에게 줄 수 있느냐 라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이름이죠 이름 그 예수 그리스도 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남에게 줄 수 있느냐 라는 겁니다.
목사들이 예수를 안 믿기에 연기를 하자 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에게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이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써 태어났는데, 사랑 자체의 관계로 태어났는데 얼마나 사랑의 관계가 아니면 자꾸 사랑하자 라고 법을 지키라고 강조 하냐 라는 겁니다. 어린아이는 이미 사랑을 누리고 있는데 엄마 내가 지금부터 엄마를 사랑할께요 라고 하는 짖이 겨우 설거지 하겠다고 오히려 설거지 꺼리를 더 늘어놓듯이 말입니다.
스스로가 더 나은 것을 포기 하고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사랑하겠다고 하니
아버지가 주시는 사랑에 누리면 될 일을
자기가 사랑하겠다고 정신없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서 나타난 차이성인데
마리아가 더 좋은 편은 택했다 라고 말한 이유는
받을 사랑을 자꾸 지키고 행하는 사랑으로 그렇게 되면 자기자신에게 충실해야하는
예수님이 주시는 사랑을 자꾸 작게 여기고 자기가 추구하는 사랑을 크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일로 근심하게 되는 마르다처럼 더 좋은 것이 있는데 되도 않는 전혀 미덥지 못한 미쁘지 않는 자기 속에서 만들어 내는 허상에 얽매이게 되는 겁니다.
목사에게서의 허상은 교회와 그 교인들입니다. 목사 본인이 교인들에게 마음껏 목사를 소모품으로 이용하라고 당당하게 외치질 못하니까? 거꾸로 자꾸 교인들을 어떻게 해서든 굴려먹을려고 이용하게 되는 겁니다. 결국 마르다처럼 괜히 본인의 근심꺼리를 전가시켜서 남도 쓸데 없는 근심 속으로 집어 넣는 거죠. 그리고 못했을 경우에 그것을 빌미로 다구치는 겁니다. 그럼으로 인해 지도자 위치의 권력에 점점 맛들이게 되는 거죠. 정치죠 정치.

또 질문 속에 주의 이름이란 상대적인 인간의 이름의 박탈을 뜻합니다. 그런데 자기이름을 얻기 위해서 주의 이름이 동원되는 식이고 자기 이름을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허망하지 않게 미련하지 않게 하자 라고 했을때에 저 격한 모습을 보니
사랑을 받아서 흐물흐물한 모습이 아니라 뭔가 남에게 약점이 잡힐까봐 그 약점을 강력하게 보완하자 라는 말처럼 하는 이유가 목사 본인이 흐물 흐물한 사랑이 싫고 강력한 요새처럼 믿음을 갖추어야만 약점 없는 자 강력한 자가 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겁니다. 악령이 씌여서 그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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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7 23:33:30,
생명이 왔을때 우리의 반응은 깨달아야 하고 애써 붙잡아야 하고 소유로 삼아야 한다  신앙생활을 잘하면 소유를 얻는데 소유가 상이다 생명이 상이 되겠끔 하라
말씀은 인격이고 생명이다

답변 :
예수님의 죽으심이 오면 자기의 죽음도 고려하게 됩니다.
인간이 살아 있는 이상 예수님의 생명조차도 선악적으로 보는 겁니다.
저 예수님의 생명이 나에게 어떤 유익이 되는가를 먼저 계산하는 겁니다.
고맙게도 종교군들이 그런 계산을 먼저 계산기를 후다닥 두들겨서 답을 내려 줍니다.
신앙 생활 잘 하면 소유를 얻고 그 소유가 상이고 생명이다 라는 계산기 액정에 나타난 값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그런 계산기에 놀아나는 예수님의 생명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죽음으로 다가 옵니다.
비인격적으로 다가 옵니다. 어딜 감히 인격 인격 운운 합니까?
예수님 자기 자신을 갈기 갈기 찢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인격 운운하는 인간들이 사기치는 것을 아예 원천 봉쇄하기 위함입니다.
또 독생자를 원수들의 손에 버렸습니다. 어딜 감히 인격 인격 운운합니까?
자기 독생자를 버리고 마귀의 자녀인 우리를 건지는게 인격인가요? 어지간히 신사적이네요 참나.
예수님 자기 자신을 스스로 치셨습니다. 자살이요 자기학대입니다.
이게 무슨 인격 인격 입니까?

