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사람들의 철저한 이중성 (일관성 때려죽어도 못 찾음)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라 (누가복음 16:11)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9-02-27 00:05:05,

사라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아직 의문이 안풀린건 사실입니다

답변 :
당연하지요 의문입니다. 의문이 풀리면 안됩니다. 의문을 해결 못하도록 하는 것이 복음이니까요?
맞습니다. 제가 의문이 풀리도록 이야기 한 것은 없고요
오로지 예수님을 증거하는 복음(곧 십자가라는 불의함, 철저한 모순, 불륜 스캔달)을 알리는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성화론이 왜 나쁜고 하니
어떤 성경의 특정인물을 제시해 버리면
그 사람의 행동이 일관되게 일치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일치성으로 사기를 쳐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의 어떤 믿음의 인물도 일관성이 없습니다.

즉 항상 이중적입니다.

예로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제가 사래를 인신매매 하듯이 팔아버린 이야기로 인해
누이 라고 속인 것을 어제 언급을 안하고 빠뜨렸는데
사실상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자가 왜 이런 행동을 해야 하는가입니다
(또 시아버지 유다는 항상 일관성있는 기준으로써 일관적입니다. 그러나 며느리 다말은 창녀의 옷을 입지 않나? 속이지 않나? 더더욱 시아버지와의 잠자리를 마다 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불륜 즉 이 이중성, 이 모순이 유다를 살리는 겁니다. 십자가의 원리가 그러합니다. 이것이 누가복음의 불의함의 의미가 다 적용됩니다. 십자가의 원리로써 말이죠. 즉 정작 성령은 이 모순과 불륜 스캔달인 부정함으로 일관하는 이유는 인간들이 육이면서 정결함으로 일관하는 행동에 무조건 이유도 없이 주건도 없이 반대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반드시 언급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때에 성경의 믿음의 선배 인물들이 다 이중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따라하고 흉내내고 일치 동화할려는 것에 꺼려지게 됩니다.

심지어 사도바울도 처음에는 믿음을 중심으로 이야기 했다가 뒷부분에서는 행함을 강조해 버리니까 사람들이 헷갈려서 완전 정면 배치 되는 이야기 때문에 해석이 불가하게 되어 버립니다.

맞습니다. 바로 이겁니다.

반드시 이들 믿음의 선배들의 믿음 조차도 해석불가로 만드신 겁니다.

즉 선악적인 접근에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선악으로만 그때 그때 달리 보이는 겁니다.

분명히 구약에서 모세는 애굽의 바로 왕이 무서워서 도망쳤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무서워 하지 않았다고 아주 당당하게 뻔뻔스럽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 성경은 거짓말 하는 겁니까?
진리란 이런 식입니까?

네 그런 식입니다. 결국 선악으로 접근하는 인간들은 반드시 성경 자체가 악취 나도록
반드시 이중적으로 보이도록 성경 자체가 선악과 나무처럼 보이도록 불난 집에 부채질 하듯이 선악을 아는 지식에 부채질 하듯이 더욱더 기름 때려 붓는 식으로 작용합니다. 성령이 그렇게 일하십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성화론입니다. 이들은 성경을 선악으로 밖에 볼 줄 모릅니다. 막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 자체를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기 때문에
성경의 인물들을 자꾸 일관되게 가르쳐야 자기들도 일관성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성경에서 차용해 버립니다. 바로 그것이 걸려든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 어디에도 믿음의 사람들이 일관적인가? 아닙니다. 반드시 이중적입니다. 왜 이중적이냐? 선악의 눈에서는 반드시 이중적으로만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예 노골적으로 베드로는 이런 이중성을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고 사람들은 골라 선택하기 시작 합니다.
가장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탐스러운 인물이 누구인고 하니?
사도 바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좋아하는냥 목사들이 자신의 이상형이라고 우기지만 정작 하나도 닮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매를 맞은적도 없이 일부러 진짜로 매 맞을 까봐 미리 매 맞는 길을 피해서 가버리니까요

그렇다고 피할 수 있느냐? 사도바울의 복음증거 내용 자체도 이중적이라서
지금 현대 신학자들과 성경을 비꼬는 자들(성령께서 동원해서) 현대의 모든 지혜자들이 동원되어서 해석을 하는데 있어서
아무리 이 사도바울의 이중적인 복음증거를 하나로 일치 시킬려고 해도
다들 실패로 돌아가고 도저히 풀 수가 없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정반대의 믿음과 행함을 하나 인냥 말하는데 있어서
도저히 하나가 아닌 이중적으로 보이고
또 그 이중성을 하나처럼 받아들일려고 해석풀이 해 본들 다 실패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제가 분명히 언급 했듯이 사도바울 뿐만이 아니라 성경의 믿음의 사람들이 다 그러합니다.

