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는 자유냐? 지키는 종교냐?

누리는 자유(새창조:은혜:사랑:용서)냐? 지키는 종교(이전것:선악법:행위:믿기라는정치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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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0 09:04:36,
사생자가 아닌 세상에서 주님의 그릇으로서  새창조가가 완전히 끝난 사람은 환란도 없고 심판도 없고 어려운 상황도 피하게 해 주시면서 이 세상을 누리면서 살다가 저 세상에서도 같은 상태로 누리게 해 주시게 되는건가요  인생은 사건의 연속인데 사건이 올때 사람의 상태에 따라 어떤 사람은 작게 어떤 사람은 크게 온다 어떤 사람은 피하게 해 주신다고 하니 참 난해하네요

답변 : 피한다는 의미는 공격자가 있다는 뜻입니다.(만약 공격자도 없는데 지 혼자 피하고 한다면 혼자 쇼를 하고 있는 거죠. 그런 정신병자들이 종교 속에 많습니다. 허상 만들어 놓고 혼자 쑈 하기)

그 공격자를 들추어내는데 있어서 피난처가 있기에 상대적인 보호자가 증거되는 겁니다. 즉 이런 미끼가 없으면 공격자와 보호자의 싸움이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바로 한나의 찬양 마리아의 찬양 곧 계시 묵시는 이 두 영의 세계의 싸움을 드러내는데 동원되는 겁니다.

환란이 없고 심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환란이 남들보다 더 격게 되고 심판을 남들보다 더 격게 됨으로써 두 영의 전쟁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더 격는다는 것은 더 나은 제사가 주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환란이 극심하면 극심할수록 보호자에게 그 조명빨이 주목이 되는 것처럼 말이죠.

마치 애굽의 강퍅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되는 겁니다. 이 때에 주님은 자신의 영광 곧 주인공 되심을 부각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더더욱 고통을 가중 시키는 겁니다. 애굽왕과 애굽 군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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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0 09:11:57,
주님의 새창조가 끝난 사람은 사건이 와도 좋고 안 와도 좋은 그저 누릴수 있는 상태이기만 한건가요

말씀을 배운다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이 보호하사 커다란 외부 환경없이 무난하게 말씀만 배울수 있는 상태로 환경을 조성해 주시고 저도 말씀을 배우지만 제가 봐도 무난하게 가는것 같습니다.

답변 : 창조가 끝났다 라고 선언해 버리면 완료로써 봄으로써 그 창조의 관계성을 계속 진행이고 움직이는 겁니다. 계속 진행이라고 하니까 그럼 창조가 완벽하지 않았다는 말이냐? 라고 묻는자는 많은데 쉽게 말해서 아기가 태어나면 인간으로써 태어난 겁니다. 완벽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니 마음대로 살아라 라고 내버려 두면 바로 죽습니다. 먹이고 입히고 똥싼거 기저귀 갈아주는 그 관계성 까지 다 완료로써 준비 되어 있습니다. 그 아기는 누리도록만 되어 있습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새창조 된 사람은 곧 구원된 사람은 구원 이 후의 삶이라는 것을 따로 챙길 필요가 없습니다. 도리어 구원 된 삶을 누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엄마의 아기로 태어난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을 누리도록만 되어 있습니다.

마귀의 자식으로 태어난 자는 마귀의 자식 된 삶을 누리도록 되어 있고,
주님의 자식으로 태어난 자는 주님의 자식 됨을 누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주어지는 사건은 그 사건이 누구를 드러내기 위한 것인고 하니
그 사건이 자식이라는 열매에게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 열매의 나무를 드러내는데 일어나는 사건들입니다.

아 저 자녀가 그래서 누구 자식이구나 라고 알게 되는 계기가 사건이 일어날 때 마다입니다.

그렇다고 사건을 자기가 잘 숙제 풀 듯이 푼다고 자기 부모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건의 문제를 풀든 못 풀든 그 사건을 푸는 당사자들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사건 자체가 넌 누구 자식이야 라고 달려오고 덮쳐오고 들추어내는 겁니다.

사건 자체가 말이죠.

