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지신 이유 : 구원을 막기 위해서

생명나무 철폐시킨 이유 : 영생을 막기 위해서

죄의 소원이란 이 막힌 것을 뚫고자 하는 조건없는 뚫고자하는 이유없는 집착 = 바벨탑쌓기(천국의 계단)

(창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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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3 09:55:31,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였기에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가 온인류의 죄와 사망이라는 운명을 십자가 위에서 함께지고 죽으신것이다 자기 죽음에 모든 인류의 죽음을 끌어 들인것이다 혈육으로 난 생명이 십자가에서 끝난것이다  혈육으로 인한 생명을 끝내고  하나님 생명안으로 다시금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동화시키는것이고 일치시키는 것이다

답변 :
모든 종교에서의 십자가 신학 또는 고난 신학은 종교적인 속성을 못 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육적인 사고방식인데 바로 일치성과 동화작용 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차이성과 차별화입니다.
즉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라는 것은 마치 믿음과 더 나은 믿음으로 차별화 시키는 원리와 같습니다.

인간의 이름을 아담이라고 했을때에 도저히 동화시킬수 없고 일치를 이룰 수 없는 이름이 
더 나은 이름이 바로 마지막 아담입니다.

그렇다면 그 마지막 아담을 보고 차별성을 느끼는 자만이 십자가가 의미가 있는 겁니다.
(나 아담의 이름인 나는 틀렸고, 마지막 아담이 옳았구나 라는 그 실제적인 사건들이 덮쳐지는 자에게만)

즉 십자가에 반대편에 선 자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십자가와 일치성으로 다가오는 자는 마치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인 겁니다.

결국 십자가가 더더욱 그런 악마의 본색들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나 정작 일치성 근처도 못오고 멀리서 고개도 못들고 그저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는 자에게 (십자가를 찾아서 다가갈 능력이 무능하기에) 십자가가 다가오는 겁니다.
(그러나 종교꾼들은 십자가 찾는데 귀신들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들의 모습이 엘리야를 꺽기 위해서 어떤 모습이던가요? 십자가 지겠다는 모습 아닌가요?)

인간 쪽에서 십자가와의 일치를 위해 다가오는 자들은 십자가가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다 깨부수고 작살을 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십자가를 따라갈 용의가 있는 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12제자도 모든 인간도 다 도망치게 하는 십자가야 말로 진짜 십자가이지 인간들이 친근히 다가갈 인간의 선택권에 놓여진 십자가는 결국 인간의 손에 의해 버림받을 십자가이기에 종교꾼들의 자기유익의 수단 자기집단의 광고효과를 이용당하는 멍청한 십자가일 뿐입니다. 그 어떤 인간의 노림수에도 속지 않는 십자가야 말로 그 조직을 와해 시키는 유일한 어리석은 지혜가 되는 완료된 십자가입니다.
 
이미 완료된 십자가를
인간들은 종교라는 조직을 완료케 할려고 미완료에서 완료로 이끌어 가고자 하는 수단으로 십자가로 사기치는 것은 이미 다 드러난 개수작인 겁니다.
그러나 정작 완료 앞에서 미완료의 것을 아무리 가지고 와도 완료 앞에 다 부셔지는 겁니다. 부셔져도 상관 없는 완료인지 아닌지는 십자가가 주체가 되어 다루지
인간이 일치하겠다고 십자가를 다룰 수 없습니다.
무식이 용감하다고 어느 정도로 무식한고 하니 십자가로 완료를 이루겠다고 다가올 정도로 무식한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은 이 십자가에 당해 봐야 십자가의 지혜가 어떠한지를 알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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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3 09:57:59,

주님은 하나님과 일치하고 연합하기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신것이다 죽지않고서는 하나가 될수 없다는것을 알았기에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하나가 된것이다

답변 : 언젠가 부활이란 모든 종교에서 다 있고 그 부활이 죽었다가 다시 피어나는 겨울의 죽음을 깨고 봄의 새기운으로 피어나는 자연의 현상을 통해 인간들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기들 종교와 모든 의미 속에 다 집어넣고 신화화 시킨다고 말이죠.
마찬가지로 인간들은 주님의 활동을 분석하고 그 분석한 것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서 자기 지식에 집어넣는 해석들이 다 한결같이 인간의 모든 종교 모든 활동상에 똑같이 다 들어납니다. 그렇다면 마귀자식이나 주님의 자식의 차별성이 없겠지요. 다 그렇게 해석 할 줄 아니까 말이죠.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님 외에는 다 소외 시키는 것에 다 이루신 겁니다. (이것을 창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정작 인간들은 알 길이 없는 지혜가 완성이 된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비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방금 그 질문은 비밀이 아니다는 소리와 같죠?

