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종말의 영)을 부어 주리니

(욜 2:28, 개역)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행 2:17, 개역)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행 2:18, 개역)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9-02-19 19:41:01,
이사야57:17 과 또 기타성경 여러 부분에서 주님의 심판이 있는데 그래서 말씀을 아는자 그리고 영적으로 깨어있는자들은 자신이 일어난일에 민감할수 밖에 없다 자신의 일이 괜히 일어난게 아니라 자신과 주님이 상관있는 일이기에 그런 것이다.

답변 : 그런 개인의 시각에 포착되는 주님이란 없습니다. 주의 이름은 이스라엘 전체를 다룹니다. 개인적인게 없습니다. 전체 이스라엘을 다루시는데 있어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데 다루시는 겁니다. 결국 또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은 없는 겁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은 자기를 위한 자기 단체를 위한 이스라엘은 없습니다. 그래서 종말적입니다. 항상 세상의 다른 민족과 반대로 거꾸로만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심판이라는 방식으로 창조를 증거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새창조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처음자리를 다시 상기 시키게 됩니다. 자신들의 처음자리이기에 말이죠, 새 창조를 또 누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원치 않았습니다. 자기의 고유 영역의 자리를 확보하고파 했습니다. 그래서 예민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리라는 없는 자리를 있다고 우기게 되니까 그 자리 날라갈까봐 겁을 먹고

반대로 이스라엘을 쳐서 그 자기부인의 자리에서 튀어나온 남은자는 도리어 그 심판을 통해서 새로운 완료된 미래의 세계를 미리 앞당겨 누리는 기쁨을 선물로 누리게 됩니다.

같이 심판이라는 불 속에, 또는 광야 속에 들어갔어도 한 쪽은 생지옥을 느끼고 한 쪽은 생천국을 누리는 겁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 속에서 두 패로 나누어지고 쪼개지고 분리가 되는 겁니다. 가짜 이스라엘 마귀자식들과 진짜 이스라엘인 남은자 잉여품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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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9 19:47:04,
사건이 일어났을때 주님과 자신이 관계성이 있기에 자신만이 그 이유를 알것이다 그 사건이 자신에게 구원이 될수도 심판이 될수도 있는것이다

그렇다면 내게 안 좋은 일이 있을때는 이사야에서처럼 자신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서라고 봐야 하나요 그것도 주님과 관계성이기에 주님이 밀어붙어시는데로 움직이게 되는건가요

답변 : 인간이 현재의 문제를 풀려고 과거를 찾는데 있어서 항상 과거를 통한 미래를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방식은 미래의 완료에서 현재를 쳐서 지우는 방식 현재를 삭제하는 방식입니다.

그렇기에 과거를 통한 이유로 구원이냐 심판을 나누어지지 않고
이미 미래의 지옥과 미래의 천국에 의해서 땅겨지는 대로 나누어지는 겁니다.

현재를 통한 구원 지옥은 없습니다.

이미 완료된 편애냐 미움이냐 라는 소원이라는 차원에서
죄의 소원에 따라, 아들의 소원에 따라 갈라지고 분리되고 나누어지는 겁니다.

미래와 창세전의 예정이 이미 결정한 사항을 통보하시는 식으로 사건이 진행이 되지
현재의 사건의 여부와 결과적인 행동 여부로 미래를 결정하는 법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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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9 19:51:32,
이런것을 보면 성화구원을 말하는자들은 자신이 하는 행동거지나 모든것에 민감하게 될수 밖에 없고 두려울수 밖에 없는것 같습니다

이런구절이 나오는것은 너희가 이럴수 밖에 없는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긍휼을 준다 인가요

구약과 신약을 연결해서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변 : 민감 정도가 아니라 미쳐 있습니다. 완료된 미래는 안 보이고 현재의 자신만이 유일한 잡히는 존재이고 그래서 믿을 구석이 자기 밖에 없고 자신만의 숙제로 그 긴긴 미래를 채워넣어야 하는 겁니다. 잘못 채워넣다간 또 다시 새로 해야하기에 그것도 한 두 번이어야 말이죠. 스스로 올무를 지고 또 어린아이에게 까지 연자맺돌로 자기도 못 지키는 법을 씌우는 겁니다