그래서 환란이나 기근이나 칼이나 죽음이 와도 넉넉히 이기는 것은
이겨내어서 이기는게 아니라.
이미 이긴자로써 태어난 겁니다. 누가 이긴자 입니까?
예수님이 이기셨기에
자동적으로 예수님의 자녀는 이길 수 밖에 없는 운명으로 태어난 겁니다.
지고 싶어도 질 수 없는 운명입니다.
아무리 지옥 가고 싶어도 이미 천국이 땡기는 운명이고

반대로 아무리 저 쪽은 이기고 싶어도 이길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난 겁니다.
무조건 실패하고 질 수 밖에 없는 운명으로 태어난 겁니다.
지옥이 싫다고 해도 지옥 자체가 땡기는 겁니다. 자기의 처음자리가 지옥 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자녀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마귀의 자녀는 음부의 권세에 무조건 질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이유도 조건도 없이 무조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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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0 09:20:03,
저는 아직 얼마 안 되서 그런지 저의 것으로 인해 속에서 가고 싶을때도 있고 게으름 피우고 싶을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건이 크게 올때도 있어서 말씀을 못 배우게 되는 상황이 될때도 있습니다 마음의 상태에 따라 역사하신다고 하고 사건도 자기 분량만큼 오는것이니 사건이 올때 자기속상태를 봐라 결국은 주님말씀데로 사는것 외엔 없다 하니 그 말씀도 맞는것 같고 제가 아직 듣는 신앙이고 보지 못하는 신앙이어서 그런지 요샌 진짜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만 가지게 되는것 같습니다.

답변 : 자기 분량 이라는 표현 참 오랜만이 듣는데요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거 사기였습니다.
자기 분량이란 일종의 자기가 소유한 자기영역 개념인데 성경에는 이스라엘을 다룰때에 개인적으로 다루는 법이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다룹니다. 그 전체적으로 다룰때에
언약의 인도에 따라 예를들면 노아언약 때는 노아 가족들을 다룰때에 상대적인 홍수로 싹쓸이 당하는 자들과 대비 된 겁니다. 모세언약을 다룰 때는 애굽이라는 민족을 다룰 때입니다. 그리고 다윗언약을 다룰 때는 가나안 민족을 싹쓸이 한 이후에 이스라엘 내부를 다룰 때입니다. 그렇때마다 언약에 따라 죄의 양상도 그 깊이가 달라집니다. 은혜가 깊어져야만 죄도 깊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분량이라고 한다면 주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 곧 선물의 양상에 따라 그 만큼 죄의 깊이도 알게 되는 겁니다. 개인적인 죄 깊이 차원이 아니라. 님과 님 주변의 모든 사람과 역어진 상태에서 다루어지는 은혜요 죄의 깊이입니다. 예로 부부가 결혼했다면 그 부부는 자신의 죄 뿐만 아니라. 아내의 죄 더 나아가 태어날 자식의 죄 또 더 나아가 남편 식구 시가댁 전체와 아내 식구 처가댁 전체가 다 맞물려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나 혼자 따로 뚝 때어내어서 은혜를 다루든지 죄를 다룰 수 없는 문제입니다.