왜 비인격으로 나오는가 하면 사랑은 질투요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봐 줄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뭔고 하니 바로 선악 밖에 모르는 인간들이 인격이라고 선을 운운한다는 자체가
바로 악마적이기 때문에 도저히 봐 줄 수 없어서 무조건 반대로 하는 겁니다.

마치 항상 바리새인과 부자청년은 선한 선생이여 라고 다가왔고
당신은 참말만 하시고 선하시며 진리에 거침이 없는 일만 한다고 늘 긍정적으로 칭찬으로 다가 왔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기꾼이 떳다는 적색경보의 신호입니다.

그들은 항상 인격적인 것에 반해
예수님은 항상 그들에게 삐딱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예수와 함께 손 잡고 생명의 말씀을 같이 함께 증거해 보자고
돌을 떡덩어리 되게,  거룩한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천사가 밭쳐주는 기적을 받도록하는 불멸의 존재가 되게, 온 천하 만국이 절하는 제사장 나라 1등 극가 1등 국민 1등 복받은자 1등 선택자 가 되는 길을 함께 손잡고 이루자 라는 것에
예수님은 단호하게 사탄아 물러가라
그리고 오로지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자꾸 자꾸 자신의 죽음 십자가의 죽음만 십자가만 외골수로 고집하듯이 죽음만 외쳤습니다.

그 목사 마귀새끼입니다. 그런 개와 함께 어울린다는 자체가 이미 유혹에 빠졌기 때문에 못 빠져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단지 호기심 충족 밖에 안되는 겁니다. 장난치는거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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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7 23:46:36,
말씀은 진리이고 만물을 움직이는 원리이다 만물은 이 생명의 말씀이 없으면 쓰레기에 불과 하다 또한 말씀이 있어도 생명으로 나오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사망이다

답변 : 도를 아십니까? 라고 길거리에서 외치는 전도하는 자들의 메시지도 그러합니다.
결국 니 숙제이니 니 숙제 니가 해야지 남이 해주길 바라면 안된다는 소리죠. 개소리입니다.

반면에 복음이란 숙제 할 필요도 없이 숙제 자체가 숙제 스스로가 숙제를 다 끝낸 상태에서 너의 숙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숙제를 함께 누리지 않겠냐 라고 다가오는 겁니다. 인간이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말지요. 예수님이 어떻게 나의 숙제 인간의 숙제 죄의 문제 하나님의 숙제 등등 이것을 언약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완벽하게 숙제를 다 하셨는지를 그 현장 속으로 고 고 고 하면서 목격자의 여행을 즐기는 겁니다.

생명의 선으로 사망을 악으로 인상 찡그려 가면서 법으로 협박 공갈치는 것은
성경 자체를 아무리 봐도 선악의 법으로만 밖에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완료가 덮친자에게는 성경은 즐기는 여행입니다.
양탄자를 타고서 여행을 즐기는 자가 구경하는 기쁨을 누리고 감사할 뿐이지
인상 찡그리 가면서 힘든척 연기하면서 (마르다) 여행 할 리가 없지요. 그들에게는 여행이 아니라 법이기 때문입니다.
40년 광야 생활을 갈렙은 생천국을 구경하듯이 누렸고
(배고픔 속에서 배고픔 보다 더 나은 것을 바랬습니다. 그것이 만나였고
목마름 속에서 목바름 보다 더 나은 것을 바랬습니다. 그것이 바위 속에서의 생수 곧 신령한 음료 였습니다. 그래서 배고픔도 누리고 목마름도 누리고 모든 것이 누리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더 나은 것이 이미 준비 되어 있기에)
그 나머지 59만 9천 9백 9십 8명은 생지옥만 격게 됨으로써 도리어 이미 멸망이 완료된 지옥으로 돌아가겠다고 차라리 지옥 가겠다고 시도때도 없이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배고픔 속에서 만나를 먹어도 소용 없었습니다. 더욱더 배고픔만 더해 갔습니다. 만나가 더욱더 재촉한 겁니다. 목마름 속에서 신령한 음료인 그리스도의 피가 소용이 없었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가 더욱더 그들의 목마름을 재촉한 겁니다.)

그 목사 개 새끼는 자신의 재촉성을 교인들에게 까지 재촉하는 겁니다.