ㅋㅋㅋ 그렇다면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나가 아니다는 소리네요?
(결국 선악을 아는데 우리 중 하나가 되었다 라는 원리 처럼되는 것이겠죠)
(분류 대상인 주제에 자꾸 분류 주체가 될려고 하니 긍흉의 대상이 아니라, 남을 용서하고픈 위치에 서고픈 종교적 위인이 될려는 시도를 또 하게 되는 겁니다. 차라리 철저하게 소외 당하는 것이 곧 소경되었다면 고침받을텐데 소경 아니라고 하니 참소경인 겁니다. 소경 주제에 저 하나 됨에 끼여들려고? 정작 단절을 느끼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자 어떤가요? 종교꾼들이란 단순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를 괜히 주님이 활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독자적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리시는 영입니다.
반드시 예수님의 지시대로만 움직이는 피조물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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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3 10:01:50,
우리가 구할것은 하늘의 생명을 구해야 한다 우리의 본성과 생명을 바꾸기 위해선 생명을 바꿔야 한다 그래서 부활 승천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은 진리이기에 똑같은 결과가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복음으로 낳았다면 하나님의 인격과 생명 성품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끄는 일에 동참하는일에 이끌어 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죽어야 한다

답변 : 그래서 성경말씀을 봐야 하는 겁니다. 보면 구원됩니까? 아닙니다. 보시면 주님의 자녀들이 구한 것이 뭔가를 보게 됩니다. 그 목사는 지금 하늘의 생명을 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개소리는 성경을 아예 모르는 땡중들도 성경과목 선택과목으로 패쓰해서도 나올 수 있는 불교 스님들도 다 하는 소리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나 믿음의 선배들이 한 말을 보면 다르다는 겁니다.
그들은 생명을 구한게 아니라. 반대로 죽음을 구했습니다.

어느정도로 그 죽음을 구하는데 양보가 없는 고 하니?

(갈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예수님의 죽으심을
모든 인간의 말과 사상과 행동에 돋보기를 대듯이 들이대어보면 그 실체들이 다 들어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다 이루신 것은
이 죽음으로 모든 내막과 실체와 실상들을 다 들추어낸 겁니다. 허상 허구임을 말이죠.

예수님의 생명으로 그렇게 한 게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 생명을 증거하는 자가 권위가 졸지에 생겨버립니다. 그래서 교회사 몇천년 동안 사기를 친게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을 완료로써 증거하면 증거하는 당사자 조차도 그 죽음으로 인도함을 당하기에 인간에게 그 권력이 있을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참선지자들은 예수님의 하실 일을 미리 앞당겨서 선포함으로써 예수님의 죽음과 같은 노선으로 갔고 사도들도 마찬가지이고 초대교회도 마찬가지 노선이였습니다.

아무런 세움과 권력의 영역과 시스템이 일체 허용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배태시킨 이후에는
기독교라는 시스템과 복음이 대립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복음은 지금까지 기독교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복음을 증거했지 기독교를 세운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교회는 양립 될 수 없습니다. 서로의 소욕을 이루지 못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일하게 구약에서 언약과 이스라엘은 양립 될 수가 없었음을 누차 강조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양립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 언약이듯이
새언약에서는 질문 속에서 나타난 여전히 인간에게 의미를 두고 기대를 거는 식의 인간 종교활동 또는 인간 신앙활동에 의미를 둘려고 하는 그런 시도는 이미 구약 옛언약때 끝났습니다. 이제 인간에게는 기회가 없습니다. 새언약에서는 그래서 옛언약과 새언약은 양립 될 수가 없습니다. 새언약은 그래서 약속한 성령을 주시는 겁니다. 이제 육이 감당할 영의 말씀은 없습니다. 이제부터의 말씀은 말씀이 말씀 스스로에게 증거하고 그 증거로 다 완료된 상태입니다.