게으름도 피우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상 원래 모든 인간은 게으름 뱅이입니다. 게으름 피울때에 게으름 피운다고 자신이 판단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게으름 뱅이입니다. 아무리 게으름 피우는 인간이라도 밥이 오늘따라 유난히 맛있을 때에는 부지런해 집니다. 결국 게으름 피우는 것도 주변환경이 좋을 때입니다. 그런 인간도 주변 환경이 나빠서 배고픔이 닥쳐오면 자기가 아무리 배고프기 싫어도 배고픔 때문에 뭐든지 부여잡고 움직여야 먹을거리가 생기는 겁니다. 결국 게으름 피울 수 있을 때 그 정도로 주변 환경이 아직까지는 배부르게 닥쳐 왔다는 뜻이고, 조금 누려볼 여유도 있는 겁니다. 그거 3초죠 뭐. 그러나 어려움이 닥치면 이야 또 부지런해 지라도 닥쳐오는 것이니 도망칠 수 밖에 없지요 뭐. 다윗이 왕 자리의 여유를 누리다가 왕자리를 쟁취할려고 아버지의 목을 딸려고 달려드는 자식들이 여러명 덤비면 우짭니까? 도망 쳐야 죠 뭐. 심지어 거지 행세도 합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누리는 것 외에는 할 게 없습니다. 일하는 것요? 그것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결혼도 지키기 위해 하는게 아니라. 누리는 것 중의 하나요, 부부사움도, 자식 애 먹이는 것도, 친척이나 가까운 가족의 죽음도 다 누리는 입장이지 지켜서 누가 죽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님에게 듣는 신앙과 보는 신앙으로 나눈적 없습니다. 아마 그 쪽 교회에서 사기친다고 알려준 모양인데 신앙 자체가 정치술입니다. 인간의 믿음은 다 허구입니다. 안개를 쫏는 것과 같습니다. 내 신앙 따로 챙길려고 하지 마시고 예수님의 믿음만이 실상이니 그 예수님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를 말씀을 통해서 인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오히려 누릴 것을 그런 되도않는 소리를 듣고 누릴 것을 지키는 것으로 만들지 마세요. 그냥 인생은 다 누리는 겁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자체도 누리는 겁니다. 나를 위한 누림이 아니라. 예수님이 인간으로 태어나게 해 주신 겁니다. 그것에 대한 감사로 누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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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0 09:28:17,
목요일날 오후 11시 30분에 kbs1서 동행이란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되어 요샌 그 시간만 되면 자주 보다시피 합니다

커져만 가는 저의 육을 보면서 그것을 통해 다시 저를 추스리게 될때가 있거든요 제가 그것을 요샌 자주 본다고 하니 그건 작가가 쓴데로 그들은 움직이는것이고 어차피 안봐도 아는 내용이 아니냐 하면서 자기보다 수준이 낮은 사람취급을 하는데 자존심도 상했지만 한편으론 제가 아직 뭘 모르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답변 :

사람이 어려움이 닥치면 닥칠수록 자기의 입지와 영역이 좁아집니다. 요즘 추세가 고개숙인 아버지 라고 해서 가장의 아버지의 입지가 좁아지게 되니까 사회적인 전반적 문제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웃기는 것은 아버지가 고개를 들면 어머니는 과거의 여자처럼 입지가 좁아져서 어머니의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라는 가부장적 권력으로 다 덮어버리고도 남을 정도로 위력이 아주 강하게 자리잡아서 여자는 마치 물건처럼 다루어졌기에 끽 소리 못하고 지냈습니다. 바로 그런 환경을 만드는데 몇천년 걸리는데 성공한 판국에 이제는 여자들의 입지가 넓혀질려고 하니 (겨우 이제 시작일 뿐인데) 그 과도기로써 몸쌀을 앓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란 주변 환경의 유행에 따라 시대적인 문화에 따라 자기의 영역도 함께 그 흐름에 타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의 자리 너의 영역은 원래 없었다고 처음자리는 없었다고 알려 줍니다.
그 처음자리는 고정화된 인간들의 선악의 법에 따른 어떤 영역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님의 사랑이라고 처음자리를 알려 줍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영역이 있기를 원하고 소유하고파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리를 빼앗김당해봐야 주님이 하시는 소리가 뭔 말인지 알게 됩니다.
그 빼앗김 당하는 것을 구원 이라고 합니다.
자기 자리 심판 당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심판이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어찌 피 흘림이 없는데 사함이 있겠습니까?

님은 자아라는 선악이 만든 허구인 자아를 쳐다보게 되니까
자기 연민과 자아 연연에 빠지는 겁니다.
없는 자아를 쳐다 봐야 허상이기에 허무만 보일 뿐입니다.

그런 없는 자아를 날려버리고 빼앗아 버리는 주님의 수고를 본 자라면
주님만을 쳐다 보게 됩니다.

주님이 크게 보이면 자기는 작게 보이고 안 보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이 크게 보이는 겁니다.