반드시 그들 자체가 복음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선악과 나무처럼 안 믿는 자들에게 이중적으로만 보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하느냐?

간단합니다.

그들 인물 자체에서 해석 하면 안되고

반드시 예수님을 거쳐서 그들을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행동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새기준에 의해서
그들은 십자가의 반대편인 긍휼의 자리에 놓여짐으로써 증거된 복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다윗을 예로 들면 율법과 자신을 일치 시켰을때에
주님은 그 다윗을 반드시 율법의 반대편에 서게 함으로써 구원하십니다.
그래야 선악이 아닌 생명나무를 통한 구원을 알게 되는 겁니다.

마치 이것은 그리심산(축복산)과 에발산(저주산)에 각각 6지파 씩을 나누어서
그 두 산 사이에 있는 세겜에서 율법을 낭독하는 말씀을 선포 할때에
지키면 축복이요 축복이요 라고 축복산 그리심산에서 상대방 저주산 에발산을 향하여 선포합니다.
또 안 지키면 저주요 저주요 라고 저주산 에발산에서 상대방 6지파가 있는 축복산 그리심산을 향하여 선포하게 됩니다.

즉 이것을 또 흉내내고 따라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의미상 십자가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전 밖, 영문 밖에서 죽죠, 특정 공간 특정 장소 특정 시간이 파괴되는 겁니다. 그래서 안식일 주장했다가는 새로운 기준을 무시하고 거부하겠다는 것과 같죠, 주일성수 주장도 마찬가지, 특정 공간 이라는 교회건물 교회 조직도 마찬가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다 지파가 어느 산에 올라갔는가입니다.
왜냐하면 유다 지파가 중요한게 아니라.
유다 속에서 왕이 오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어느 산에 올라간 셈입니까?

골고다 저주의 산에 올라간 겁니다.
왜냐하면 죄악의 저주를 해결해야 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미워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죄악을 감당하고자 피 흘리기 위해서 에발선 저주산에 올라갑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리석은 지혜라고 합니다.
반드시 어리석게 보이는 겁니다. 누구 기준에서? 선악을 아는 인간의 시선에서 말이죠.

바로 그런 의미에서 선악을 아는 인간들에게서는 도저히 이해불가 납득불가한 십자가를 기준으로 해서 증거되는 복음이고 믿음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중적으로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기생라합의 거짓말 반드시 거짓말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겁니다.
거짓말 따라 했다가는 사람들에게 정죄받는 왕따 당할 것이고
거짓말 안하면 구원 못받게 될까봐 걱정이 되고
항상 이 이중적인 잦대에 의해서 흉내 못 내도록 했건만
성화론이나 오늘날 종교는 바로 그런 걸림돌을 대중들에게서 철폐시킴으로써 말미암아
부담없이(걸림돌 뺏으니) 교회 나오도록 해 버린 겁니다.
그래서 성경의 이 이중적으로 보이는 것을 하나로 해석하는데 있어서
행함으로 일관해 버리면 간단해 버리는 겁니다.(저들에게서는 성공이다고 보는 거죠. 바리새인의 일관성입니다.)
만약 다른 반대의 이야기를 하는 참선지자가 에발산에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등장해 버리면 간단하게 죽여버리면 되는 거죠.(자연스럽게 율법과 국가 곧 성전을 사수하게 되죠)
왜냐?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이중적인 것을 하나로 실컷 만들어 놨는데
쓸데없이 또 이중적으로 보이게 하면 남들 헷갈리게 하니까요?
불편과 불공평을 그대로 남겨두는 자는 아예 짤라버리는 겁니다.(이 원리가 노아가 무지개 언약(창 9장)의 의미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노아가 포도주 마시고 취해서 옷 벗은 사건이 벌어짐으로써 자식들이 두 패로 나누어지는 겁니다. 이 두 패로 나누어지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로 일치되자 라는 것이 그 상대적인 행동이 바로 바벨탑 쌓기입니다. 무지개 언약의 의미를 제대로 적용한 것이 두 패로 나누기 인데, 바로 이런 불공평을 없애버리는 것이 바로 인간들의 언약의 반대의 행동인 일치성 추구 인 하나되자 운동인 바벨탑 쌓기요 성전쌓기입니다. 성전이란 구별 분리(거룩)의 목적인데, 그들은 반대로 해석해서 하나되자 일치 되자로 해석하게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에서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있어서 성전중심으로 하나가 됩니다. 이방국가체제와 성전중심체제가 결국 바벨탑의 원리와 같은 것입니다. 여기에 상대적으로 예수님이라는 새성전은 세상을 두 패로 나누는데 철저하게 불공평인 십자가를 새언약의 기준으로 땅에 밖아 버립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비유의 특징이 반드시 불공평의 의미를 유지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불공평이라는 가시가 있으면 반드시 빼내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공평의 의미를 자기들이 창작해서 해석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손에, 해석에 포착 불가요 해석 불가인 겁니다.