마치 위의 질문처럼 아버지와 예수 나 는 하나다 라는 원리와 같습니다. 인간은 이제 끼일 입장이 못 됩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활동상은 그럼 어떻게 된것인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겠죠. 놀랍게도 그들의 활동이 없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고백입니다. 다 영들이 한 일들이고 그 영들의 움직임에 그들은 단지 목격자로써 이끌림 받은 것 뿐임을 그들이 고백합니다. 왜냐? 천사들은 눈에 안 보이니까 말이죠. 숨어있으니까요.

아니 이것을 따라하고 역사 속에서 잇기가 가능하다는 식으로 교육을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요?
그래서 그 이후 시대에 그들을 따라 하는 행동들이 다 거짓이 되는 단회적이지, 흉내낼수 없는 반복적인 일들이 하나도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교회란 또는 기독교라는 조직체는 우기기에 나서는 겁니다. 그 우기기가 먹혀들때는 결국 조직이라는 위압감을 앞세울 때 가능했기에 내세울 것은 시스템을 갖추어서 협박 공갈 하는 길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나 복음은 시스템 자체를 갖출 이유가 없기에
사람들에게 이해 되거나 납득이 되거나 먹혀들지 않는
천만 다행으로 인간의 머리에 포착되지 않는 불가능으로써 건질자만 건질 뿐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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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3 10:06:40,
히브리서의  주님이 천사보다 뛰어남은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신것이다 우리도 아름다운 이름을 받았기에 생활속에서 검증되어야 한다 주님도 이 땅에서 육신을 입었지만  하나님처럼 사셨다  우리가 생활속에서 검증되어지면 다른것을 얻게 되는것이 아니라 사람을 얻는것이다 사람을 얻으면 그 사람은 자신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고 하늘에 속한 생명으로 이 세상에서 나와 함께 사는 것이다

답변 : 히브리서의 특징은 구약의 주가 바로 예수님 이였다는 겁니다. 그 예수님이 주가 되신 근거는 육신을 입었지만 하나님처럼 사셨기 때문이 아니라(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 목사가 사기를 쳐 주니 참으로 고맙기 짝이 없네요), 육신을 입었기에 영의 일을 한 것인데 바로 육의 입고 한 행위들이 영의 일이다는 겁니다. 결국 그 영의 일이 바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제물로 삼았다는 희생 제물이 된 것을 믿음이요 이 믿음이 행함이 아닌 믿음이 믿음으로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의 믿음과 하나님의 믿음이 이룬 영의 일이다 라는 겁니다.

결국 이렇게 되면 인간의 믿음을 그 사이에 끼어넣을수 없도록 차단과 단절을 이루었다는 사실입니다.

일종의 뭐라고 표현하면 제일 이해할 수 있나?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요? 마치 내 후계자는 내 믿음을 그대로 행하는 자다 라고 했을 때에
(자기 믿음으로 다가가는 자는 다 깨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믿음이 아니라 자기 믿음이니까요)
또는 자기 딸 평강공주의 울음을 멈추게 하는 자만이 공주의 남편이 된다는 식?
또는 잠자는 숨속의 공주의 잠을 깨우는 자 만이 왕자 라는 등의

바로 이런 원리가 솔로몬의 재판에서의 지혜입니다.
이 어리석은 지혜(하나님의 지혜)와 일치하지 않는 자는 더 거짓인 겁니다.

맞는지 안맞는지 가려내는 식이니까요? 그래서 구약의 문제의 해답이 그 수많은 제사들과 의문의 율법의 답이 예수님이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히브리서인데

영의 일이란 제물된 믿음 곧 하나님 자신이 자기 자신을 치시는 지혜에서만 자기백성을 살리는 것이다는 겁니다. 이런 하나님의 믿음에 예수님의 믿음이 부합이 된 겁니다.

그리고 일은 다 완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룰 것이 없고 남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틈이 없는 영의 일에

종교꾼들은 틈새시장을 노리는 것이 바로 사람을 얻는 일이라는 둥의 피라미드 다단계 판매를 펼치는 겁니다.

참으로 그렇게 해주고 있다는 것이 참 다행입니다. 전혀 비밀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니 말씀이 맞았으니까 말이죠. 자기 따나 비밀 풀었다고 나오는 놈들을 조심하라고 했죠.

(고후 11:13, 개역)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 11:14, 개역)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즉 광명한 천사나 그리스도의 사도나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에 인간들은 풀 길이 없습니다. 그것 마저도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단감별사 노릇하는 집단들이 우후죽순으로 나타나는 것도 당연한 겁니다.