그러나 법은 자기 자신을 크게 보려고 하는데서
자기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인간들이 자기를 키우는데 영웅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화 라고 저번에 말했습니다.
없는 허깨비 허상인 자아를 신화로 만들고파 인간들은 지금도 쉬지 않고 쉼도 없이 부지런히 뛰고 뜁니다. 심지어 교회 속에서도 자기의 존재를 신화로 만들려도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다가 와서 제발 손 놓아라 라고 하십니다.
자기를 키우는 그 헛짓은 다람쥐 챗바퀴 돌리는 시치프스 신화에 나오는 그 짖이라고 하는 겁니다.

(마 11:28, 개역)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개역)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개역)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리고 그런 취급 자기들 보다 수준 낮은 취급 당해도 오히려 기뻐하세요. 저들이 모른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은 주님 자신만 높도록 하셨고 그것이 눈에는 반대로 가장 낮은 자리로 말석으로 자리를 앉으셨고, 그렇기에 자신 외에는 높은 수준인 자가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다 고만 고만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다 낮은자일 수 밖에 없는데 그 속에서 상석을 바란다면 그 상석을 마음껏 앉으라고 하세요. 종말때에는 그 자리 빼앗길 자리일 뿐입니다. 주님만 좋은 자리 주님만 수준 높으면 되었지 인간들 저거들끼리 수준 높아 봤짜 얼마나 높을까요? 그 그런 헛소리는 자기 탐욕을 정당화 하는데 늘 사용되었다는 것을 아시면 됩니다.

주님만 높으시다면 그것을 족하세요. 얼마든지 더 낮은 수준으로 내려가는 기쁨도 그런 기회로 누려보세요. 자꾸 게임에서 패배했다 졌다는 의식이 들게 되면 자기자신에 대한 지나친 요구로 자기자신을 못살게 굴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저들이 모르면 저런 예수님의 행동과 정반대의 행동을 하고서는 성화라고 우기는 그 악마성을 주님이 보여주셨다는 그 자체로 감사하세요. 나도 저들과 똑같은데 저들과 한 패거리가 되고 싶었는데 갈라내시고 분리시키고 차이를 두게 해 주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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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0 09:32:50,
그렇게 친다면 이 세상에 모를게 없지 않을까요 어차피 성경에 모든게 축소 되어 있는데...그냥 요샌 사람이 안다고 하는데 진짜로 무엇을 아는것일까 하는 의문도 가져 봅니다

내가 못 보니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보게 되는 경우도 있고 또 그 사람의 눈도 온전하다고 말할수 없고...결론은 무지로소이다 입니다 ㅋ

답변 : 굿 빙고. 타인의 눈을 통해서 봐도 그 사람의 눈도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주시겠다 라는 이유는 성령 아니고서는 다 가짜 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자는 성령으로 인해 보게 되니까 야 다 알게 되었다 라고 천리안처럼 다 본다는 그 강한 파워 능력을 자랑할게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자신의 처음자리인 무능의 자리를 보게 됩니다. 성령의 조명빨로 보게 되니 비로소 완전히 정반대로 해석하는 내 꼬라지를 보게 되고 자신의 죄악을 병든 모습을 비로소 보게 됩니다.

자 그렇게 되면 아버지 더욱더 이 성령이라는 파워 레이져 무기로 저를 강하게 해 주십시요가 아니라(이것이 기존교회의 성화론부터 개혁주의의 성령론입니다), 마치 기적을 보여주면 믿겠다. 이것이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이지요. 그러나 주님이 보여줄 표적은 즉 성령의 일은 자기부인 곧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입니다.