남들에게 떳떳하게 이 정도의 성공한 교회를 내세우고픈 겁니다. 자신의 목회성공담을 빨리 펼치고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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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8 07:44:49,
주님의 말씀은 모순적이고 감춰졌다는데 그건 주님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고 주님의 사람이면 말씀을 열어 주시고 주님의 말씀이 이해되는거 아닌가요 그래서 주님을 점점 더 알아가고 깨닫아 가게 되는거 아닌가요 내 쪽에서 행동을 규정하는게 아니라 주님의 이끄심으로 행동은 자연스럽게 나오는것이구요 근데 지금 성화론자들은 자기쪽에서 행동을 규정하고 자기쪽에서 움직이려고 하니 문제가 되는것이다 이 말씀 아닌가요

답변 :
주님의 반대편에 안 썬 인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치 주님의 편에 썬 냥 외치면
정작 당사자 예수님이 주님의 편에 섰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자 조차도 주님의 반대 편에서 주님을 바라보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주님의 반대 편에 세우시는 주님의 뜻에는 관심 없고
차라리 주님의 편에도 못 서고 주님의 반대 편에 설 수밖에 없다면
자기를 빠지겠다고 이쪽편도 저쪽편에 아닌 제 3의 영역에 빠지겠다고 우기는 겁니다.

주님의 편은 주님 혼자 외에는 아무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편에 섰다 라고 나오면 무조건 가짜 라고 보십시오
나다나엘이 참 이스라엘이라고 칭찬받은 이유가 그러합니다.

땅에 선한 것이 아예 없다 라고 보는 시각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이 땅을 악하다 라고 규정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아니 그런 예수님이 악하다고 규정한 판국에
예수님의 편에 선 자가 있다 라는 말인가요?

과연 그러한지 의심에 의심을 도마처럼 끝까지 의심하고 조사하고 벗겨보고
찔러보고 긁어봐서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는지 조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발적으로 나타나는 그리스도 사람인 빛의 자녀를
자꾸 고정적으로 제사한다면 그 놈 뭔가 수상한 노림수가 있는 겁니다.

차라리 창녀 세리 강도 매국노 살인자 소경 귀머거리 문등병자 에이즈 환자 감옥소 들 속에서 찾는 것이 더 빠를 것입니다.

저는 아직까지 교회 속에서는 찾아 본적 만나 본적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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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8 07:50:11,
우리교회목사님도 종교에서 나와야 하고 지금 목회하는자들의 문제점을 말하는데 그것도 상대방을 들어 자기의 의를 표현하는것이라고 봐야 할까요 설교할때도 우리가 하는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셔야 한다고 하면서 또 우리가 해야 할것을 가르치는데 어폐를 많이 느낄때가 있습니다 전 그것을 주님이 오시면 내가 굳이 안 해도 주님은 나를 그렇게 이끌어 갈것이다 생각하거든요.

답변 :
옛언약인 구약에 나타난 사울 왕을 보시면 일반인과 똑같습니다.
성령이 임했다가 악령이 임했다가 결국 고정적인 인간이 없듯이 항상 유동적으로 움직이다 보니 그 사람 자체를 이런 자다 라고 딱 규정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성경이 고맙게도 이미 결정난 자로써 사울왕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 자체를 볼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뒤에서 조정하고 부리고 움직이는 배후세력을 봐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과 그 사람의 행동은 별개입니다.

분명히 별개입니다. 별개로써
문뜩 문뜩 그 사람에게서 뱉어지는 말씀을 통해서 그 사람의 주인이 어떤 자인가를 보게 됩니다.

물론 별개라고 했기에 그 사람의 실천력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씀의 내용에 의한 겁니다.

그렇다면 별개 라도 그 사람의 주인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별개성이 지금은 별개적으로 작용해도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씀에 의해서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다윗도 똑같이 사울 왕과 같은 짖을 해도 다윗의 배후에는 다윗의 실천력과 상관이 없이 여호와께서 다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호와로 주인이 규정되었기에
다윗은 다윗 자신의 율법 잘 지킨 것을 내세울 수가 없고 (그러다가 깨졌지요), 이것이 아니요 이것입니다. 뭐 뭐 아니요 뭐뭐입니다. 라는 것이 덮쳐진 순간부터 본격적인 미래에 오실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만 하는가를 미리 앞당겨 보여주기 위해서 미리 고난을 받게 되는 겁니다. 율법 지키기 라는 힘든 그 실천력과 족히 비교도 안되는 고난을 받습니다. 원치 않는 고난입니다.