성경 말씀 하나 하나는 계시요 묵시입니다. 해석 불가능이요 철저한 단절 되었습니다.
풀줄 안다고 우기고 그런 자기자신이 고정된 자 라고 우기는 자는 무조건 거짓입니다.
생명 나무로 가는 길은 막혔고 차단 되었습니다.

차단 된 것을 마치 풀렸다고 말하는 자들이 종말때에 많이 많이 100% 넘쳐나야 하듯이 말이죠.

아니 질문을 다시 보니 진짜 웃기네요. 종교 장사꾼들의 전형적인 멘트 아닌가요?
사람 하나 얻고자 두루 두루 돌아다니는 소경
다행히도 세상의 흐름 속에서 이미 세상사람들이 다 보여준 형태들을 이제야 부랴부랴 따라하는 종교 다단계 판매방식은 이미 사회에서 그 부작용이 다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늦게나마 발악을 하는 이유는
이유는 딱 하나? 어찌했던 간에 먹고 살아 남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경제가 나빠지고 극한 광야의 상황이 되면 될수록 본색이 드러납니다.

차라리 주여 저는 처음부터 죄인일 뿐이고 믿음이라곤 단 하나도 없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히브리서에서 말한 바로 그런 너 때문에 희생제물이 된 시체가 된 예수님의 피를 본 자입니다.

그 시체에서 나온 피 마저도 자기 종교적인 탐욕으로 써먹을 정도로 인간은 악하다 라는 것을 히브리서가 밝혀내는 겁니다. 믿을 것이 못 되는 인간의 믿음이다는 것을 말이죠, 정반대로 얼마나 미쁘신 믿음이 예수님의 믿음이라는 것을 부각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제사가 두 계열이 있듯이 제사장도 두 계열이 있는 겁니다. 인간 제사장과 하늘의 제사장 멜기세덱 반차 말이죠. 그렇게 되니

인간 제사장의 제사의 방향과 멜기세덱 제사장의 제사의 방향을 대립 시키는 겁니다.

처음부터 인간의 제사는 제사일 뿐이지 순종이 아니다는 겁니다. 껍데기입니다.
순종은 제사 보다 낫습니다.

그 나은 제사가 바로 멜기세덱 제사장의 반차로 처음부터 실행이 된 다른 계통의
더 나은 제사가 있었던 것을 말하는 것이 히브리서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믿음 인간의 제사 인간의 찬양은 다 죄요 거짓이요 미흡함 뿐입니다. 미완료입니다.

완료된 더 나은 제사가 있고 더 나은 믿음이 있다는 것에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완료 뿐이니까요

만약 없었다면 거짓 속에서만 살았을 뿐이니 말이죠.(미완료 뿐이니까) 지킬 것 뿐인 종교가 기득권으로 득세를 부리고 그 행패에서 못 벗어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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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3 10:11:28,
그런 사람을 만나면 대화가 통하는것이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많아서 답답한것이지 이 세상이 답답한것이 아니다  하나님 말씀 통하는 한 사람만 있어도 신난다 그리스도가 얻은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라 기업은 유업이다 물려 받은것이다 물려 받는것에 끝나지 않고 실력이 되게 하고 누리는것은 자신의 몫이다

답변 : 종교란 유유상종 곧 같은 욕망을 가진자들이 동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그 욕망에 금가고 틈새가 벌어지면 무한대의 종파가 생기는 겁니다. 욕망때문인거죠.

결국 종교가 꿈꾸는 천국이란 소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 소통이 단절되면 미쳐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종교는 막혀버리는 것을 가장 싫어하겠지요. 그래서 정치꾼들이 되는 겁니다. 불도져로 밀어버립니다. 그 불도져에 밀려 깔려 죽은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단절로써 일합니다. 아무리 넘어뜨리고 실족케 하고 다리 걸어서 자빠져도
뭘 믿고 계속 일어나는지를 통해서 그 사람의 배후가 누구인가를 가려내는 겁니다. 물론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하는 겁니다. 성령의 일하시는 방식은 단절 뿐입니다.
막아도 막아도 차단해도 차단해도
악마를 깔아놓고
가시를 깔아 놓고
돌짝밭을 깔아 놓아도

이상하게 열매 완료 그 자체인지 아닌지를 찔러봄으로써 가려내는 겁니다.