기적을 요구하는 단체는 교회 뿐입니다. 그 교회 속에서 두 기적으로 분리 시킵니다. 악한세대 악한 교회가 요구하는 기적, 성령과 / 주님이 보여주시는 기적, 성령의 일은 십자가와 두 패거리가 있습니다. 성령의 일은 그 육의 욕심과 정을 십자가에 못 밖음으로써 처음자리로 되돌려 놓기입니다. 그럼으로 인해 성령의 은사인 무능의 자리에서
나에게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사랑 희락 양선 자비 충성이 나도 모르게 나오는 겁니다.
너 사랑도 할 줄 아네? 아니야 아니야 내가 사랑이 아니라 난 사랑 할 줄 모르는데 나도 모르게 사랑이 나오는 것 보니까 주님이 하신거야 라고 자기를 자꾸 뺄려고 하고
반대로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 곧 성령을 받은 자들은 사실은 성령 받은게 아니라. 악령을 받은 거죠.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기자랑으로 쓰는 겁니다. 자기 과시가 일어나게 되면 반드시 상대방을 기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악령을 받은 증거입니다.
(또 오해 말하야 할 것은 그 상대방이 가인의 족속이라면 이유도 조건도 없이 미움을 받게 되겠지요. 결국 어떤 것도 고정화 시키지 않고 사건으로 뺑뺑이 돌려서 먼저 된자 나중되고 나중 된자 먼저 되도록 자꾸 자꾸 사건이 아니면 고정화되고 정체화 되기에 사건을 통해서만이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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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0 09:45:54,
주님이 정하신 완료된 미래를 향해 가는것인데 내가 수정한다고 수정되는것도 아니고 로봇처럼 버튼 누리는데로 움직이는것외엔 답이 없네요

육으로 움직이든 영으로 움직이든 주님의 예정된것 안으로 그저 갈뿐이고 ㅋ

답변 :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서 현재로 쳐들어 오는 겁니다. 뒤로 거꾸로 소급해서 덮쳐 오는 겁니다. 그러니 수정한다고 수정 될 문제도 아닐뿐더러 그것을 의식하면서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그냥 자기 성깔대로 살 뿐이며 그로인해 우리는 이유도 없이 죄가 깊은 곳에 은혜도 깊은 그 사랑의 깊이 높이 넓이 길이가 어떠한가를 누릴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 속의 위치해 있을 순간에는 모릅니다. 모든 사건들은 지나가는 통로처럼 다 통과해버리는 겁니다. 뒤늦게서야 알게 됩니다. 다 은혜였구나 라고 말이죠. 그것이 완료를 누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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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0 09:48:35,
참 그리고 창세전에 우리는 예정되었고 주님이 우리에게 너희를 이렇게 만들어갈것이다 하는것에 동의해서 세상에 육신으로 나올때 그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에 태어난것이다 하는데 이것도 예정론이라 봐야 하나요
답변 : 그래서 누누이 말했습니다. 그런 예정론은 없다고 인간들이 조작해 낸 것이라고
예정이라고 했을 때는 정작 인간은 빼버리고 예수님을 집어 넣습니다.
아니 예수님만 해당되는 예정론 뿐입니다.

에수님만 해당되는 예정론을 사람들이 특히 교회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예정은 죽음이요 십자가의 찢기심이요 버림당하심이요 피흘리심 뿐입니다.

만약 그 예정론과 인간들의 예정론과 일치 시킬려면
같은 운명 같은 일을 당해야 하는데 당하기 싫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싫어버린바 된 예정론 원치 않는 바 된 예정론이 예수님의 예정되심입니다.

인간들이 장난감처럼 다루고 있는 예정은 그런 부정적인 의미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모조리 다 자기 좋으라고 좋은말만 좋은 것으로만 채운 예정론 뿐입니다.

구원이 아니라 심판 뿐인 예정론을 그들이 믿는 예정은 없을 겁니다.
그래서 기적인 겁니다. 아무리 예정론까지 나와도 저들과 일치 되는 것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말이죠.

단절의 예정론 차단의 예정론 막혔고 분리 되는 예정을 죽었다고 깨어나도 그들에게서는 안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예정 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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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0 10:11:37,
심판을 통해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는데도 만약에 자신이 육적인 삶을 살고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삶을 계속한다면 자신을 하나님께서 예정하여 선택한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것인가요  주님이 이렇게 만들어 놓으셨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수 없어 나도 모르겠다 하면서 그저 무조건 가는것도 자신의 합리화일수 있고 순간 순간 주님을 깨달으면서도 내자신도 어쩌지 못하고 똑같은짓을 반복하거나 달라지지 않는 내 모습을 보면 정말 난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답변 : 육적인 삶이나 영적인 삶이란 인간의 손에 다루어 지질 않습니다.
육적인 삶이야 라고 자기가 규정했다고 칩시다. 그리고 이것이 육적인 삶이야 라고 살았다 칩시다. 그게 무슨 육적인 삶입니까? 인간이 다룬다고 다루어질 삶이 육적인 삶입니까?