그것도 죽은자 로써 말입니다. 이 죽은 자를 기준으로 해서 이스라엘 전체를 죽이겠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저는 마땅히 죽을 죄인입니다 라는 자만이 심판을 외치면서 그 심판을 자신의 신체 속에 담는 참선지자의 말에 아멘을 하고

그 외의 사람들은 제 3의 영역에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거짓선지자의 외침에 다 속도록 반드시 한명도 남김없이 다 거짓선지자에게 속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이스라엘(교회)을 다루시는 여호와와 인간이 다루는 이스라엘(교회)의 차이점입니다.

결국 이랫다 저랫다 라는 표현 속에서는 선악의 법 때문에 선악적으로 설교할 수 밖에 없고 또 듣는 사람도 선악적으로만 판단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 속에 있는 자는 뭐든지 은혜로만 들립니다. 심지어 마귀라는 가시조차도 허용하시는 것이 모순이 아니라. 주님이 일을 얼마나 잘 하시는가를 보는 겁니다. 인간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보기 때문에 우리가 아니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즉 동원될 수 밖에 없는 나누어지는 개념이다는 겁니다. 소모품 자체의 운명은 어떻게든 자신의 주인을 드러내기 위해서 동원되는 미끼 이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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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8 07:54:53,

억지 춘향격이 아닌 자연스러운 흐름으로요 성도들도 그렇게 듣고 있는 사람들도 있구요 목사가 설교할때 우리와 주님의 몫을 분리 시키지 말고 주님이 오시면 우리를 이렇게 이끌어 가신다라고 전해야 하는거 아닌가요

답변 :
듣는 사람들은 듣는 순간에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난채로 듣습니다. 즉 선악입니다.
여기에 그 결정난 것에 동질감이 아닌 낯선 이질적인 것을 넣게 되면 물과 기름처럼
깨어지는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선악이라는 법의 원리 밖의 것입니다.
곧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이해 불가입니다.

그러나 선악의 이야기는 나름대로 다 선악을 한가닥 다 알고 있기에
좀더 선이냐 좀더 악이냐 라는 레벨의 차이일 뿐이지 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서
고만 고만한 비평과 평가와 타협점과 정치적 공평이 가능한 겁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런 것이 일체 허용이 되지 않을뿐더러
코란 보다 더 심합니다.

어느 정도로 심하냐?
코란 이냐 칼이냐? 만약 거부했을때는 칼이 주어지는데
칼이 주어졌다고 해서 코란 자체는 안 사라집니다. 죽는 놈만 사라지지요.
어찌되었던 신앙의 대상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심한고 하니 칼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 자체를 날려 버립니다. 사라집니다. 숨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칼도 필요 없고요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할 뿐입니다.)
신앙 대상이 사라졌으니 사라졌으니 숨어버렸으니 죽어버렸으니
신앙 자체가 불가능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인간의 믿음 일체 거부입니다.

아 그럼 믿음도 소용 없네 다 무(無) 네 라는 결정이 되어버리면 이것은 불교죠.

그런데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믿음이요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즉 인간의 믿음이 없다고 해서 믿음이라는 것이 쓸모짝도 없느냐? 아니올시다
예수님의 믿음이 있다는 것으로써 인간의 믿음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으로 규정하는 예수님의 믿음이 기준이 되어버린 겁니다.

이렇게 되면 코란 보다 더 심각해 지는 이유가

인간의 믿음을 모두 거짓으로 규정하는 저 예수님의 믿음을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입장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없애는 시도로 성공한 것이 십자가요
이 십자가 사건이 예수님의 믿음으로 인해 발생된 사건이라는 겁니다.

성공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이 옳았다 라는 것을 오히려 살인자들이 증명해 버린 겁니다.

마치 여호수아 대제사장 옷이 더럽다고 마귀가 고소 송사 하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 옷을 새로 입힘으로써 더욱더 부각이 되듯이

마귀가 없으면 더러운 옷과 새 옷의 차이성이 부각이 되지 않는 겁니다.

마귀가 스스로 새 옷을 더 이상 흠잡을 수 없는 것이라고 증거하는 셈이니까요?

그래서 십자가 라는 어리석은 지혜가 아니고서는
인간은 더러운 옷만 계속 주장할 뿐입니다.

미래에 완료된 거룩한 새 옷, 천국 잔치의 예복이 이미 준비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옷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옷에는 관심 없고 자기의 옷으로 자신의 가리우면서 자신의 것을 내 뱉는다는 것은 천국 잔치 자체를 무시하고 준비된 예복을 거부하는 겁니다.

내쳐서 어두움 속에서 이를 갈고 슬피 우는 것이
바로 지금 현재에서도 벌어지는 겁니다.

주님은 아들의 잔치를 십자가로 완료 했습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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