처음부터 소통으로 다가가지 않습니다. 차단으로 다가 갑니다.
처음부터 생명으로 다가가지 않습니다. 죽음으로 다가 갑니다.
처음부터 구원으로 다가가지 않습니다. 심판으로 다가 갑니다.

왜 그런고 하니 미완료에서 완료가 되는 방식을 차단하기 때문입니다. 완료도 아닌데 미완료가 완료되는 방식이 없는데 완료가 되어버릴까봐 걱정하고 두려워 떨기 때문입니다. 누가? 예수님이 말이죠. 그래서 부랴 부랴 생명나무를 후딱 치우는 겁니다. 마치 야호 성공이다. 선악과 따먹었네 빨리 생명나무 치워버리자 라는 식으로 생명나무를 치울것에 알리바이를 형성하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성공했다고 신나게 치우듯이 말이죠.

(마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이미 완료인 자만을 뽑아내는 겁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 건지도록 되어 있는데 차질이 생기면 안되니까요

사도행전에서 부터 바울과 베드로가 충돌이 되어서 계파가 생긴 것 같은 오해의 일들을 성경은 그대로 담아버립니다. 그런데 이것을 또 역으로 해석해서 계파분열의 정당성으로 이용하는 교계가 한 둘이 아니였죠. 정작 성경의 의미는 이겁니다. 완료 앞에서 따로 따로의 국밥을 형성하는 것은 완료를 결국 깨뜨리는 미완료 취급하겠다는 취지와 같다는 것 앞에서 완료 앞에서 되도 않는 미완료의 것들을 알짱알짱 어른거리지 못하도록 하라 라는 겁니다. 베드로와의 충돌(갈 2:11-16)처럼 많은 충돌들은 성경은 빠뜨리지 않고 증거하고 있다. 왜냐? 그들의 충돌은 단순한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충돌이기에 그들은 그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모든 것들을 탈탈탈 털려야 하듯이 빈주머니 되듯이 다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전 1:12, 개역)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고전 3:7, 개역)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고전 3:8, 개역)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고전 3:22, 개역)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결국 사도바울의 권위도 아니요 베드로의 권위도 아닌
정작 둘 조차도 완료 앞에서 믹서기에 갈리듯이 다 갈려 가루가 될 입장에
자기 영향권을 형성하는 시도나 또 그런 발상이 있다는 그 근원의 뿌리를 아예 아작 내는 식으로 증거한 겁니다.

왜 이 부분을 성경이 다루었는고 하니
결국 인간이 성경을 흉내내는데 있어서 반드시 조직화와 분파와 시스템 갖추는 것을 보고 다 거짓임을 알아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이 고마운거죠. 왜냐? 안믿는 놈들이 아니라 정작 믿는다는 놈들이 꼭 성경과 정반대로만 어쩌면 그렇게 똑반대로 행하고서는 그것을 부정하고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것이 옳은냥 우긴다는 것을 바로 그런 성경 속에서의 사건을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얼마나 완료와 차이가 났으면 저렇게 미흡하고 미완료를 맞다고 옳다고 우기는지를 말이죠.이 질문 부분의 답변을 결론적으로 말해 보면

인간이 종교적이든 뭐든 다 동원해서 생각한 영의 말씀은 결국 선한 방식입니다. 그래서 그런 방식은 구약으로써 옛언약의 방식을 그대로 하는 놈들이 바리새인 인 겁니다. 바리새인을 괜히 예수님이 배치시킨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정작 성경에서의 성령의 방식은 또는 예수님의 활동은 반대입니다. 상대적입니다. 바로 저런 바리새인의 사고방식에 완벽한 정반대임 무조건 반대인 그야말로 악마적입니다.

아무리 봐도 예수님을 좋게 좋게 볼려고 해도 도저히 좋게 볼 수 없는 악마적인 모습으로만 일관하고 아무리 자신들의 성경 지식을 대비시켜서 분석해 본들 악마 라는 답 외에는 달리 다른 해석이 나오지 않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은
지금의 바리새인의 계통을 잇는 종교꾼들에게는 항상 무조건 반드시 악마적인 모습으로써 반대로 일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결론적으로 말하는 취지가 정반대이라는 말을 하고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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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3 10:19:00,
그런데 어떨땐  모든것이 다 주님의 의해 움직이는것이다 하고 어떨땐 자기몫이다라고 하는데 이것조차도 주님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것 아닌가요