의문의 증서는 예수님을 통한 자들에게서만 일관되게 십자가의 용서로 작용하지
아무리 자기 쪽에서 출발해서 성경을 해석할려는 자들에게서는
이 의문은 여전히 작용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모르도록 막아버리는 겁니다.

그 모르는 작태들이 바로 일치성 동화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뭐라고 했지요?

차이성입니다. 분리입니다.

정작 모든 인간은 십자가의 같은편(일치성)이 아닌 차이나는 철저하게 막히고 분리된 반대편(차이성)에서 죄인으로써 구원자를 보게 됩니다.
그 구원자는 죄인만을 부르러 온 겁니다.

그런데 구원 이후 라는 둥의 용어로 사기를 치면서
이제는 의인이니까
같은 편에 서서
의인으로써 구원자를 바라보겠다는 시선이
결국 의문의 증서를(이중성)을 해결하지 못한 입장에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식으로 사기를 칠려고 하니
결국 자신들 조차도 위선적으로 되는 겁니다.

또 저들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의 시선에서는 예수님이 무조건 이중적으로 보일테니깐요

마치 바울이 증거한 복음이 헷갈리게 이중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듯이
막혀 있는 겁니다.

성경은 오직 십자가로만 일관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지혜로 접근하는 방식은
그 십자가와 자신과의 일치성으로 접근 합니다. 인간 쪽의 출발이니까 어쩔수 없습니다.
여기에 십자가는 철저하게 이중적으로 활동 합니다.

인간이 바라보는 십자가의 시선은 고정적인 것이기에
인간이 교회를 가듯이 십자가 쪽으로 가면 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인간의 선택 사항이요, 행함의 여부인 인간 숙제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런 고정적인 십자가는 없습니다.

십자가는 유동적이고 우발적입니다.
인간이 찾아 오도록 멍청하게 주일날만 기다리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직접 뛰어들어서 매사를 일일이 간섭하는
며느리를 괴롭히는 시어머니입니다.
직접 육의 소욕이 있는 현장에 뛰어들어서
십자가라는 걸림돌에 모두 부딧히도록 만들어서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들어야
인간 쪽에서 이것이 옳니 저것이 옳다 라는 둥의 발언을 일체 허용치 않도록
양쪽 다 깨어버리는 겁니다.

예수님 마저 갈기 갈기 찢어버리는 십자가라면
인간들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구원을 챙길려는 시도를 할 것이 아니라
도대체 왜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밖에 죽일 수 밖에 없었는가를
십자가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즉 인간의 일관성을 딱 하나입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밖아 죽인 사실만이 일관적입니다.

이것을 숨긴채로 성경의 문자를 명령어를 지키겠다고 인간의 숙제인냥 행하고 지켰다가는
일관성 일치성 동화는커녕 철저한 위선자로써 자기에게 더욱더 집착하고
자기 얼굴을 꾸미듯이 성화하겠다고 칼을 대고 성형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얼굴이 성화된 얼굴은커녕 악마의 얼굴로 변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됩니다.예수님은 성화할 필요 없이 직접 뛰어들고 찾아오셔서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신 겁니다.
받아달라고 달음박질 한 적도 없었는데도 말이죠.(롬 4장)

(롬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개역)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7, 개역)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 9:18, 개역)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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