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족보와 여자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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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6 16:30:17,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왜 족보가 없는건가요 

답변 :

족보는 족보 자체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족보를 언급할때에는 항상 그 상대적인 족보에 대비된 의미에서 증거 됩니다.

또 족보 안과 족보 밖의 어떤 선을 그리는 분리 구분 나누어짐 갈라짐 구별을 말하는 겁니다.

가인의 족보(인간 자발적인 영생 추구 모임=바벨탑=살았더라 족보) 가 언급이 되면 반드시 하나님이 직접 관리하는 아벨의 족보(죽었더라 족보)가 언급이 됩니다. (창세기 4-5장)

또 예수님의 족보가 언급이 되는 마태복음의 목적은 결국은 유대족보를 겨냥한 겁니다.
(마태복음 1장 5명의 여인 "~~에게서", 다말 에게서, 라합 에게서, 룻 에게서, 우리야의 아내 에게서, 마리아 에게서,
이 5명의 여자의 특징이 부정한 존재인 이방여자요 외부의 개입으로만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마리아는 성령이라는 외부의 개입이 없으면 유대인에게서 끊쳐진 죽은자와 방불한 자 입니다. 즉 여기서 언급된 여자는 외부의 개입이 아니면 이스라엘 전체 족보 자체는 죽은자요 또 죽었더라의 족보인 아벨의 속성을 그래도 유지합니다. 자체적인 살았더라를 이을수 없도록 한 외부의 철저한 개입을 말하는 겁니다. 여기서 빠진 사라는 이삭이 대변해 줍니다. 이삭이란 아브라함이 낳은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낳은 자식인 죽은태에서 나타난 도저히 태어날 수 없는 자가 외부의 개입으로 태어난 자임을 말하는 이삭 자체가 사래를 대변해 줍니다. 또 다말 에게서 라는 말은 유다에게서는 아니다 라는 유다를 부정해 버리는 의미 입니다. 라합 에게서 라는 의미는 그 사건에 대비된 이스라엘-광야에서 원망한 자들을 부정해 버리는 의미 입니다. 또 우리야의 아내 에게서 라고 바로 밧세바 라고 언급하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 라고 하는고 하니 다윗을 부정해 버리는 의미 입니다. 우리야의 죽음 자체가 하늘의 계획이였다는 겁니다. 마리아 에게서 라는 말은 그 당시 사건의 마리아와 대비된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을 대비된 의미로써 이스라엘 남자들의 율법 쥔 의미를 부정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기도는 높은자 낮추시고 낮은자 높여달라는 영적인 하늘의 전쟁을 싸움 붙이는 기도를 하고 자신은 정작 싸움 붙이기만 할 뿐 싹 빠져버립니다. 이미 완료된 전쟁이 끝난 전쟁이기에 개입할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기도는 한나의 기도처럼 이스라엘 내부에서 두 패로 나누는 기도 입니다. 곧 성령의 기도 입니다. 결국 성령의 일이란 분리 구별 갈라짐 입니다. 즉 성경에서 여자를 언급할 때는 항상 남자(육의 계통 통로)와 대비된 구별 분리 가르기 나누기 두패로 정체를 드러내는데 일에 동원되는 겁니다.)

특히 구약에서는 여자를 족보에 언급하는 것보다

남자들의 족보를 언급하는데 대립된 족보와의 전쟁의 의미를 부각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유대인의 족보에는 여성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옛언약에서의 남성 족보 대 남성 족보에서의 전쟁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실제로 구약의 드보라 사사를 사용하심은 남성이 해야 할 일이 여자가 함으로서 남성의 무능을 고발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여성을 통해서 구약 이스라엘을 새롭게 해석 합니다.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족보가 그러하고

갈라디아서에서 나타난 두 여자의 족보가 그러합니다.

결국 이미 확정되고 완료된 족보였기에
구약의 남성 족보는 실패 할 수 밖에 없었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즉 남자의 족보는 부재성을 드러내고

정작 그런 남자의 족보에서 소외된 여자의 족보를 예수님이 완료성으로 이미 확정된채로 증거했다는 것을 알수 있었습니다.

