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아담 만을 드러내는  “~~ 여인 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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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6 21:50:50,

마태복음 1장 5명의 여인 "~~에게서"에서 1절 ~4절엔 에게서가 없는데 이부분은 무슨 뜻인가요 그리고 에게서가 있는 5절도 남자를 부인하는것이고 6절 부터 15절 까지 다윗을 부인한다는 것은 육으로 나온 남자를 부인하고  진짜 남자는 그리스도다를 의미한다는것인가요

답변 :

역시 예상한 대로 어떤 한 인물로써 의미를 두어 버리면 자꾸 예수님과 일치 또는 동화작용을 시도 하게 됩니다. 그게 종교입니다. 종교란 예수님이 쓰신 말씀 속에서 따옴표 쉼표를 썼다고 해서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라고 묻게 되면 하나 하나 의미를 다 파악해야 할 입장입니다. 맞습니다. 다 파악해야겠지요 그러나. 그 해석이 그때 그때 마다 다 달라지는 겁니다. 즉 하나의 해석으로 계속해서 그 해석이 먹혀들도록 성경 자체가 허용치 않습니다.
(하나의 해석법이 고정이 되어서 계속해서 성경 전체에 해석법으로 고정되지 않듯이 그렇게 되면 성령이 필요 없죠)

1-4절에서 에게서 없는 이유는 언급 안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언급한 부분에서 왜 언급했는가?

맞습니다. 질문 속에 나온 것처럼 상대적인 남자계통을 부정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모든 아담은 실패한 자 라는 겁니다. 여기에 여자도 해당됩니다. 모든 아담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만 옳으냐? 마지막 아담만 옳다는 겁니다.

마치 제사를 아무리 드려도 순종이 낫고
제사를 아무리 완벽하게 흠 없이 드려도 더 나은 제사가 따로 예비(완료된채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아담] 은 무조건 틀렸고  [마지막 아담] 만 무조건 옳다는 겁니다.

이것을 지금 제가 의미를 두고 말한다고 해서
저나 또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과연 마지막 아담에 의미를 두느냐?
과연 무조건 옳게 여기느냐?

절대로 아니올시다.

반드시 성경의 인물을 하나의 모델로 삼아서
여전히 그 특정 인물에게 의미를 두고서 자기의 본으로 삼아 따라해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했다면 자신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실로암 소경을 고치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싶어서 자신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소경 앞에서 모세의 제자라고 (특정인물을 내세운다는 자체가 아담을 내세웠기에 허상 곧 우상을 내세운 것임 오늘날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함,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을 의미둔다든지, 루터나 칼빈을 앞장세워 개혁주의나 건전교단임을 강조한다는 그 자체가 다 악마적인 발상임, 이 실로암 소경 앞에서는 그들이 눈뜨게 해 준것이 없음 소경은 오로지 유일하게 산 자요 유일하게 창조주요 유일하게 죄를 해결 한자는 예수님 뿐이였음 왜 예수님 뿐 이다 라고 말을 못하는 가?) 방어막을 쳐 버리듯이, 그러나 놀랍게도 소경의 입에서 더 나은 분인 예수님이 증거 됨으로써 저들의 증거가 무조건 거짓이 되어버림, 즉 거짓이란 참이 등장해야 거짓이 되지 참이 등장하지 않으면 거짓인줄 알수 없고 그 거짓이 왕노릇 해도 별 수 없는 것이 됨. 바로 그런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실로암 소경을 고치신 사건의 의미임)

그런데 예수님이라고 이 실로암 소경처럼 독대하듯이 바로 그런 시도를(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 빼고 다른 성경의 위인인물로 모세의 제자다 라는 것처럼 누구가 좋다 더 끌리는 인물이다 라는 식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십자가가 가로막혀 있기 때문에

예수님 자체가 바로 그런 시도를 일체 허용치 않고 부수겠다는 취지를 나름대로 알고 있기 때문에 아예 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십자가로 하나 또는 일치 또는 동화를 시도하겠지만
정작 십자가가 밀어내면서 반드시 십자가의 반대편에 서도록 합니다. (반드시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만)

그렇다고 인간이 포기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일치성을 시도 합니다. (반드시 가해자 없고 피해자 없는 종교적인 도 닦기만 있는, 그래서 성화론이 인간의 종교성에 먹혀드는 것임)

그래서 성경 문자와 자신을 일치 하는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만약 안 그렇다면
가짜 목사를 주변 환경에 깔아서라도 반드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항상 인간은 자기에게 의미를 두겠지만
주님은 바로 그런 자기에게 의미를 두는 자를 깨뜨리면서 예수님 자신에게 의미를 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못 따라 하는 이유는 자기 부정인 십자가로 갈기 갈기 공중분해를 시켰기에
인간이 성경을 실천 하겠다는 자체가 갈기 갈기 공중분해하듯 찢어버리는 이 십자가의 의미 하나만 빼고서는 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곧 아담(인간의 이름 = 남자만이 아닌 여자도 포함해서) 은 무조건 가짜 요 틀렸다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밝혀진 대로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죽인 가해자로 판명됨, 인간의 숨은 실체성, 예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이유 없는 적개심과 살인의지)

이것을 알도록 바위에 계란 터트리기 식으로 투입 되는 것이

바로 “~~ 에게서” 에 해당 되는 여자입니다.

사사 입다와 같은 자기 밖에 모르는 자에게
(사사 곧 구원자 일을 떠 맡게된 일종의 은사를 받은 자가 얼마나 사적으로 이용하는지를 가감없이 다 들추어냄)
이름 없는 입다의 딸이 입다를 깨뜨리기 위해서 갈기 갈기 찢어집니다.
(제사 보다 순종, 살고자 인정받고자 하는 것 때문에 그것을 깨뜨리는 희생의 죽음, 이름없고 처녀 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더 낫다 를 강조, 깨끗한 거룩한 자가 더러운 입다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십자가의 의미를 드러냄)

브닌나 같은 여자가 이스라엘 속에서 그런 생각을(아이 낳기로 이겼다) 가지고 있을때에
한나 같은 여자가 바로 그런 여자의 생각을 깨뜨리기 위해서 투입되는 바위 깨뜨리는 계란이 되는 겁니다.
(이방이 아닌 이스라엘 안에서는 그런 생각이 허용이 되지 않기에, 사실상 브닌나는 바로 그런 생각이 그 당시 이스라엘 전부에게서 나타난 것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임. 특히 엘리 제사장 가문 속에 그런 생각이 있다는 것을 들추어냄)

인간은 그래서 절대로 자기와 동화 될 수 없고
반드시 차이성으로 나타나는 [마지막 아담]을 통해서

자신은 가짜 이고 예수님이 옳습니다 라는 창조를 당하는 곧 성령의 일을 고백하는 겁니다. 

~~에게서 에 나타난 5명의 여인도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남자를 부정하는 의미로 여인이 동원되듯이

또 아담(인간 자체)을 부정하는 의미로 마지막 아담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름 싸움 모든 인간의 이름인 아담을 누가 깬다? 주의 이름이 깨어버린다. )

새 언약의 기준에 의해서 성령에 등떠밀려서 불쑥 불쑥 튀어나오게 된 계란들 입니다.
(계란이란 상대적인 딴딴한 바위=육의 소욕을 겨냥한 성령의 소욕에 의해 우발적으로 등장한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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