(사 57:12, 개역) 『너의 의를 내가 보이리라 너의 소위가 네게 무익하니라』
(사 57:13, 개역) 『네가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 우상으로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은 다 바람에 떠 가겠고 기운에 불려갈 것이로되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
(사 57:14, 개역) 『장차 말하기를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여 내 백성의 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 하리라』
(사 57:15, 개역)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사 57:16, 개역)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나의 지은 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

(사 57:17, 개역)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우고 노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도다』
(사 57:18, 개역) 『내가 그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의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사 57:19, 개역)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종말의 때는 인간에게 기대거는 것이 없고 영으로 일괄처리 하겠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행동 여부를 따져서 거룩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시대는 구약으로 이미 그 기회는 다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제 종말의 때에 성령을 부어주시는 때에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그 영의 활동상에만 의미를 두는데 있어서

그 상대적인 육의 활동은 이 영의 활동을 거부하고 훼방하는 방식이 되는 겁니다.

약속한 성령이 오면 이제 그 정과 육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밖는 자기부인의 길을
인간이 아예 원래 원천적으로 못하기에 그 일을 전담하고자
나를 십자가에 육을 못 밖는 일만을 골라서 하겠다는 겁니다.
사생자에게는 이것이 없고 아들에게만 매를 대신다는 이유는 사랑 때문입니다.
그 매를 멈추지 않겠다는 것은(금지할 법이 없다는 것은) 그 정도로 죽음보다 강한 사랑 외에는 남기지 않겠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죽으면 죽으리라 는 그 순간까지에 가서라도 누리도록 되어 있는 팔자입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갈 5:17, 개역)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22, 개역)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개역)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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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9 22:54:09,

주님이 성문밖에서 죽은 이유는 성전안에는 죽음이 없고 생명만 있기에 성문밖에서 죽은거라 하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전체적인면하고 연결되는것이라고 봐야 하나요

답변 :
인간은 특정 장소 특정 사건이라는 장막을 쳐서 자기의 거룩한 영역을 소유 확보할려고 하는 반면에 예수님은 그 중간에 막힌 담을 헐어버림으로써 자신의 거룩을 특정 장소 특정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거룩 곧 사랑을 확정 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나비인가 봐처럼 잡히지 포착되지 않습니다.

고정화 되지 않는 사랑만이 인간의 모든 거룩갖추기 사랑실천쌓기를 다 깨뜨리고
오로지 긍휼의 대상인 무능자의 자리에서 주님을 바라보도록 하신 겁니다.

넌 피조물인 사랑의 대상이지 사랑이 아니고 난 사랑을 실행하는 창조야 라고 말이죠.

뭐뭐 아니요 뭐뭐 이다 라는 식으로 말이죠.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참고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거룩한 성전에서 예수의 피를 묻히거나 흘리기 싫었던 겁니다. 예수님의 피를 무가치 하게 여긴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 계산 한 겁니다. 예수님이 성전 밖에서 흘린 그 피로 인해서 정작 모든 땅이 거룩한 성전이였고, 그들이 주장한 자기들의 거룩한 성전이라는 공간이 바로 마귀의 아지트인 겁니다. 강도의 소굴 늑대 본부. 자연스럽게 그들 스스로가 영역을 설정하는 그 모습이 선악의 공간을 따로 따로 규정하는 그 자체가 이미 지옥에서 땡기는 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겁니다. 난 지옥의 열매라고 스스로 자백하는 꼴인 겁니다. 그래서 그들의 성전이 지옥이 그들이 더럽다고 한 성전 밖이 오히려 깨끗한 거룩한 곳인 예수님의 피로 정화가 된 곳이다는 겁니다. 결국 무조건 반대로 저들의 행동과 의미 부여에 무조건 반대로 증거하시는 겁니다. 이유도 없이 원인도 없이 조건도 없이 무조건 반대인 거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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