창 3장 15절의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 이라는 약속의 구체성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 말 것은
여자 라고 해서 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란 남자의 대비된 존재인 차이성을 말하고 있고
(피조물이란 창조주를 말하기 위한 차이나는 존재로써 나의 창조주는 이 분입니다. 나는 창조자 아니요 그의 피조물입니다 라는 차이를 말하기 위한 겁니다. 결국 여자라는 뜻은 남자가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또 예수님의 신부 된 교회를 겨냥한 신랑된 남편이 누구인가를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즉 겉모양으로 여자라고 해서 성경은 그 자를 여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 그런 의미 곧 새 기준의 의미에서 즉 성령의 전 이라는 기준에 의해서

사라는 반드시 불임여성으로써 남편이 누구인가를 말해야 하는 입장이고
또 그 자식이 누구인가를 말하는 입장입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라고 했을때에 여자란 자기의 뼈와 자기의 살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여자의 머리가 누구인가? 나의 머리는 누구인가를 말하는 자입니다.
마치 열매는 나의 나무가 어떤 나무인가를 말하듯이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여자의 자식은 바로 그 관계의 증식 개념을 말하는 겁니다.)

결국 하늘의 어머니인 자유하는 여자가 자유하는 약속의 아들을 낳는 개념이 바로

예수님이 자유하는 약속의 자녀를 잉태하는 남들이 보기에 무능하고 불임여성으로 취급해서 십자가에 죽이는

열매 곧 누가 진짜 열매 다운 열매를 낳는가? 라는 여자 싸움(계집종 하갈과 본처 사래의 자식 낳기 싸움이 곧 하늘의 하나님이 누가 과연 진짜인가를 드러내는 하나의 그림자로써 보여준 겁니다.)

(갈 4:19, 개역)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20, 개역)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갈 4:21, 개역)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갈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개역)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개역)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개역)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갈 4:28, 개역)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갈 4:29, 개역)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갈 4:30, 개역)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갈 4:31, 개역)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결론적으로 간단히 답해서 사래의 족보가 언급 안된게 아니라 언급이 되는데 반드시 복음을 드러내는 목적으로 언급되기에 자주 빈번하게 사용되지 않고 신약에서 완료 된 의미로 언급이 됩니다. 특히 이삭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하갈이 낳은 자식과 대비되는 차이로써 언급이 됩니다.

참고로 구약은 일종의 기회를 주는 인간 개인의 의미를 두고 또 반드시 실패로 이끄시는 사건으로 일관 합니다.
그러나 신약 자체에서는 어떤 개인을 언급하는 것은 없습니다. 전체 판대기로써 다루고 있기 때문에
어떤 인물 한 인물의 행동을 분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 자체 또는 개인으로 볼 것이 아니라, 다룰 문제가 아니라. 누구를 말하기 위해서 그 주변 인물들과 함께 누구를 드러내는 사건 중심으로, 판대기 전체로 움직인다는 사실로 신약성경을 봐야 합니다.

결국 신약에서는 말씀이 말씀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명령어도 그런 취지로 선포 됩니다. 명령어와 선포 자체가 창조 이기 때문 입니다. 미완료 미흡한 창조가 없습니다. 그래서 창조의 말씀은 창조의 말씀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 대비된 인간의 믿음이나 행함이나 인간의 신앙등등은 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고서 사기를 치는 모습으로서
특히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충돌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이란 말씀 지키는데 대표성 곧 오늘날로 치면 개혁주의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완료 자체 입니다.

이렇게 되면 가인은 아무리 제사를 드려도
아벨에게 편애로써 더 나은 제사가 됨으로써

이유 없이 가인에게서 미움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복음이란 이유 있는 미움이 아닌

반드시 이유 없는 미움을 형성 할때에 더 나은 제사와 결부가 되는 겁니다.
(만약 누가 이 글을 보고 이유 없는 미움을 형성해야지 라고 이글을 보고 생각 했다면 이미 이유가 생겨버린 조건이 된 겁니다. 그런 차원에서 바리새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말씀 지키기에 나서게 되, 예수님은 이미 완료된 창조주로써 자신의 지금 막쪄낸 창조물 곧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피조물이 되었다 라는 소경이나 현장에서 잡힌 간음한 여자를 더 나은 제사 라고 당당하게 내세움으로써 저들 율법 쥔 자들의 악마성을 거짓을 드러냅니다.)

즉 더 나은 제사란
예수님이 규정하신 악한 세대(세상이 악하다 라고 또 하나님을 안다는 자들이 기적을 요구하는 그 악한 세대)로 부터 미움을 받지 않는 다는 것은 예수님이 준 믿음의 선물이 아닌
자기 속에서 종교성으로써 만들어낸 믿음에 불가 하기에
그 거짓을 감추기 위해서 성경의 모든 명령어와 법과 문자를 가급적이면 철두철미하게 자신에게 적용하고 실천할려는 자들일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서 미움을 받고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새언약의 기준은 십자가 사건을 늘 똑같이 증식 시키고 있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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