이것도 어차피 인간의 입장에선 합리화가 될수도 있겠지만 포괄적인 면에선 다 주님의 허락하에 움직이게 되는것이고 예정되어 지는데로 가게 되는것이만 주님은 우리에게 너는 꼼짝마 하는것 같습니다

답변 : 마귀에게 도저히 빠져 나올수 없도록 마귀를 깔아 놓았습니다. 저런 놈들의 사기를 알려면 사기꾼에게 당해본 자들만이 그 사기를 아는 겁니다. 그래서 복수한다고 똑같이 사기를 치는 자들이 있는 반면에 그런 사기를 통해서 예수님이 규정한 악하게 만들었다는 그 취지를 알고 그 속에 나 또한 악한 자임을 예수님을 사기치고 예수님을 가지고 사기친 사실을 통해서 자신의 죄인임을 알려주는 성령의 탄식으로 비로소 알게 되는 겁니다.

율법이 가입해서 모든 사람들을 율법 아래에 가두심으로 인해서

죄 아래 갇혀 봐야 또 그 죄란 내 손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닌 반대로 죄가 나를 다룬다는 것을 아는 자만이 (롬 7장)

반대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율법 외의 한 의가 나타나서 구원을 이루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결국 인간은 바로 이 두 권세에 낑긴 상태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 로써의 잉여로 죄가 땅기고
원인 없는 결과 로서의 잉여로 은혜가 땅기는 겁니다.

갇혀 본 자 만이 자유를 압니다.
늘 자유한 자가 자유를 알지 못합니다.
빛은 대낮에 의미가 없고 캄캄한 어두움에 빛의 의미가 부각이 됩니다.

그래서 죄인을 부르러 온 이유는 죄인이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구원자가 의미있고 구원자를 말하기 위해서 죄인이 동원되는 겁니다.
죄인이 만약에 동원되지 못하면 인간들은 구원자가 소용없다고 또 잔머리를 굴립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돌들이 증인으로써 외친다고 합니다.

결국 인간들은 예수님에게 질 생각이 원래 없다는 뜻입니다.
믿음도 예수님을 꺽는 식으로
신앙도 예배도 찬양도 예수님마저 경쟁대상으로 삼아서 게임하듯 장난을 치겠다는 것으로 일관 했습니다.

그런 장난치는 놈이 목사요 그 목사의 말에 난 그저 속았을 뿐이고 라고
몰라서 그러니 봐 달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안 봐 줍니다.

예수님이 악하다 라고 규정했기 때문에 걸려든 겁니다.


자신이 이런 심판 속에 마땅히 죽어야 할 입장인 것을 모르는 놈들은

그새 고개를 쳐들고 구원의 조건이라는 둥
믿음의 조건이라는 둥
성도의 조건이라는 둥
교회의 조건이라는 둥
주님의 자녀의 조건이라는 둥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미완료인 법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신됨을 하나님 같이 된 것을 멈추지 않고 흡수 통합 스폰지처럼 빨아 드려서

성경말씀과 일치성과 동화됨을 육의 자랑으로 삼아서
틈만 나면 예수님을 꺽어볼려는 살인의지로 일관하고 있는 겁니다.

바로 그런 남들에게 나 이렇게 예수 잘 믿는 놈이다 라고 자기의 영역을 갖추겠다는 자체가
예수님을 죽이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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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3 10:22:30,
말씀 들을때 모르겠으면 쌓아두라 그러면 어느날 익게 되어 있다 성령이 오셔서 깨닫게 해 주신다

답변 :

다단계 피라미드 판매전략 세니마나? 보험회사가 사원들에게 교육세미나를 하는 방식을 한번 들어보세요. 부흥회 수준입니다. 거의 집단최면 방식입니다. 또 그렇게 해야 운영이 됩니다.

즉 처세술 외에는 믿을 구석이 없다는 것이 이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정당성과 합리성을 성령이라는 보증수표로 안심시키는 겁니다.

판매전략을 할 때에 남을 속이지 않으면 안될때가 많은데 그때의 양심의 찔림을 보상과 댓가성으로 무마 시키듯이

그런식으로 동원되는 것이 성령입니다.

그 목사 새끼 완전 노골적으로 자신의 잉여를 드러내고 있네요
갈 때 까지 간 모양인 것 같네요.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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