예를 들어서 사울 왕이 자기가 육적인 삶을 살고파서 육적인 삶을 산게 아닙니다. 주님이 육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도록 성신을 주었다가 다시 악신까지 주었다가 하십니다. 그래야 육적인 삶이 되는 겁니다. 영의 것을 맛 보고 난 뒤에 영이 빠져나가버리니까? 사람 돌아 버립니다. 남들은 성신으로 이겼고 승리했기에 계속 사울에게 있을 줄 알았는데 없으니까 고정화 되지 않으니까 사람 돌아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성신이 임한 다윗까지 옆에 두게 하니 더더욱 미운 겁니다. 내 속에 있던 성신이 저 꼬마에게 들어가 버리니까? 어른이고 뭐고 할 것 없이 그 아이를 미워하는 겁니다. 다 큰 어른이 말이죠. 그런데 거꾸로 다윗은 사울을 어른으로 대우해줍니다. 항상 사울 앞에 자신은 꼬마로 여기면서 말이죠. 이거 뭐 거꾸로 된 거죠. 그러면 그럴수록 사울은 돌아버리는 겁니다.

자 이 육적인 삶을 사울이 그렇게 산 겁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육적인 삶이라고 해야 육적인 삶입니다.

주님이 주신 모든 공짜 은혜를 누려놓고서 자기가 자기 스스로 지금도 공짜 공기인 은혜를 마시면서 난 육적인 삶이야 라고 판단 내리지 마세요. 18년 동안 귀신들려 산 여자도 자신을 그렇게 판단하지 않고 단지 고쳐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삶만 살았다고 우기는 바리새인들은 18년된 귀신들린 여자 하나도 못 고치면서 안식일 고쳤다고 예수님을 다윗처럼 미워하는 사울왕과 똑같이 행동 하는 겁니다.

육적인 삶 곧 악령은 아무나 씌이는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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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0 10:20:42,
심판을 받고 감사하게 누렸으면 그 다음엔 그것을 반복하지 말아야 하는데 여전히 그 자리인걸 보면 난 주님의 자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어쩔땐 서서히 느리게 내 자신도 모르게 변화되어 가는 내 모습을 보면서 그래도 주님이 역사하시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구요  아무튼 저혼자 북치구 장구 치구 다 해 봅니다 ㅋ

답변 : 주님은 가만히 있는데 자기가 자기자신을 자꾸 법적으로 보니까
자신을 못 살게 구는 것이

자꾸 자기를 들었나 놨다. 들었나 놨다. 자꾸 만지작 만지작 조종 하고픈 겁니다.

리모콘은 주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마음껏 성깔대로 사시고 누리세요.

내성적인 사람들의 특징이 그 내성적이라는 성경 조차 철저한 자기 이기심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런 겁니다. 인간이란 처음부터 혼자 살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특히 자기 혼자 노는 사람은 자기의 허점 단점 허물 실수 등이 남들이 다 알 수 있도록 공개되는 것을 원치 않고 자꾸 안 들키기 위해서 감출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아니 감춘다고 세는 바가지 밖에서는 안 센답디까? 실수도 허물도 자꾸 보이면 보일수록 더욱더 정감이 있어 보입니다. 또 그것이 상대방에게 마음껏 오픈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마음놓고 다가오는 겁니다. 너무 실패 실수 허물 두려워 마세요. 원래 우리의 처음자리는 무능입니다. 무능의 자리에서도 기뻐하는 잉여가 선물로 주어지는 채로 살아 갈 뿐입니다.)

자기가 자기 스스로 혼자 놀기의 달인처럼 시체놀이처럼 자꾸 가지고 놀고 싶어하는 이유는
남을 자기 손아귀에 마음껏 조종하고파서입니다.

남과 자기를 조종할려고 하지 말고 (심지어 예수님 마저도)

그냥 조종 당하는 즐거움으로 사세요. 생긴대로 사세요. 태어나게 해주신 주님의 인도함 대로만 사세요. 처음자리로 사세요. 님이 태어나도록 님이 힘쓴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은혜로만 사세요.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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